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202
각성 (3)
“정마…협.”
누군가 꺼낸 말에 정적이 번져나갔다.
난 만들어진 고요 속에서 천천히 군중을 오시했다.
인질로 잡힌 가족들과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사용인들을 지나, 머리가 하얗게 쇤 우희에게로.
대체 무슨 일들을 겪었기에.
시선이 이동할수록 내 안에선 고요한 분노가 들끓어 올랐다.
“강은. 네가 이런 거냐.”
“가휘, 난….”
“정마협,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당황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은 곁에 선 지체 높은 차림새의 여인.
하긴, 지금쯤 무림맹에 있어야 할 놈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좀처럼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지 한참을 이쪽을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철혈대주…! 감등, 철혈대주로부터의 연락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보고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 놈이 감히…!”
적진이 분주해진 사이, 나 또한 우희와 전음이 한창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머리카락은 대체….
-깨달음의 대가이니 그리 걱정할 거 없어요. 그보다 어떻게 알고 여길…. 빈아는요? 어르신은 찾았나요?
-빈아랑은 근처까지 함께 왔어. 상황이 급해서 나만 먼저 달려온 거야. 그리고 사부님은…. 돌아가셨어. 신비인의 손에.
-아….
충격에 휩싸인 우희를 향해 난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상황부터 알려줘.
-…보다시피 암중세력의 정체는 황실이었어요. 아마 삼십이황자에 불과했던 주 공자가 황제가 될 수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예요.
-저 여자는 강은의 모친이 맞아?
-맞아요. 장양비 서씨. 주 공자가 황위를 잇기 전까진 장양궁의 귀비였던 인물이에요.
장양궁의 서귀비… 잠깐만. 장양궁(長陽宮)?
그 말을 듣는 순간, 명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개방도를 쫓던 암중세력과 맞닥뜨린 일이 문득 떠올랐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배후를 캐묻던 내게 적의 우두머리가 적어준 대답은…
[長阝]“장양…!”
당시 상대에게 걸려 있던 금제가 발동되는 바람에 마저 확인하지 못한 글자의 정체가 마침내 밝혀졌다.
설마 그 때부터 모든 게 예견되어 있었다니.
그렇다면 비동에서 강은을 지키던 호위무사의 이름 또한 어쩌면….
“장 무사. 장견(長犬)이란 이름이 혹시 태후마마의 충견이란 뜻이었소?”
“…놈. 이제라도 알았다면 예의를 갖추거라.”
“하….”
진실이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다니.
이제라도 진상을 알았으니 이젠 싸울 일만 남았다.
헌데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다.
혼돈기와 건곤대나이의 조합이면 적이 황실이라도 두려움은 없다.
문제는 인질.
조금 전 하인과 시녀들의 목을 치려던 금의위 정도라면 모를까, 식구들 쪽은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부모님의 목에 칼을 들이민 자들의 실력은, 결코 황제와 태후를 호위 중인 무사의 밑이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 이상.’
과연 내가 그들을 제압하는 것이, 그들이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싣는 것보다 빠를까?
해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
허나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면전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한편,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적들 또한 마찬가지.
혈마의 비동을 준비한 장본인들이니 내가 지닌 힘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 터.
그러니 내가 장원을 비운 틈을 노려 이렇게 부랴부랴 쳐들어 온 거겠지.
장기로 따지자면 양쪽 모두 외통수인 상황.
허나 가족들을 인질로 잡힌 나로선 먼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 폐하와 국모황태후를 뵙습니다.”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구나, 정마협.”
“두 분께서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이제 와서 우리 사이에 어떤 대화가 필요할까.”
태후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사사건건 우리 일을 훼방 놓은 것이 네놈이 아니더냐.”
“그 사악한 음모들 뒤에 황실이 있을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헌데, 그런 일들을 꾸미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강은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입니까?”
난 대화로 태후의 주의를 끄는 한편, 강은에게도 물밑작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의식을 둘로 나누는 양의심공을 익힌 내게 말과 전음을 동시에 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강은, 우린 아직 친구지?
-가휘….
-희야에게 들었어. 네가 어머니께 대항해서 우릴 감쌌다고.
난 과거 혈마의 비동에서 그녀가 들려준 고민들을 떠올렸다.
-네가 비동에서 내게 물었지. 사람의 운명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걸까, 하고.
-…….
-그 때 내가 했던 대답, 혹시 기억나?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다른 누구도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고.
-이건 네 의지로 결정한 일이야?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심한 갈등의 빛.
허나 그 이상으로 그녀의 얼굴을 잠식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대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친구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내놓는 그녀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라면… 설마?
-무진은 어디 있지?
순간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모습은 가족들을 인질로 잡힌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혹시 무진이 위험한 거야?
-…사실 황제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어디서 잔재주를 부리느냐!”
이런.
호통 소리에 난 전음을 멈추고 태후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잠시 해후를 나눈 것뿐입니다. 이제 보니 마마께선 폐하의 체면을 전혀 고려해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네놈 따위가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그리도 권력이 탐이 나셨습니까? 본디 여인인 강은을 황자로 둔갑까지 시키면서 말입니다.”
“뭣이…?”
허를 찔린 그녀가 입을 다물자 장내는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다.
잠시 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그녀가 부랴부랴 날 향해 고함을 질렀다.
“헛소리! 과연 세 치 혀로 마교를 농간한 놈답구나.”
“제가 명교에서 벌인 일을 아신다면, 이 눈에 대해서도 잘 아실 겁니다. 제가 지닌 금안에는 강은의 신체 곳곳을 틀어막은 부자연스러운 기의 흐름이 분명히 보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폐하?”
실은 수련생 시절 때 우연히 그녀의 환복 장면을 본 것에 불과하지만, 진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폭탄발언을 던진 난 슬그머니 카메라로 인질들이 있는 곳을 살폈다.
허나 예상과 달리 그들은 이미 강은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듯, 다른 대부분의 병사들과 달리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틈이 생기면 바로 건곤대나이를 펼치려 했던 나로선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회는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강으으은-!!!!!
허공에 울려 퍼진 쩌렁쩌렁한 외침에 모두의 고개가 한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은! 난 무사해!!!
“무진…!”
수백 장 밖 언덕 위에서 고함을 지르는 한 사내를 발견한 강은의 얼굴이 기쁨에 물들었다.
그와는 반대로 태후의 얼굴은 썩어들어갔다.
“저놈이 어떻게! 누가 저놈을 풀어줬어!”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측근 하나를 닦달했다.
“열쇠는!”
“여기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 있사온데 대체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
“그럼 산공독까지 먹은 놈이 만년한철로 만든 우리를 부수고 나오기라도 했단 말이냐! 당장 저놈을 잡아 들여!”
“존명!”
“철혈대주도 그렇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들이 없어! 아악!”
명령을 받고 떠나가는 병사들을 향해 그녀가 히스테릭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 사이 강은은 그렁거리는 눈으로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고마워, 가휘. 정말.
아니, 내가 한 거 아닌데….
“정마협! 네놈이 꾸민 일이더냐!”
“글쎄? 난 모르는 일이오.”
“네놈…!”
아니, 정말 나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대체 누구지? 타이밍 한 번 기막히네.
설마 약빈이가?
하지만 아무리 스승님의 비전을 연마한 그녀라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구름 같은 황실 병력들 사이에서 몰래 무진을 구출해내는 건 불가능할 텐데.
아니면 설마 그 녀석이…?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는 사이, 내가 무진을 빼돌린 것으로 착각한 강은이 돌발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마협의 말이 맞소. 난 여인이오.”
“폐하! 당장 멈추시지 못하겠습니까!”
“다들 여길 봐주시오.”
태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은의 본모습을 감추고 있던 겉껍질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눈망울이 커지고, 툭 튀어나와 있던 목젖과 광대가 들어가고, 굵직하던 선이 옅어지고.
따로 놓고 보면 작디작은 변화였으나, 그 끝에 완성된 것은 태후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경국지색의 미녀였다.
말투는 여전히 남자 같았지만.
“…폐하.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 겁니까.”
“어려서부터 어마마마의 뜻을 따라 남자로 살아왔어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태후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어미가 폐하를 위해 어떤 짓까지 했는지 진정 모르시는 겝니까? 폐하는 황실의 마지막 남은 핏줄입니다.”
“바란 적 없는 일입니다.”
“…철없는 것. 허오, 폐하를 모시세요. 이지를 잃으셨습니다.”
“충!”
마침내 본명이 드러난 장견이 명령에 따라 강은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용서하십시오.”
파밧-!
장견에게 혈을 집힌 강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아마 혈마의 비동에서 사라지기 전에도 저런 식으로 제압당했으리라.
“쯧, 저리 마음이 약해서야.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이 궁궐인 것을.”
혀를 차던 태후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돌아봤다.
“네놈이 꼬이면 되는 일이 없구나. 또다시 날 방해하느냐?”
“남의 집에 불까지 지르신 분께서 너무 안하무인이십니다.”
“닥쳐라.”
입술을 부들거리던 것도 잠시,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마친 그녀의 입가엔 다시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폐하는 여인이다. 그래서 바뀌는 거라도 있느냐? 어차피 황실의 씨는 내 손으로 모두 말려 없앴다. 기나긴 중원 역사에 여제가 없던 줄 아느냐?”
“강은에게 황실의 피가 흐르긴 하는 것입니까?”
“…뭣이?”
“저, 저놈이!”
“이 노옴! 마마께 불경을!”
날 못 죽여서 안달인 사람에게 예의는 개뿔.
어차피 강은이 여자임을 폭로한 순간부터 협상의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
이렇게 된 이상 상대의 빈틈이라도 유도해야 했다.
“마마의 말씀대로 중원 땅에 여제가 없던 것도 아닌데 굳이 강은의 성별을 숨긴 까닭이 무엇입니까.”
“저, 저…!”
“선대 폐하께선 분명 백 년 넘게 천수를 누리셨지요. 허면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금의 폐하를….”
“감히 네놈 따위가 날 능멸하느냐!”
뾰족하게 외친 태후의 품에서 단도 하나가 빠져나왔다.
혹여 달려들기라도 하는 걸까 싶어 기세를 끌어올리던 난, 이어진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보거라.”
표독스럽게 날 노려본 그녀가 강은이 실린 가마로 다가갔다.
그녀의 다음 행동은 강은의 손바닥에 상처를 새기는 일이었다.
황제의 옥체에 해를 입히다니.
본래는 태후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나, 놀랍게도 가마 주위에 있는 누구도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허나 난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녀가 흘린 피가 손목의 팔찌로 흘러든 순간, 팔찌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건…?”
“비천한 것. 이것이 네가 그리 원하던 핏줄의 증거다.”
“충!”
지휘부 몇몇이 가마를 향해 무릎을 꿇자, 멀뚱하게 서 있던 나머지 흑의인들 역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가마를 중심으로 물결처럼 번져나가는 수백, 수천 명의 경배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허나 그 순간에도 인질의 감시를 맡은 놈들은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독한 새끼들.
“성혈백금….”
“뭔지 알아?”
“가문의 고서에서 본 적이 있어요. 황제의 자식들은 탄생과 함께 한 덩이의 백금을 수여받는다고 해요. 그 백금에는 피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 태어난 아기가 황제의 씨앗이 맞다면 오색 찬란히 빛나고, 그렇지 않다면 부정으로 태어난 아이로서 모친과 함께 참형에 처해진다고요.”
“그런 물건이 있어? 난 처음 듣는데….”
“나도 오늘까진 호사가들이 지어낸 얘긴 줄만 알았어요. 아마 아는 사람도 얼마 없을 거예요. 황실에 대해 입을 함부로 놀리는 자는 멸문을 피하지 못할 테니.”
우희의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은이 비동에서 보여준 적이 있지.
분명 안쪽에 이름이 새겨져 있던가?
헌데 기분 탓일까? 어디선가 비슷한 걸 본 듯한 기시감이 드는 건….
“흥!”
콧방귀 소리에 고개를 드니, 날 노려보는 태후의 섬뜩한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피가 흐르는 강은의 손을 제자리에 내려놓은 그녀는 단도를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네놈의 언동이 실로 괘씸하기 짝이 없으나… 내 한 가지 살 길을 마련해주마.”
“…살 길?”
“폐하와 혼인하여 황실의 부마가 되어라. 그리하면 내 네놈을 중히 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모든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놈이 사사건건 방해를 한 탓에 다소 무리하게 황위를 계승한 것이 사실이다. 황실의 지배력이 많이 악화되었으니, 네가 벌인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거라.”
“나를 믿소? 난 마마를 믿지 못하오.”
“잘됐구나. 나도 사람을 믿지 않는다. 네겐 산공독을 먹이고 필요할 때만 무공을 돌려줄 생각이다. 물론 가족들은 계속 인질로 잡혀 있어야겠지.”
“하…! 그런 제안을 내가 따를 듯 싶소? 난 당신들 탓에 스승까지 잃었소.”
“남은 가족까지 잃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허오, 그걸 꺼내도록.”
“옛!”
장견이 품에서 단환 하나를 꺼내 내게 던졌다.
“그걸 먹고 투항하면 가족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마.”
“내가 산공독을 먹자마자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어찌 믿소?”
“따르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 반역죄를 쓰고 천하를 상대로 싸울 셈이냐?”
“내가 그리 못할 것 같소?”
“해보아라. 네가 나를 죽이는 것이 빠를지, 네 부모의 목이 달아나는 것이 먼저일지 나도 매우 궁금하구나.”
“…….”
침묵하는 날 바라보는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름답지만 섬뜩한 미소였다.
“여길 나타나질 말았어야지. 그리 가족이 소중했으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어야지.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나부터 죽였어야지. 허나, 이미 늦었다. 얌전히 내 자비를 받아들이거라.”
그간 수많은 적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온 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눈에 번뜩이는 광기가 결코 연기가 아니라는 것을.
더구나 그녀는 노련하기까지 했다.
“숫자 다섯을 세마. 그 전에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후훗. 네 부모와 원수의 기일이 같아지겠지. 하나, 둘….”
저 미친년.
카운트다운에 맞춰 심장이 거세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공격을 시도해야 하나?
“셋, 넷, 다서….”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내 입술만을 바라보던 조가장의 모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네가 그런 무위를 지니고도 영원히 백성인 게다. 지배자는 혈육의 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은 법이지.”
“언제까지 도발하실 생각입니까? 이제 한 식구가 될 참 아니오? 빈정이 상하려고 하오만.”
“그래. 이만 하마. 꼴에 사내라고 자존심은 있어선.”
마지막까지 이죽거린 그녀의 입가에 화사한 승리의 미소가 피어났다.
허나 그녀는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내 단전이 보통의 무인과 다르다는 것을.
영상 하나, 하나가 가상의 단전인 내게 산공독 따위는 소용없다는 것을.
“단환을 삼켜라. 허튼수작을 부렸다간.”
“알고 있소. 보는 눈이 몇인데….”
단전 리프레쉬의 시간이 돌아왔다.
산공독을 먹는 순간 적들에게 발생할 찰나의 방심, 그 틈을 노린다.
허나 내 계획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도 전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겨우 그거였어?”
터벅, 터벅, 터벅-.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적 속에 갑자기 울려 퍼진 발자국 소리는 마치 천둥처럼 우렁찼다.
“겨우 그거였냐고.”
“누구냐!”
“우리 할아버지가 겨우 그런 거 때문에…. 야망? 황위? 그딴 좆같은 것 때문에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 할아버지가 죽은 거냐고… 이 씨발년아.”
고요한 살기를 내뿜으며 내원을 가로지르는 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약빈이었다.
두 눈에 그렁그렁한 분노를 담은 채 태후를 향해 똑바로 전진하는 그녀의 목에는, 윤가장의 비밀창고에서 발견한 스승님의 유품이 매달려 있었다.
“너희들이 흡성대법 같은 것만 세상에 안 뿌렸어도….”
“정마협의 스승인 적양권의 딸입니다. 정마협과는 연인 관계입니다.”
장견의 설명에 태후가 코웃음을 쳤다.
“계집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서느냐. 정마협의 얼굴을 보아 이번 한 번은 용서….”
“네 딸은 계집 아니야?”
“무어라?”
“마마께 무엄하다! 뭣들 하느냐. 저년을 당장…!”
“내가 나설 자격이 있는지!”
약빈이가 목에 걸린 줄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없는지.”
그녀의 옷소매에서 튀어나온 단도 한 자루에 금의위들이 황급히 태후 앞을 가로막았다.
허나 그녀의 단도 끝이 향한 곳은 적진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그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스팟-!
그녀의 손바닥 위로 긴 혈선이 그려졌다.
이윽고 상처에서 주르르 쏟아진 선혈이 그녀가 쥔 장신구로 흘러든 순간,
새까만 어둠 속에서 휘황찬란한 섬광이 휘몰아쳤다.
번-쩍!
“헉!”
“어, 어찌 이런!”
사람들의 동요를 뚫고,
“금.의.위.는.들.어.라.”
천둥 같은 그녀의 외침이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나, 주약빈이 적통한 황위 계승권자로서 명한다.”
“선황 폐하와 형제·자매를 시해하고!”
“황실을 기만하였으며.”
“황제를 지칭하는 역도의 무리들을.”
모두 숨 쉬는 것마저 잊은 채 그녀의 입술만 바라보는 가운데.
마침내 최후의 한 마디가 또렷이 울려 퍼졌다.
“처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