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205
위선 (2)
맹주의 시선이 부서져서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향했다.
“이게 뭔가?”
“저야말로 이걸 아직도 안 버리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깊이도 숨겨 놓으셨더군요.”
“난 이게 뭔지 몰라.”
“이 지경이 되어서도 발뺌을 하십니까. 그것이 맹주님의 본모습입니까?”
이어서 난 그의 발치로 서신 한 장을 던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황실과의 싸움에 앞서 존명이 내게 남겼던 암문의 해석본이었다.
“황실에서 조가장을 습격할 거다. 황실에 정보를 흘린 자가 있다. 네가 교관으로 취임한 것을 아는 자가 달리 누가 있지? 나 같으면 주변 사람들부터 의심하겠어.”
이미 수없이 읽어 달달 외운 내용을 읊조리며 묻는다.
“왜 그러셨습니까.”
“허허…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구나. 이 주변인이 나라는 근거가 어디 있나?”
“물론 제가 학관에 방문할 것을 아는 사람은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관을 맡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저와 빈아, 맹주님 셋 뿐입니다. 더 이상 어떤 증거가 또 필요합니까.”
“음… 그랬구만. 그랬어.”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일이 꼬여버렸어. 가문이 풍비박산 났으니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게 검을 들이밀 줄이야…. 설마 황실의 공격을 막아냈는가?”
“어찌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황실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텐데 이럴 틈이 있나?”
우리가 황실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약빈이가 향후 황위를 계승할 황녀임을 아직 모르는 그의 얼굴엔, 치부를 들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진즉 그를 의심했어야 했다.
천하의 사도련주와 스승님의 합공을 그리 여유롭게 막아낼 수 있는 자가 그리 흔할 리 없는데.
평생을 강호의 평화에 이바지한 거인에 대한 존경심이 두 눈을 흐리게 만든 것이리라.
“당신이 진정 제 스승님을 죽였습니까?”
“신투 공순기가 자네 스승이 맞다면 말이지… 헌데 그 친구가 죽었던가?”
“…….”
“표정을 보니 진짜인 것 같구만. 허! 허허, 그것도 모르고…. 괜한 짓을 했어. 마음이 조급했던 게지.”
“스승님의 행방을 어찌 아셨습니까. 설마 당신이 직접 조가장을 감시하지는 않았을 테고.”
내 말에 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 그 친구가 직접 찾아왔지.”
“사부님께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 순간 문득 떠올랐다.
흡성대법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을 우려하던 우희와 약빈이에게 스승님께서 남기셨다는 말씀이.
“설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오랜 친구가 당신이오?”
“신투와 검성.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네만 한창의 나이였던 우린 백성을 위한다는 공통의 기지 아래 의기투합 할 수 있었지.”
어째서 사부님은 맹주와 함께 있었나.
맹주가 신비인임을 의심한 뒤에도 풀리지 않던 의문 하나가 지금 해결됐다.
‘그러고 보니….’
과거 사부님께선 무림맹 수뇌부 정도라면 역용을 간파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적양권이 아닌 평범한 마부로 무림대회를 관람하신 적이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석율이란 가면 한정이지만, 스승님께 배운 역용술은 마교주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다.
헌데 나보다 훨씬 뛰어난 숙련도를 지니신 스승님의 역용술이 겨우 무림맹 장로들에게 간파될 리 없잖은가.
그렇다면 그 때 사부님께서 경계하신 존재는 오랜 지기였던 무림맹주가 아니었을까?
“피차 궁금한 것이 많아 보이는데 잠시 앉지.”
뒤늦은 깨달음에 잠긴 내게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그가 스승을 해한 원수인 줄도 모르고 몇 번이나 추궁과혈을 해준 그 의자였다.
“…뻔뻔하시오.”
“바로 싸울 게 아니라면 그만 노려보고 잠시 앉게나. 급할 것 있나? 어차피 혼자 온 것 같은데.”
그 잠깐 새에 기감을 퍼뜨려 본 듯,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사도련주와 팽원소 그 친구가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걱정했지. 자네들 셋이 합공을 한다면 나도 승리를 점칠 수 없으니…. 하긴, 그 친구들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네 말만 덥석 믿을 리 없지.”
“잡설은 되었소. 사부님의 마지막을 듣고 싶소.”
“그래…. 말해주지. 20년 만이었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래 전에 소식이 끊긴 그 친구에게 연락이 온 게 말이야. 객사한 줄만 알았던 친구놈이 연락을 했으니 내가 얼마나 기뻤겠나. 헌데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의 눈이 돌연 음험한 빛을 띄었다.
“만나고 보니 그 친구가 바로 몇 달 전 내게서 비급을 들고 달아난 그 놈이더란 말이야? 허허! 우스운 일이지. 목숨을 걸고 빼돌린 비급을 다시 되돌려주러 오다니 말이야. 인생은 알 수가 없어.”
“비급만 챙겼어도 됐잖소.”
“그 친구가 내 정체를 알아봤네. 혈마의 비동에선 무려 20년 만의 재회였지만 이번엔 겨우 몇 달만이 아닌가. 우린 단박에 서로를 알아봤지. 잘린 손가락들을 어찌나 자연스럽게 붙여놨던지 깜빡 속을 뻔 했지 뭐야.”
“…….”
“아쉬운 일이야. 공가 놈이 조금만 더 둔했어도 아까운 친구를 잃진 않았을 텐데.”
“맹주!”
분노를 터뜨리는 내 앞에서 그는 손짓발짓까지 섞어가며 그 날 있었던 일들을 담담히 묘사했다.
“기습으로 옆구리에 바람 구멍을 내주었네. 헌데도 어찌나 잽싸던지 몇날 며칠을 성가시게 하지 않겠나. 비급까지 버리면서 말이야.”
“…목격자인 양민을 없애려 했던 이야기는 왜 빼시오.”
“거기까지 알아냈나?”
“그래서… 당신은 수색을 계속했소?”
“아쉽지만 그 무렵 맹에서 전서구가 도착했네. 정마협의 연인이 날 찾는다고 말이야. 어찌나 기겁했던지 곧장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네. 헌데 설마 죽은 줄 알았던 자네가 멀쩡히 살아 있을 줄은….”
그것이 처음 무림맹을 방문했을 때 그가 부재 중이었던 이유.
그것도 모르고 나와 약빈이는….
“그 때는 솔직히 많이 당황했지. 혹여 자네가 공순기에게 무슨 연락이라도 받고 온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당신은 위선자요. 대체 언제부터 이런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었소.”
까마득한 후배의 비난에도 그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나의 신념과 인생을 폄하하진 말게나.”
“실수? 실수라 하였소?”
“자네를 절벽에서 떨어뜨리고, 자네의 스승을 해한 것. 그런 악행을 벌인 것은 검을 쥔 이후 처음이었어.”
“그랬는데 왜….”
“평생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하네만, 나도 한 가지 앞에선 추해지더군. 그게 뭔지 아나?”
“…….”
“세월. 세월이야.”
그렇게 한탄하는 노인의 눈엔 짙은 아쉬움이 배어있었다.
“누가 그 앞에 초연할 수 있겠나. 평생을 걸쳐 이룩한 무(武)도, 명성도 늙어가는 몸을 어쩌진 못했어. 그러던 차에 흡성대법의 소문이 들려왔지.”
“그때부터 계획을 꾸몄소?”
“다분히 충동적이었지. 장보도가 처음 발견된 날부터 매일매일을 욕망과 싸웠네. 허나 난 결국 수명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사천으로 내달리고 있었지. 헌데… 그렇게 신념마저 버리고 얻은 비급이 이렇게 넝마짝이어서야.”
그가 품안에 있던 비급을 바닥에 내던졌다.
언젠가 맹주를 카메라로 몰래 관찰할 때 보았던 무상검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허나 멀쩡한 표지와 달리 그 안에 담긴 것은 찢어지고 한글로 낙서가 새겨진 흡성대법이었다.
“이따위 장난질이나 쳐 놓고 말이야.”
“역시 그 때 수련생들의 소매에 적힌 수실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 문자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소?”
“더불어 자네들을 떠보려는 의도도 있었지. 아직 확신이 없었으니까. 자네가 내 정체를 알면서도 의뭉을 떠는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공순기 그 친구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암중세력의 정체가 황실인 건 어찌 알고 연락을 보냈소.”
“혈마의 비동에서 보았네. 그들과 동행 중인 삼십이 황자를 말이야.”
기나긴 이야기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위에 놓인 집기들이 달그락거리며 모옥 내부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흡성대법의 구결이 그리 궁금했으면 나만 노렸어도 될 일이오. 우리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소?”
“그래야 자네가 내게 의지할 것이 아닌가.”
“의지?”
“자네 정도의 고수라면 제 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을 테고, 황실에 복수를 하려면 내 힘이 필요할 테니. 누가 뭐래도 난 자네의 둘째 스승이 아닌가.”
더 이상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검을 드시오.”
“궁금증이 모두 풀렸다면 내 질문에도 답해주게. 대체 어쩔 셈인가. 황실과 척을 진 상황에 설령 내게 이기더라도 자네의 입지만 좁아질 뿐이네.”
“당신의 추악한 행동들을 세상에 알려야겠지.”
“어떻게? 사람들이 자네 말을 믿어주겠나?”
“이렇게.”
방안을 어질러놓은 것도 모두 이 때를 위해!
쐐애애액-!
순간 건곤대나이가 발동하며 옷가지 밑에 숨겨두었던 검은 물체 하나가 모옥을 뚫고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졌다.
“음?”
스팟-!
찰나의 순간에도 맹주의 반응은 기민했다.
그러나 목표를 뒤쫓던 검기는 내가 한 발 앞서 펼쳐둔 기막에 가로막혀 애꿎은 대나무 숲만을 길게 할퀴며 지나갔다.
콰과과곽-!
반파된 모옥 내부로 별빛이 쏟아졌다.
“…방금 그게 뭐였지?”
“글쎄요.”
미심쩍은 얼굴로 묻는 그에게 난 대답 대신 오른손을 뻗었다.
구구궁-.
“음….”
태산 같은 압력에 짓눌린 그의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허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욱하게 번지는 먼지 너머를 향해 난 연신 내력을 뿌려댔다.
“까마득한 후배이니 선수는 양보받겠소!”
“건곤대나이로는 날 이기지 못한다! 전전대 마교주였던 은진천의 스승조차 내게 패한 사실을 모르느냐!”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요?”
쿠구구궁-!
압력을 이기지 못한 모옥이 가루로 화하며 우리를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됐다.
허나 그 거대한 폭발 속에서도 맹주의 음색은 차분했다.
“진짜 흡성대법을 내놓게. 목숨을 살려주겠네.”
하늘을 향해 치켜든 검이 달빛을 받아 시리게 빛났다.
그 한 수에 자욱했던 흙먼지가 단숨에 승천하며 신선처럼 고고한 노인의 자태가 드러났다.
“원한다면 자네 스승의 무덤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지.”
“그 더러운 입으로 사부님을 들먹이지 마시오.”
“어리석구나.”
건곤대나이가 소용없다는 그의 말은 결코 허세 따위가 아니었다.
극한까지 다듬어진 날카로운 검세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건곤대나이의 압력을 두부 베듯 베어내며 순식간에 내 눈앞에 도달했다.
“하앗!”
카가가각-!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굴더니, 원수에게 배운 검술은 잘만 사용하는구나.”
“마교의 무공도 사용하는데 까짓 게 대수겠소?”
호기롭게 맞받아치기는 했으나 검 하나로 수십 년 째 강호의 정점을 지키는 노괴와 비교하면 내 검술은 태양 앞의 반딧물이나 마찬가지.
난 거리를 벌리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금안을 발동했다.
콰앙! 쾅! 콰과광-!
동일한 검초가 부딪힌 여파로 거대한 대숲은 순식간에 폐허와 다름 없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 검을 쥔 손아귀와 팔에 걸린 부하는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 덕에 그의 검세를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마냥 손해는 아니었다.
스팟-!
충격의 반동을 이용해 잽싸게 뒤로 물러난 난 다시 기공을 펼쳐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소용 없다 하지 않느냐!”
“이번엔 다를 것이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여태까지는 그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눈속임일 뿐.
혹여 그를 놓쳐 후환을 남기는 일이 없도록.
진짜는 이제부터였다.
“후….”
미리 준비해둔 수십 개의 단전이 동시에 개방됐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것은 흑과 백, 본래라면 양립 자체가 불가능한 상극의 기운.
허나 천기자가 남긴 구결은 앙숙과도 다름없는 둘을 부드럽게 어르고 달래며 한 지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기운이 하나가 된 순간.
구오오오오-.
만물이 경배하는 태초의 힘이 현세에 강림했다.
***
“겨우 이 정도였나?”
무너지는 대지를 떠받들었다더니.
과연 소문대로 정마협의 내공은 명불허전이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건곤대나이라는 거창한 무공의 원리도 결국 따지고 보면 기의 움직임.
형체가 없는 기를 수족처럼 다루는 공부는 놀랍다고 할 만 했으나, 결국 그 기운보다 빠르고 강한 힘으로 베어내면 그만이다.
물론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기의 폭풍 속에서 그것이 가능한 이는 드넓은 중원에서도 자신 정도겠지만.
그렇기에 이번에도 그는 사방에서 조여오는 기운을 회피하는 대신 맞서 싸우는 것을 택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꾸드드드득-.
“음?”
다르다.
여태까지 자신을 공격하던 기운과는 밀도 자체가 달랐다.
스팟-!
재차 검을 휘둘러봐도 결과는 마찬가지.
미증유의 기운에 막혀 전진을 멈춘 검을 보며 그는 심해를 떠올렸다.
마치 수백 장 깊이의 물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무거워진 팔다리가 낯설다.
허나 그것은 때늦은 후회였다.
검격을 집어삼킨 거대한 압력은 어느새 그의 육신마저 우그러뜨리고 있었으니.
빠드드득-.
“큭…!”
싸움이 시작된 이래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영악한 놈.
이런 힘을 여태껏 감추고 있었다니.
허나 자신 역시 운으로 수십 년 간 정파의 정점에 군림한 것이 아니었다.
“스으-.”
들숨과 함께 단전에서 솟구친 미증유의 거력이 사지백해로 뻗어 나갔다.
숨통이 트이는 것과 동시에 그를 억압하던 기운이 잠시 주춤했다.
“후….”
날숨으로 한 호흡이 완성된다.
기운이 움직였으니 다음은 육신이 따를 차례.
목숨이 경각에 달했으니 더 이상 힘을 아낄 여유 따윈 없었다.
이윽고 그의 손에선 여태껏 선보이지 않은, 심지어 눈앞의 청년에게도 꽁꽁 숨겨둔 비전 절학들이 아낌없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드드득-.
꾸드드드-.
그의 검이 눈부신 백광을 토했다.
여전히 무겁지만 그를 둘러싼 기운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허나 베어내는 것 이상으로 채워지는 속도가 더 빨랐으니.
숨 막히게 밀려드는 공간 속에서 그는 일갈을 터뜨렸다.
“노오옴!!!! 네놈이 날 죽이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그것이 당신의 본성입니까.”
“넌 무림공적이 될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그에게 청년이 비릿한 웃음을 선사했다.
“아까 제가 모옥 밖으로 날린 게 무어냐 하셨지요. 그것은 시간을 담아내는 물건입니다.”
“크흑…. 뭐…?”
“그 안에는 우리가 나눴던 대화와 더불어 당신의 추악한 모습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명교의 성녀에게 선물로 받은 물건이지요.”
그것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여능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사이에도 청년의 비아냥거림은 이어졌다.
“제게 홀로 왔냐 물으셨습니까? 이런 소란이 벌어졌는데도 아무도 달려와 보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아마 지금쯤 한 데 모여 맹주님의 치태를 감상 중일 겁니다. 추악한 악인으로 강호사에 기록되는 것은 내가 아닌 당신입니다.”
“감히! 감…히!”
“그래. 당신한테 근엄한 최후는 어울리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그를 짓누르는 압력이 한층 더 거세졌다.
“크아아아아!”
죽음의 위기 앞에 검성 여능천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베고, 베고 또 베고.
그러나 그를 둘러싼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머잖아 그는 공간에 완전히 삼켜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흡성대법을 위해 평생의 신념마저 버렸을 만큼 삶을 향한 그의 집착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의 정신은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 답답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도록.
더 빠르게.
더 날카롭게.
더 멀리!
더…!
그렇게 얼마나 심상 속에서 검을 휘둘렀을까.
그 끈질기면서도 순수한 욕망이 기적을 만들었다.
우두두둑-.
온몸의 뼈마디가 분질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조차 그의 집중을 깨뜨리진 못했다.
적을 향한 분노도 살기 위한 욕심조차 잊었다.
완벽한 무아의 경지.
환히 물든 시야 속에 보이는 것은 오직 공간 너머로 이어진 작은 선 하나.
여능천은 그 선을 향해 천천히 휘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겁던 팔이 어째선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그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의념이 공간을 뛰어넘어 선 끝에 이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수십 년 간 정체되어 있던 자신의 경지기 지금 또 하나의 벽을 뛰어 넘었음을.
동시에 그의 몸에 변화가 시작됐다.
손등의 주름 몇 개가 옅어지고, 나부끼던 머리칼의 끝은 검게 물들었다.
오래도록 메말랐던 육신에서 화수분처럼 기운이 샘솟았다.
“아아…!”
반로환동!
오랜 수양 끝에 천명마저 극복하고 젊음을 되찾는 전설의 경지.
그 끝자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허나 기쁨은 찰나였다.
고요하던 심상에 환희라는 잡념이 깃든 순간, 그토록 바랐던 무아지경은 한 순간의 덧없는 꿈처럼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우둑-.
그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목이 꺾인 사람이 사고를 계속할 리 없으니.
‘바로 눈앞이었거…늘.’
현실 속 청년의 목에 그어진 붉은 실선 탓에 더 커지는 미련을 두 눈 가득 담은 채,
꽈드드드득-.
절대자였던 노인은 공깃돌 크기로 압축되어 이내 세상에서 말소됐다.
***
프스스스-.
그 흔한 단말마조차 남기지 못한 채, 시대를 호령했던 노인은 그렇게 한줌 먼지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허나 값진 승리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 없었다.
“하아, 하….”
목에 맺힌 핏방울을 닦아낸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한가득이다.
대체 그게 뭐였지?
부딪히는 느낌조차 없었다.
혼돈기로 밀집된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난 무형의 검극.
왠지 모를 불길함에 목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렇게… 였나?”
홀린 듯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는 조금 전 그의 몸을 휘돌던 기운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금안의 관조에 비췄던 길을 따라.
분명 이런 식으로….
쑤아악-!
“어?”
순간 몸에서 기운이 뭉텅이째 빠져나갔다.
허나 허탈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닿을 듯 말 듯한 안타까운 기분만이 아른거렸을 뿐.
“…뭐였지.”
몇 번 같은 손짓을 반복하길 잠시,
나는 이내 털썩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미지의 적이었던 황실을 물리치고 사부님의 복수마저 했다.
헌데도 기분이 찝찝한 것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수많은 황실 병력 사이에서 병사로 위장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무진을 빼돌린 자는 대체 누굴까?
혹시 태후가 죽는 순간 내게 전음을 날렸던 자와 같은 인물일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일이 가능한 건….
“하! 하… 그러면 소원이 없겠네.”
말도 안 되는 억측과 함께 찾아오는 그리움을 웃음에 담아 날려 보내며 두 눈을 감는다.
이윽고 귓가로 들려오기 시작한 그리운 이들의 외침 속에, 내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
늦은 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대숲이었던 폐허는,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허나 승리의 기쁨에 처한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무림맹에서도 가장 높은 전각, 그 꼭대기에 서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한 사람의 그림자를.
“후… 미련한 녀석. 그걸 왜 혼자 싸워.”
나직한 한숨을 터뜨리는 사내의 낯빛은 파리했으나 그 안에는 안도의 기색이 가득했다.
군중들로부터 그가 있는 전각까지는 물경 수백 장에 이르렀지만, 적어도 두 사람 만큼은 확실히 구분이 가능했다.
오늘의 주역인 청년과 그 곁에 선 한 여인.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따스한 눈길로 그들을 응시하던 사내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잉, 왜 보라는 놈은 안 보고 엉뚱한 녀석들이 시신을 발견해서는….”
힘이 넘치던 목소리가 늙수레한 빛을 띄었다.
투덜거림과 함께 하나씩 늘어가는 주름은 청년의 얼굴을 급속도로 노화시켰다.
“어이구, 무리를 했더니 피가 또 나오는구나.”
강호 곳곳을 거닐며 악인을 벌하고.
그들의 곳간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을 도우니.
죄 많은 이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의 꽁무니를 쫓더라.
허나 신출귀몰하고 변화무쌍한 그의 본 모습을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으니.
그것은 이십 년 간 제 손으로 기른 손녀와 아끼는 제자 또한 마찬가지.
“괜히 아끼던 인피면구만 버렸네 그려.”
거짓 얼굴을 거짓 얼굴로 덮은 채 수십 년을 살아온 노인은,
얼마 만에 되찾은 것인지 모를 본래의 얼굴을 어색하게 더듬으며 한탄했다.
“나가긴 나가야 하는데 대체 언제 나가야 할 지…. 넌 어찌 생각하느냐. 지금 나가면… 공격 받으려나?”
“쮸쯋!”
털이 모두 깎여 맨들맨들한 다람쥐 한 마리가 노인의 어깨에 올라탔다.
몇 없는 손가락으로 다람쥐를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녀석. 이제 까슬까슬하구나. 내 살다살다 다람쥐를 분장시켜보긴 또 처음이다.”
“쯋! 쮸쯋! 쯋!”
“어서 가기나 하라고? 알았다, 욘석아. 알았으니까 그만 좀 보채거라.”
한 사람과 한 마리가 떠나가고.
머잖아 그들이 향한 폐허에서 귀신이라도 본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오는 광경을.
오래된 전각은 제자리에서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