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206
Epilogue. 탄생
약빈이가 황제에 즉위하고 어언 한 달.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첫째로 죽은 줄만 알았던 스승님의 생환.
야욕을 드러낸 무림맹주를 물리친 그 날 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의 한 구석에 오순도순 모여 있는 다람쥐 세 마리를 발견하곤 어찌나 놀랐던가.
세 마리.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두 마리가 아니고 세 마리.
직후 헛기침과 함께 슬며시 어둠 밖으로 나오는 노인을 봤을 때는,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 잘들 지냈냐?’
비명을 지르는 나와 약빈이를 향해 사부님이 내뱉으신 머쓱한 한 마디였다.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고, 기쁜 순간이다.
다음으로 기쁜 소식은 어머니의 출산.
나와 스무 살 터울을 두고 태어난 조가장의 셋째는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다행히 어머니 역시 빠르게 건강을 회복 중이다.
한편, 늦둥이의 탄생을 가장 기뻐한 것은 아무래도 소희였다.
그동안 가문의 막내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해온 녀석은 갓 태어난 아기를 제 자식처럼 등에 업고 싸돌아다녔다.
덕분에 곤란해진 것은 부모님.
집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한동안 제갈세가에 신세를 지게 된 두 분께선, 부부 금슬의 결실인 늦둥이를 사방팔방 광고하고 다니는 소희 탓에 사돈 보기를 굉장히 민망해하셨다.
참고로 조가장은 한창 복원 중이다.
태운 놈들이 책임을 지라는 약빈이의 지론 하에 공사비용과 손실된 재물은 모두 황실에서 지불했다.
약빈이가 황위를 계승했듯 나 역시 무림맹주의 직위를 제안 받았지만 거절했다.
내가 미쳤다고 신혼 초부터 그런 골치 아픈 일을 떠맡겠는가.
게다가 잘할 자신도 없고.
그렇게 무림맹주의 자리는 두루두루 평판이 좋고 노련한 당가기 노사에게 돌아갔다.
그가 맹주에 오른 뒤 최초로 수행한 업무는 ‘무림맹 부맹주’라는 있지도 않은 직책을 만든 것.
물론 그 감투를 쓰게 된 것은 나다.
별다른 의무나 책임이 없는 자리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부교주에 이어 부맹주라니.
아무래도 난 ‘부’라는 글자와 인연이 많나 보다.
이제 얼마 뒤면 황실의 부마 자리에도 오를 테니까.
아니지. 약빈이가 황녀가 아니고 황제이니, 국서라고 해야 하나?
국서가 여러 여인을 두는 것에 대해 황실에서는 전례없는 일이라며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약빈이가 대신들에게 좆까라를 시전하며 무마시켰다.
황족들이 전부 갈려나간 탓에 그녀에게 개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죽은 태후가 한 일 중에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황족의 예절 따위 알지도 못하고 배울 생각도 없는 약빈이는 태후와는 또 다른 의미의 폭군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약빈이의 즉위는 그동안 황실과는 배척 관계에 있던 명교에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교류를 넓혀가다보면 언젠가는 명교가 중원으로 본단을 옮기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한편, 지난 한 달 간은 내게도 무척 바쁜 시간이었다.
넘치는 내력을 이용해 장원의 재건을 돕고, 무림맹주가 죽기 전에 남긴 기묘한 심득을 연구하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심혈을 기울인 일은, 그간 여러 사정으로 인해 미뤄진 ‘그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여러분, 이제 곧 시간 됩니다! 다들 자리로 이동하세요!”
“네, 대인!”
“금 여협,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그런 얘기는 다 무사히 끝난 다음에 해야겠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금라희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그녀’를 맞이할 시간이다.
***
악양.
동정호를 보러 오는 사람들로 사시사철 붐비는 도시에서도 눈부신 백발을 지닌 여인의 외모는 단연 눈에 띄었다.
백봉 제갈우희.
근래 밀려드는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가 근거지도 아닌 이곳 악양까지 행차한 것은, 남들과 마찬가지로 동정호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도 그녀의 기분은 그리 편치 않았다.
이번 여행을 계획한 당사자가 오늘 아침 숙소에 서신 한 장만을 덩그러나 남겨두고 홀랑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급한 일이 생겨서 해결하고 올게. 축시 초(오후 1시)에 어제 얘기한 다루에서 만나.]“누군 안 바쁜가.”
그렇잖아도 최근 밤만 되면 집을 비우는 정인에게 불만이 많은 그녀다.
워낙 전적이 화려해야지.
‘혹시 또 다른 년 만나는 거 아니야?’
불길한 상상과 함께 그녀의 두 눈이 자기도 모르게 샐쭉해지던 그 때,
“저기요.”
갑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여인의 모습에 제갈우희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더욱 예상 밖이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가씨. 이 꽃이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안 사요.”
“그냥 드리는 거예요.”
‘살수…?’
수상함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 위로 기이한 수식이 그려졌다.
한 달 전, 각성의 그 날 이후 더 이상 부채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진 그녀다.
“이 안에 독이 있나?”
거역할 수 없는 의지가 담긴 음성에, 어느새 이지를 제압당한 여인이 멍하니 답했다.
“없습니다.”
“이걸 누가 시켰지?”
“금 여협께서.”
그건 또 누구야.
커져가는 의문 속에 제갈우희는 결국 암시를 풀고 꽃을 받아들었다.
혹여 꽃잎이나 포장 안쪽에 숨겨진 전언이라도 있는지 살펴볼 요량으로.
그러나 상대의 기행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눈부신 햇살에 비친 그대 모습이-.”
“왜, 왜 이래요.”
꽃을 주더니 이번엔 갑자기 노래라니!
난생 처음 겪는 일에 영민한 그녀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사람인가?
설마 살수가 이런 눈에 띄는 일을 벌일 리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거기 아리따운 소저. 오늘 우리 객잔 앞을 지나시는 천 번 째 행인이시오. 이 꽃을 받으시겠소?”
“언니, 이거 받으래요!”
“혹시 이 꽃을 떨어뜨리시진 않으셨나요?”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이유를 대며 안겨준 꽃들로, 어느새 그녀의 품 안엔 커다란 꽃다발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등 뒤를 쫓는 노랫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더욱 커져 있었다.
“함께 걷고 싶어요-!”
“이런 날 믿고 기다려준 그대.”
대체 뭔데!
꽃을 건넨 뒤 노래를 따라부르며 자연스럽게 대열에 합류하는 사람들.
심지어 길에서 동냥을 하던 악사마저 악기를 들고 따라나서니,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무렵 그녀의 주변은 노래를 부르는 이들과 이 진귀한 풍경을 구경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그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대에게 감사해요-!”
노래의 마지막 소절을 장식한 청년이 수북한 꽃다발위에 마지막 꽃 한 송이를 더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가가!”
청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났다.
***
한 달.
플래시몹 이벤트 준비에 걸린 시간이다.
이벤트 업체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세상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직접 발품을 팔아야 했으니.
일단은 곡의 선정.
처음에는 현재 세간에 유행하는 ‘시’로 이벤트를 구성할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현대의 곡으로 결정했다.
노래를 부를 사람으로는 극단에서 일하는 배우들을 섭외했고, 금라희 교관님께서 이들의 교육을 도왔다.
그녀는 학관에서 이미 중원 악기에 K-POP을 접목해본 경험이 있으니.
존명이 놈이 뭐 열심히 숨는다고 숨긴 했는데, 솔직히 마음먹고 찾으면 일도 찾는 건 일도 아니지.
“나 조용히 좀 살자….”
“응, 그 쪽 아니고 형수님.”
존명이의 투덜거림 따윈 가뿐히 무시한 채 금라희를 잠시 빌려왔다.
그렇게 땀과 눈물이 흐르는 기나긴 지옥훈련이 시작되…는 줄 알았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작업은 한 달 만에 순식간에 완료됐다.
돈의 힘이 이토록 대단하다.
일찍 성과를 낼수록 대금이 증가하는 계약조건을 걸었더니, 다들 잠까지 아껴가며 생소한 음악을 미친 듯이 소화해내고야 말았다.
한국어까지는 도저히 무리여서 개사를 하긴 했지만.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다.
“축하드리오, 소저!”
“축하드려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보는 우희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이상하다 했어요. 다 가가가 준비한 거예요?”
“아니?”
“거짓말. 웃고 있는데.”
“괜찮았어?”
“이런 건… 처음이에요. 너무 이상해요. 뭐예요, 이게?”
요즘 일에 치여 살던 우희에게서는 보기 드문, 들뜬 표정이었다.
이 한 순간을 위해 여태껏 들인 노력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물론 이런 이벤트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장먁 : 플래시몹 ㅋㅋ] [크래카라 : 식상하고] [래치하 : 형 이게 맞아? 너무 오글거리는데?] [redsoxchosum : 동정호 플래시몹… 명나라인이 부르는 KPOP… 이게 무협…?] [로제린 : 아직도 플래시몹을 하네] [미푸새 : 제발 참신해]쏟아지는 비난에도 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명나라에서는 내가 처음한 걸 텐데 뭐.
우희만 기뻐하면 됐지.
“꽃은 여기 맡기고. 배고프지, 희야. 밥 먹어야지.”
“응.”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게 얼마인데 벌써 놀라면 안 되지.
여전히 신기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손을 이끌어 다음 데이트 코스로 안내했다.
분위기 좋은 객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식사를 하고.
연극을 보고.
시장을 구경하고.
플래시몹에서 점수를 제대로 딴 덕에 우희의 기분은 하루 종일 하늘을 찔렀다.
우리는 웃고 떠들며 데이트를 만끽했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난 그녀를 오늘의 최종 코스로 안내했다.
“이 방향은….”
“왜?”
“동정호는 내일 낮에 보자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와 봐. 보여줄 게 있어.”
여태껏 우희에게 온갖 핑계를 대며 동정호 쪽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한 것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 뒤 드넓은 중원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호숫가에 도착한 우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예쁘지.”
“응.”
어두운 밤하늘 아래.
은하수가 담긴 호수의 가장자리 전체를 빼곡히 감싼 등불의 향연.
내가 의뢰한 거지만 정말 장관이었다.
돈지랄을 한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이쪽이야.”
넋이 나간 그녀의 손을 잡고 호수로 다가갔다.
그 발걸음의 끝에 놓인 것은 아담한 크기의 나룻배 한 척.
“오르시지요, 아가씨.”
“…….”
“왜 그렇게 봐?”
“기특해서.”
감동한 듯한 우희를 배에 태운 채, 노를 저어 서서히 호수의 중심으로 향한다.
내력을 사용하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겠지만 모터보트도 아니고 그건 너무 무드가 없으니까.
평소에도 연인이나 부호들이 배를 띄운 채 야경을 즐기는 동정호에 주위를 은은히 밝히는 등불까지 있으니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심지어 우리 둘만을 위해 준비된 풍경이다.
오늘을 위해 이곳 동정호를 하루 간 전세 냈으니까.
대가를 지불 안 한 것도 아니고, 이럴 때 권력을 써보지 언제 써보겠어.
“마음에 들어?”
“응….”
지상의 등불과 밤하늘의 별을 번갈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가 코앞이다.
호수의 중심에서 우린 짧은 키스를 나눴다.
“…….”
“…잠깐 뒤로 누워볼래?”
입술을 떼며 속삭인 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선체 안쪽에 머리를 뉘이니 등불의 불빛이 난간 너머로 모습을 감추며 아늑한 어둠이 찾아왔다.
“…오늘 너무 좋았어요.”
“아직 끝난 거 아닌데?”
“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내 뺨에 입술 자국을 새기던 우희가 덩달아 고개를 돌린 순간, 선명한 불꽃 하나가 긴 꼬리를 그리며 별이 박힌 하늘을 가로질렀다.
퍼퍼펑!
“아….”
오늘의 대미를 장식할 불꽃놀이의 시작이었다.
이 시대에도 춘절이나 특별한 날 불꽃놀이를 즐기긴 하지만 성녀에게 협찬 받은 현대의 폭 죽은 말 그대로 어나더 레벨.
쉬이잉- 펑! 퍼펑!
와아아아-!
화려한 폭죽이 하늘을 수놓을 때마다 호숫가 주위에서는 구경꾼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장관을 특등석에서 바라보는 우희 역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아-.”
불꽃이 비친 우희의 눈동자가 아름다운 색으로 빛난 순간, 난 그녀에게 키스했다.
퍼엉-! 퍼펑-!
“…예뻐요.”
“너?”
“으응-. 응….”
결국 폭죽 몇 개는 놓치는 바람에 귀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쪽-.
“하….”
달뜬 한숨과 함께 기나긴 입맞춤에서 벗어난 우린, 다시 머리를 맞대고 불꽃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불꽃의 화려함에도 슬슬 익숙해질 무렵, 세컨드 페이즈가 발동했다.
동시에 내 얼굴에는 짙은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연습대로만 되라.
퍼펑-!
힘차게 하늘로 쏘아진 불이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거기까진 아까와 별반 차이가 없으나 이후는 달랐다.
“아…!”
각자 어른의 손을 붙잡고 서로를 마주본 두 어린아이.
그녀와 나의 첫 만남.
하늘에 펼쳐진 그림을 본 우희가 입을 틀어막았다.
펑-!
불꽃이 튀며 다음 그림이 펼쳐졌다.
천재소녀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얼굴에 액괴 파편을 한가득 묻힌 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 어린 우희.
첫 만남부터 당돌하게 내 뺨에 뽀뽀를 갈긴 그녀와 당황한 내 모습.
“흑…. 으흑….”
우희의 흐느낌 속에 그림이 이어진다.
함께 책상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공부를 하는 모습.
5년이 지나 몰라보게 달라진 그녀와의 재회 등등….
둘만의 추억들이 연달아 하늘에 펼쳐질 때마다 그녀의 두 눈은 촉촉히 젖어들었다.
반면, 건곤대나이로 불꽃들을 조종하는 나는 죽을 맛이다.
전생하고 20년이나 흘렀는데, 커스텀 폭죽이 출시됐으면 좀 좋아? 어휴….
지난 한 달 간의 개고생을 떠올리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혹여 이벤트를 준비하는 걸 들키기라도 할까, 새벽마다 호북성 밖 산골짜기로 미친놈마냥 달려나가 리허설을 하던 매일.
정교한 표현을 위해 어린 시절 영상들은 또 얼마나 지겹도록 돌려봤던지.
하지만 그것이 헛고생이 아니었음은 지금 우희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가. 나 똑똑하잖아.”
“응. 세상에서 제일 천재지.”
“근데 이런 건 상상도 못해봤어요. 너무 좋아요.”
“하핫.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읍.”
감동에 젖은 그녀가 내 입술을 덮쳤다.
정교하던 그림이 마구 흐트러진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아직 클라이맥스가 남아 있다.
“희야, 저기, 저기.”
입술을 떼어내며 속삭인다.
내 손끝이 향한 곳을 바라본 우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랑해]“흐흣.”
[대답은?]“나도 사랑해요, 가가.”
[이제 손을 내밀어주세요.]내가 준비한 마지막 문장이 하늘에 새겨진 순간 채팅창이 폭발했다.
[비굴링 : 큰거 온다] [원퉁사 : 큰 거 온다!!] [drworker :우희야 안 돼ㅠㅠㅠㅠ] [작은새우 : 쓰레기쓰레기쓰레기]명나라의 청혼방식에 반지를 끼워주는 풍습은 없다.
하지만 분위기만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한 그녀는 벌써부터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윽고 가는 떨림 속에 다가온 가녀린 손을 난 부드럽게 감싸며 고백했다.
“소저. 저와 혼인해주시겠어요?”
“…좋아요, 공자.”
눈물 가득한 얼굴로 미소지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린 동정호의 달빛 아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
1년 뒤.
황제의 처소 건천궁엔 늦은 시각까지 불이 밝혀져 있었다.
“아… 허리야. 야, 이제 자자.”
“자긴 뭘자. 일해. 지금 술시(19~21시) 밖에 안 됐어.”
“씻는 시간은 생각 안 해? 넌 눕자 마자 자냐? 아기가 우리 얼굴 잊겠다.”
“내 딸은 똑똑해서 안 까먹어. 그리고 이거 네 일이야.”
“이젠 네 일이거든요, 재상님?”
오늘도 티격태격 싸움이 한창인 두 사람을 바라보는 팽소혜와 단예지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한 나라의 황제와 재상 간의 싸움이라니.
“뭘 웃어? 너희는 멀쩡히 집도 있는 것들이 왜 자꾸 오는 거야? 황실이 너희 집 안방이야?”
“아, 언니들이 약속 안 지키니까 그러죠오.”
입술을 내민 팽소혜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뭔 약속.”
“아, 알면서 또 모른 척.”
“1년 전 저희 아버지와 팽 소저의 할아버님께 한 약속을 잊으셨나요? 그 때 분명 역모를 감수하고 조가장의 싸움을 도운 저희에게 언젠가 은혜를 갚는다고 하셨….”
조목조목 대꾸하는 단예지를 상석의 두 사람이 쌍심지를 켜고 바라봤다.
“부탁을 상식 선에서 해야지. 남의 남자를 넘봐? 조 공 이제 애 아빠야.”
“하… 참지 말고 그냥 역모죄로 처형해.”
“그래 버릴까?”
“아, 언니들. 어차피 네 명이나 되는데 우리 둘 껴준다고 뭐 달라지냐고요. 우리도 자존심 다 내려놓고 이러는 거거든요?”
“응. 자존심 챙겨.”
“아, 진짜아-.”
자리에서 일어난 팽소혜가 쪼르르 달려가 약빈에게 안겼다.
지켜보던 궁녀들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지만,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체통을 지키라는 말도 상대에게 그럴 의지가 있을 때나 통하는 것.
애초에 집무실도 아닌 침소에서 업무를 보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그것도 무방비하게 외인까지 들여서.
궐 밖에서 자유분방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여제는 그녀들에게 있어서 통제불가능한 존재였다.
“웅? 언니. 우리 학관에서 즐거웠잖아요. 또 다같이 그렇게 지내요.”
“얘 왜 이렇게 뻔뻔해? 웃기네.”
“치…. 우희 언니이-.”
“엉기지 마. 안 그래도 일 많아서 바빠.”
실제로 그녀는 변방의 오랑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게 다 1년 전에 죽은 태후 때문이다.
강은을 제외한 황족의 몰살은 새로 황제에 오른 약빈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쥐어주었으나, 그 이상으로 국력의 악화를 가져왔다.
여러 황족이 나누어 관리하던 이권이나 재물 등이 반란의 과정에서 상당 부분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중원은 현재 잦은 외세의 침입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가휘가 나서면 해결될 일이나 그의 몸은 하나에 불과하고, 분쟁은 끝이 없으니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은 국력강화 뿐.
“그래서 우리가 맨날 와서 도와주잖아요. 예지 언니도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그렇게 콩고물 떨어지는 것만 기다리지 말고.”
팽소혜의 눈총에 단예지가 얼른 지원사격에 나섰다.
“폐하. 비록 국경에서 외적이 들끓지만 나라 안이 이리 조용했던 적이 또 있나요? 저희 사도련은 사파를 규합하고 통제하는 데 최선을….”
“단 소저, 지금 나 협박해?”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다들 조용해. 일해.”
그칠 줄 모르던 네 여인의 언쟁은 외부의 개입이 있고나서야 간신히 수그러들었다.
-폐하. 소신 규원이옵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늦은 시간에 무례를….
“들거라! 아, 다 조용히 좀 해봐.”
“폐하, 처소에 남성을 들이시다니요. 체통을.”
“내가 뭐 외도했어요? 말 웃기게 하네.”
“폐, 폐하. 어인 말씀을….”
“어후, 답답해. 빨리 들어와!”
호통에 화들짝 놀란 신하가 얼른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를 조아렸다.
“북해에서 서한이 도착했사옵니다.”
“거기 두고 나고 보거라.”
“예, 폐하.”
신하가 물러나기 무섭게 허공으로 떠오른 서신이 제갈우희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동시에 단예지의 눈에는 경쟁심이 피어났다.
제갈우희는 그것을 모른 채하며 서신을 펼쳤다.
촤륵-.
“…….”
“뭐라고 써있어? 북쪽 방비를 도와주겠….”
꾸깃.
“안 도와준대?”
“도와준대.”
“근데 왜 승질이야.”
“뭐겠어. 자기한테 궁 하나 내어달래.”
“…설 소저 그렇게 안 봤는데.”
궁을 내어달라는 말은 곧 후궁 자리를 달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다들 나한테 뭐 맡겨놨어? 내가 황제지 조가휘가 황제냐고.”
그녀가 투덜거리는 사이 제갈우희는 이미 붓을 들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뭐 써?”
“백발은 나 하나로 충분하니까 나대지 말라고.”
“하, 근데 걔네 도움 받긴 받아야 되는데…. 북해가 요즘 힘이 막강하다던데.”
중얼거리던 약빈은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말을 멈췄다.
슬며시 고개를 드니 뾰루퉁한 팽소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왜, 뭐.”
“좀 그래요.”
“뭐가.”
“우린 매번 부려먹으면서 찬밥 신세고. 북해는 서신 한 번 받았다고 고민하고.”
“너넨 백성인데요? 북해는 새외고.”
단예지도 슬며시 가세했다.
“그래도 협조적인 것과 비협조적인 건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해요”
“옳소, 옳소!”
“아, 그래? 하지 마. 나도 안 해. 주강은 데려와. 나 안 해!”
“또 시작이지.”
제갈우희가 이마를 짚는 가운데, 약빈의 노성이 다시금 건천궁을 진동시켰다.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야! 아니, 살아 있으면 살아 있다고 연락을 해야지. 황제는 얼어죽을…!”
“폐하, 체통을….”
“야, 시끄러. 일해.”
“주강은 데려와!!!”
그 뒤로도 건청궁에선 오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야!!!!
“헛…크흠….”
문고리를 잡던 노인의 손이 멈칫했다.
“…안 들어가십니까?”
“음, 오늘은 좀 그렇구만. 그냥 돌아갈 테니 기별할 필요는 없네. 폐하껜 내가 왔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게나.”
“예, 대인.”
“수고하게.”
슬며시 뒷걸음질을 치는 신투 공순기의 얼굴은 1년 전과는 비할 바 없이 젊음으로 가득했다.
굳이 역용술이 아니어도 50대로 보일 정도.
이게 모두 제자로부터 지속적으로 혼돈기를 주입받은 결과였다.
과연 흡성대법의 완성형이라 할 만한 공능.
덕분에 남은 인생이 길어진 것은 환영할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손녀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서야 주객전도가 아니겠는가.
“에잉… 젊어지니까 잠도 잘 안 오고. 손주나 보러 갈까…?”
***
“하연이, 까꿍! 까-꿍!”
-전하. 공 대인께서 오셨나이다.
-가휘 있느냐?
“스승님?”
난 아기 돌보기를 잠시 멈추고 벽려군과 홍사강을 바라봤다.
“저흰 괜찮아요.”
“안으로 모시어라!”
“밤 늦게 미안하구나.”
명을 내리기 무섭게 1년 새 부쩍 젊어진 스승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손주 얼굴이나 볼까 해서 들렀다.”
“잘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어르신.”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금방 나가마.”
“누가 보면 저희가 스승님 박대하는 줄 오해해요. 편히 계시다 가세요.”
그제야 스승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허흠, 그럴까? 청아는 자나보구나.”
“빈아 보고 오시는 길이세요?”
“으휴….”
한숨부터 쏟아내시는 걸 보니 안 좋은 일이 있으셨던 게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방을 가로지른 사부님께선 태자이자 손자인 하성을 번쩍 안아드시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하… 요즘은 괜히 살아돌아왔나 싶기도 하고. 손녀라고 하나 있는 건 짜증만 내고.”
“아이, 또 그러신다. 빈아가 요즘 피곤해서 그러죠. 빈아가 사부님 사진 보면서 우는 모습 또 보여드려요? 그 때 빈아 안고 질질 짜셨으면서.”
“뭐 이 녀석아? 어휴, 늙으면 죽어야지.”
아니, 요즘 외로움 타시나?
“그렇게 젊어지신 얼굴로 말씀하셔도 설득이 없어요.”
“네놈도 그러는 거 아니다.”
“아니지? 아빠는 안 그렇지?”
“꺄-!”
품에 안긴 하연이가 까르르 웃었다.
엄마인 려군을 닮아 얌전하고 잘 울지 않는 아이다.
한편, 지금은 옆방에 잠들어 있는 청아는 우희를 닮았는지 갓난아기임에도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제 두 달 뒤에 사강까지 출산하면 말 그대로 대가족이다.
“사강, 몸 상태는 좀 어때요? 아까 저녁 먹고선 좀 안 좋았잖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만삭인 배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은 자애롭기 그지 없었다.
명교에서의 첫만남을 생각하면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한편 려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언제나 의지가 되고, 누나 같은데 보고 있으면 귀엽고.
혈마의 비동에서 함께 죽을 위기를 겪은 그녀와 나 사이엔, 다른 여인들과는 또 다른 각별함이 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정도로.
“가휘?”
“네?”
“왜 그렇게 봐요?”
“맞춰봐요. 내가 무슨 생각했나.”
-…또 귀엽다고 할 거잖아요.
거봐, 내 생각 읽는 거 맞다니까.
-지금 본인이 본인을 귀엽다고 한 거예요?
-가휘가 매번 그러니까….
“에잉, 쯧쯧. 어른이 있거나 말거나 그저 좋아서.”
“그럼 신혼인데 좋아야죠.”
스승님의 푸념을 한 귀로 흘리며 사랑스러운 부인들과 눈빛을 교환하던 그 때, 도네이션 음성 하나가 내 귓가를 사로잡았다.
[Rhacoom : 깐휘 형 무림티비(2) 여기 형이 운영하는 채널이야?]응?
그 사이 먼저 채널을 검색해보고 온 몇몇 시청자가 비슷한 말을 했다.
[배고파양 : 짭이겠지 ㅋㅋ] [iolemon : 오 느낌 비슷한데] [F.A : 뉴챌린저] [Nishiken : 다른 환생자 아님?] [뵨태아저시 : 근데 진짜 뭐임?] [영태킴 : ㄹㅇ분위기가 비슷한데 서브채널인가요?] [모닝피맥 : 환생 모른 척 하라고 밴 먹기 싫으면]난 설마설마하는 기분으로 해당채널을 검색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무림티비(2)] [실시간 스트리밍 중]아직 생성된지 얼마 안 된 듯 새하얀 배경에서 유일하게 색을 지닌 생방송 영상을 클릭한다.
그와 동시에 난 확신했다.
그것이 여태껏 O튜브상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온갖 유사 채널들과 달리, 나와 같은 세계의 영상임을.
영상에 비치는 것은 조금씩 흔들리는 천장이 전부.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질감, 색감,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유행하는 문양.
그 모든 것이 동일했으니.
더구나 시청자들마저 어렴풋이 눈치챈 것을 이 세계에서 20년 넘게 주민으로 살아온 내가 모를 리 없잖은가.
깨달음과 동시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나처럼 환생한 현대인일까?
아니면 수진이처럼 전이한 케이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수진이와는 경우가 다르다.
그녀는 나와 플랫폼도 환생특전도 다르니.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묘한 동질감이 가슴을 채웠다.
근데 잠깐만….
아무리 비슷하다고는 해도 이 천장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어디서….
“아…?”
“왜 그래요?”
“…….”
“가휘?”
여인들의 부름마저 무시한 채 내 시선은 오직 머리 위의 천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닐 거야.
에이, 설마.
난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놈아, 갑자기 왜 그러는 게야.”
“잠시만요. 잠시만.”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긴다.
목적지는 코앞이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앞을 가로막는 문을 열고 천장을 바라본다.
“…….”
시선이 밑으로 떨어진다.
다음으로 응시한 것은 어둠 속에 잠긴 조그마한 요람이다.
그 위에서 꼬물거리는 실루엣에 맞춰 내가 보는 화면이 흔들리고 있다.
터벅터벅터벅-.
조급한 발걸음이 침상으로 이어졌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듯한 불안함을 떨치며 요람 위로 고개를 내민 순간.
여태껏 천장만을 비추던 낯선 이의 스트리밍 화면에도 한 사내의 얼굴이 비쳤다.
그건 다름 아닌 나, 조가휘의 얼굴이었다.
가상의 공간에 비친 현실의 나.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듯한 광경에서 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의 본래 주인인 아기에게서도.
“청…아?”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의 눈을 살핀다.
허나 말똥말똥한 눈빛하며 어른들은 의도를 이해하기 힘든 손짓, 발짓은 결코 억지로 흉내낸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어려서 직접 갓난아기를 흉내내본 나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딸 청아는 환생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난 머릿속에 떠오른 답을 멍하니 중얼거렸다.
“…유전…됐어?”
잘 보이는 무림티비 (완)
완결 후기입니다.
우선 지난 1년 간 잦은 휴재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제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첫 양지작이다 보니 전개속도나 수위 등 생각지 못한 난관이 많아서 몇 번이고 넘어질 뻔 했지만 가족의 응원과 편집자님의 도움, 그리고 독자 여러분이 계셔서 완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삐그덕거리긴 했지만요.
많은 분들께서 우려를 표하셨던 최종막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몇몇 분이 예상하신 것과 달리 엔딩 부근의 급격한 전개는 판매량 감소나 작품에 대한 애정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해당 전개는 처음 플롯을 짤 때부터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글을 실제로 등록하고 반응을 보기 전까진 이토록 쓴소리를 들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난 평소랑 똑같이 쓴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반응이 안 좋지? 그렇게 별로였나? 어떻게 해야 되지?
완결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예상도 못했기에 솔직히 멘탈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연재를 멈추게 될까봐 며칠 간은 댓글도 읽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 결국 힐끗힐끗 다 보고 말았습니다.
쓴소리와 조언, 응원을 모두 읽고 깨달은 것은 결국 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반전이 밝혀지는 마지막 서사이니만큼 빠르게 몰아치는 전개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필력이 부족하여 스릴감과 반전미는 그저 허술함과 조급함으로 남게 되었네요.
몇몇 독자님들의 조언처럼 잠시 연재를 멈추고 플롯을 고치는 방향도 생각해봤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가휘가 학관에서 교관으로 생활하며 암중세력과 맹주의 비밀을 차근히 파해치는 방향으로 풀어나가자니, 신투의 죽음이 걸렸습니다.
사부님이 돌아가셨는데 가휘가 교관 생활을 밝게 해낼 수 있을까, 맹주는 지금쯤 조바심이 날 텐데 내가 맹주라면 어떤 행동을 벌일까.
그렇게 기존에 적은 플롯들을 하나하나 지우다보니 결국 신투가 처음부터 흡성대법을 갖고 떠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외의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백지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여태까지 제 글을 따라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글을 쓰는 속도가 매우 느린 편입니다.
플롯을 떠올리는 것도 느리고 거기에 살을 붙이는 것도 느립니다.
이미 후반부 전개방향과 반전까지 밝혀진 마당에 자유연재로 돌리거나 몇 주나 더 기다려달라는 말씀을 드릴 염치도, 그렇게 떠올린 스토리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제 글솜씨가 작품에 대한 애정만큼만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히로인에 대해서도 참 할 말이 많네요.
우희나 벽려군은 최초 구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약빈이의 경우 수위 문제로 인해 성격이 180도 달라져버렸습니다.
원래는 친남매처럼 티격태격거리는 관계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어려서 약빈이가 자기 속도 몰라주는 가휘의 엉덩이를 차주던 장면이 기억나실 겁니다.
원래 플롯은 가휘가 복수를 한다며 약빈이의 엉덩이도 두들겨주고, 약빈이는 분하면서도 왠지 모를 흥분을… 옙, 바로 삭제됐습니다.
홍사강의 경우는…
마교 장로가 ‘장로님, 점프 뛰십시오.’라는 대사를 듣는 장면이 있으면 웃기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급조된 캐릭터였습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최후까지 남게 되었네요.
전작인 투명츄의 주인공과 달리 가휘의 성격이 애매하게 착하가 보니 이어지지 못한 히로인 후보가 많습니다.
설이나, 팽소혜, 단예지, 심서우, 하영영, 이름도 정하지 못한 시녀즈 등등.
이들에 대한 외전은 아직 고민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원하시면 쓰고 싶지만, 가휘의 캐릭터성이 붕괴될까 하는 두려움에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네요.
IF형태로라도 원하시는 분이 계시면 추후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향후 일정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미 예정된 외전(감금된 깐휘, 홍사강, 전원)은 11월 말까지 모아오겠습니다.
그 외에도 원하시는 외전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성인 등급이어도, 아니어도 좋습니다.
확인 후 제가 생각한 캐릭터 이미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려하겠습니다.
아직 제작하고 싶은 삽화가 많기 때문에 적어도 12월까지는 삽화가 계속 추가될 예정입니다.
이후에는 전작인 투명츄의 초반부 개정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번 작의 문제점이었던 잦은 휴재나 종막의 급전개가 반복되지 않도록,
차기작은 적어도 1년 정도의 공백기를 가지고 차분히 전개방향과 비축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감사하다는 말로 끝맺고 싶었는데 마지막까지 유감스러운 공지가 되었네요.
부족한 작품 마지막까지 따라와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음에는 더 나은 글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플롯을 비롯하여 제가 힘들 때마다 위로해주시고 상담해주신 박상호 편집자님, 뒤늦게 제 작품을 담당하시어 아슬아슬한 마감에 시달리신 김경모 편집자님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