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47
미행 (1)
설이나와 헤어진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아 두 눈을 감았다.
잠시 방치해둔 카메라를 다시 조작하기 위함이었다.
그 순간, 화면에 비치던 모옥 문이 벌컥 열리며 벽려군이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기 전과는 다른 안내인을 대동한 채.
“이쪽이네.”
“······.”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허리가 굽은 노인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뒤, 그녀를 따라 이동하던 화면이 어느 순간 벽에라도 부딪친 듯 허공에 우뚝 멈춰섰다.
약 250미터에 이르는 카메라 사정거리가 벌써 한계를 맞이한 것이다.
이제는 결정할 때였다.
이대로 그녀를 뒤쫓을 것인가, 아니면 학관으로 되돌아 갈 것인가.
기숙사 통금까지는 이제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은 상황.
이럴 줄 알았으면 외박 신청을 하고 나오는 건데.
···따라가자.
고민은 잠시였다.
적당히 쫓다가 너무 멀어진다 싶으면 되돌아오면 되겠지.
그리고 설령 복귀가 늦다한들, 도박장이나 기루에 다녀온 것도 아닌데 학관생의 명예만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큰 질책이야 있겠는가.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객잔을 나와 한적한 길로 방향을 틀었다.
벽려군의 위치는 이미 손바닥 안이니, 굳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가로지를 필요없이 적당한 장소에서 경공을 전개할 생각이었다.
탓-.
가볍게 솟구친 신형이 한 마리 제비처럼 밤하늘 속으로 녹아든다.
건물의 담벼락과 지붕 위를 가볍고 날랜 몸놀림으로 스쳐 지나가며, 이따금 실눈을 뜨고 벽려군의 현재 위치를 재확인했다.
그렇게 무려 반 시진에 걸친 미행 끝에 도달한 곳은 하남의 외곽에서도 바깥쪽에 위치한 어느 음산한 폐가였다.
···오늘 돌아가기는 글렀네.
이미 한참을 지난 통금시간에 체념하던 그 때, 추적 내내 말이 없던 화면 속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긴가요?”
“그렇네.”
검후가 대답의 진위여부를 파악하듯 노인의 얼굴을 훑자, 그가 불쾌한 표정으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싫으면 돌아가든가. 우리도 위험을 감수하고 안가를 드러낸 것이니.”
“아니에요. 가죠.”
“크흠···.”
노인이 아직 기분이 덜 풀린 얼굴로 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검병에 손을 얹은 검후가 사방을 예의주시하며 뒤쫓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등 뒤를 쫓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음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200m나 떨어진 어느 언덕에서.
잠시 뒤, 뜰을 가로질러 본채에 이른 둘은 방 중앙에 놓인 청동화로 앞에 멈춰 섰다.
뚜껑에 바다코끼리가 조각된 거대한 화로의 무게는 족히 삼백 근은 되어보였다.
“이 밑이네. 흡-.”
구구궁-.
노인이 화로를 번쩍 들어 옆으로 옮기자 놀랍게도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후가 어두컴컴한 계단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 안에 당신의 상관이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요?”
“그렇대도.”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품에서 손 두 뼘 길이의 대나무 통을 꺼냈다.
종이며 목화솜 따위를 채워 넣은 죽통으로, 강호인들이 어둠을 밝힐 때 애용하는 ‘화섭자’란 물건이었다.
그러나 적외선 촬영이 가능한 내겐 필요 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최종 목적지도 알았겠다, 난 노인이 화섭자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한 발 앞서 정찰에 나섰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고 카메라가 날아갔다.
새까만 지하계단을 따라 빠르게 내려간 카메라는 이내 넓게 뚫린 공동에 도착했다.
흙벽 사이사이로 여러 개의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는 토굴 같은 장소였다.
미리 시청자들에게 경고메시지를 보낸 나는, 혹시 모를 위협을 찾아 토굴 내부를 구석구석 수색하기 시작했다.
관통 패시브가 붙은 카메라가 지하 곳곳을 날아다니며, 벽 너머의 풍경들을 내게 전달했다.
여긴 비었고.
여기도.
그리고 여긴···?
세 번째로 들어간 공간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계집 하나 잡는 일에.”
“그 계집이 다름 아닌 검후니까.”
“그래봤자 반쪽짜리 아닌가?”
“방심하지 마시게. 그녀가 휘두른 검에 고혼이 된 고수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엄중히 경고했으나, 그와 대화를 나누던 홀쭉한 사내는 그리 납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벽력탄은 아니지. 자칫하면 우리도 생매장되는 거 아니야.”
“그걸 터뜨려야 하는 상황이면 우린 이미 구천을 헤매고 있을 걸세.”
“하긴···. 듣자하니 청록이로(靑綠二老)까지 왔다던데. 우리가 나설 기회나 있겠어?”
“금화부인이 이를 갈았군. 벽력탄에 청록이로까지···.”
“제 남편을 죽인 년이니 오죽할까.”
함정!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누군가 검후를 노리고 판 함정이 분명했다.
게다가 벽력탄이라니.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사부님께 듣기로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하는 폭탄이라고 했다.
그런 것이 이렇게 복잡한 토굴 내에서 터진다면···?
소름이 돋은 난 황급히 카메라를 벽려군에게 되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노인을 따라 지하계단에 발을 디딘 뒤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이제 거의 다 왔네. 조금만 더 가면 돼.”
난 볼 수 있었다.
앞서 걷던 노인이 비릿한 미소와 함께 품속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는 것을.
“젠장.”
두 눈을 번쩍 뜬 나는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폐가를 향해 황급히 몸을 날렸다.
사부님의 보물찾기 수업 이래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품안의 복면을 뒤집어쓰며.
***
“거의 다 왔네.”
드디어.
노인의 말을 들은 벽려군은 어쩌면 오늘 오랜 숙원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빛냈다.
하지만 결코 긴장감을 늦추진 않았다.
여태껏 사파 무리를 쫓다 함정에 빠진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럼에도 노인을 따라 지하로 내려온 것은 마찬가지로 지난 경험들 때문이었다.
정보 단체들이 음침하고 으슥한 장소를 접선지로 지목하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도 아니었으니.
그렇다.
정보.
금일 벽려군이 다른 교관과 기숙사 당직까지 바꾸어가며 야행(夜行)에 나선 것은 모두 한 가지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비겁한 방법으로 그녀의 스승을 시해하고 종적을 감춘 어느 마두의 정보를!
당시, 그녀의 스승이자 전대 검후였던 백모란은 가장 강력한 사파 세력으로 손꼽히던 사도련주와의 생사결에서 정정당당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사도련 측에서는 패배를 인정하기는커녕, 추적대를 비롯해 수많은 사파 고수들을 고용해 천라지망을 펼쳤다.
개중에는 과거 마교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금안마군이라는 자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고수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닌 그의 일장에, 보름에 걸친 추적으로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던 그녀의 스승은 미처 저항도 못해보고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제자인 벽려군과 신물인 월녀검만을 근처 나무 위에 숨겨둔 채.
살거라.
너마저 죽는다면 누가 월녀문을 잇겠느냐.
스승이 마련해준 변명을 되새기며, 15세 벽려군은 절벽 위의 참상을 숨죽이고 지켜봤다.
피눈물을 흘리며.
그로부터 꼬박 사흘이 지나서야 나무를 내려온 그녀는, 스승이 떨어진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복수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일인전승인 월녀문에는 더 이상 그녀를 지도해줄 스승도 동문도 없었으니.
더구나 그녀가 미처 배우지 못한 월녀검결의 후반부 초식이 담긴 비급마저 도주 중에 유실된 상황.
차라리 잃어버렸다면 되찾을 희망이라도 있으련만, 검격에 휘말린 비급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이상, 그녀가 앞으로 월녀검을 대성할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일부에서 그녀를 반쪽짜리 검후라 폄하하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절정고수의 반열에 드는 데 성공했다.
스무 살 겨울, 그녀는 척마멸사의 기치를 내걸고 복수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7년에 걸친 복수에도 마지막 한 사람, 금안마존의 행방만큼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알 수 없는 그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했던가.
혹시 마교주의 교체 이후 죄를 용서받고 신강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천무학관의 교관직 제의를 수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교에 대해 황실 다음으로 많은 정보가 모여드는 무림맹이라면, 언젠가 금안마존에 대한 소식도 접할 수 있을 테니.
그런데 설마 학관이 개설된 지 열흘이 채 지나기도 전에 금안마존의 행방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게 될 줄이야.
정보의 출처가 무림맹이 아니란 점에서 신빙성은 의심되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
부디 이번에는 거짓 정보가 아니기를.
오랜 회상만큼이나 기나긴 계단을 전부 내려온 순간이었다.
살기!
동공에 들어선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눈에 보이는 건 없지만, 수년간의 실전을 통해 다져진 감각은 결코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스릉-.
순식간에 뽑혀 나온 옥빛검이 노인의 목덜미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러나 상대 역시 만반의 대비 중이었다.
“어이쿠.”
넘어질 듯 몸을 굽힌 노인이 앓는 소리를 낸 순간,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도검을 든 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쳐라-!”
와아아-!
심지어 조금 전 그녀가 내려온 통로에서도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벽려군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스걱-.
“아아악!”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남자의 팔을 일검에 잘라버린 그녀는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장 선두에 선 무사의 머리를 밟았다.
우둑-.
“끄윽···.”
발끝에 실린 막대한 경력에 목이 부러진 사내가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벽려군은 멈추지 않았다.
“끅-!”
“머리 위다!”
“아악!”
우르르 달려드는 자들의 머리를 징검다리를 밟듯 사뿐히 밟으며 달려 나간 그녀가 한 차례 허공에서 몸을 뒤집었다.
월녀검결 제六초.
월영난무, 역(逆).
핏. 핏. 핏. 핏.
밑을 향해 뻗은 검봉이 시린 궤적을 그린 순간,
어지러이 선 사내들의 경동맥이 일시에 쩍 갈라지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컥.”
“끄극-.”
벽려군이 바닥에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손으로 목을 틀어막은 여덟 사내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를 본 나머지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겁을 먹고 뒷걸음질 쳤다.
그래봤자 도망칠 곳은 한정적. 벽려군은 그들 사이를 산책이라도 하듯 유려하게 거닐며 그들을 도륙했다.
스각-.
“아악!”
스걱-.
“아, 아···.”
한 번의 휘두름에 팔 하나.
공평한 듯 지극히 불공평한 교환 사이엔, 그 흔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마저 없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살육을 벌이는 벽려군의 얼굴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그렇게 양떼 사이에 뛰어든 늑대마냥 거침없던 그녀의 보보(步步)에 일순 제동이 걸렸다.
뒤!
목덜미를 향해 날아드는 예기를 감지한 그녀의 몸이 발뒤꿈치를 축으로 부드럽게 회전했다.
챙-!
비도를 쳐낸 그녀의 눈에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한 노인이 보였다.
“준비한 건···.”
“놈!”
스걱-.
“이게 끝인가요?”
눈길 한 번 주는 일 없이.
그녀의 옆에서 달려들던 사내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툭-.
촤륵, 피를 사방으로 흩뿌린 월녀검이 다시 영롱한 옥빛을 내뿜었다.
목이 분리된 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녀에게 덤벼드는 간 큰 이는 없었다.
“으으···.”
저벅, 저벅.
뒷걸음질 치는 노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그 때,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어중이떠중이들로는 시간조차 못 버는구나.”
어느 샌가 통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청수한 중년인은, 노인에게 다가서는 벽려군을 만류하며 오른손을 들어보였다.
“그대의 실력은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그만 검을 거두시···.”
중년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벽려군의 검이 하늘을 날았다.
콰득-.
“컥···!”
심장에 검이 박힌 노인이 서서히 뒤로 넘어졌다.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벽려군은 검을 회수하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미 던진 검을 되돌리는 재주는 없어서.”
중년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번 대의 검후가 실력에 비해 손속이 잔혹하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실력이 부족하니 독심으로 메우는 수밖에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군!”
두 사람이 대치하는 사이,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은 허겁지겁 토굴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벽려군은 개의치 않았다.
“금안마군의 정보를 가지고 있나요?”
“빨리도 묻는구나.”
“모른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이미 10년도 더 전에 스스로 모습을 감춘 마두를 무슨 수로 찾을까.”
“할 말은 그게 끝?”
벽려군의 말에 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이긴 듯 구는구나. 헌데, 이걸 보고도 그럴 수 있을까?”
“그건···.”
“벽력탄의 기폭 장치다. 아무리 네년이 날고기는 재주가 있다한들 이 정도 거리에서 살아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동귀어진을 각오했다면 수하들을 희생시킬 필요가 있었나요?”
“동귀어진? 그럴 리가.”
어깨를 으쓱한 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왼팔을 가리켰다.
“얌전히 팔 한쪽을 내놓고 간다면 보내주겠다. 우리도 의뢰주에게 할 말은 있어야지.”
중년인의 요구에 벽려군은 잠시 멈칫했다.
확실히 그녀라 해도 이리 밀폐된 장소에서 벽력탄이 터진다면 결코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으나 원수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벌써 갈 수는 없는 일.
벽려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상대의 손에 들린 기폭 장치를 살폈다.
과연 벽력탄이 묻혀 있다는 말은 사실일까.
그가 장치를 작동시키기 전에 손을 베어낼 수 있을까.
그런 잠깐의 고민이 그녀에게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 순간,
핏-!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여태껏 상대하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과 속도였다.
“읏!”
급히 고개를 틀었으나 어깨에 작은 생채기가 남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암습을 가한 자의 정체를 확인한 벽려군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청검 선배.”
“호··· 나를 아느냐?”
“강호에서 명망 높으신 분께서 설마 저 같은 어린 계집에게 암습을 가하실 줄은 몰랐네요.”
“돈은 귀신도 부리는 법이다, 아해야. 그리고 누가 천하의 검후를 평범한 계집으로 보겠느냐.”
팔자주름이 선명한 노인, 청검 서정천이 유들유들 웃으며 답했다. 그는 광서성을 무대로 활동하는 검의 고수로, 푸른빛이 도는 검 한 자루를 기가 막히게 다룬다하여 청검이라는 별호를 얻는 전대의 실력자였다.
“나도 있다.”
“녹야 선배···.”
새로 등장한 노인을 발견한 벽려군이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역시 광서성을 무대로 활동하는 고수로, 독과 암기를 다루는 솜씨가 결코 사천 당가의 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자였다.
강호에선 괴팍한데다 성품마저 잔혹한 두 노인을 청록이로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하나만 있어도 백초 안에 승부를 낼 수 없는 노괴가 둘이라니.
득보다 실이 많겠어.
그녀가 긴장을 내비치자 기폭장치를 든 중년인이 의기양양하여 조소를 보냈다.
“그러게 진즉 한 팔을 두고 갔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지 않았나.”
“······.”
싸구려 도발에 응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청록이로가 슬금슬금 그녀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디 이번에는 내 것도 한 번 받아 보거라!”
녹야의 소매로부터 수십 개의 우모침이 날아들었다.
벽려군은 검풍을 일으켜 막아내려 했으나, 순간 오른팔이 말을 듣지 않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독···?
조금 전 자신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시퍼런 검날에 생각이 미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설마 까마득한 후배를 협공하는 것으로 모자라 검날에 독까지 묻히다니.
그러나 지금은 분노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코앞까지 날아든 침들을 바라보며 황급히 왼팔을 들어올렸다.
이쪽에도 독이 묻어 있을 게 뻔했지만 얼굴을 내어주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투두두두둑-.
가죽에 침이 박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팔에서 별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당황한 녹야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웬 놈이냐!”
“괜찮으시오, 소저?”
듣기 좋은 중저음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벽려군은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보며 눈을 떨었다.
“누구···시죠?”
“그대가 만나길 기대하던 사람.”
“네···?”
사내가 말없이 웃어보였다.
복면 위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이 어쩐지 익숙한 듯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