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49
여난 (1)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느덧 해가 중천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것치곤 이른 시간이었지만,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마른세수를 하고 학생식당으로 향하자, 휴일이어서인지 늦은 시간임에도 많은 이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디 앉아야 되나···.
빈자리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던 그 때,
“가휘! 여기야.”
“아, 현아.”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손을 흔드는 남궁현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지난 열흘간 제법 친해진 중소군파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서 우리끼리 왔지.”
“아··· 피곤해서 늦잠을 잤더니. 그런데 너희도 오늘은 꽤 느긋하네?”
“모처럼의 휴일이니까.”
“근데 너는 왜 맨날 용봉지회랑 안 있고 얘들이랑 먹냐.”
“아침은 거기서 먹고 점심은 여기서 먹고 하는 거지.”
어깨를 으쓱하는 남궁현의 옆에서 존명공자 양철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가휘, 그냥 늦잠이 아닐 텐데?”
“어?”
“자네가 무단외박으로 혼나는 모습을 본 친구가 있어. 그리고 그 곁에는 당직 날짜를 바꾼 검후 교관님께서 함께였다지, 아마?”
양철진의 말에 사춘기 소년들의 이목이 단번에 내게 집중됐다.
난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냥 정문 앞에서 우연히 만난 거야.”
“수상한데?”
“뭘 수상해. 헛소문 퍼뜨리지 말고, 밥 떠올 테니까 좀만 천천히 먹고 있어.”
“수상해, 수상해.”
난 동기들의 미심쩍은 눈길을 뒤로 한 채 급히 배식대로 향했다.
다행히 잠시 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관심사는 이미 내게서 멀어진 뒤였다.
“그나저나 강은, 자네는 왜 그렇게 부끄럼이 많나?”
“···뭐?”
“공동욕탕을 이용하는 걸 못 봐서 하는 소리야. 어제도 합격술 훈련이 끝난 뒤에 굳이 방에서 따로 씻지 않았나. 혹시 그게 작아서 부끄러운 거야?”
“하!”
양철진의 말에 예쁘장한 청년, 주강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의 옆방에 묶는 강무진이란 수련생이 젓가락질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작지 않다.”
“뭐?”
“그저께 나와 함께 욕탕을 이용했다. 작지 않았다.”
“아니, 뭘 그걸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나저나 ‘크기’하면 또 우리 화화공자를 빼놓을 수가 없지.”
“아이, 밥 먹는데 진짜.”
나까지 음담패설의 희생양이 되려는 찰나, 남자 수련생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입을 다물었다.
식탁을 향해 다가오는 은발의 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북해빙궁의 소궁주 설이나.
그녀의 등장에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펭귄목살 : 시큼이다!] [멍보단냐옹 : 땀이나 왔냐고!] [꿀마 : 깐휘님 액취증은 데오드란트로 커버 안 돼요. 그나마 겨드랑이털 밀어서 땀이 맺히는 걸 줄이면 아포크린샘 분비액과 덜 맞닿으면서 냄새도 줄어요] [양뽈락 : 전문가 등판 ㄷㄷ] [샤인쿤 : 겨털 밀래요!]······.
채팅창을 확인하는 사이, 설이나가 어느덧 내 앞에 도달했다.
휴일이어서 그런지 땀 냄새는 나지 않았다.
“화화공자.”
“아, 설 소저.”
“어젯밤엔 내가 미안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당황해서.”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사과에 주위 시선이 모여들었다.
난 더 이상 화화공자와 관련된 뜬소문이 늘기 전에 황급히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제가 한쪽 눈을 감고 바라본 거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그쵸?”
“음···? 그렇다.”
“제가 어제는 미처 오해를 풀지 못하는 바람에···. 사실 그게 제가 익힌 무공의 특징이거든요.”
“아, 그 혼잣말을 하게 되는 무공?”
“네, 맞아요.”
“난 그것도 모르고···.”
눈처럼 새하얀 그녀의 뺨이 금세 발갛게 물들었다.
난 그녀의 민망함을 덜어주기 위해 재빨리 포권했다.
“아뇨. 북해빙궁의 예절에 무지한 제 잘못이죠.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아니다. 나 때문에 수행에 차질을 빚을 필요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네?”
“···가보겠다.”
서둘러 멀어지는 설이나의 뒤로, 날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비가 눈에 띄었다.
마침 그녀에게 용무가 있던 나는 잽싸게 전음을 날렸다.
모처럼 시청자가 꿀팁을 줬는데 시도는 해봐야지.
-하 소저, 잠시만!
-무슨 일이죠?
-반 시진 뒤 식당 뒤에서 만날 수 있겠소?
-히익, 색마! 나한테까지!
양팔로 가슴을 가리는 그녀에게 난 황급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서, 설 소저와 관련된 이야기이오.
-···아가씨와?
의심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던 하영영은 한참이 지나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얘긴지 들어는 볼게요.
곧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그녀가 한참 앞서나간 설이나를 쫓아 멀어지자 난 한숨을 토해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내겐 아직 상대해야 할 이들이 남아 있었다.
“자네 설마 교관님이 아니라 설 소저와 밤을 샌 겐가!”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너 내 얘기 안 들었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여자에게만 친절한 화화공자의 본색을!”
“하···.”
난 울분에 차서 부르짖는 존명공자를 무시한 채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나 머잖아 또 다른 손님이 우리 식탁을 방문했다.
“휘 가가-. 오늘은 식사가 늦었네요?”
“으음···.”
난 습관처럼 눈을 내리까는 남궁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다가온 그녀를 맞이했다.
“희야, 잘 잤어?”
“저는 잘 잤는데··· 가가는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외박을 해서 그런가?”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
“검후 교관님과 다정히 걷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잦아드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내 손목 위를 맴도는 딱딱한 시선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가, 제가 드린 팔찌는 어디 있나요?”
“아, 맞다.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어떡하지, 희야? 끊어져버렸어.”
“······.”
“희야?”
“응, 계속 해봐요.”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에 어쩐지 조바심이 든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미안. 좀 더 소중히 다뤘어야 했는데.”
“어쩌다 끊어졌어요?”
“아, 훈련하다가. 하하···.”
우희는 몰라도 다른 수련생들 앞에서 간밤의 일을 밝힐 수는 없는 일.
나는 그리 답하는 한편, 그녀에게 몰래 전음을 보냈다.
-지금 설명하긴 좀 그래. 이따 둘만 있을 때 자세히 얘기해줄게.
“···끊어진 팔찌는요?”
“흘릴까봐 방에 잘 모셔뒀지.”
“······.”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가가 방에서 봐요.”
“응. 언제 올래?”
“한 시진 정도 뒤에요.”
“기다릴게.”
잠시 뒤, 우희가 떠나가자 존명공자가 어딘지 허탈한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만 벽 교관님에 설 소저에 백봉 소저까지···. 넌 대체 무슨 목적으로 학관에 온 거냐?”
“목적이야 너와 같지. 결과가 다를 뿐.”
“큭-.”
마침내 그에게 한 방 먹인 주강은이 속 시원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그나저나 어떡하냐, 휘? 너희 마나님한테까지 외박 소문 다 났는데.”
“내가 당당한데 뭐가 문제야.”
“근데 정말 둘이 무슨 사이야?”
“전에도 말했잖아. 소꿉친구라니까.”
난 더 이상 곤란해지기 전에 여전히 쭈굴한 자세로 앉아있는 남궁현에게 화살을 돌렸다.
“야, 현아. 희야 갔으니까 고개 들어.”
“오늘 초반(炒飯) 맛이 기가 막히네.”
“아, 지금 먹느라 못 본 척 하는 거야? 그래서 네가 편해진다면···.”
“크흠.”
그제야 남궁현이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뒤로도 학관 동기들 간의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예전처럼 시청자들에게 일일이 해설을 해주느라 대화의 흐름이 끊기는 일은 드물었다.
O튜브에서 제공하는 자동번역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덕이었다.
하긴, 내가 이 세계에 환생한지도 어느덧 17년이 지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더불어 구독자 수 역시 빠르게 증가해 어느덧 300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자연히 방송에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대폭 증가했다.
더 이상 ‘환생’이란 설정을 밈이 아닌 진실로 받아들이는 자들과, 근래 무서운 속도로 발전 중인 가상현실기술을 언급하는 이들까지.
한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대답을 강요하고 욕이나 협박을 일삼는 그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달리 생각하면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니까.
기업이나 정부에서 접촉을 시도하거나 외압을 행사할지 모른다는 걱정도 접었다.
이미 계정 주소며 계좌까지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 마당에,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 O튜브 모니터링 팀이 진즉 뭔가를 했겠지.
어차피 내 채널의 정체가 뭔지,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고민은 그쪽 사람들끼리 하라고 하지, 난 방송이나 할 테니.
그렇게 생각하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채팅창과 댓글란이 지저분해지는 게 유일한 걱정이었지만, 뽀미님과 그 친구 분이 매니저를 맡은 이후 분탕 종자들이 컷 당하는 속도는 기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즉각적이었다. 그야말로 내겐 은인인 셈이다.
그렇게 난 전생에 휩쓸리는 일 없이 현생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시끌벅적한 식사 시간이 끝난 뒤, 수련생들이 각자 수련이나 개인 활동을 위해 뿔뿔이 흩어질 무렵, 남궁현이 내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휘. 언지광이 널 노린다는 소문이 있어.”
“저번에 우희한테 수업 시간 물어봤다가 까인 걔?”
“어. 그 때 체면을 구긴 뒤로 이를 갈고 있다더군.”
“웃기는 놈이네. 내가 뭘 했다고.”
“뭐, 네 실력이면 그런 놈에게 당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거 같아서.”
그래도 이놈이 친구라고 내 생각을 다 해주는구나.
아니, 소희 때문인가?
난 미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걔 말고 다른 사람들은 별 말 없어? 용봉지회나···. 우희처럼 예쁘면 관심 있는 애들 많을 텐데.”
내 말에 녀석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너, 걔가 입관 시험에서 임시교관 자격 따려고 애들한테 무슨 짓 했는지 못 들었어?”
“비무했다며.”
“개처럼 두들겨 맞는 게 비···무? 뭐, 그래도 황보결 그 친구는 희아 좋아하지.”
“황보결? 그 덩치 큰 애?”
“어. 워낙 싸우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그래도 그건 호감이라기 보단 호승심에 가까운데, 어쨌든.”
이야기는 다시 언지광으로 되돌아왔다.
“방심은 하지 마. 그래도 진주언가라면 때에 따라 오대세가의 말석에 들기도 하는 명가니까.”
“구체적으로 뭘 조심해야 되는데.”
“녀석도 명색이 정도(正道)이니 암습 따위를 하진 않겠지. 듣기로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수련생 간 비무에서 널 지목할 듯 해.”
“굳이 한 달이나 기다려서?”
“수련생과 교관들이 모인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생각이겠지.”
말을 마친 녀석이 힘내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비무야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혹시 녀석이 가문을 내세워 핍박한다면 얘기해.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집이 언가에 밀린 적은 없으니까.”
“말이라도 고맙다.”
“사실 제갈세가에서 먼저 나설 테니 우리까지 차례가 돌아오겠느냐마는.”
잠시 뒤, 남궁현과 헤어져 식당 뒤로 향하자 그곳엔 이미 하영영이 대기 중이었다.
“늦잖아요, 화화공자.”
“미안하오. 소저께서 식사를 이리 빨리 마칠 줄 몰랐소.”
“그래서? 아가씨에 대해 할 말이 뭔가요?”
나와 단 둘인 상황이 어지간히 불안한지.
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재촉하는 그녀에게, 시청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오해 말고 들으시오. 설 소저께서 중원에 온 뒤로 체취로 고민 중인 건 그대도 잘 알 것이오.”
“···계속 말해 봐요.”
“내가 지인에게 듣기로 체모를 자주 손질해주면 땀이 덜 맺혀 냄새도 준다고 들었소.”
“확실한 거겠죠?”
“해봐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소. 혹여 내가 알려줬다고 이야기하진 말고.”
“그 정도 배려심은 있거든요? 별꼴이야.”
새침하게 쏘아붙인 그녀가 문득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혹시··· 아래쪽도 해야 되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식겁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르오! 설 소저에게 말하면 알아서 할 것이 아니오!”
“제가 해야 되니까 그러죠! 명색이 아가씨 시비인데!”
“앗··· 음?”
스스로 처리해본 적이 없다고?
순간 방에 있는 손거울이 떠올랐지만, 어쩌면 설이나에게는 그쪽이 더 민망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대들이 알아서 하시오.”
난 엄한 망상을 털어내며 그 자리를 뒤로 했다.
***
식당가서 밥 먹은 게 전부인데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오히려 식사 전보다 피로한 얼굴로 방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약속대로 우희가 찾아왔다.
“여기 앉아 봐요.”
“응···.”
어쩐지 묘한 위압감이 담긴 목소리에, 난 얌전히 그녀가 가리키는 침상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끊어진 팔찌는요?”
“여기.”
가운데가 싹둑 끊어진 팔찌를 내민 순간, 경직되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팔찌가 생각보다 덜 망가져서 기분이 풀린 걸까?
“고칠 수 있겠어?”
“네? 아, 네. 이 정도면요.”
반색하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비단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망가지기 전과 완전히 동일한 팔찌 하나가 더 들어 있었다.
“그거 여러 개였어?”
“강호는 험한 곳이니까요. 혹시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서 폐관수련 중에 예비로 만들어뒀어요. 그래도 함부로 다루면 안 돼요? 자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응, 명심할게.”
예비팔찌의 존재를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고칠 수 있다니까 다행이다. 나 이거 끊어지고 엄청 걱정했는데.”
“···미안해요, 가가.”
“응? 뭐가?”
“가가한테 예민하게 굴어서. 팔찌가 끊어질 수도 있는 건데··· 아까는 너무 속상해서. 가가 친구들도 보는 앞에서 화내구.”
어쩜 이렇게 마음이 여릴까?
난 울상을 짓는 그녀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자기가 선물한 게 망가지면 속상한 게 당연하지.”
“휘 가가···.”
“나야말로 미안. 앞으로는 좀 더 소중히 다룰게.”
“···응. 또 끊어지면 말해요.”
배시시 웃은 그녀가 내게 새 팔찌를 내밀었다.
“지금 차보실래요?”
“응.”
“으응, 손 내밀어. 내가 채워줄 거야.”
“흣, 여기.”
얌전히 손을 넘기자 그녀가 5년 전 그날처럼 내 손목에 팔찌를 채웠다.
다시 몇 초나 지났을까, 팔찌가 매인 손목 위를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가 스르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제 무슨 일 있었는지 들려줘.”
손등을 쓰다듬는 보드라운 손길에, 난 지난밤에 있던 일들을 남김없이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카메라가 등장하는 부분들은 적당히 각색을 거쳤지만.
잠시 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우희가 내 손을 꼭 맞잡으며 두 눈을 글썽였다.
“청검과 같은 전대의 고수를 물리치다니 정말 대단해요, 가가. 그래도 앞으로는 그러지 마요. 다치는 거 보기 싫어.”
“별로 안 다쳤어.”
“수투 벗어 봐요.”
“아···.”
급히 손을 오므렸지만 우희의 행동이 한 발 빨랐다.
곧 무리한 내력 운용과 청검의 검기로 엉망이 된 손이 드러나자, 그녀가 곱게 눈을 흘겼다.
“이게 안 다친 거야?”
“···미안.”
“상의도 벗어 봐요.”
“뭐? 아, 잠깐···.”
그녀가 막무가내로 옷을 벗겼다.
과거와 달리 더 이상 그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게 된 나로선 속수무책이었다.
“거봐. 여기도 많이 다쳤잖아.”
“그렇···네.”
“돌아봐요. 약 발라줄게.”
나를 돌려 앉힌 그녀가 멍들고 상처 난 부위에 금창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
난 아찔한 통증과 야릇한 간지러움 사이에서 신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휘 가가, 몸이 너무 예뻐요.”
“너 지금 사심 채우는 거 아니지?”
“다른 애들 보여주면 안 될 거 같아.”
쪽-.
“으학? 야, 야, 뭐해!”
등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퍼뜩 놀라 일어나는 나를, 우희가 잽싸게 끌어안아 다시 주저 앉혔다.
“가가는 내가 이러는 게 싫어?”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너 걱정돼서 그러지. 안 그래도 요즘 너랑 빈아가 내 방 오가는 걸로 이상한 소문 돈다던데.”
“신경 안 써. 다섯 해나 참았으니까.”
그녀가 한층 더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그런데 가가는 이제 제압술 훈련도 같이 안 해주고.”
“희야, 잠깐만.”
“싫은데? 제압술 같이 해준다고 하면 놔줄게요.”
등 뒤에 눌려오는 뭉클한 감촉에 난 허리를 바짝 세우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건 좀··· 그렇다니까? 방에서 하기엔 너무 과격하고, 밖에서도 눈치 보이잖아. 옷도 지저분해지고.”
“그럼 덜 과격한 거면 되겠네? 방도 안 망가지고, 안에서 할 수 있고.”
“으음···.”
“지저분해질 옷도 필요 없는 그런 거?”
“······.”
말문이 막힌 나를 보며 그녀가 키득거렸다.
“휘 가가, 지금 무슨 생각했어요?”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으응-? 침 삼키는 거 다 들렸는데?”
이어서 한층 더 속삭이는 듯한 음색으로,
“흐흣, 이 음-적.”
“야, 너 어디 봐.”
“글쎄···요? 아무데도 안 봤는데?”
좀 전의 내 말투를 그대로 답습하며 웃은 그녀가 비로소 내 등에서 몸을 뗐다.
“약 다 발랐어요.”
“···다 지워졌겠다.”
“또 해달라구?”
“아니!”
허둥지둥 옷을 걸치는 내 이마 위로 그녀의 검지가 닿았다.
“내가 다음에 이 방에 올 때까지.”
“어?”
“앞으로 나랑 뭐하고 놀지 생각하기. 알았지?”
나를 쿡 밀어 침상으로 넘어뜨린 그녀가 끊어진 팔찌를 챙겨 방을 나섰다.
난 하루가 다르게 요망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