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52
특별수업
“오늘은 하남의 기운을 듬뿍 받은 이 운태산에서 영과를, 또 영초를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음··· 전에도 말했지만 이 시기에 맺힐 수 있는 영과에는···.”
‘기연을 찾아서’수업의 교관인 만산객 송요동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딘지 짠한 인상을 지닌 아저씨였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그는, 남들은 평생가도 한 번을 마주치기 힘들다는 기연을 벌써 십수 번도 넘게 발견한 탐색의 귀재였다.
실제로 그가 지닌 고절한 내공의 구할 이상은 영약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긴, 그런 내력이 없었다면 학관 측에서 교관으로 초빙했을 리 없지.
다만 그가 여러 차례 진귀한 보물을 발견했음에도 여태 추레한 행색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 또한 이러한 재능 때문이었다.
짜릿한 인생역전의 순간을 수차례나 맛본 그는, 더 이상 소소한 행복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심각한 기연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그와 친분이 있는 다른 교관에게 들은 말로는 풍문으로는 수업이 없을 때도 기연을 찾아 온 중원을 헤집고 다닌다고.
“홍령초는 이 장 이내로 접근하게 되면 정욕이 끓어오른단 말이지. 주의하도록 하고, 또 무산영도라는 복숭아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지만···.”
그는 침까지 튀겨가며 열정적으로 강의를 진행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리 집중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른 수련생들을 가림막 삼아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두 여인 때문이었다.
-희야, 수업 들어야지.
-가가도 다 외우고 있으면서.
아니거든! 지금 한 글자도 머리에 안 들어오거든!
이래서 거짓말은 함부로 아는 게 아니라 했나.
몇 차례 O튜브 능력을 뽐낸 탓에 나를 자신과 대등한 천재라고 믿는 우희의 손은 요지부동이었다.
-희야, 나 진짜 하나도 못 듣고 있어.
-그렇다고 칠게. 그럼 이따가 가가 방에 가서 또 알려줘야겠네?
아랫입술을 깨물며 앙큼하게 눈웃음 짓는 그녀.
애초에 이 과목을 수강한 이유 자체가 물 맑고 공기 좋은 야외에서 노닥거리기 위함이니만큼, 거리낌 따위는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지금도 이러는데 이따가 실습이 시작돼서 자유행동을 할 때는 얼마나 노골적이 될지.
한편, 반대쪽 손을 차지한 약빈의 어필도 만만치 않았다.
며칠 전 내게 연심을 고백한 그녀는 깨가 쏟아지는 나와 우희를 심술궂은 얼굴로 노려봤지만, 그것은 위장에 불과했다.
-휘 랑. 걔랑 하는 거 밤에 나한테도 해줘야 돼?
귓가를 간질이는 달콤한 속삭임.
수줍은 앙탈과 함께 꼬물꼬물 손바닥 안에 그려지는 사랑해(愛)라는 글자.
이러고 싶어서 그동안 어떻게 참았니.
설마 둘과 이런 관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관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돌봐줘야 할 동생들로만 여겼는데.
여심을 드러낸 둘은 그동안 보여준 적 없는 낯선 모습들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였다면 더 큰 상처를 막기 위해서라도 누군가 한 사람을 빨리 선택하는 것이 예의이고 상식이니까.
그러나 이곳이 중혼이 가능한 세상이라는 점이 자꾸만 욕심을 부추겼다.
솔직히.
정말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솔직한 마음으로.
두 사람 모두와 앞으로도 함께 지내고 싶다면··· 욕심일까?
여태껏 둘을 여동생으로 생각했다는 놈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한 태도가 아닐 수 없지만, 그것이 뒤늦게 깨달은 내 진심이다.
나는 그렇다 쳐도 둘은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재회한 이래 내 곁에 꼭 붙어 있는 약빈을 보고도 별말이 없는 우희.
더도 덜도 말고 우희에게 하는 만큼만 해주길 바란다는 약빈.
얼핏 생각하기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야 두 사람과 각각 6년씩을 알고 지냈다지만, 그녀들이 함께 보낸 시간은 불과 1년에 불과하니까.
그마저도 상당 부분을 수련에 몰두한 것을 생각하면 반년이나 될지 모르겠다.
거기에 빈아도 삼자대면만큼은 결코 안 된다고 펄쩍 뛰고.
난 괜히 서두르다 긁어 부스럼이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좀 더 고민해보자.
그녀들이 서로에게 충분히 익숙해졌다는 확신이 들면, 그 때 물어보자.
내 바람이 그저 욕심인지.
***
옥월선자 금라희 여협은 풍성한 머리칼에 밉지 않은 푼수기를 지닌 30대 후반의 고수였다.
“여러분, 음공의 기초 시간이 돌아왔어요! 박수, 박수.”
교양 과목으로 음공(音功)을 고른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다재다능하신 사부님조차 음공의 조예는 그리 깊지 않았으니.
현대 가요에 음공을 담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금을 배워 O튜브에 올라온 악보를 연주하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고.
사실 이 시대의 음악은 내가 듣기에 너무 단조롭고 느린 박자인 것이 사실이니까.
“홍예령 수련생?”
“네, 교관님?”
“지난 시간에 내가 음공을 무어라 정의했더라?”
“소리에 기운을 담아 듣는 이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 무공이라고 하셨어요.”
“맞아, 맞아.”
고개를 주억거린 그녀가 손바닥을 짝- 부딪치며 외쳤다.
“오늘 이 시간에는 목소리가 아닌 악기에 기운을 담는 연습을 해보기로 해요. 각자 앞에 있는 금이랑 퉁소 보이지?”
“네-!”
“응, 대답 좋아. 수업은 학관에서 지원해주는 악기로 진행되지만, 정말 음공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은 자신만의 악기를 마련하길 바라요. 병장기랑 똑같아. 몸에 익어야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겠지?”
이어서 그녀는 한층 더 활기찬 목소리로,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지난 수업 복습부터 하자. 자, 단전에 힘주고- 소리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서 기운을 끌어올려. 따라해 봐요. 아아-!”
“아아-!”
“기운을 많이 담는다고 능사가 아니랬지? 고막 터뜨리려고 하는 거 아니야. 심금을 울리게.”
상대의 귀를 홀리고, 심장을 옥죄고, 이윽고 기운마저 지배하는 공감의 극치.
“아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풍성한 음색에, 강의실에 놓인 물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덜그럭거리며 춤을 췄다.
아! 이 얼마나 경이로운 광경인가!
수련생들의 눈에 떠오른 경탄의 빛을 읽었을까, 어느새 노래를 멈춘 금라희가 깨알 같은 홍보를 시작했다.
“사실 수업을 통해 여러분께 음공의 기초를 알려 드리고는 있지만, 열흘에 네 시진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겠지? 우리 천음문의 제자가 되면 좀 더 심오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알겠니?”
“사문이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잘 물어봤어요. 우리 천음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요. 자파(自派)의 절기만을 익혀야 하는 규정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관심 있는 사람들은 수업 끝나고 따로 절 찾아오세요. 음··· 그리고 또 있다, 여러분 사단에는 가입했나요?”
사단은 현대로 치자면 동아리를 의미하는 말로, 천무학관에서는 교과목 외의 활동 역시 인정하고 있었다.
수련생이든 교관이든 상관없었다.
누구든 관심사를 주제로 동아리를 개설하는 게 가능했다.
“내가 음악 동아리 고문이거든? 참고로 음공이 아닌 음악을 즐기기 위한 활동이니까, 이것도 관심 있는 친구들은 부담 없이 참여해주면 좋겠어. 내가 너무 대놓고 홍보를 했니? 오-호호!”
“나 저렇게 웃는 사람 처음 봐.”
“···금라희 여협, 너무 매력적이지 않냐?”
“뭐?”
놀라서 돌아본 그곳엔 사랑에 빠진 청년이 있었다.
아무래도 존명공자는 음악 동아리에 들 것 같다.
***
음공 강의를 마지막으로 모든 수업을 마친 나는, 예상대로 헐레벌떡 금라희의 뒤를 쫓아간 존명이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과 외출을 위해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간만에 바깥 구경이나 할 요량이었다.
참고로 우희와 약빈은 아직 수업이 남아 함께 하지 못했다.
“휘, 아예 네가 만드는 건 어때?”
“뭘.”
“동아리 말이야. 너 요리 잘하잖아. 학식도 맛있지만 가끔은 조가장에서 네가 만들어주던 게 생각난단 말이지.”
길을 걷다 남궁현이 한 제안이다.
하긴, 우리 집에 가끔 놀러올 때마다 내가 잘 해먹이기는 했지.
어려서부터 고향의 맛을 찾아 주방을 드나든 나는, 비록 전문숙수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괜찮은 솜씨를 지니고 있다 자부했다.
한편, 우리의 대화를 듣던 주강은과 강무진은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가휘, 요리도 할 줄 알아?”
“그렇다니까. 가끔 괴상한 걸 만들긴 해도.”
“그럼 나랑 별 차이 없는 거 같은데.”
“진짜야. 특히 고기 굽는 솜씨가 기가 막혀.”
남궁현이 재차 강조하자 주강은이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날 바라봤다.
“정말이야, 가휘?”
“마이야르.”
“뭐?”
“마이야르.”
그나저나 이렇게 넷이 걸으니 이목이 꽤나 집중되는구나.
남궁현과 주강은의 예쁘장한 외모야 더 얘기하면 입만 아플 뿐이고, 강무진도 이들 둘과는 다르지만 키가 훤칠하고 선이 굵은 미남이었다.
이거 괜히 존명이만 상처받는 게···?
그 순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저 뒤에서 존명이가 우릴 부르며 달려왔다.
“나만 두고 가냐!”
“네가 금 교관님과 얘기하기 편하게 자릴 피해준 거지.”
“허억, 헉. 그런 거야?”
난 숨을 헐떡이는 녀석에게 물었다.
“그래서 동아리 가입은 잘 했어?”
“잘 됐지. 근데 무슨 얘기 중이었어?”
“현이 나한테 요리 동아리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내 말을 들은 녀석이 번뜩 아이디어를 냈다.
“화화, 너 추궁과혈 기가 막히잖아. 그거 하면 되겠네.”
“뭘 자꾸 나보고 하래.”
“야, 소문나면 수련생 소저들이랑, 어? 무림맹 여협들까지 다 몰려들 텐데··· 개새끼, 금라희 여협은 건들지 마라.”
“미친 새끼, 지 혼자 이상한 상상하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형이 두 손 꼭 잡고 부탁한다. 제발 금라희 여협 만큼은···.”
왜 이 녀석만 보면 자꾸 욕이 나올까.
왁자지껄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가던 그 때였다.
분명 아무도 없던 등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허허, 이 친구가 그렇게 추궁과혈을 잘 한다고?”
“헉!”
“웬 놈이냐!”
이렇게 기척도 없이 뒤를 잡히다니?
저마다 혼비백산하여 뒤를 돌아본 우리는, 짓궂게 웃는 낯익은 인상의 백발노인을 볼 수 있었다.
“···맹주님?”
“무림말학들이 맹주님을 뵙습니다.”
“허례는 되었다.”
급히 포권을 올리자 그가 껄껄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보다는 추궁과혈 말이다. 안 그래도 요즘 어깨며 허리며 이 노구가 멀쩡한 날이 없었는데, 자네 솜씨 좀 볼 수 있겠는가?”
“아, 저···.”
“혹시 바쁜 일이라도 있는 게야?”
“아닙니다, 맹주님! 그냥 바깥 구경을 하려던 참입니다. 이 친구 데려가십쇼!”
“그럼 문제없겠구나.”
존명 개새끼야···.
난 친구들의 안쓰러운 미소를 뒤로 한 채, 예정에도 없던 맹주실 구경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해방된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도 더 지나서였다.
“반쯤은 장난이었거늘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혈을 자극하는 솜씨가 경지에 이르렀어.”
“아하···하, 과찬이십니다.”
“거기에 자네로부터 흘러드는 기운이 아주 정순한 것이 분명 대단한 고인께 사사했음이야. 사부님의 존함이 무언가.”
엇. 우리 사부님 가명이 뭐더라···, 아!
“적양권 주단묵 대협께서 제 스승 되십니다.”
“아··· 그 친구.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많이 들었지. 헌데 오늘 보니 소문이 오히려 축소되었음이야.”
그는 마사지가 퍽이나 만족스러웠는지 연신 나를 추켜세웠지만, 나는 나대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차돌 같은 근육들하며 상처들이 도저히 80대 노인의 등이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뒤, 그가 오랜 칭찬을 마치며 물었다.
“그래, 추궁과혈 동아리를 만들 생각이라고? 내가 직접 자네의 실력을 보증함세.”
“아, 말씀은 감사하지만···.”
난 사양의 뜻을 내비쳤다.
사실 추궁과혈에 소모되는 기운 자체는 보잘 것 없지만,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여자 수련생들과의 신체 접촉을 우희나 약빈이 반길 리 없잖은가.
안마 부위를 어깨 정도로 한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고 근육질 청년들의 몸을 주무르는 취미는 더더욱 없었다.
“아쉽구만. 그래도 이런 노인 하나 정도는 가끔 봐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맹주님.”
누구 부탁이라고 거절할까.
그렇게 난 얼떨결에 열흘에 한 번씩, 무림맹 최고권위자의 집무실에 드나들 권한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