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57
Black eyed dragon
“젊은 혈기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은 이해하나, 학관 내에서 단순한 비무가 아닌 정식 대결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반드시 한 명 이상의 교관을 대동하게 되어 있다. 이를 몰랐다고 하진 않겠지?”
승리의 영광도 잠시, 비무를 마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학관주 한중수의 호된 꾸지람이었다.
오후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관주실로 호출된 나와 언지광은, 무려 반 시진 넘게 설교를 들어야 했다.
하긴, 그렇게 관객이 많았는데 교관들 귀에 안 들어가는 게 비정상이겠지.
“백도무림에서 너희들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알 것이다. 다행히 오늘은 서로 큰 부상 없이 끝났으니 주의를 주는 정도로 넘어가겠지만, 두 번은 없다. 주변 수련생들에게도 잘 전해두도록.”
“네!”
“그만 가도 좋다.”
마침내 떨어진 축객령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관주실을 나서자,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궁현이 우리를 맞이했다.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지광 자네도.”
“음··· 난 먼저 가보겠네.”
“다음에 봐.”
멀어지는 지광을 향해 손을 흔들던 남궁현이 이내 날 바라보며 웃었다.
“저 친구가 오늘 자네에게 아주 혼쭐이 난 모양이야.”
이 자식이 다 아는데 시치미는?
비무가 끝난 뒤, 혹시 모를 언지광의 보복에 대비해 남겨둔 카메라에 남궁현이 찍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평소 웃는 놈이 화내면 더 무섭다더니, 언지광의 목줄기에 칼을 들이밀던 녀석의 모습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내게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던 언지광이 찍 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마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본 나와 시청자들의 호감도가 수직상승하는 것은 당연지사.
우희만 보면 쩔쩔 매던 남궁현에게 이런 반전이 숨어 있을 줄이야.
더구나 녀석이 화를 낸 이유가 소희 때문임을 알기에 더욱 예뻐 보일 수밖에.
[덩굴팍이 : 궁현이 정도면 인정이지] [겨울좋아 : 왜 깐휘보다 멋있냐ㅋㅋ] [연참은입금 : 구독과 좋아욧! 이 지랄만 안 했어도]······.
자기들도 좋다고 웃었으면서 태세전환 봐라.
그래도 남궁현의 모습이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멋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정도 듬직함이면 소희도 믿고 맡길 수 있겠어!
미래의 매제를 향해 보내는 내 눈빛을 느꼈는지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봤어.”
“싱겁긴. 아, 그리고 혹시 내일 시간 돼?”
“왜? 무슨 일 있어?”
“용봉지회 친구들이 자리를 한 번 마련해달라고 하네?”
용봉지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나를?
“딱히 정해진 약속은 없는데. 걔네가 왜?”
“오늘 네 실력을 본 사람이 많아. 희아가 단순히 화화공자의 외형에 반한 게 아님을 알고 궁금해진 거겠지. 그리고 겸사겸사 언지광과의 화해도 주도할 겸.”
“아, 언지광도 너희들이랑 인연이 있다고 했지. 알았어. 희야도 가는 거야?”
“응, 온대. 내일 둘이 같이 오면 되겠네.”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은 용봉지회 뿐만이 아니었다.
“화화, 잘 싸우더라? 다시 봤어.”
“아하하, 고마워.”
“가휘, 나중에 나랑도 한 번 겨뤄보자고.”
“시간 나면.”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별로 친하지도 않은 수련생들이 자꾸 말을 걸어오는 통에 꽤나 많은 시간이 지체됐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호기심과 호승심이 뒤섞인 시선들 속에 난 걸음을 서둘렀다.
다음날 오후.
난 우희를 대동한 채 약속장소인 정연루(淨蓮樓)로 향했다.
금수당이라는 제법 큰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다루 앞은 값비싼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공자, 찾는 분이 계신가요?”
“천무학관의 친구들을 만나러 왔소.”
“용봉지회 분들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아, 예···.”
밖에서 용봉지회란 말을 들으니까 왜 이렇게 부끄럽지!
나도 모르게 손발에 힘이 꾹 들어간 순간,
“으응, 그렇게 세게 안 잡아도 어디 안 가는데.”
“아, 응.”
“그럼 두 분, 이쪽으로.”
난 본의 아니게 우희와 애정을 과시하며 정연루의 계단을 올랐다.
용봉지회 녀석들은 전각 오 층에 모여 있었다.
“오, 두 사람! 여길세!”
열댓 명 남짓한 무리에서 한 녀석이 의자를 박차며 소리쳤다.
도저히 비슷한 나이 또래로는 여겨지지 않는, 산적 같은 생김새에 덩치 또한 산만한 녀석,
분명 이름이 황보결이랬지?
내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녀석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반갑네, 흑안룡! 우리 인사는 처음이지!”
“흑안···룡?”
“어제 두 눈을 어둠에 맡긴 채로 그만한 신위를 뽐내지 않았나. 으하하! 겸손해 하지 말게!”
철썩, 철썩!
“으억, 겸손이 아니라··· 잠깐만, 황보 형? 너무 아픈데?”
난 등짝을 얻어맞으며 생각했다.
검은 눈의 드래곤이라니, 벌칙게임이냐고!
차라리 화화공자가 괜찮게 들릴 정도라니···!
잠시 뒤, 간신히 착석을 마치자 본격적으로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화산의 홍예령이에요. 우리 음공 수업 같이 듣는데, 알아요?”
“아, 그 때 금라희 교관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셨던···.”
“기억하네요? 사실 전 그 전부터··· 으음, 어쨌든 반가워요.”
뭐지?
이 부자연스러운 끝맺음은?
얼어붙은 그녀의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향했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생긋 웃는 우희의 얼굴이 보였다.
“왜요, 휘 가가?”
“그냥 봤어. 예뻐서.”
“흐흣. 으응, 부끄러워어.”
여기저기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린 얼굴들이 보였다.
너무 애정행각이 심했나?
난 볼을 긁적이며 홍예령의 옆자리에 앉은 여인을 바라봤다.
“아! 종남의 양예서예요.”
“반갑습니다, 양 소저. 조가휘입니다. 그 옆의 분은···.”
“나는···.”
소림사 정훈.
무당파 장소천.
사천당가 당초홍.
······.
아, 많다, 많아.
언제 다 외우냐.
갑자기 많은 사람의 이름을 외우려니, 마치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막상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는 시청자들이 다 알려줘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지만.
“용봉지회에 참석한 첫 소감은 어떤가요, 소협?”
“아··· 백수린 소저.”
[똠얌꿈 : 아미파 백수린]채팅창을 확인하며 얼른 대답하자 그녀가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였다.
“과연 흑안룡이 특수한 심공을 익혀 때때로 눈을 반개한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음, 그러고 보니 반개룡도 잘 어울리는군, 친구!”
이상한 별호 그만해!
난 아직도 얼얼한 등짝을 움츠리며, 대화에 끼어든 황보결을 바라봤다.
녀석은 좋게 말하면 호쾌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주 귀찮은 친구였다.
“흑안룡, 어제 자네가 지광과 대결할 때 했던 말들 말이야.”
“무슨 말?”
“그거 말일세, 그거. 느-려.”
“읍··· 그게 왜?”
뿜을 뻔했던 찻물을 간신히 삼키며 묻자, 그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멋있더란 말이지. 내가 아주 감탄했어. 역시 잘생긴 친구들은 싸울 때도 멋있게 싸우는구나, 하고 말이야. 그런 대사들은 평소에 짬짬이 생각해두는 거겠지?”
“아니야!”
“아니야?”
“그게 정말 멋있었어? 네 취향이 특이한 거 아니고?”
대답은 백수린에게서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요, 소협. 저랑 오늘 오전 수업을 함께 들었던 동기들도 모두들 대련 중에 느려, 느려를 외치던 걸요?
“앗···.”
“혹시 모르셨나요?”
“공강일···이라서요.”
이런 끔찍한 일이!
질색하며 고개를 젓는 내게 황보결이 털이 숭숭 난 두 손으로 포권을 취했다.
“다른 것이 또 있다면 부디 알려주게!”
“다른 거?”
헛웃음을 터뜨리는 내 귓가로 슈퍼챗 알림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jyj5070님이 후원했습니다.] [초갓겜인증사님이 후원했습니다.] [Upton9님이 후원했습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되라지.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
“오오···!”
“느리구나, 쓰러지는 것조차. ”
“캬-. 자네의 멋이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어! 느리구나, 쓰러지는 것조차.”
“저희의 눈이 틀리지 않았네요, 흑안룡.”
뭐라는 거야···.
뭐야, 왜 다른 놈들까지 모여드는 건데.
희야, 너도 그렇게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마.
그날, 용봉지회를 시작으로 천무학관에 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중2병이라는 이름의, 피독주로도 몰아낼 수 없는 독이!
“이봐, 흑안. 나려타곤 동아리를 만들어보는 건 어때?”
···나 여기 왜 온 거지?
***
“어이구, 시원하다. 어이구.”
왜 나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모처럼의 휴일 아침부터 교관 숙소에 불려나와 당가기를 안마하는 내 심사는 잔뜩 꼬여 있었다.
“교관님, 요즘 너무 자주 부려먹으시는 거 아닌가요?”
“조교가 하는 일이, 음··· 다 그런 거 아니겠느냐.”
“하.하. 이제 엎드리시죠. 허리 한 번 봐드릴 테니.”
“너무 그러지 말거라. 아, 내가 잘 챙겨준다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시큰둥하니 답하자 막 침상에 엎드린 그가 날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내 녀석이 꽁 해가지고서는. 이놈아! 내가 교관이 아니고 맹주였어도 이럴 게야!”
“맹주님이시면 또 얘기가 다르죠.”
“권력의 개 같으니.”
“네? 아니, 누구보다도 권력을 남용하고 계신 분이···.”
“아이, 시끄럽고. 어제 용봉지회 꼬마들이랑 만나고 왔다고?”
또 말 돌리시네.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어요?”
“손녀한테 들었지.”
“손녀? 아- 설마 당초홍 소저가 교관님 손녀분이셨어요?”
“응.”
“귀여운 손녀분 놔두시고 왜 저한테 이런 걸 시키세요.”
내 힐난에도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껄껄 웃었다.
“그치? 내 손녀 귀엽지? 별호도 독봉(毒鳳) 아니냐.”
“예에.”
“어디 한 번 만나볼 테냐?”
“무슨···. 교관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정인이 있는 몸입니다.”
“학관에서 제일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놈이 지조 있는 척은.”
이 할아버지 아까부터 말씀이 좀 심하시네.
어쩌다 이렇게 허물없는 사이가 된 건지.
사부님이랑 죽이 잘 맞으실 거 같은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드려볼까?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추궁과혈을 이어가기를 한참, 가까스로 그를 만족시킨 나는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놈아, 이마의 땀이나 좀 닦고 가거라.”
“또 뭐 시키실까봐요.”
“저, 저 깐족거리기는. 가라. 가, 이 녀석아.”
“예, 갑니다.”
피식 웃으며 당가기의 방을 나서던 내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계단을 지나 맞은편 방에서 마침 벽려군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욕을 마친지 얼마 안 됐는지 머리칼이 촉촉히 젖은 그녀는, 뒤늦게 나를 발견하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조가휘 수련생. 교관 숙소에는 어쩐 일인가요?”
“당가기 교관님 추궁과혈을 좀 해드리려고 왔다가요···.”
“응- 그렇잖아도 맹주님께서 칭찬 많이 하셨어요.”
“아하하··· 네.”
“···아, 돌아가는 중이었죠? 제가 시간을 뺏었네요.”
“아닙니다. 그럼 이만.”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휴일의 무방비한 모습 때문일까.
괜히 어색한 기분에 서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헤어지려는데,
벌컥-.
당가기가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왜 복도에서들 이러고 있어?”
“아, 교관님.”
“당 선배님. 간밤에 평안하셨어요?”
“하여튼 예의가 발라.”
허리를 꾸벅 숙이는 벽려군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가, 문득 뜻밖의 제안을 했다.
“자네도 이 친구 추궁과혈 한 번 받아보는 게 어때?”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아주 일품이야. 맹주도 그러지 않았나, 꾸준히 받으면 무공증진에도 효험이 있을 거라고.”
벽려군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도 무인인지라, 무공증진이라는 말을 들으니 제법 구미가 당기는 듯 보였다.
곧 그녀의 얼굴에 민망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잠깐 부탁드려도 될까요, 조가휘 수련생?”
“아, 네.”
-그럼 그렇지, 우리 손녀가 싫을 리 없는데···. 연상 취향이었나?
느물거리는 전음과 함께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당가기의 얼굴이 방 안으로 쏙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