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63
겨식대법
첫 월례비무가 끝난 날, 꽤나 늦은 시각에 내 방을 찾은 손님이 있었으니.
똑똑.
-저예요, 가가.
“희야?”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침상에서 일어난 나는, 잽싸게 방문을 열고 그녀를 맞이했다.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뭘 그렇게 놀라요?”
“아까 헤어졌는데 또 왔으니까,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
“으응, 그냥. 가가랑 얘기 좀 더 하고 싶어서.”
대답을 마친 그녀가 주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가가, 다른 수련생들이 자꾸 보는데.”
“어, 들어와, 들어와.”
난 얼른 문에서 비켜나며 물었다.
“차라도 줄까?”
“으응, 좀 있음 잘 건데···.”
고개를 젓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람쥐이-! 언니, 보고 싶어서 나왔어?”
쪼르르 달려 나온 고든람쥐를 손바닥에 얹고, 그녀가 침상으로 향했다.
풀썩-.
“이리와요.”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 그녀를 따라 나 역시 침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뭐하고 있었어요?”
“그냥, 오늘 월례비무 때 본 것들 생각하고 있었지. 아, 아까 깜빡하고 못 물어봤는데 그 부채는 도대체 뭐였어?”
“아- 이거? 비무대 사이가 꽤 멀었는데 봤네요?”
“나 눈 좋은 거 알잖아.”
내 말에 빙긋 웃은 우희가 부채의 갓대를 슬며시 밀었다.
트득-.
몇 마디 부챗살 위로 빼곡히 그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도형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언지광은 혼이라도 나간 듯한 표정을 지은 걸까.
“뚫어지겠어요.”
“그냥 평범한 부채로 보이는데.”
“제갈세가의 진식에 가가께서 알려준 수학지식들을 접목해서 만든 부채예요. 지금은 작동을 멈춘 상태지만, 제가 짠 수식을 따라 진기를 주입하면 효과가 발동하죠.”
“다른 부분들에도 비슷한 게 그려져 있는 거야?”
내 물음에 우희가 부채의 나머지 부분을 활짝 펼쳤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그림이 그려진 부분은 전체 면적의 1/4에 불과했다.
“여기까지가 폐관 중에 짠 진식이에요. 아직 세 가지밖에 없지만 앞으로 아홉 가지를 더 채울 생각이에요.”
“그것들이 전부 다른 효과를 지닌 거야?”
“응.”
“오늘 사용한 건 효과가 뭔데?”
“무(無)를 형상화 해봤어요.”
없을 무.
존재와 부재.
너무나 추상적인 개념이라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겪어볼 마음은 전혀 없지만.
“다음 그림은 뭐야?”
“다음 거? 흐흣, 그건 비밀.”
“나한테도?”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요.”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개구쟁이다.
도대체 무슨 장난을 치려고.
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마 가장자리에 난 잔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채에 이름은 붙였어?”
“있었는데, 지금 막 사라졌어. 지어줘요.”
“음··· 백우선(白尤扇)은 어때?”
백봉과 우희에서 각각 한 자씩.
새하얗고 빼어나다는 뜻의 백우.
지극히 평범한 이름이었으나, 내가 붙여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지 그녀의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좋아.”
부채를 품안에 갈무리한 그녀가 문득 책상 한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건 뭐예요? 어제까진 없었는데.”
“아, 이번에 집에서 도착한 표물. 그··· 설 소저랑 약속한.”
“아, 그 제취제?”
“응. 오늘 시제품이 와서. 그나저나 효과가 있어야 되는데.”
데오드란트 시제품이 든 상자를 가지러 책상으로 향했다.
그 사이, 채팅창에선 오늘도 설이나의 체취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펭귄목살 : 약빈냥이 어떡해ㅋㅋㅋㅋ] [멍보단냐옹 : 시큼이 냄새 없애지 마ㅡㅡ 자기만 안 맡으면 되지 왜 맡고 싶은 사람까지 못 맡게 하냐고!] [넥크로드 : 혈도를 제어하는 방식으로 아포크린샘 있는 곳만 땀이 나지 않게 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무협지 보면 귀식대법으로 호흡도 제어하던데 겨드랑이랑 발바닥 땀샘만 제어 못함?] [저리로 : 시청자가 은거기인 ㅋㅋ] [지나갈낙타 : 겨식대법ㄷㄷ] [Upton9 : 헉헉 설이나쟝 겨드랑이 킁카킁카 햝짝햝짝 후루루루] [‘뽀미’님이 ‘Upton9’님을 강제 퇴장시켰습니다.] [뽀미 : 뇌절이 심함]설이나 팬들이 유독 기인이 많은 듯한 건 기분 탓일까?
그나저나 귀식대법이라.
난 어느 시청자의 의견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귀식대법은 기척차단과 생존에 초점이 맞춰진 무공으로, 장시간 잠입 임무나 혹한, 굶주림 등 극한상황에서 신체 활동을 강제로 억제하는 수법을 뜻한다.
그런데 이걸 땀샘에만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
한쪽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가가?”
“어? 아, 미안.”
“또 역대 구독신공의 계승자들과 교감 중이에요?”
“응.”
그것은 언젠가 한국어를 마스터 할 우희와 약빈이 방송 멘트에 의구심을 품지 못하도록 준비한 변명.
그렇게 시청자들은 졸지에 구독신공에 깃든 영혼들이 되고 말았다.
“알면 알수록 참 신기한 무공 같아요.”
“난 네 부채가 더 신기해. 내게 선물해준 팔찌나 간이진도 그렇고. 어떻게 그런 기물들을 혼자서 뚝딱 만들 수 있는지.”
“금칠하지 말아요.”
“아니, 정말로. 그러고 보니까 신산심적권도 네가 만들었··· 앗!”
머리에 벼락이 쳤다.
그래. 우희가 있었지?
희대의 천재를 코앞에 두고 뭘 혼자 고민하고 있던 건지.
“희야, 이게 가능할까?”
난 시청자가 제공한 겨식대법의 아이디어와 그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내 얘기를 전부 들은 우희는 피식 웃더니 입가를 가렸다.
“흣. 아, 미안해요, 가가. 근데 종종 느끼는 거지만 구독신공의 영(靈)들은 뭔가··· 소소하달까? 엉뚱? 그렇네요?”
“어, 좀 그래.”
“귀식대법이라면 우리 가문에도 괜찮은 게 있어요.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어서 그녀가 덧붙인 말은,
“그런데 신체 일부에 귀식대법을 적용하더라도 몸에서 발생하는 열은 그대로이니, 아마 다른 부위에서 흐르는 땀은 더 늘어날 거예요.”
“응.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일단 된다는 거잖아.
새롭게 펼쳐진 활로에 긍정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를 본 우희의 얼굴에 순간 새초롬한 장난기가 떠올랐다.
“걜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 안 해.”
“야.”
“흐흣, 농이에요. 해줄게. 대신 한 눈 팔면 안 돼. 설 소저에게 전수할 때는 꼭 내가 만든 거라고 밝히고.”
“당연하지.”
그 순간 우희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말로만?”
“···그럼?”
“행동으로 가가의 순수를 증명해 봐요.”
쪽-.
잠시 맞붙었던 입술을 떼며 물었다.
“됐어?”
“다시.”
“어?”
“다-시.”
쪽-.
“다시.”
“몇 번이나 시킬 건데.”
“제대로 할 때까, 으응-. 흐흣.”
깊숙이 포개진 입술을 깨물며 눈웃음을 지은 우희가, 내 목에 두 팔을 감으며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난 그녀와의 행위에 집중할 수 없었다.
흘긋.
내 두 눈이 옷장으로 향했다.
약빈이는 괜찮으려나?
설마 한 번 기숙사에 돌아갔던 우희가 되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그 탓에 안심하고 비무에서 승리한 포상을 누리던 약빈이만 된서리를 맞았다.
우희의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은신을 펼치던 그녀를 떠올리자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다.
통금시간도 아니니 차라리 당당히 있었으면 될 것을, 괜히 평소의 습관 때문에 제 발 저리고 만 것이리라.
이제 슬슬 소피도 마려울 시간인데.
“가가, 지금 딴 생각해?”
“그럴 리가.”
옷장에서 시선을 거두며 우희의 목덜미를 쪼고 있으려니,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데오드란트 샘플이 든 상자를 뒤적이는 고운 손이 보였다.
“넌 왜 딴 짓해.”
“난 누구랑 다르게 일편단심이라? 근데 서신이 들어 있네요?”
“아, 그거.”
“연이 언니가 보낸 거네?”
제갈연은 우희와는 친사촌지간으로, 그녀가 폐관에 들어간 사이 조가장에서 비누 연구의 일익을 맡은 여인이었다.
올해 나이 서른둘로 사차원 괴짜에 지독한 연구벌레인 그녀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읽어도 돼?”
“응, 당연하지.”
그러자 내 귓가에 입술을 맞댄 우희가 편지의 내용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달콤한 목소리로.
“일단 이거 먼저 사용하고 있어. 그런데 좀 더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기 위해선 대상의···.”
“읏.”
“흐흣, 가만히 좀 있어봐아.”
통금시간이 될 때까지 그녀의 낭독은 계속됐다.
***
“···그래서 적합한 물건을 만들려면 연구원이 직접 설 소저의 체취를 맡아볼 필요가 있다고 하네요.”
희희낙락하여 데오드란트 시제품의 상자를 열던 설이나가 내 말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내 얘기를 한 건···.”
“결단코 설 소저의 신상에 대해선 입도 뻥긋 안 했어요.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부하셔도···.”
“아니다, 하겠다. 그런데 혹시 그 자가 사내인 것은 아니겠지?”
“당연하죠. 제갈세가의 여협이세요.”
“그렇다면 뭐···.”
난 여전히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녀에게 한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최대한 체취가 짙어야 한다고 하니 잘 준비해두시고요.”
“준비···? 혹시 영영에게 뭔가를 들은 건···.”
아차.
하영영에게 제모를 귀띔해준 게 나라는 사실은 비밀이지.
“요즘 워낙 증세가 많이 호전되어서 하는 이야기예요. 저번에 소저께서 그러셨잖아요. 하영영 소저가 어떤 비법을 알려줬다고.”
“아, 그랬지.”
“아마 제가 연락하면 한 달 내로 직접 오실 거예요. 서신을 보내는 날 미리 알려드릴 테니, 적당히 시기를 조절하시면 될 거 같아요.”
“그럼 당분간은 손질을··· 으흠! 아, 알겠다, 준비해두겠다.”
헛기침과 함께 상자를 닫은 그녀가 황급히 수련실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씻으러 가보겠다.”
“네, 그러세요.”
“이걸 사용해보려면 평소보다 좀 더 시간이 걸릴 텐데···. 기다리는 건 무리겠지? 차라리 오늘도 식사를 함께 하는 건···.”
“아,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다른 친구들과 약속이.”
“백봉과 옥당화겠지?”
그녀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대신 다음에는 날 위해서도 시간을 내어줘야 한다. 저번에 그대를 그리 남기고 떠나 마음이 불편하다.”
“네. 그럼 다음 휴일에는 시간 비워둘게요.”
“응! 그럼 먼저 가보겠다.”
그녀는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땀 냄새가 신경 쓰였는지, 굳이 나보다 한 발 앞서 수련실을 나섰다.
나 역시 뒤따라 주섬주섬 떠낼 채비를 서둘렀다.
끼익-.
조금 전 설이나가 떠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던 그 때,
“앗! 흑안룡 소협?”
“팽 소저?”
놀란 듯 토끼 눈을 깜빡이는 소녀, 팽소혜를 향해 난 가볍게 포권했다.
“수련하러 가시나 봐요.”
“아하하··· 네.”
“그런데 그건?”
내 두 눈이 그녀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검, 그리고 도.
가뜩이나 작은 키에 병장기를 두 자루나 찬 모습을 보니, 의식하지 않아도 시선이 갔다.
‘아혜. 넌 검보다 도가 어울려.’
팽조영이 한 그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루 새 눈에 띄게 수척해진 열다섯 소녀의 얼굴을 보자 어쩐지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소저, 어제 못다한 승부를 내볼까요?”
“네? 아, 전 아직···.”
“수련 상대,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
소녀의 눈에 갈등이 어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아으- 아니, 아니요. 이제 다 마치고 가시려던 거 같은데, 괜찮아요.”
“이왕 땀 난 김에 좀 더 흘리죠, 뭐.”
“아··· 그럼 감사히···. 이쪽 수련실로 들어가면 될까요?”
“아, 아니요. 여긴 조금··· 환기 좀 더 시키려구요.”
“아하.”
난 고개를 끄덕이는 팽소혜를 옆 수련실로 이끌었다.
팽소혜
팽소혜의 허리에 걸린 두 자루 병기가 눈에 들어왔다.
검, 그리고 도.
무림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무기.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과거 사부님께서도 한 차례 난색을 표하신 바 있다.
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제작목적에 따라 생활도구라면 도, 전투용 무기라면 검으로 분류하였으나 이제는 그것도 옛말.
검집의 유무, 외날과 양날 여부 등 세월에 따라 변화해온 도검의 정의는 더 이상 무엇이 정확하다가 말하기 어려울 만큼 혼용되고 있다고.
그러니 그냥 베는 게 도, 베고 찌르고 이도 저도 다 되는 것이 검이라고 대충 받아들이라는 게 사부님의 말씀되시겠다.
추가로 이때 ‘벤다’의 의미는 자르다기보다 휘두르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도신이 두텁고 날이 뭉툭하여 베는 것보다 파괴에 초점이 맞춰진 팽소혜의 병기가 도로 분류될 수 있는 이유다.
이처럼 병장기의 형태와 사용법이 다르다 보니 그에 어울리는 무공 역시 다른 것이 당연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팽소혜가 펼치는 검법은 어딘가 어색했다.
마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럼 시작할게요, 소협.”
“네. 아무 때나 오세요.”
“후···.”
검을 들어 올린 그녀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럴 듯한 기수식, 허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쉬익-!
쉭!
그녀가 펼치는 초식의 대부분은 휘두르기에 편중되어 있었다.
베기와 찌르기의 변화가 자유로운 ‘검법’의 묘리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아쉬운 움직임.
반면, 그녀의 도법은 대단했다.
한 때 언지광과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한 것이 실례라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하-앗!”
부웅-!
“합!”
붕-.
거대한 도가 공기를 찢어발겼다.
그 조그만 체구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자신의 몸집만한 도를 깃털처럼 가볍게 다루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타고난 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난 그제야 그녀의 오빠가 했단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혜, 넌 검보다 도가 어울려.’
지난 월례비무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난 비무 때 소저께서 도법을 펼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겠네요. 위력에 감탄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검법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어, 음···.”
“내키지 않으면 굳이 답하실 필요 없어요. 그저 도움이 될까 해서 여쭌 것이니.”
“죄송합니다. 가문과 연관된 이야기여서.”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캐묻는 것은 실례였다.
친해지면 언젠가 들을 날이 오겠지.
그때도 말 안 해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잠자코 물러서는 순간,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당장 드릴 게 없는데 이거라도 드실래요?”
···말린 과일?
“혹시 검후 선배님께 검술 지도를 받으셨다는 게···.”
“아, 전데. 어떻게 아셨어요?”
“교관님 숙소에서 같은 걸 봤거든요.”
“검후 교관님 숙소에 가셨다구요?”
호기심이 깃드는 눈을 보며 다급히 변명했다.
“아, 제가 추궁과혈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요즘 교관님들에게 불려 다니거든요.”
“······.”
“정말이에요.”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을 거두지 않는 그녀.
이게 다 화화공자라는 별호가 불러온 업보였다.
난 헛기침과 함께 말을 돌렸다.
“크흠, 혹시 괜찮으시면 앞으로도 저랑 이렇게 함께 수련하시겠어요?”
“앗, 정말요? 전 좋아요! 그런데 소협께 폐가 되는 건 아닌지···.”
“팽가의 절학들을 맛볼 수 있다면 저야말로 영광이죠.”
그렇게 난 설이나에 이어 또 다른 비무친구를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보름가량이 지나자 우리는 서로를 가휘 오라버니, 소혜라고 부를 만큼 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술실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 상태였다.
그녀가 자신이 검에 집착하는 이유를 들려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검술은 할아버지께 배웠어요.”
“할아버지?”
“네. 그런데 전부 배우기 전에···.”
그녀의 아련한 눈빛에 내 목소리도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아··· 돌아가신 거야?”
“앗, 아뇨. 살아계신데.”
“그럼?”
“그게··· 말년에 심마에 드셔서.”
“아··· 그렇구나.”
보통 무가에서 심마(心魔)라 함은 무공 수련 중에 발생하는 마음의 병을 일컫는 말로, 이는 자칫 잘못했다간 내공의 폭주, 즉 주화입마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 ‘말년’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것은 치매를 곱게 돌려 말하는 은어이기도 했으니까.
난 어딘지 곤란한 그녀의 눈빛에서 그런 사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이 사실을 숨겨왔던 이유도.
하긴, 가문 내에서도 쉬쉬하는 일을 외부인인 내게 밝히긴 어려웠겠지.
“가끔 심마에서 벗어나실 때마다 한 소절씩 읊으시는 구결을 모아서···.”
“진짜? 왜 그렇게 위험하게···.”
“저희 오라버니도 같은 말을 하셨어요.”
“···비급은?”
“원래 이 무공은 팽가로 시집오신 증조모님께서 서고를 정리하다 발견하셨다고 들었어요. 당시 이름난 검의 달인이셨던 증조모님께선 한눈에 검법의 위력을 알아보시고 할아버지께도 익히길 권하셨대요. 그런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에는 검술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어서요. 무공도 전부 도법이고.”
“팽가 정도면 경시가 아니고 자부심이라 해야 옳겠지.”
“아하하, 맞아요. 자부심. 열 살이면 한창 가문의 무공에 자부심이 넘칠 나이잖아요? 할아버지도 그러셨대요. 팽가 사람이 무슨 검법이냐고, 익힐 거면 혼자 익히시라고 학을 떼셨대요.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증조모님께서는 병마로 세상을 뜨셨어요.”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셨나봐. 결국 검술을 익혀서 손녀에게까지 전해주신 걸 보면.”
“맞아요. 날이 갈수록 커져가는 그리움에 할아버지는 뒤늦게 증조모님께서 익히셨던 검법을 수소문하셨대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증조모님께서 돌아가시기 이전 해에 팽가의 서각에 큰 화재가 있었다는 걸.”
“설마···.”
“다른 무공들은 괜찮았어요. 가전무공의 경우 비급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니까. 그런데 증조모님께서 익히셨던 검법을 익힌 사람은···.”
“없었구나.”
“한 사람도요. 결국 그 검법은 할아버지 기억 속에만 남게 된 거죠. 증조모님이 펼치던 모습만 어렴풋하게.”
얄궂은 일이었다.
유일한 검법의 전승자와 비급이 동시에 사라지다니.
응? 잠깐만. 이거 어디서 들어본 스토리인데···?
“얼마나 미련이 남았겠어요. 세가 어른들 중에는 고절한 무공을 익히신 할아버지께서 심마에 드신 게 그것 때문이라는 분들도 계세요.”
“······.”
“저는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이 검법을 완성해서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래야 할아버지의 미련도 풀고, 저도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테니까요.”
당찬 포부와 함께 쑥스럽게 미소 짓는 팽소혜.
그러나 난 그녀를 격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머리를 덮친 강렬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팽가? 화재? 검법?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들이 하나로 합쳐진 순간,
“소혜야, 혹시 그 검법의 이름이···?”
“혼원무허검이라고 들었어요.”
그 말에 퍼뜩, 과거 어느 날 스승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혼원무허검이란 검법의 초식들 중 하나이니라.’
‘오래 전 팽가에 큰 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지.’
‘내 스승께선 화재가 있기 2년 전에 이미 팽가를 다녀오셨다.’
‘우스운 일이 아니냐. 정작 팽가 사람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검법인데 말이야.’
‘이 또한 조만간 네게 전수해주마.’
“아하하···.”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비급 카테고리 속 ‘혼원무허검’이라 이름 붙여진 비공개 영상이 날 웃게 만들었다.
그래. 이미 기억하는 이도 없는 무공,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오라버니?”
난 놀라서 두 눈을 깜빡이는 소혜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소혜야, 검수(劍手)가 하고 싶어?”
***
그와 단 둘이 하는 수련의 효과는 놀라웠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실력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그동안은 타문파의 수련 방식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듯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이미 실전된 비급이라면 내가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제안을 받아들이길 천만다행이었다.
화화공자의 역량은 기대이상, 아니 상상이상이었다.
진주언가의 후계자를 눈을 감은 채 이겼다는 소문을 접했을 때도 그저 부풀어진 무용담 정도로 생각했건만, 정도무림 최고의 기재 백봉이 점찍은 데는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까.
“소혜야, 거기선 팔꿈치를 이렇게 비틀어야지.”
“이렇게?”
“아니, 반푼 정도만 더. 이렇게.”
그가 직접 어깨와 손목을 잡고 자세를 교정해주자, 막혀 있던 진기가 한층 수월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이미 완성된 검결을 펼치는 것처럼.
비록 그와 함께 만들어가는 검공이 그 옛날 할아버지께서 보았던 혼원무허검에 얼마나 가까울지는 미지수지만, 그녀 혼자 수련할 때보다 아득히 높은 완성도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혜야, 손목에서 조금만 힘을 덜어보자. 응, 딱 그 정도.”
지도를 받으면서 깨달은 또 다른 하나는 그의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일부러 초식을 느린 속도로 전개한 것도 아니건만.
손가락과 발끝의 미세한 움직임부터 그녀가 지닌 작은 버릇들까지, 그는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기는 일이 없었다.
아니, 그것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었다.
한창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만 보아도 마음이 간질거릴 나이, 소녀의 마음에 자그마한 연심이 싹트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휘 오라버니는 내게 왜 이렇게 친절할까?
모두가, 심지어 검술 수업 교관인 녹정검마저 그녀에게 도를 쥐라고 할 때, 홀로 검을 외친 남자.
따지고 보면 남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위해 귀찮은 내색 한 번 없이 고생을 마다 않는 남자.
잠깐의 고민 끝에 팽소혜가 내린 결론은,
혹시 이 남자, 나한테 관심 있나?
그의 곁에 백옥이화라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달리 별호가 화화공자이겠는가?
꽃은 여럿일수록 좋다는 못된 사내들 중 하나일지도.
그런데 정말 오라버니가 날 좋아하면 어쩌지?
달콤한 망상에 빠진 순간, 팽소혜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맛볼 수 있었다.
두 여인으로도 부족해서 자신에게까지 관심을 보이는 청년에 대한 괘씸함.
다른 하나는 어쩌면 자신의 매력이 백봉이나 옥당화에 버금갈지도 모른다는 뿌듯함!
응. 내가 어디 가서 꿀리는 외모는 아니니까.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귀엽다는 얘기도 자주 듣잖아?
그렇잖아도 여자 수련생들 사이엔, 백봉이화 다음으로 화화공자의 방에 초대될 여인이 누구일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본인의 몫이니, 그 후보 중 하나가 되더라도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리라.
팽소혜는 힐끔 고개를 들어 화화공자의 얼굴을 몰래 훔쳐봤다.
“아···.”
그녀의 눈빛이 잠시 몽롱해졌다.
응. 나쁘지 않아.
그렇게 청년의 품안에서 순진한 열다섯 소녀의 얼굴이 점차 붉게 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