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69
집으로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세상에는 비급이 참 많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나름 실력에 자신이 있는 무인이 어느 날 자신의 깨달음을 글로 남긴다면 그것이 곧 심득이요, 비급이었다.
더불어 세상에는 목숨을 잃는 무인도 참 많다.
당장 내일이라도 고혼이 될지 모르는 것이 소위 칼밥을 먹는 인생들이다.
세력에 속해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
오히려 이 경우에는 아무런 은원이 없는 상대방과도 칼부림을 벌이기 일쑤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세상에는 주인 잃은 비급들이 참 많다.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기 듯 무인은 죽어서 비급을 남긴다.
그렇다면 그 비급들은 현재 어디에 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선 비급의 흐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인 또는 세력이 지닌 비급은 보통 사망, 멸문과 동시에 원수의 손아귀로 넘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주인 잃은 비급의 설움이 시작된다.
최초는 연구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비급에 적힌 글귀 하나하나가 낱낱이 분해되어 ‘파훼법’이라 불리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무공이 만들어진다.
어디 그 뿐인가.
일부 유용하면서도 범용성이 높은 수법들은 승자의 무공을 보강, 강화하는 디딤돌로 사용된다.
그렇게 쓸모가 다 한 뒤에는 승자의 서고에 처박히는 것이다.
허나 이마저도 가치를 인정받은 비급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면 진즉 저잣거리에 몇 푼도 안 되는 헐값에 팔려나가거나, 불쏘시개로 전락한다.
한 차례 패배한 무공이라는 낙인은 이처럼 무섭다.
하지만 그것도 전 중원이 무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황실비고!
마교의 광명각!
그리고 무림맹의 천무비고!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루 듯 세상천지의 모든 비급들이 모여드는 이곳에는, 비록 패배했으나 한 시대를 풍미한 절세무공들이 자신의 가치를 재증명 해줄 주인이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천무학관이란 명칭 역시 천무비고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수련생 누구에게나 개방되는 본관 내 서각과는 달리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장소이다.
남궁현의 천무전 우승 상품 중 하나는 바로 그 천무비고에 출입하여 원하는 비급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권리였다.
거기다 어디 가서 쉽게 못 구하는 상등품의 무기 한 자루와 영단까지!
남궁현 뿐 아니라 모든 수련생 앞에서 이러한 보상의 내역을 밝히는 것은, 수련생들의 의욕을 고취시키려는 무림맹 측의 의도이리라.
유치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부러우면 몇 개 훔쳐주랴?
또 언제 오신거람?
내 일도 아닌데 너무 경청한 걸까, 어디선가 들려온 사부님의 전음에 기겁해서 고개를 저었다.
한다면 정말 하시는 분이라 무섭다.
당장 내가 지닌 것을 소화하는 것도 벅찬데, 이 이상은 욕심이다.
그저 현아가 나오면 천무비고 안에 어떤 무공들이 있는지, 고를 시간은 얼마나 주는지 따위나 물어봐야지.
혹시 알아?
다음에 들어가는 건 내가 될지.
물론 그 전에 우희라는 높은 벽을 넘어야겠지만. 언제까지 그녀의 그림자에 가려 있고 싶지는 않다.
시청자들 중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비판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으레 수컷은 자신의 여자 앞에서 힘자랑을 하고 싶은 법이니까.
천무비고 들어가기만 해봐.
겨우 한 권? 어림도 없지.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니랄까봐, 비고 안의 무공들을 깡그리 녹화해버리는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단상에서 내려온 남궁현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강은의 모습이 포착됐다.
“현, 비고에 들어가거든 이 목록에 적힌 책들이 있는지 한 번 살펴봐 줄 수 있겠어?”
“이게 뭔데?”
“수십 년 전에 사라진 가전무공을 찾고 있어. 선대부터 백방으로 수소문 해봤지만 이제 남은 건 삼대비고 뿐이야. 물론 가져다 달란 뻔뻔한 이야기는 아니니 부담 갖지는 말고.”
난 카메라에 비친 삼십여 개의 목록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유실된 황궁무공이라.
그의 말이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말?
애초에 강은과 무진 중 누가 황자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오래 살고 싶다면 황실과 엮이지 말 것.
부모님과 스승님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황실 혹은 그림자 호위 가문의 실전된 비급?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벌써부터 불길한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는가. 괜한 관심 보이지 말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오는 강은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강은, 방학 동안에는 학관에서 지내?”
“응. 나름 내 무공에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이번 천무전 결과 봤잖아? 본선에도 들지 못하는 거. 집을 오가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남아서 단련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바늘 가는 데 실이 빠지겠는가, 그의 곁에 있던 무진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다.”
“존명 너는?”
“나도 집에 가봤자 부모님이 잡일이나 시킬 게 뻔한데, 그냥 여기 있으련다!”
시큰둥하게 답한 녀석은 이내 내게만 말해준다는 듯 허리를 숙여 속닥거렸다.
“내가 금소저를 두고 어디 가겠어. 방학이면 함께 있는 시간도 많으니까··· 으흐흐, 누나 죽었다.”
“어휴···.”
“너야말로 벽 교관님은 어떻게 하고 이화만 데려가냐? 뭐, 현지 정인이다, 이거야?”
“아이, 비켜, 인마. 무슨 소리 하나 했더니.”
벽려군이 방학 내내 학관에 머물 것이란 소식은 이미 한참 전에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 알고 있었다.
수개월 전 함정에 빠진 그녀를 구해내는 과정에서 얼핏 들었듯이, 스승의 원수를 찾는 일을 계속하며 남는 시간에는 기숙사에 남는 학생들의 수련을 도우려는 듯했다.
아직도 독에 당해 생사를 헤매던 그녀의 모습이 선명한 나로선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더 이상의 참견은 오지랖이다.
이제 강호초출인 내가 강호에 위명이 자자한 검후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통할 지도 모르겠고.
그저 빌려준 피독주의 회수를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2학기에는 외박 제한이 풀릴 지도 모른다고 하니, 그 때는 좀 따라다니며 지켜볼 생각이다.
강은과 무진, 존명 외에도 학관에 남는 수련생들은 수두룩했다.
어찌 보면 옆동네라고 할 수 있는 호북성의 우리 집도 여기서 무려 천오백 리 길이 넘는다.
말을 혹사시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하루 이동거리가 백에서 백오십 리.
물론 마을이 오십 리, 백 리마다 딱딱 맞춰 있을 리도 없으니, 그것까지 고려하면 족히 이십여 일은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 된다.
가면 끝인가?
다시 와야지.
돌아올 때 부지런히 경공을 펼친다고 해도 열흘은 걸릴 테니, 거진 방학 기간의 절반인 한 달을 길바닥에서 보내는 셈이다.
이러니까 다들 집에 안 돌아가려고 하지.
듣기로 일부 수련생들은 미리 가문의 어른이나 스승께 연락을 보내 무림맹 근처로 호출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덕분에 학기가 마무리 된 뒤에도 정주시 상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학원에 픽업하러 가는 부모도 아니고, 가히 현대의 사교육 열풍을 방불케 하는 현장이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을 천무학관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
학관을 떠나려는 조가장 일행 앞에 뜻밖의 방문객이 나타난 것은 이튿날 아침,
“희야와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방학 동안 실력을 기르고 오겠습니다.”
남궁세가를 통솔해온 장로 앞에서 포권을 하는 남궁현.
우희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에 생쥐가 되는 녀석이 말은 번지르르하다.
왜 소희 보러 간다고 말을 못해!
피식 웃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가휘구나? 얘긴 많이 들었어.”
“수아, 처음 보는 소협께 예의를 지키렴.”
“언니는, 동생 친구면 동생이지.”
“아, 두 분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자, 아리따운 두 여인 중 부드러운 눈매의 여인이 날 향해 포권했다.
“여동생의 무례를 사과드려요, 소협. 현아의 둘째 누이인 남궁란이에요.”
“난 남궁수아, 셋째.”
“반갑습니다, 두 분. 조가휘입니다. 진즉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떠나는 날에야 뵙게 되네요.”
학관 제일의 미소년인 남궁현의 누나들이니만큼 두 사람 모두 미모가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한 건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 잘생겼다? 별호가 화화공자라며?”
“수아!”
“아, 알았어. 그만할게. 얼굴이 관옥 같으신 조 소협, 언제 한 번 남궁세가에도 꼭 들러주신다면 이 소녀가 소원이 없겠어요.”
“얘가 진짜···.”
동생의 빈정거림에 눈을 치켜뜬 남궁란이 이내 여러 사람들 앞임을 깨닫곤 얼른 표정을 풀었다.
“언제든 환영할게요, 조 소협.”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고 꼭 한 번 들르겠습니다.”
위로 누나만 넷이라고 했지.
현이가 소희에게 껌뻑 죽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허나 남궁현의 합류는 이미 며칠 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사항이다.
정말 의외의 인물은 그 다음에 나타났다.
“화화공··· 아니, 조 소협.”
“아, 설 소저. 방학 잘 보내시길··· 근데 어디 가시나봐요?”
난 내 앞에 선 설이나와 하영영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격식을 갖춘 외출복에 바리바리 싸든 보따리 안쪽으로 보이는 옷가지들.
그녀의 고향인 북해는 이곳에서 너무나 먼 곳이라 방학 동안 갈 엄두도 못 낸다고 했거늘, 지금 둘의 복장은 마치 여행이라도 가는 차림이 아닌가.
내 시선을 눈치 챈 그녀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부탁일 줄은 알지만 그대의 가문이 학관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들었다. 괜찮다면 나와 영영이 방학 동안 신세를 질 수 있을까?”
“엑? 아가씨? 분명 저한테는···”
그녀의 시비인 하영영이 금시초문이라며 괴성을 질렀지만, 설이나는 깔끔히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저번에 만난 제갈연 여협도 그랬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여협께서?”
“그렇다. 아! 물론 묵는 값은 충분히 치르겠다!”
설이나가 품에서 꺼낸 묵직한 전낭을 흔들어보였다.
난 흘끔 우희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서운함을 표시한 이후 나름 친하게 지내던 여사친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
하지만 대놓고 거절하기엔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일단 보는 눈이 한 둘이 아니다보니, 설이나와 북해빙궁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데오드란트를 개발 중인 제갈연까지 들먹이는 것을 보니 명분도 충분하고.
더구나 부모님께서 지켜보시는 자리다.
우리 집이 보통의 민가도 아니고, 여인 둘의 숙박 요청도 들어주지 못해서야 조가장의 명예에 흠집이 난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보다못한 우희가 앞으로 나섰다.
“괜찮지 않나요, 가가? 저번에 얘기한 무공도 설 소저께 전수해야 하니까요.”
“괜찮아?”
조그맣게 속삭이자 그녀가 귀엽게 웃어보였다.
“나 그렇게 속 안 좁아. 아니면 설 소저랑 못된 거 할 생각이에요?”
“설마.”
“그럼 됐네.”
옆구리를 쿡 찌른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우리 부모님 들으라는 듯이.
“그렇잖아도 설 소저께선 중원이 익숙지 않은데 동기의 부탁을 어떻게 모질게 외면하겠어요. 물론 장주님 내외의 허락이 먼저겠지만요.”
“백봉···.”
감동한 표정의 설이나에 이어, 상황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흐뭇한 얼굴로 앞으로 나서셨다.
“희야 말이 옳다. 장원에 빈 방이 몇 개인데 아들의 친구 하나 초대하지 못하겠느냐. 대가는 필요 없으니 두 분 소저께서도 마음 편히 머물다 가시오.”
“감사를 표한다. 아니, 합니다. 영영, 뭐해.”
“윽, 감사합니다.”
설이나가 하영영의 뒤통수를 잡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상상도 못한 두 사람을 더해 일행은 조가장을 향한 여행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