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72
어쩔 수 없었어요
손녀와 제자를 만나기 위해 천무학관에 다녀온 뒤로, 신투는 종종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불쾌함을 느꼈다.
이 불쾌함의 원인이 뭘까.
천무전이 열린 날 인피면구를 쓴 괴한을 놓친 것 때문에?
아니지, 아니야.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것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갑작스런 변수에 당황하기로는 상대방이 더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의 신경을 이토록 거슬리게 만드는가.
신투는 그저께 밤이 되어서야 그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도가 다르다.
간만에 사제 간 야행을 나가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기꾼의 창고를 터는 과정에서 가휘가 보여준 은신은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천무전 당일 인피면구 사내를 미행하는 도중 느꼈던 미세한 기운과는 분명 달랐다.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은퇴한 지 오래되어 감이 무뎌진 걸까? 아니지, 늙어서 죽을 때가 된 게야.
어느덧 팔십을 넘긴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자조적으로 웃던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 자신도 사람인 이상 착각쯤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고 넘기기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왜 천무학관을 떠나 조가장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간혹 그 기운이 느껴지는가.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신투는 즉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고 모든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심지어 무공이라고는 일초 반식도 모르는 가휘의 모친과 자신의 손녀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썩어도 준치라지 않는가.
그가 작정하고 펼친 감시를 간파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관찰 반 시진 만에 마침내 찾아냈다.
기억 속의 꺼림칙한 기운과 가장 유사한 기운을 지닌 이를.
“음··· 위치만 보면 곤궁(坤宮)인데 토(土)는 식상하고. 다른 걸 섞어볼까?”
너였느냐.
담벼락 앞에 쪼그려 앉아 진법 설치에 여념이 없는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감탄이 가득했다.
천하에 다시없을 기재임은 알았지만 설마 자신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성장했을 줄이야.
당장 느껴지는 기도로 보아 소문만 무성한 섭선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나, 진법 역시 그녀가 지닌 실력인 것을.
그나저나 평소의 영특함을 생각하면 그날의 대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를 유추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헌데도 여태껏 아무 말도 없다는 것은 당분간은 지켜보겠다는 뜻이렸다?
아니면 그저 손 안의 패가 무르익길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상대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신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제자를 배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서로에게 칼끝을 겨눌 일은 없을 것이기에.
다만, 손녀딸의 사랑을 응원하는 입장에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약빈의 자질도 결코 모자라지 않건만, 우희라는 희대의 천재 앞에선 빛이 바라고 마는 것이다.
여기선 할아비로서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겠구나.
결심을 내린 그의 얼굴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
“빈아와 둘이 여행을 가시겠다고요?”
“장주와는 이미 이야기를 마쳤다. 너희들 정도의 실력이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원을 지키는 데 문제는 없을 게다. 그리고 희아가 만든 진법도 있으니 말이다.”
통보나 다름없는 사부님 말씀에 난 황급히 전음을 날렸다.
-이렇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빈아와 내가 조가장에 의탁한지도 6년이 넘었다. 내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죽기 전에 손녀와 추억을 쌓고 싶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말릴 수가 없잖아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방학이 끝날 때까진 돌아오마. 내가 없더라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빈아에게 뒤쳐지기 싫다면 말이다.
-다녀올게, 휘 랑.
작별인사를 건네는 약빈이의 눈빛마저 왠지 예사롭지 않다.
그렇게 수수께끼만을 남긴 채, 두 조손은 6년 전 내 앞에 나타났던 그날처럼 홀연히 길을 떠났다.
뭐지, 숨겨두신 영약이라도 먹이려고 하시나.
방학이 조금 쓸쓸해질 것 같다.
“그나저나 정보상은 혼자 찾아봐야겠네.”
요 며칠 상단 일을 도우며 느낀 게 많다.
난 카메라의 기능 덕에 사기꾼의 수법을 빠른 시간 안에 찾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오로지 상인의 노련함으로 한 발 먼저 진실에 도달했다. 적절한 순간에 관군이 개입하도록 만든 인맥과 정보력은 또 어떠한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련함이나 인맥과 달리, 정보는 사고 팔 수 있다는 점이다.
강호에는 크고 작은 정보 단체들이 여럿 존재한다.
사문에서 별도의 정보조직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면, 이들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사는 것이 보통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개방과 하오문이다.
우선 구파일방에서 ‘일방’을 담당하는 개방은, 이름 그대로 거지들의 방파를 뜻한다.
거지들은 드넓은 중원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구걸을 하며 수집하는 정보들은 낱개로 보면 보잘 것 없지만, 그것들이 쌓여 이루어진 금자탑에는 대단한 가치가 있다.
천무학관에서 사귄 친구 중에도 개방의 제자가 있다.
명색이 거지라고 참 냄새가 많이 나던 친구인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닥 친하게 지내진 않았다.
시청자들은 똑같이 냄새나는 건 설이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편애하냐며 나를 비난했지만, 어디 선천적인 체취와 안 씻어서 나는 냄새가 똑같은가?
가까이만 가도 몸이 간지러운 기분이라 좀처럼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세상에 얼빠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다고, 판사들도 원고의 외모 따라 판결을 다르게 하는 판국에 냄새 좀 차별하는 게 대수냐.
무엇보다 개방은 정의를 표방하는 단체다.
무림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도 아니고, 상가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정보를 내놓을지는 미지수다.
정보를 얻을 때마다 내 신분과 관심사가 노출되는 것도 꺼림칙하고.
반면 하오문은 비교적 이런 제약에서 자유롭다.
거지들이 주축인 개방과 달리 소매치기, 기녀 등 뒷세계 주민들의 뒤를 봐주는 문파인 하오문은, 정보를 얻는 방식 또한 남다르다.
흔히 베갯머리송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녀의 잠자리에선 온갖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가는 법이다.
하오문은 그런 정보들을 취급한다.
또한 이들은 비록 표면적이긴 해도 결코 의뢰인의 정체를 묻는 법이 없다.
“접촉한다면 하오문인가.”
생각을 마친 난 곧장 거리로 나왔다.
기루를 돌아다니며 수소문 하다보면 상대 쪽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오늘은 스스로 찾아볼 생각이다.
물어서 찾아가는 것과 스스로 찾아내는 것, 어느 쪽이 협상에 유리할지는 불 보듯 뻔하니까.
거기에 조가장의 장남이 벌써부터 기방을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아도 곤란하니.
“그럼 기녀보단 소매치기 쪽이 낫겠지.”
괜히 기루 쪽을 수색하다 엄한 장면이 찍혀서 방송정지를 당하는 건 사양이다.
난 적당히 외진 곳을 찾아 역용을 마쳤다.
벽려군을 미행하며 역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것이 벌써 3개월 전, 그 이후 짬짬이 역용술을 수행한 덕에 지금은 눈뿐만 아니라 코와 입, 턱선 등 기본적인 이목구비를 바꿀 수 있게 됐다.
역용을 마치고 확인한 스트리밍 화면에는, 원래 나이보다 열 살 정도 더 들어 보이는 선이 굵은 미남이 윙크를 하고 있었다.
[분홍폭탄 : 잘생긴 얼굴은 못 버리네ㅋㅋ] [돌겜충 : 깐휘는 와인이야] [빅그림 : 그려진다 저 얼굴로 나중에 벽려군 꼬시는 그림이] [월화수목금 : 다 예상이 간다 이 말이야]······.
채팅창은 오늘도 호평일색이다.
그럼 역용도 마쳤으니 이제 수색을 시작해볼까?
난 소매치기들이 모일만 한 뒷골목이나 외진 폐가 근처를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머잖아 카메라에 비친 수상한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전에 성과 좀 있냐?”
“좆도 없어. 개털이야.”
“형님은 좀 어떠세요?”
뒷세계 주민들답게 걸쭉한 대화들이 오갔다.
잠시 뒤, 그들은 형님이라 불린 사내에게 수입의 일부를 상납한 뒤 뿔뿔이 흩어졌다.
쫓을 상대가 전해졌다.
얼마 뒤, 형님이란 불렸던 사내 역시 또 다른 형님에게 돈을 전달했다.
그렇게 몇 차례 손에서 손으로 돈이 오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안 움직이네.”
마지막 상납이 이루어진 뒤, 반 시진이 넘어가도록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난 다른 패거리를 찾아 자리를 옮겼다.
채팅창에서는 미행이 지루했는지 소매치기의 팔다리를 하나쯤 분질러놓고 물어보라는 의견들이 나왔지만···.
또라이들인가?
속으로 생각하고 흘러 넘겼다.
이후로도 두세 개의 무리를 더 찾아냈지만, 처음과 마찬가지로 정보단체와 연결되기도 전에 보고가 멈췄다.
가능성은 두 가지.
상납기일 또는 시간이 맞지 않았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헛다리를 짚었든가.
일단 이 구역에서 모임이 이뤄지는 장소는 알아냈으니, 내일은 다른 쪽을 찾아봐야지.
그렇게 첫날 수색은 별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
***
집에 돌아오니 마당에서 빙수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설이나가 빙공으로 얼린 우유를 하영영이 내가중수법으로 박살내면 소희가 달달하게 졸인 팥과 과일을 올리는 식이었다.
“오라버니!”
“요즘 너무 자주 먹는 거 아니야? 배탈 나도 모른다.”
난 소희에 이어 빙궁의 두 여인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녀들 덕에 최근 조가장 내에는 빙과류 열풍이 불고 있었다.
이 시대에 아이스크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당나라 때 화약의 재료인 초석(질산칼륨)을 채굴하는 과정에서, 초석을 물에 녹이면 얼음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은 얼음 위에 얇은 접시를 깔고 수(酥)라고 불리는 유제품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 종유 동굴에서 자라는 석순마냥 뾰족한 모양의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수산(酥山)이다.
그러나 결코 자주 해먹기는 힘든 사치스러운 방식인데다 현대의 아이스크림과는 제법 맛의 차이가 있었다.
그에 반해 설이나의 빙기(氷氣)는 급속냉동에 온도 조절까지 가능한 최첨단 시스템이다.
우유를 저으면서 얼리면 밀크셰이크도 가능하다구?
물론 집집마다 설이나를 하나씩 놓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요, 하루에 쓸 수 있는 공력도 정해져 있으니 상용화는 무리지만, 우리만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되지, 뭐.
아니면 북해빙궁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빙과 산업에 뛰어들든가.
잠시 뒤, 뚝딱 완성된 우유빙수를 소희가 한 숟갈 듬뿍 퍼서 내 입으로 내밀었다.
“오늘은 현이부터 안 주네?”
“그럼 오라버니 삐친다고 현 가가가 오라버니부터 주랬어.”
“그 말을 하면 더 삐친다는 건 안 가르쳐줬니?”
말과 달리 빙수를 냉큼 받아먹으며 설이나에게 포권했다.
“맛있어요, 설 소저.”
“그렇다니 다행이다.”
[펭귄목살 : 설 소저가 갓 만든 우유빙수 ㄷㄷ] [멍보단냐옹 : 시큼한 맛 안 나는지 확인 잘하라고ㅋㅋㅋ] [이푸린 : 빨리 북해빙과 설립해서 돈 쓸어 담는 거 보여줘!!]채팅창의 짓궂은 메시지들은 무시했다.
순식간에 녹아 없어진 달콤함에 난 입맛을 다시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번에 알려드린 무공에는 좀 진전이 있으셨어요?”
“아! 그렇잖아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다. 영영은 언제나 냄새가 안 난다고만 하니 믿을 수가 없구나. 마침 빙공을 사용하여 땀이 났으니, 그대가 한 번 확인해줄 수 있을까?”
설이나가 반색하며 내게 몸을 붙였다.
초봄에도 얇은 옷을 입는 그녀의 한여름 복장은 중원인들에겐 다소 자극이 강했다.
거기에 새하얀 쇄골 위로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자 금세 눈이 어지러워졌다.
그러자 이를 본 하영영이 빽 소리쳤다.
“아가씨! 저 자의 음탕한 눈빛 좀 보세요!”
“아니, 바로 눈 돌렸는데···.”
“영영, 난 괜찮으니 그만해. 조 공자의 동생도 있는데.”
“하지만···.”
아랫입술을 깨문 하영영이 나를 쏘아봤다.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 내게 설이나가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냄새가 어떻지?”
“그냥 땀 냄새만 조금 심한 거 같아요.”
“아···!”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활짝 호를 그렸다.
여기에 매화향만 첨가되면 완벽할 텐데.
난 내친 김에 매화겨법의 연구 성과를 묻기 위해 우희의 처소를 방문했다.
“마침 잘 왔어요.”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는지, 방에 들어선 내게 우희가 익숙한 필체의 비급을 건넸다.
“빙매화심결?”
“매화검법을 분해하는 것보다 설 소저에게 구결 삽입에 필요한 빙궁의 심법 한 토막을 얻는 게 더 힘들었어요. 이것도 가가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구독신공의 선조 중에 빙궁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하···하. 고생했어.”
“분석해보니 매화검법의 향기는 진기의 방출보다 흡(吸)자결에 그 요체가 있었어요.”
이어진 그녀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지금껏 강호인들은 매화검법이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레 매화향이 나는 것으로 여겼지만, 실제 향기의 원인은 이른 봄 화산파에 만개한 매화의 향 때문이었다고.
“흡자결을 통해 빨아들인 매화향이 검법을 펼칠 때 흘러나오는 거죠. 수련을 열심히 할수록 짙은 향이 나는 것도 당연해요.”
“꽃향기가 체내에 쌓인다고? 그게 가능해?”
매화향이 무슨 중금속도 아니고.
“정확히는 꽃의 기운이에요. 모든 기는 자연에서 비롯되는 거니까요. 흔히들 곤륜의 검에선 청량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죠. 곤륜산의 맑은 기운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어요.”
“음···.”
그녀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나를 바라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 원리를 이용하면 체향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에 시청자들이 흥분했다.
[지나갈낙타 : 겨이나 땀 냄새 종류별로 향수 만들어서 파는 거 가능?] [미카엘 : 난 나오면 산다ㅋㅋㅋ] [Blueminute : 택배 “보내줘”] [Canu : 겨넬 no.5] [제프리현 : 결국 시큼이를 달큼이로 만드는 건가요ㅠㅠ] [헤우웅 : 깐휘섹 겨념없네]하지만 아직 우희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여름이라 매화꽃을 구하기 힘들겠어요. 그래도 매실은 제철이니까요?”
···설 소저, 소저는 어쩔 수 없는 매실인가봐요.
그리고 다음날부터 조가장에는 매실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