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83
무림대회 (4)
“조가휘, 승!”
내력만큼은 평범한 줄 알았던 청년의 주먹에 가공할 기운이 실린 것은 극히 일순간에 불과했으나, 벽려군이 어떤 사내를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은공···?”
그녀의 떨리는 눈빛이 비무대를 내려가는 청년의 등을 향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여태껏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의식에 제동을 걸어왔다.
하나는 서로 다른 외모.
역용술이나 인피면구라면 외모를 바꾸는 걸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절정고수인 그녀의 안목을 속일만한 물건은 흔치 않다.
또 다른 하나는 내공.
이쪽이야말로 주된 이유다.
몇 달 전, 은공께서 서장의 승려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선보인 내공만 해도 수 갑자에 이른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일개 수련생은 죽었다 깨어나도 보유할 수 없는 양이다.
헌데 조금 전의 경기로 그런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의심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문득 지난 학기 중 가휘의 몸 상태가 눈에 띄게 안 좋았던 시기가 떠오른다.
무인에게 부상은 일상다반사이기에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시기가 은공께서 내상을 입었던 시기와 공교롭게 맞물린다.
그 뿐인가.
보름 전 하오문을 통해 전해진 연락도 수상하긴 마찬가지.
은공이 남긴 서신에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두어 달 사마척결에 동행하지 못할 것 같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 급한 일이란 게 무림대회의 준비와 방학기간을 뜻하는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거듭되는 의심 속에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조가휘 수련생.”
“교관님?”
당황한 청년을 향해 벽려군은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조가휘 수련생이 제 은인인가요?”
그렇게 속 시원하게 물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동시에 그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자신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어째서 이리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걸까.
둘이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피어난 이 싱숭생숭한 기분은 무엇일까?
혹시 가르치는 수련생에게 놀아났을까봐?
그러나 ‘놀아났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그동안 은공께 입은 은혜가 너무나 컸다.
누가 장난으로 하는 일에 그토록 여러 차례 목숨을 건단 말인가.
반면 자신은 은공에게 식사를 몇 번 대접한 게 전부다.
심지어 그녀는 아직 피독주도 돌려주지 못한 상태다.
몇 번이나 되돌려주려고 했는데 은공께서 거부했다.
‘언제나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그대가 걱정되어 받지 못하겠소. 그대가 더 이상 다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때 받으리다.’
천하의 검후가 언제 그런 말을 들어봤을까.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어쩌면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후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
“아하···하, 교관님? 무슨 일이세요?”
불러놓고 아무 말도 없는 그녀를, 청년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벽려군은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 했으나, 그의 등에 업힌 제갈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입술은 마치 아교라도 바른 듯 꾹 닫히고 말았다.
만약 은공의 정체가 가휘라면, 자신은 이미 정인이 있는 사내를···.
“교관님?”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자신을 다시 벽 소저가 아닌 교관님으로 칭하게 된 것은.
표면상으로는 양철진과 금라희처럼 또 오해를 하는 이가 나올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으나, 눈앞의 살가운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인지 그 이유만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설마 연인을 신경 쓰느라 일부러 내게 거리를 두는 걸까?
그럴 거면 다가오지나 말지.
문득 솟구친 서운함에 벽려군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건 마치 질투하는 여인 같지 않은가!
오, 아닐 거야. 질투라니.
그건 여태까지의 그녀의 삶과는 이역만리 떨어진 단어였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가 몇 살 차이인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자신의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다른 여인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만큼은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감정인지는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벽려군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궁금증을 억지로 삼켰다.
“교관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두 분 경기 잘 봤어요. 그 나이에 그 정도 성취라니, 교관으로서 자부심이 생기네요.”
본심을 숨긴 채 몸을 돌린 벽려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품안의 피독주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당장 확인해봐야겠어.
***
“피곤할 텐데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요. 몸조리 잘하고, 조가휘 수련생은 모레 준결승, 결승 준비도 빈틈없이 하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멀어지는 벽려군을 보며 난 참았던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일단 당장의 고비는 넘겼지만, 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들켰다고 봐야겠지?
아니, 확신까지는 아니어도 의심 중인 건 분명해.
어떡해야 하나.
일단 방학이 끝날 때까지 다시 만날 예정은 없긴 한데··· 그냥 튈까?
그러나 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신경 써야 할 사람은 이미 떠난 벽려군이 아닌, 지금 내 등에 업힌 의심 많고 사랑스러운 연인임을.
“검후 교관님 참 예쁘죠, 휘 가가?”
등 뒤에서 들려온 고운 목소리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
잠깐만 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피로가 컸나 보다.
잠에서 깨어나니 설이나 뿐 아니라 팽소혜의 시합도 끝나 있었다.
결과는 일대일.
설이나는 사예무곡의 이인자를 상대로 어렵사리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팽소혜는 팔이 부러지면서까지 검을 휘두르는 투혼을 보였으나 결국 단예지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고.
소혜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 마지막 준결승 티켓이 달린 약빈과 남궁현의 경기를 관전했다.
콰앙-!
“윽···. 졌어. 정말 많이 강해졌구나.”
“고마워.”
어려서부터 조가장에서 인연을 쌓은 두 사람답게 경기의 마무리는 훈훈했다.
“주약빈 승!”
“와-!”
놀랍게도 약빈이는 100여 초 만에 지난 천무전의 우승자인 남궁현을 꺾고 준결승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두 사람의 성취를 아는 나는 시합 전부터 약빈이의 승리를 점쳤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우희에 이어 남궁현까지, 오대세가의 후계자가 연달아 패배한 것이 어지간히 충격적인 듯, 함성소리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조가장과 적양권이라는 여섯 글자가 사람들의 인식 속에 깊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나 대망의 무림대회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준결승 첫 경기는 약빈이와 사화 단예지가 장식했다.
카메라에 비치는 비무대 위에선 경기 시작 전부터 날 선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원하던 대로 됐네? 축하해.”
“뭐가 말이죠?”
“결승에서 휘 랑이랑 만나고 싶어했잖아.”
“휘 랑···? 아, 그 때?”
단예지는 며칠 전 내게 결승에서 만나자며 이를 갈던 것을 그새 잊었는지 뒤늦게 코웃음을 쳤다.
“그게 진심일 리 있나요? 그나저나 백봉에겐 정말 실망이네요. 백도 제일의 기재로 소문이 자자해서 기대했더니, 화화공자 따위에 눈이 멀어서···.”
“따위?”
“아, 그러고 보니 그쪽이 백봉과 연적 관계던가? 백도의 여인들은 순종적이어서 자존심도 없나 봐요. 어디 남자가 없어서, 한 사람을 사이에 두고.”
“그 말 잊지 마. 나중에 꼬리치기만 해봐.”
약빈이의 엄중한 경고에 단예지의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콩깍지가 씌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그런 얼굴만 번지르르한 사내, 줘도 안 가질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런 것치곤 요즘 휘 랑이랑 자주 엮이던데? 아, 그럼 되겠다. 지금 떨어지면 되겠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에, 카메라로 중계 중인 내 얼굴만 붉어졌다.
빈아, 내 편 들어주는 건 고마운데 시청자들이 다 듣고 있어! 민망하니까 그만햇!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들의 말다툼이 멀리 떨어진 객석까진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귀빈석에 자리한 몇 사람이 내 쪽을 흘긋거리는 걸 보니 그렇지도 않은가?
“천무학관 주약빈 대 사예무곡 단예지의 대결을 지금 시작한다!”
곧 심판의 외침과 함께 대결이 시작됐다.
선공은 사화였다.
“날 사랑하는 낭군님과 못 만나게 하시겠다?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조금 전 백봉 외엔 안중에도 없다던 태도와 달리, 약빈을 향해 우아하게 검을 찔러 들어가는 그녀에게선 상대를 경시하는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곧 그녀의 검끝이 검은 연꽃을 그리며 약빈이의 몸으로 쇄도했다.
그리고 그것을 피해 비무대 위를 뛰어다니는 약빈이의 움직임은 숲에 사는 맹수처럼 잽싸고 유연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비무대건만, 그녀가 지옥 훈련을 했을 숲이며 절벽 따위가 눈앞에 그려지는 기분이다.
마치 아크로바틱을 보는 듯 현란한 동작들이 이어졌다.
“이게 다야?”
“글쎄?”
공격이 빗나갈수록 사화의 눈빛은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의 검끝에선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검술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스스슷-.
한 차례 회피한 검끝이 유령처럼 되돌아오는 신기에, 이번만큼은 약빈이도 화들짝 놀라 신형을 뒤로 뺐다.
사르륵, 머리칼 몇 가닥이 허공에 흩날리고, 이어진 이격은 화려하지도 기묘하지도 않지만, 묵직했다.
콰앙-!
조금 전까지 약빈이가 서 있던 비무대 바닥이 깊게 패이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직후 먼지 속을 뚫고 나타난 약빈이 사화의 얼굴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단예지는 급히 검을 들어 올리다 말고 흠칫했다.
조금 전까지 약빈이의 오른손에 있던 비수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다급함이 떠올랐다.
그렇게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번개만큼이나 재빨랐다.
비수의 행방을 확인하기도 전에 들어올린 왼손이, 오른뺨으로 쇄도하던 시퍼런 날을 콰득 움켜쥔다.
희고 고운 손목을 따라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악!”
객석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비명이다.
날을 맨손으로 잡은 걸 상상만 해도 끔찍했나보다.
그러나 정작 비수를 움켜쥔 단예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검을 쥔 오른손을 휘둘렀다.
약빈 또한 주저 없이 비수를 놓고 뒤로 재주넘기를 돌았다.
회피가 아닌, 반격의 한 수였다.
파앙-!
그녀의 발끝에 가격당한 사화의 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으음···.”
순식간에 무기를 잃은 사화가 비로소 옅은 신음과 함께 두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피투성이가 된 비수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며 반격을 준비했다.
한편, 다시 기수식을 잡은 약빈이의 소매 안쪽에서도 새로운 비수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각각 비수를 움켜쥔 두 여인이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가운데,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와아-!”
흉흉한 기세에 다들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관전했다.
한편, 채팅창에선 약빈이가 다칠까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멍보단냐옹 : 약빈이 죽을까봐 무서워서 못보겠네 ㅅㅂ] [WolfangE : 저렇게 빨리 싸우는데 심판이 중간에 말릴 수나 있어요?] [빅그림 : 이거 가상현실 게임이라고 기사 떴던데 둘 중 하나 다치면 로드 가능?] [지나갈낙타 : 안 되니까 려군 눈나 등에 화상 입었을 때도 로드 안 했겠지] [뽀미 : 무림티비는 로그라이크야!]게임방송인 줄 아는 시청자들의 반응도 이리 격렬한데, 실제 이 세계를 살아가는 내 심정은 오죽할까.
수많은 무림명숙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설마 별다른 일이 있을까 싶겠냐만, 원래 사고라는 것은 눈 깜짝할 새 일어나는 법.
노파심이란 건 알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내비해, 나는 조용히 스페어 내공의 공력을 일깨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