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al Streamer RAW novel - Chapter 88
뉴페이스 (2)
-다시 보게 될 거라고 했죠?
단상 위에서 전음을 보낸 단예지가 날 향해 미소 지었다.
재회의 반가움이나 호감 따위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미소였으나, 약빈이와 우희의 눈엔 다르게 비쳤는지 둘의 표정이 대번에 샐쭉해졌다.
신입생과 새로운 교관들에 이어 사예무곡 교환학생까지.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시끄러운 학관생활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입학식이 끝난 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신입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묘하게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하하하!”
응? 이 호탕하면서도 경망스런 웃음은···?
“얘들아, 잠깐만.”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강렬한 기시감 속에 웃음의 진원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젠가 본 적 있는 사내가 주위 신입생들 상대로 일장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너희, 아직도 구독과 좋아요를 모르는 거야?”
저 목소리, 저 얼굴을 어찌 잊을까!
“빈아, 맞지.”
“응.”
내 뒤를 따라온 약빈이의 얼굴에도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허나 단박에 상대를 알아본 우리와 달리, 상대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 너희, 이리 와볼래?”
“저희요?”
“응. 너희. 손목에 그것 좀 보여줘 봐.”
기억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났다.
“1년만이네요.”
“으응? 날 알아?”
“기억 안 나요? 객잔에서 저희 식사 계산도 해주셨는데. 그때도 저희 옷소매를 보고.”
“아니, 잠시만··· 오오! 이제야 알겠어! 기억 나!”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천무학관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집을 떠난 나와 약빈이는, 정주시의 어느 객잔에서 옷소매에 ‘구독과 좋아요’를 새긴 한 청년과 조우했다.
같은 유행의 선두 주자를 만난 것이 기쁘다며 선뜻 밥값까지 계산하고는,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채 떠났던 청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분명 학관 수련생으로 재회할 거라 생각했는데 합격자 중에 없어서 허탈했었지.
그런데 설마 천무학관 2기생으로 입학할 줄이야!
“역시 너희도 입학에 성공···.”
서로 같은 기수인 줄 알고 입을 열던 그가, 우리 허리춤에 매달린 붉은 수실을 발견하곤 말끝을 흐렸다.
올해부터 기수 구별을 위해 1기생들은 붉은 수실을 달고 있다는 걸 모를 그가 아니니.
허나 다시 입을 연 그의 얼굴에서 민망한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감탄했다는 듯 호탕한 목소리로 칭찬을 건넬 정도였다.
“뭐야, 둘 다 이미 붙은 거였어? 이런 재능이 넘치는 녀석들 같으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소협. 그 때 이름도 못 여쭤본 게 마음에 걸렸는데.”
“으음, 개의치 말라구?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작년에 입학했다면 1기 수련생들도 잘 알겠군.”
“누구 궁금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당연하지! 지난 무림대회의 우승자인 화화공자와 그를 따른다는 백봉과 산당화, 흑백이화로 불리는 아리따운 두 소저만큼은 꼭 만나보고 싶었네!”
잔뜩 흥분한 청년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외쳤다.
지난 무림대회를 관전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걸까?
당사자를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그의 모습에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화화공자는 요즘 소문이 영 안 좋던데요?”
내 말을 들은 우희와 약빈이가 등 뒤에서 키득거린 것과 달리, 그는 도리어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영웅 곁에 꽃이 모이는 것은 자연의 이치! 거기에 화화공자처럼 얼굴마저 빼어나다면 말할 것도 없지. 그러고 보니 너도 한 외모 하는 걸?”
“아하···하.”
괜히 장난을 쳤나? 민망한데.
정체를 밝힐 타이밍을 가늠하며 적당히 맞장구치고 있으려니,
“화화, 여기서 뭐하냐.”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언제 봐도 얄미운 존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냐.”
“님 찾아 산 넘고 강 건너 학관까지 온 사화로도 만족 못해서, 이젠 신입생 중에 아리따운 소저가 없는지 찾고 있는 거야?”
“너 솔직히 말해. 내 이상한 소문들, 다 네가 퍼뜨리고 다니는 거지?”
“그건 네 행실이···.”
“뭐, 인마?”
투닥투닥.
“···화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청년의 얼굴이 멍한 빛으로 물든 것이 보였다.
“본의 아니게 소개가 늦었네요. 호북 조가장의 조가휘입니다.”
“억? 네가, 아니 당신이 화화···!”
뒤늦게 그의 안색이 대변했다.
마치 연예인을 만난 팬처럼 두근거림과 조바심이 엿보이는 얼굴.
화화공자라는 별호를 얻은 이래로 처음 보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그럼 뒤의 두 여인이 백봉과 산당화?”
“네. 이쪽이 제갈우희 소저, 이쪽이 주약빈 소저.”
“휘 랑, 내 소개가 왜 더 나중이야?”
“어머, 빈아. 휘 가가 곤란하시게 뭘 그런 걸 물어.”
“아앗···.”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날 구해낸 것은 청년의 호들갑이었다.
“오오! 오오오! 난 영풍상단의 허태오요!”
“전 심서우예요!”
“반가워요, 허 소··· 응?”
갑자기 끼어든 또 다른 목소리를 향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내 얼굴을 훑을 정도의 뻔뻔함을 지닌 소녀였다.
“이야-. 이 분이 소문의 화화공자십니까?”
커다란 눈과 살짝 올라간 눈매에서 그녀의 활달함이 엿보인다.
키는 150초반? 거의 팽소혜만큼이나 작은 듯싶다.
소혜가 귀여운 토끼라면 그녀는 꾀 많은 너구리같은 인상이다.
“안녕하십니까! 사예무곡 2기생 심서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선배!”
게다가 설마 했던 사예무곡생!
“선배라니··· 편하게 부르세요, 소저.”
전생과 달리 이곳에서 선후배란 호칭은 배분 차이가 상당할 때나 사용한다.
그렇기에 한두 살 차이에는 거의 오가지 않는 호칭이나, 눈앞의 소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이, 그럴 수야 있나요. 이게 편합니다! 선배님이야말로 말씀 편하게 하십쇼!”
“아··· 응, 그럴까?”
“우희, 약빈 선배님도 너무 이쁘십니다. 여자로서 부럽습니다!”
몇 마디 안 나눠 봐도 그녀의 성격이 대략 짐작이 갔다.
좋게 말하면 씩씩하고 살갑고, 나쁘게 말하면 비글과다.
“근데 세 분 선배들은 어떤 수업 들으십니까?”
“저기··· 나는 안 궁금하니?”
“선배는 누구십니까?”
“억!”
“비켜봐. 모른다잖아.”
침몰하는 존명이를 옆으로 치우며 질문에 답한다.
“우리 수업은 왜?”
“유명인이랑 같은 수업 듣고 싶습니다!”
“선행 과목도 있어서 겹치는 게 몇 개 안 될 텐데?”
“선배애-. 그러지 말고 알려주십셔.”
“오오. 나도 알려주게! 나도! 나도!”
심서우에 이어 허태오까지 우리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출신도 생김새도 전혀 다른데 마치 친남매 같은 저세상 텐션에, 결국 얼떨결에 수강 과목들을 줄줄이 읊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존명이 뒤에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정·사간 분위기가 좋은 걸 보니 계획대로 진행해도 되겠어.”
“뭘?”
“신입생 환영회.”
***
“당신은 또!”
이른 새벽, 우희, 약빈이와 몰래 기숙사를 나오다 사화와 딱 마주쳤다.
천무학관 1기생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데 유독 사예무곡 수련생들만 기겁한단 말이지.
“단 소저, 혹시 나한테 관심 있소?”
“미쳤군요?”
“그렇잖소. 심 소저를 이용해 수업까지 따라 듣질 않나, 가는 곳마다 마주치니 의아해서 하는 말이오.”
어쩐지 심서우가 대뜸 강의시간표를 묻더라니.
비글소녀와의 첫 만남이 사화의 사주였음을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첫 수업에서 사화와 마주쳤을 땐 그저 우연으로 치부했으나, 다음 수업도 같고 그 다음 수업까지 같으니 의심은 확신이 됐다.
‘서우야,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아하하, 죄송합니다, 선배. 그런데 저도 선배랑 같은 수업 듣고 싶었던 건 정말입니다! 진심입니다!’
사화의 옆자리에 앉은 심서우의 해명이었다.
“거기에 대해선 이미 해명했을 텐데요? 당신이 아니라 백봉과 산당화의 일정이 궁금했던 거라고. 그런데 이리 수련을 등한시하고 남녀놀음에 빠져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무슨 상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린 어려서부터 소꿉친구였소.”
“뺨에 묻은 입술자국이나 닦고 말하세요.”
“엇?”
“거짓말이에요, 가가. 내가 아까 나올 때 다 닦았어.”
놀라서 뺨을 더듬자 곁에 있던 우희가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단 소저는 사파의 여인답게 거짓말이 능숙하네요?”
“그대는 정파의 여인임에도 염문을 두려워 않고 말이죠.”
“염문? 아- 화화공자의 손길을 못 잊은 사화가 자꾸 가가 근처를 맴돈다는 염문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네요?”
“···하!”
말로 쟤를 어떻게 이겨.
헛웃음을 터뜨린 사화는 한참을 우희와 눈싸움을 벌이던 끝에 결국 홱 소리가 나게 몸을 돌렸다.
저래봤자 오늘 첫 수업에서 또 만날 텐데 말이지.
난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눈썹을 긁적였다.
***
며칠 뒤, 용봉지회의 단골 다루인 정연루에서 신환회가 열렸다.
전생의 대학생 신환회와 다른 점은 술이 아닌 차가 오가는 건전한 교류회라는 것!
거기까진 좋다 이거야.
“근데 왜 다 아는 애들이냐고.”
원래 알고 지내던 1기생들이야 식탁을 오가며 간간이 대화를 나눴지만, 문제는 이 자리의 주역인 신입생 및 교환학생들이다.
신환회가 시작되고 한 시진이 넘도록 우리 테이블에 다가온 2기생이라고는 오직 허태오와 심서우 뿐!
“나도 권해봤는데 신입생들이 네 옆에 앉길 꺼려하더라고.”
“나도 알아.”
맞은편 강은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며칠 간 수업을 들으며 뼈저리게 느꼈다.
지난 무림대회 결승, 세간에서는 사화의 치욕(邪花之辱)이라 불리는 이번 사건의 여파가 얼마나 큰 지.
정작 그 사화가 우리 테이블에 앉은 게 아이러니다.
-정말 나한테 관심 있소?
-······.
말없이 눈을 흘긴 사화가 자기 앞에 놓인 찻잔에 공력을 담아 날 향해 미끄러뜨렸다.
하지만 내력만큼은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나다.
찻잔에 담긴 막대한 공력을 물 한 방울 흘리는 일 없이 가뿐히 해소한 뒤, 다시 그녀에게 전음을 보낸다.
-그만 좀 노려보시오. 찻물에 체할 지경이오.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죠?
-안 그러면 그대가 건넨 찻물을 애정을 듬뿍 담아 음미할 생각이니까. 내일 어떤 소문이 날지 궁금하다면 시험해 봐도 좋소.
-그게 지금 정파의 후기지수 입에서 나올 말인가요?
-셋을 세겠소. 하나, 둘···. 셋.
내 손이 망설임 없이 찻잔을 움켜쥔 순간,
“읏.”
입술을 깨문 그녀가 결국 나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잘 생각했소.
난 승리의 쾌감에 빙긋 웃으며 다시 찻잔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둘이 지금 전음으로 무슨 말했어?”
“어? 아, 그만 좀 째려보라고.”
“그 한 마디에 우리 얌전하신 사화께선 순한 양처럼 고개를 돌리셨고? 솔직히 말해요, 가가.”
약빈이와 우희의 합공에 난 할 말을 잃고 시선을 헤맸다.
주위 수련생들은 각자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도, 언제 치정싸움이 벌어지나 촉각을 곤두세운 채 우리 테이블을 주시했다.
그 와중에 시킨 적도 없는 사치스런 다과를 내온 종업원의 한 마디는, 그렇잖아도 들끓던 분위기에 불을 붙였다.
“조 공자, 루주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계단 근처, 면사를 쓴 묘령의 여인이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정연루주의 등장에 수련생들 사이에 소란이 번졌다.
“정연루주면 고관대작들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던데.”
“화화한테 손 흔든 거 맞지?”
“빈익빈 부익부 거지같다.”
“화화, 인생 편하게 사네···.”
웅성웅성-.
이렇게 될 것을 정연루주, 아니 하오문 정주 지부장 홍서현이 몰랐을 리 없다.
-홍 소저···.
-여러 여인들께 둘러싸인 공자를 보니 심술이 나서 그만. 사죄는 좀 전에 보낸 다과로 대신 할게요. 그래 봬도 제법 비싼 거랍니다?
전음에 답한 그녀가 고혹적으로 손을 흔들며 계단 위로 사라졌다.
온갖 악의 섞인 시선 속에 나만 홀로 남겨둔 채.
그날 이후, 나와 관련된 소문 한 가지가 추가됐다.
화화공자의 마수가 학관 밖까지 미쳐있다는 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