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
암살검가 로이넨-1화(1/258)
제1화. 암살검가 로이넨
나는 루빈 로이넨.
서른 살에 죽은 남자.
그리고 다시 태어난 사람.
아, 아니지.
‘회귀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다.
죽고 나서 과거로 되돌아왔으니까.
루빈 로이넨의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나를 죽인 건 다름 아닌 황제. 내 어머니의 배다른 오빠이자,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 텔마흐였다.
그의 배신을 알아챈 건 내가 서른 살 무렵일 때였다. 너무 늦었지. 대체 언제 이 배신의 씨앗이 뿌려진 걸까.
우리 가문은 황제의 충실한 검이었다. 황명이 내려오면 이유 불문 대상을 제거해야 하는 암살검.
수백 년 전부터 존재했던 우리가 황제의 검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우린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거야말로 우리 가문의 존재 이유였는데. 굳이 부러뜨려야 했을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건 하나다.
황제이자, 내 어머니의 배다른 오빠였던 텔마흐.
그 작자가 나를 죽일 것이다.
내 앞에서 어머니의 생명을 끊을 것이다.
모든 암살검가의 중심인 로이넨가(家)를, 제국의 표적으로 삼을 것이다.
이제 나는 두 번째 삶을 얻었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뿐이다.
황제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을, 암살검가 로이넨을 지켜내는 것.
황제의 검이 가문의 정원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의 목에 내 검을 꽂아 넣는 것.
* * *
“이봐,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니…? 뭐가?”
“길을 잃은 것 같아. 아니, 이것 보라고! 이 우물만 벌써 세 번째라니까!”
날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안개는 두꺼웠다.
어둠이 가시고, 여명이 배어든 지 오래다. 푸른빛이 감도는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뿌연 안개는 거두어질 줄을 몰랐다.
두 남자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상업도시로 유명한 아디엔 성.
목적지 근처에 왔음을 알리는 교각을 건넜지만, 그 이후로 줄곧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 빌어먹을 우물을 세 번째 보는 거라고!”
“알았으니까, 진정해. 자네 지금 너무 흥분했어.”
“흥분이라고? 자네는 지금 이 상황이 심각하지 않아?”
그때.
두 남자를 에워쌌던 안개에 변화가 생겼다.
안개 속에 홀연 길이 났다. 안개 한쪽이 싸악 흩어지면서 나타난 길이었다.
“뭔가 불길해.”
“불길하긴 개뿔! 일단 가봐야겠어. 저 우물을 또 봤다간 진짜 미쳐 버릴 거 같으니까.”
흥분한 키 작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안개 사이에 난 길로 걸어갔다. 키가 큰 신중한 남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뒤따랐다.
그들이 택한 길의 끝에는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여긴 뭐야?”
거대한 정원 한가운데 있는 웅장한 저택.
“일단 목이라도 축이면 좋겠는데.”
“한번 사람을 불러볼까?”
“이봐, 잘 생각해야 해. 자칫해서 귀족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이봐요! 거기, 거기!”
키 작은 남자는 동료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때마침 정원 한쪽에서 산책 중인 여인이 그 소리를 들었다.
여인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대문 쪽으로 다가왔다.
대문의 창살을 사이에 두고 여인을 마주한 상인들은 단번에 이 여인이 하인 계급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저희는 아디엔 성으로 가고 있는 상인들입니다. 그런데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지 뭡니까. 공녀님, 길 안내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또 염치 불고하고, 목을 축일 물을 청해볼 수 있을까요?”
여인의 몸에서는 자연스러운 기품이 흘렀다.
그녀는 팔을 들어 독특한 붉은빛이 감도는 머릿결을 뒤로 묶은 뒤,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대한 대문이 스르륵 열렸다.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담벼락에 가려진 곳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와 관리인이 여인 곁으로 다가왔다.
흠칫 놀라는 두 상인에게 걱정 말라는 듯 가볍게 손짓하며, 여인은 앞서 걸어갔다.
정원을 거쳐 느긋하게 걸어간 곳은 저택의 중앙홀. 곳곳에서 가문의 압도적인 위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두 상인은 중앙홀까지 걸어가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공녀님. 이래 봬도 저희는 꽤 큰 규모의 사업을 하는 상인입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가문들의 저택은 대부분 가보았거든요.”
여인은 가만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토록 웅장한 저택은 처음이군요. 아디엔 성 근처에, 이만한 정원과 저택을 소유한 귀족이 계신 줄 전혀 몰랐습니다.”
“마, 맞아요. 이건 입에 발린 말씀이 아닙니다. 저흰 7성 경지의 무인이 가주로 계시는 저택도, 7성 대마법사 가주님의 저택도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아름다운 저택은, 맹세컨대 처음입니다.”
“오늘 같은 날 듣기에 나쁘지 않은 칭찬이군요.”
여인은 중앙홀의 한쪽 의자에 앉았다. 두 상인에게도 손짓하여, 건너편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두 상인은 목을 축일 물뿐 아니라, 황홀한 음식에 고급 와인까지 마음껏 대접받았다.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갈 때쯤. 정신없이 자신들의 여정을 늘어놓던 상인들은 불쑥 이 가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체 얼마나 큰 부자이기에, 행인에게 이토록이나 성대한 만찬을 대접한단 말인가.
“저… 공녀님, 이 가문의 가주 어르신께 약소하게나마 저희의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요. 그리해도 괜찮겠습니까?”
“안 그래도 아디엔 성의 한 귀족에게 의뢰받은 장식품이 있는데, 혹시 몰라 비슷한 급의 장식품 여분을 챙겨왔습니다. 약소하나마, 그것들로 성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상인들은 각자 들고 온 짐보따리를 풀어헤치려 했다. 그런 그들을 여인은 손짓으로 제지했다.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잔을 들고 입에 갖다 댔다. 여인의 기품에, 상인들은 왠지 모를 두려움까지 느꼈다.
“저, 그래도 가주님께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공녀님.”
“뜻이 정 그러하다면. 하세요.”
“예?”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두 상인에게, 여인이 말했다.
“세이렌 로이넨. 내가 바로 이 저택의 주인입니다.”
“……?!”
두 상인은 제국 어디에서도 여자가 가주인 가문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게다가 로이넨이라니? 세상의 돈 많고 힘센 가문들은 줄줄이 꿰고 있는 그들이다. 이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신중하고 키가 큰 상인이 자신의 동료에게 속삭였다.
“저, 저길 봐. 저쪽 기둥 옆에 걸린 그림!”
“왜, 뭔데 그래?”
“저 문양, 모르겠어? 황제의 문양이잖아!”
그러자 황홀한 식사에 가려져 있던 황제의 문양들이, 중앙홀 곳곳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 공녀, 아니 가주님. 혹시 저희가 지금, 황가와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인은 가볍게 웃었다. 어쩐지 슬픔이 배어 있는 웃음. 혹 어쩌면, 비정함이 담긴 웃음일지도.
“말하자면 복잡한 가정사, 정치사죠. 어쨌거나 오늘 내가 당신들을 이리 들여 대접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예요.”
“……?”
“오늘, 이 가문에 한 아이가 태어났답니다. 내가 낳았죠. 이 좋은 날에, 안개 속에서 당신들이 미쳐버려 서로를 죽이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 말뜻을 이해한 두 상인의 얼굴이 샛노랗게 질렸다.
“그 안개는 내 가문의 담벼락입니다. 원한다면 당신들을 평생 안개 속에 가둬둘 수도 있었어요. 내 당신들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내 집을 나서면서 아이의 축복을 빌어주었으면 하는데.”
황제의 문양, 장엄한 저택 그리고 위엄 있다 못해 살기마저 흐르는 여인의 태도까지.
두 상인은 여인의 말이 거짓이나 허풍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황급히 적절한 덕담을 쥐어 짜냈다.
“가, 가주님의 자제분께 빛나는 앞날이 있기를 바라옵니다.”
“제국의 축복과 여, 영원히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붉은빛의 긴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여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고맙군요. 그 아이 이름은 루빈입니다. 루빈 로이넨.”
두 상인은 태어난 아이의 축복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 보전을 위해 다시 술잔을 들었다.
“루, 루빈 도련님에게 축복을…….”
“…축복을.”
여가주와 새로운 아이. 이 압도할 만한 무게에 에워싸인 그들은 진정으로 축복을 빌었다.
잔이 비워졌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손짓했다. 그러자 중앙홀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드넓은 정원이 드러났다. 정원 저 너머의 거대한 대문도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여인은 두 상인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루빈이 우는군요. 아디엔 성까지 무사히 가시길.”
두 상인이 대문을 향해 점점 멀어졌다. 곧 어디선가 나타난 가신 하나가 여인 곁으로 다가왔다.
“가주님, 숲을 벗어나기 전에 처리하겠습니다.”
“…….”
여인은 멀어지는 두 상인들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암살검가 로이넨의 주인 앞에서, 감히 어설픈 거짓말이라니.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상단의 옷.
선명하게 배어 있는 피 냄새.
허리춤에 숨겨둔 단검까지.
제법 잘 연기했다만, 여인의 눈을 속이기엔 한참 모자라다.
끼이익.
상인으로 변장한 두 도적의 등 뒤로 저택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지시가 떨어졌다.
“죽여. 단, 오늘은 말고.”
* * *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아, 어머니가 오시는군.
세이렌 로이넨. 내 어머니.
황제의 이복동생이자 제국의 유일한 여가주.
정체를 숨긴 황족이자, 모든 암살검가의 주인.
7성 무인의 가문? 7성 대마법사의 가문?
그런 가문들쯤이야 암살검가 로이넨의 주인에게는 우스운 상대일 뿐이지.
내 기억으로, 어머니는 이미 내가 태어나는 이 시점에 7성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 이름을 떨치지 못한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황제의 숨겨진 이복동생.’
황제를 위해 모습을 감춘 채, 제국의 숨은 해결사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루빈. 잘 잤느냐?”
아, 어머니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다니.
지금에야 알았다. 내가 태어난 날, 어머니는 내게 다정하셨구나. 반가움을 넘어 낯설 지경이다.
아직 대답 같은 건 할 수 없겠지. 우선 손가락을 펼쳐 꼬물거렸다. 이게 최선이다. 인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의 몸이니까.
그렇다면 울어야 하나? 한번 울어볼까?
“울음소리가 참 크구나.”
아기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네.
암살검가 로이넨의 가주가 아닌, 진짜 어머니로서의 모습.
첫 번째 삶에서는 알지 못했던 이 짧은 따스함이 싫지만은 않다.
창밖으로, 아침을 알리는 햇빛이 새어든다.
자, 이제 어떻게 황제에게 복수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