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03)
암살검가 로이넨-103화(103/258)
제103화. 무도회 (1)
델린가(家)는 유서 깊은 삼휘의 마법사 가문이자, 귀족이었다.
지금에야 그 명성과 위세가 이엘로스가에 미치지 못하기는 해도, 한때는 대를 이어 카포티니 시장을 역임할 정도였다.
이엘로스가처럼 그들도 제국 본토에 닿는 끈이 있다. 이엘로스를 끌어주는 끈이 더 튼튼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델린 역시 얼마든지 카포티니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입학식 무도회? 그건 그냥 네가 등극하는 자리라고 생각해.”
“평민 애들한테 선량하게 웃어주다가, 급이 맞는 귀족 애가 찾아오면 춤추면 되는 거야.”
“아무하고도 춤 안 춰도 돼. 델린 가문이 춤을 추지 않으면 그것도 특별하니까. 단,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절하는 걸 보여주는 거 잊지 말고.”
“그날 처음으로 평민들이 추는 춤 보게 될걸? 놀라지 말고 조심해. 표정 관리도 신경 쓰고. 걔들 완전 엉망이거든. 마시던 음료를 뿜을 수도 있으니까.”
달리아 델린의 머릿속으로 언니들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보다 몇 년 앞서 마법학교에 입학했던 언니들은 각자의 입학식 무도회마다 주인공으로 인정받았다.
델린가의 위상을 침범할 가문은커녕 조금이라도 유명했던 가문조차 없었으니 당연했다.
‘짜증 나.’
그런데 올해엔 이야기가 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이엘로스 가문의 에릭이 같이 입학했기 때문이다.
“에릭 이엘로스? 아쉽지만 단독 주인공은 안 되겠다, 달리아.”
“그래도 걔가 남자애라 다행이네. 어차피 에릭이 춤을 출 상대는 너밖에 없을 테니까.”
단독 주인공 대신 동반 주인공. 달리아는 깨끗하게 납득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 편을 오히려 흡족해했고.
그런데.
“…….”
무도회장을 가로지르는 달리아는 은은한 미소를 보여주는 중이다. 단아한 걸음걸이와 우아한 손동작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가문에서부터 철저히 훈련된 아름다움이었는데.
죄다 쓸모없는 것만 같았다.
‘재수 없어.’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그녀 내부에선 적개심이 가득 차올랐다.
달리아는 홀의 저편을 바라봤다. 거기엔 모든 사람의 이목을 빨아들이는 여자애가 있었다. 늘어뜨린 금발이 살짝 찰랑거리는 제국귀족.
달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클로이 위더스푼은 이쪽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달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클로이의 눈빛은 평민들에게나 보내는 눈빛과 비슷해 보였다.
“…….”
이제 클로이의 눈길이 향한 곳은 무도회장 한가운데였다.
일찌감치 파트너를 정한 평민 생도들이 춤을 추는 중이다. 저런 게 평민들의 춤이란 건가. 가볍고, 둔탁하고,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춤이다.
‘쟨 저게 신기한가?’
반면 클로이의 눈빛엔 흥미로 가득했다.
‘어차피 관심도 없으면서 연기하긴. 정말 가증스럽네.’
그러면서도 달리아는 은근슬쩍 클로이의 표정을 흉내 냈다. 평민들의 난잡한 춤을 처음 보는 귀족 영애의 선량한 호기심이 배어나도록.
또각또각.
다시 클로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음료수를 나눠 주는 탁자로 향했다.
제국귀족이 다가오자, 놀란 아이들이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트는 게 보였다.
‘평민들한테 관대하다는 걸 어필하는 건가?’
지금, 클로이 주변의 아이들은 모두 평민 출신들뿐이었다. 잠시 후, 살짝 들뜬 목소리로 묻는 클로이.
“이게 바로 카포닐리아구나. 맞지?”
“어, 으응.”
얼떨결에 대답하게 된 평민 생도가 잔뜩 당황했다. 이 틈을 놓칠세라, 달리아도 그 근처로 다가갔다.
“카포티니에서 제일 유명한 음료수라고 들었어. 특산품이라고.”
꽃 카포닐리아를 추출해 만들기 때문에 붙게 된 이름. 카포티니의 평민들이라면 누구나 즐겨 마시는 음료수였다.
다만, 평민들의 전유물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은 멀리했다.
“<서대륙 미식유람기>라는 책에서 본 적 있거든.”
클로이는 자연스럽게 지식을 뽐냈다.
모든 사람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위층에 있는 귀빈 일부도 난간 쪽으로 다가와 눈길을 던지는 중이었다.
“음, 진짜 맛있다!”
“마실 때, 조, 조심해야 돼.”
옆에 있는 한 평민 생도가 주저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이가 활짝 웃으며 반응했다.
“조심? 아, 맞아.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네.”
꽃 카포닐리아의 꽃말은 ‘온전한 마음’이었다. 꽃 고유의 효과 때문에 붙은 꽃말이었다. 꽃에는 염료를 벗겨내고 본래의 색으로 돌리는 성질이 있었다.
그런 꽃을 주재료로 하는 음료수였기 때문에, 옷이나 머리색을 염색한 사람들은 음용하면서 특히 주의해야 했다. 옷에 흘리거나 튀는 순간 곤란한 일이 벌어질 테니.
“물론 그 드레스에는 상관없을 거야…….”
또 다른 평민 생도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든 옷감에서 카포닐리아의 탈색 반응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귀족들의 옷감은 원료 자체가 고급이었기 때문에 탈색 반응이 없을 수도 있었다.
“나도 저거 한 잔 줘.”
그때, 달리아가 끼어들며, 옆에 있는 평민 생도에게 말했다.
고개를 슬쩍 돌려서 달리아를 바라보는 아이.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게 카포닐리아가 담긴 유리잔을 건넸다.
“자. 여기.”
달리아는 충격받았다.
‘나를 몰라본다고?’
당황스럽다.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에 모여 있는 입학생도 중에서 달리아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클로이한테만 빠져 있었다. 살면서 그 그림자도 구경하기 힘든 제국귀족의 등장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달리아는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관심을 끌 만한 일을 벌여야 한다.
그런 생각과 함께 달리아 델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먹잇감을 찾은 맹수처럼 어느 한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넓은 홀의 저편.
‘적당해.’
좀 멀리 떨어지긴 했지만, 클로이한테 집중된 관심을 뺏어오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늘진 곳에 서 있는 평민 생도가 하나 있었다.
‘저 아이랑 부딪치면서 불빛 쪽으로 넘어진다면… 그러면서 유리잔을 깨트린다면…….’
교묘한 마법도 필요했다. 유리잔이 깨지는 순간에 소리를 증폭하는 마법을 펼치는 것이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를 뚫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니까.
최근에 휘식을 내면화할 수 있게 됐으니 누군가에게 들킬 일도 없었다.
달리아는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카포닐리아를 홀짝홀짝 마시며 연신 감탄하는 클로이와 그 구경꾼들을 뒤로하고, 먹잇감을 향해 걸어 나갔다.
또각또각.
우아함을 유지하며 걸었다. 걸어가는 도중에 광대처럼 무도회복을 입은 평민 생도가 말을 걸어왔지만, 상냥하게 무시해 주었다.
“저기, 안녕? 난 오스카 투니오라고 하는데, 나와 춤추지 않…….”
“이런,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
또각또각.
그늘진 곳에 있는 먹잇감에 가까워졌다. 검은 머리에 수수한 무도회복. 가까이서 보니 외모가 썩 나쁘진 않다.
평민 생도인가? 아니면 가난한 귀족?
어쨌든 상관없다. 사람들이 날 주목하게끔만 하면 된다.
달리아의 걸음이 살짝 빨라졌다. 손에 들고 있는 유리잔 속 카포닐리아가 찰랑거렸다.
단아한 미소를 유지하며, 정확한 타이밍을 노리고 마법까지 준비했다.
소리를 증폭하는 휘식을 느릿하게 그려 나갔다. 그러면서 검은 머리 남자애 바로 앞에서 살짝 중심을 잃었다.
툭!
두 사람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어?”
뭔가가 잘못됐다. 부딪치는 그 순간, 남자애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그러더니 원래대로라면 옆으로 가냘프게 쓰러졌어야 할 달리아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바로 근처에 있는 사람들 눈에도 뜨이지 않을 만큼 절제된 동작이었다.
‘아씨! 왜! 왜 되는 게 하나도 없냐고!’
바닥에서 깨져야 할 유리잔은, 어느새 검은 머리 남자애의 손안에 안전하게 들려 있었다.
“…….”
무덤덤한 남자애의 표정.
자신의 무도회복을 내려다보는 중이다. 검은색이었던 무도회복의 일부분이 쏟아진 카포닐리아 때문에 탈색되고 있었다. 원래 회색이었는지, 조금씩 그 색깔이 드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리아는 짜증이 솟구쳤다.
“아이씨!”
아직도 아이들은 저쪽에서 클로이를 둘러싸고 있었고, 이쪽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야말로 단독 쇼가 되어 버린 것이다.
“후…….”
달리아는 일단 마음부터 다잡았다. 자칫 흥분해서 명예를 실추하지는 말아야지. 우선 눈앞의 남자애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미안해. 못 봤어.”
“괜찮아.”
“이런, 옷 색깔이 벗겨졌네. 이거 카포닐리아거든. 네 이름, 말해줄래? 내가 하인 통해서 무도회복 새로 보내줄게. 돈으로 변상해도 좋으면 그렇게 해주고.”
“신경 쓰지 마. 오늘만 입고 버릴 거였어.”
달리아는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무도회복을 입고 온 걸 보면, 저거야말로 모든 돈을 털어 구했다는 뜻이겠지.
“정말 괜찮겠니?”
“응. 비싼 것도 아니기도 하고.”
“그래,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 네 입장에서는 힘들게 구한 것 같아서 그래.”
“그래? 별로.”
염료가 벗겨진 무도회복이 신경 쓰이는지, 남자애는 그늘진 쪽으로 다시 몸을 옮겼다.
달리아한테서는 짜증이 조금씩 비어져 나왔다.
“괜히 찜찜한 거 싫으니까, 이름만 말해.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 평민 생도 맞지?”
“루든 포이넨. 네 맘대로 해.”
그게 끝이었다. 루든이라는 남자애는 떨어트려야 했을 유리잔을 달리아 손에 쥐여주고는 그대로 가버렸다.
그늘진 자리만 찾아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달리아는 금방 그 애를 잊었다.
* * *
루빈은 돌아다니며 쿠제를 찾았다. 위치를 알면 전음이라도 보낼 텐데. 암연으로도 감지가 되지 않는 걸 보면 근처에 없는 것 같았다.
‘달리아 델린이라고 했지…….’
아까의 부딪침을 떠올렸다. 왜 의도적으로 부딪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예상은 된다. 클로이한테 쏟아진 관심을 자기 쪽을 돌리려는 거겠지. 애들은 다 똑같다.
심지어 달리아는 걸어오면서 마법까지 준비했다. 팔찌 덕분에 눈앞에 그려지는 마나선을 훤히 보고 있던 루빈은 그 애가 원하는 대로 놔두지 않았다.
‘클로이는… 저기 있군.’
음료수 탁자 앞에서 한참 동안 있던 클로이는 이제 무리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다. 멀어지는 클로이에게 감히 먼저 다가가는 마법생도는 없었다.
그때.
루빈이 지켜보는 앞에서 흥미로운 구도가 만들어졌다.
루빈에게 부딪쳤던 달리아 델린이 서 있는 자리 앞으로, 에릭 이엘로스가 다가갔다. 하지만 에릭의 관심사는 달리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들 바로 근처에 클로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엇갈리는 화살표가 보이는 듯했다.
* * *
‘그래, 에릭이 남아 있었지.’
달리아 델린은 에릭을 찾아 나섰다.
에릭이라면, 그녀의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켜 줄 수 있었다.
이엘로스 가문과 델린 가문은 권위 있는 삼휘 마법사 가문으로서 지속적인 교류를 유지한 사이였다. 달리아만 해도 네다섯 살 때부터 에릭과 함께 마법을 배우며 자랐다.
에릭의 오만한 성격을 받아주기 힘들긴 했지만, 서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다르지 않았다.
“무도회장에서 보겠네, 달리아. 당연히 내 파트너가 되어줄 거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사교 모임에서, 에릭은 이렇게 말했다.
그날 달리아는 어깨만 으쓱일 뿐 확답을 주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엔 이미 무도회 파트너라는 확신이 자리 잡은 상태였지만.
“에릭.”
역시 에릭답게 그를 떠받드는 어중간한 귀족 애들을 뒤에 거느리고 다니는 중이었다. 달리아를 발견한 에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를 했다.
“오, 달리아? 안녕. 드레스 예쁘네.”
“오랜만이네. 기숙사에서는 못 봤으니…….”
달리아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던 에릭은, 그대로 그녀를 지나쳤다.
“……?”
“반가웠어.”
반가웠어? 그게 끝?
달리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에릭의 원래 목표였던 클로이가 서 있었다.
“클로이, 안녕. 드레스 예쁘네.”
달리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지만, 그 태도는 한결 더 진지했다. 에릭을 떠받드는 귀족 애들은 그저 경외하는 눈으로 에릭을 쳐다볼 뿐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생도들이 이쪽을 집중하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삼휘의 기수인 이엘로스 가문과 모든 마법명가의 정점에 있는 제국귀족 위더스푼 가문의 만남이라니.
클로이를 계속 주시하던 귀빈들도 난간 쪽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달리아는 자존심이 더 처참하게 구겨지는 걸 뼈져리게 느꼈다. 애초부터 에릭은 클로이한테 춤을 신청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에릭의 부드러운 한마디가 이어졌다.
“어렸을 때, 기억나? 마법부에서 개최한 대연회 때 말이야.”
“으음…. 글쎄. 네 이름이 뭐더라?”
에릭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상대가 제국귀족 위더스푼이라면 이 정도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에릭. 에릭 이엘로스야.”
“아,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한데.”
에릭은 마음이 급해졌다. 입학생도 전체가 모인 이 자리에서, 먼지 같은 존재로 각인될 순 없었다. 얼른 기억할 만한 단서를 제시해야 했다.
“그러면 그때, 나랑 춤췄던 거 기억해? 그 춤 있잖아.”
“아!”
“기억 나지?”
“풋, 그렇게 말하니까 확실히 기억난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에릭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한 채 손을 내밀었다. 춤을 신청하는 것이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모든 생도들이 아주 잠깐 숨을 참는 듯했다.
“지금 춤추자는 거야?”
“응, 예전처럼.”
바로 곁에 있던 달리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래서 클로이가 난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뱉는 한마디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미안, 에릭. 지금은 춤추고 싶지 않거든.”
“…어?”
“난 다른 친구들 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아니, 크, 클로이…….”
에릭이 말을 더듬으며 몇 마디 더 건네려 할 때,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드는 누군가가 있었다.
에릭을 살짝 밀어내며 클로이에게 다가드는 여자. 클로이의 시녀, 셀레스네였다.
“이게… 지금, 뭔……?”
시녀의 난입에 에릭이 어처구니없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무도회는 오직 마법생도들만을 위한 자리였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교직원들도 무도회장에 들어가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결례를 범하는 셈이고, 시녀 또한 그걸 인지했지만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에릭 도련님. 중요한 일이라서요.”
그러더니 시녀는 클로이의 귀에다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한마디 한마디 이어질수록 클로이의 얼굴에선 전혀 뜻밖의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이야? 정말로 걔가 살아 있는 거 맞아?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그럼요! 아가씨. 정말이에요.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시녀가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달리아의 눈길도, 다른 생도들의 눈길도 그쪽으로 향했다.
홀의 저편, 그늘진 곳.
달리아는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거기 서 있는 남자애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클로이가 먼저 나섰다.
클로이는 금발을 찰랑거리며, 흥을 감추지 못했다. 제국귀족의 기품과는 거리가 먼 걸음걸이로 뛰다시피 다가갔다.
그녀를 중심으로, 모든 입학생도가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뜻밖의 흐름. 지켜보는 마법생도들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려 애썼다.
달리아가 아닌 클로이에게 춤을 신청한 에릭. 그걸 거절한 클로이는, 누군지도 모를 남자애한테 다가가고 있다.
“야, 너. 쟤 누군지 알아?”
“쟤? 사감한테 끌려갔던 애 아냐?”
“아, 기억난다. 기숙사 첫날에.”
달리아의 귓가에 주변 아이들의 목소리가 이리저리 떠돌았다.
넋 나간 듯 서 있는 에릭을 바라보는 달리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클로이한테 보기 좋게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관심을 잃은 에릭은 몸을 부들부들 떠는 중이었다.
남자 생도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다시 쏟아졌다.
“지금 저 둘이 무슨 얘기를 저렇게 하는 거지? 너 들려?”
“야, 야! 지금 내가 보는 게 현실이냐, 지금! 클로이가 손을 내밀고 있잖아!”
“왜? 뭘 빚졌나?”
“이 멍청아! 춤추자는 거잖아. 클로이가 저 검은 머리한테 춤을 신청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