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04)
암살검가 로이넨-104화(104/258)
제104화. 무도회 (2)
클로이의 발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또각또각.
어째선지 음악 소리는 살짝 잠잠해진 상태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클로이가 루빈 앞에 섰다. 제대로 마주하는 건 2년 만이었다. 귀족 특유의 오만함 대신, 천진함이 묻어나는 건 여전했다.
다만 루빈을 바라보는 지금의 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더는 모르는 척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
클로이는 처음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방음막이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클로이의 간결한 손짓과 함께 만들어진 방음막. 내면화된 휘식이었지만, 글레이튼의 팔찌를 착용한 루빈만은 알아보았다.
방음막은 한 겹이 아니었다. 두 사람과 떨어져 있는 셀레스네도 방음막을 겹치도록 만들어주며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도록 해주었다.
그제야 클로이의 두 입술이 떨어졌다.
“맞네.”
“응?”
“왜 알은체 안 했어, 루든?”
“아, 클로이. 네가 계속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어서.”
진심 반 거짓말 반이었다. 알고 지낸 사이라며 말을 걸었다면 누구든 길을 열어줬을 것이다. 다만 루빈이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다행히 클로이도 별말 없이 넘겼다. 그녀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2년 만에 몰라보게 성장한 루빈을 살폈다. 그 눈길엔 놀라움뿐만 아니라, 걱정도 배어 있었다.
“다친 데 없어? 괜찮은 거야?”
“다친 데라니?”
“필리몬드에서 아무 일도 없었냐는 뜻이야.”
루빈이 대답을 미루는 사이, 클로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 필리몬드에서 말이야. 가신들이 직접 확인을 했는데… 셀레스네도 갔었고…….”
혼자서 주절주절 말하는 클로이에게 루빈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몸짓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심지어 클로이는 모르는 내막까지도 짐작이 됐다.
‘내가 필리몬드를 떠난 뒤, 본가에서 뭔가 조치를 취한 거겠지.’
일주일 동안 필리몬드 축제를 즐기라고 했던 어머니의 지시가 떠올랐다. 아마 그 무렵 본가의 가신들이 움직였을 터.
규모가 크거나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에 개입된 상황이라면 으레 뒤따르는 작업이었다. 가짜 시체를 만들어내고, 사망 사실을 조작하는 건 암살검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클로이.”
“……?”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 할 거 같은데.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어.”
뒤늦게 클로이도 깨달았다.
지금 홀 안에서 펼쳐져 있는 구도만 보자면, 두 사람은 마치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입학생들과 귀빈들이 관람 중이었고.
하지만 클로이는, 주변의 눈길 따위 신경 써본 적 없는 제국귀족의 영애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끄떡도 안 했다.
“아무래도 꼭 확인해 봐야겠어, 지금 당장.”
“확인이라니?”
“네가 정말 내가 아는 루든 포이넨이 맞는지.”
그러더니 클로이는 손을 내밀었다.
“나랑 춤을 춰. 춤을 추는 동안 너를 확인할게. 흑마법이 개입된 건 아닌지, 네가 정말 살아 있는 몸인지.”
“…….”
때마침, 루빈의 머릿속으로 쿠제의 조급한 음성이 울렸다. 루빈이 찾고 있던 쿠제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쿠제는 귀빈들이 옹기종기 모인 2층 난간 앞에 서서, 암연을 기반으로 한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쿠제, 어떻게 된 거야? 한참 찾았어.
-셀레스네 님한테 붙잡혀서 그만…. 한참 취조당하고 왔습니다. 심문 마법까지 쓸 기세여서, 저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적당히 둘러서 말했습니다.
-그래서 클로이가 날 알아차린 거구나.
-클로이 아가씨께선 필리몬드 사태 이후 저희가 죽은 줄만 알고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하더군요…….
웬 죄책감? 궁금증이 일었지만, 태연하게 쿠제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클로이는 여전히 손을 내밀며 춤을 신청하고 있었으니.
왜 죄책감을 느끼는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클로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했다.
루빈이 클로이가 내민 손을 감싸면서, 두 사람의 춤이 시작됐다. 입학생도들의 경악스러운 눈빛과 수군거림 또한 마찬가지.
“말도 안 돼. 위더스푼이 먼저 춤을 신청한다고?”
“쟤 뭔데? 유명한 가문 애야?”
“그건 모르겠고, 3등귀족이라고 하던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둘은 입학생도들을 가로질러 무도회장 가운데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음악의 결이 살짝 바뀌었다. 좀 더 장중해진 음악 속에서, 둘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너… 진짜 루든 맞네. 2년 사이 마나가 좀 어지러워진 것 같긴 하지만… 맞아. 정말 다행이다.”
“내 마나를 감지한 거야? 아, 블루캣호에서 네가 내 마나가 자리 잡도록 도와줬었지.”
“응, 기억하네! 여하튼, 정말 다행이야.”
클로이에게 마나가 어지럽게 느껴졌던 건 칙명부가 주입한 가짜 마나 때문일 터.
하지만 클로이한테는 눈앞의 소년이 루든이라는 사실만 중요했다. 흑마법에 의해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루든 포이넨 말이다.
이때부터 클로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루든, 어떻게 마법학교로 들어오게 된 거야?”
“네 덕분이지. 물론 셀레스네가 나한테 마법사는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하긴 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셀레스네가 한 말은 잊어도 돼. 여긴 카포티니잖아. 누구든 재능만 있으면 마법사로 키워주는 곳이니까. 잘 결정했어.”
두 사람은 춤을 추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끼리의 소소한 대화였다.
“기숙사 룸메이트는 어때?”
“괜찮은 친구야. 아주 재밌고 특이한 녀석인데, 마법 능력이 엄청 뛰어나.”
“그래? 이름이 뭐야?”
“오스카 투니오.”
“투니오?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네.”
적당히 이야기가 오갔으니, 이쯤에서 춤을 멈춰야 할 때였다. 이대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빈은 슬슬 춤을 끝낼 타이밍을 가늠했다.
“올해 입학생들 중에는 뛰어난 애들이 많대. 에릭 이엘로스, 달리아 델린은 너도 들어봤지? 거기에 믈라뉴 가문과 헤르만 가문도 있고.”
“아마 오스카가 그 애들보다 더 뛰어날걸.”
“네 룸메이트가 그 정도야? 에릭보다도 더?”
“아마도.”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기대되는데? 물론 루든 네가 제대로 못 알아봤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클로이가 보기에 루빈은 마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란 게 없다시피 한 아이였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하지만 비록 마법사가 되어본 적은 없어도, 회귀 전 여러 마법사들과 대면해 보았던 루빈이다.
‘오스카의 경쟁자는 에릭도 달리아도 아닌 클로이가 될 거야. 아, 페르 로렌치니도 있었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페르. 암살자들한테 공포감을 심어줬던 그 광기의 마법사라면 또 알 수 없다. 마법생도 시절은 얼마큼의 경지였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루빈은 자기도 모르게 지난날을 떠올렸다.
한 번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저 멀리 떨어진 전투 현장에서 오롯하게 서 있던 그 푸른 머리칼의 마법사.
처음에는 붉은 머리칼로 착각할 만큼, 온몸을 암살자의 피로 물들였던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런, 실수했네.”
페르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다 보니, 루빈은 발의 움직임을 놓쳐 춤을 잠깐 멈춰야 했다. 클로이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루빈을 이끌었다.
“어쨌든! 같은 반 됐으면 좋겠다. 너도, 오스카라는 그 애도.”
클로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마법생도들 틈에서 루빈의 시선을 잡아끄는 한 사람이 느껴졌다. 방금까지 얘기했던 장본인. 오스카 투니오였다.
“클로이. 저기, 내 룸메이트 왔어. 에릭 옆에 있는 저 초록 머리 남자애 보여?”
“에릭 옆에… 초록 머리…? 아! 쟤가 오스카구나?”
달리아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오스카는 어딘가에서 상처를 달래곤, 이제야 막 상황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여 있나 하면서 무도회장 쪽으로 걸어오다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제국귀족과 춤을 추는 룸메이트라니!
“……!”
장난치는 것조차 잊은 오스카는 들고 있던 유리잔마저 떨어트렸다.
쨍그랑!
“하…. 오스카한테 엄청 시달리겠는데.”
“저 음료수 카포닐리아인 거 같은데? 저거 손에 묻히고 옷 만지면 안 될 텐데.”
깨진 유리잔을 주섬주섬 치우는 오스카 손에는 카포닐리아 음료가 잔뜩 묻어 있었다.
클로이의 걱정대로, 염료를 벗겨내는 성질의 음료였지만, 다행히 오스카가 입은 광대 같은 무도회복은 말짱했다. 디자인이 워낙 별로이긴 해도 푸른색 옷감 자체는 고급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
“왜 그래, 루든?”
클로이는 갑자기 춤을 머문 루빈을 올려다봤다. 루빈은 놀란 눈으로 오스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클로이. 아무래도 우리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춤을 못 추는 것 같아.”
“응? 다들 잘만 추고 있는데?”
“잠깐만.”
루빈은 담담하게 말하며 클로이와 잡은 손을 풀어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클로이와의 회포 풀기가 아니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지?’
저벅저벅.
루빈은 오스카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지금, 오스카는 카포닐리아가 묻은 손으로 머리칼을 털어내는 중이었다.
카포닐리아 꽃 고유의 성질로 인해, 손길에 닿은 오스카의 머리카락 색깔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페르가 신분을 위장할 수도 있다는 것. 머리 색을 바꿨을 수도 있다는 걸…….’
루빈의 완벽한 실수였다.
때마침 오스카는 손에 카포닐리아가 묻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머리 쪽에서 손을 뗐다. 실수를 되돌리긴 이미 늦어버렸지만.
“루든!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냐? 네가 어떻게… 아니지, 아니지. 위더스푼의 영애께서 왜……?”
“오스카. 너 머리 색이 변했어.”
“아, 이런! 원래는 카포닐리아로 벗겨질 리 없는데, 걸어둔 마법까지 다했나 봐.”
오스카는 멋쩍게 웃었다. 머리를 염색할 때 염료를 쓰는 것도 모자라, 마법까지 썼다는 의미였다.
그 이유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 오스카의 본래 머리 색이 푸른색이라는 게 중요하니까.
‘넌… 누구지?’
루빈은 당장 묻고 싶었던 말을 참았다. 일단은 침착해야 한다. 일단은.
* * *
무도회장의 위층에 마련된 귀빈들의 공간.
무도회가 시작된 뒤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 그대로인 것 같지만 미묘한 긴장감이 내리깔렸다.
도대체 저 흑발의 소년은 누구인 건가. 위더스푼 가문의 막내딸이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소년과 춤을 춘 뒤로, 모든 귀빈들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아메릭마나 마법학교에선 남성이 무도회 춤을 승낙하는 방식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엔, 클로이 아가씨께서는 그런 형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 생도의 옷만 보자면, 평민 생도가 확실할 텐데요.”
“3등귀족이라곤 하는데, 옷에 음료수가 쏟아져 있더군요. 도대체 위더스푼 영애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으니, 원.”
“중요한 건, 저 검은 머리 생도가 제국귀족 아가씨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는 거 아닙니까?”
물론 아무리 그 이야기를 다루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귀빈들은 자기들 옆에 서서 술잔을 홀짝이는 쿠제라는 이름의 사내가 루빈의 사람이란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귀빈들 중 쿠제와 루빈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클로이의 시녀인 셀레스네와 칙명부 관리요원 로젠탈러.
“…….”
때마침 쿠제와 눈이 마주치자, 로젠탈러가 이쪽을 향해 술잔을 치켜세웠다.
일종의 신호인 셈이다.
루빈이 제국귀족과 연결되어 있을 줄 몰랐고 그래서 무척 놀랐으니, 루빈의 로이넨서로서 나중에 정확히 설명해야 할 거라는 신호.
쿠제는 남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쿠제,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해 주십시오, 도련님.
조금 전 루빈과의 전음을 떠올렸다. 클로이와의 춤을 끝낸 뒤, 루빈은 쿠제를 불러내어 지시를 내렸다.
“로젠탈러를 관찰해. 그가 누구에게 다가가는지 빠짐없이 확인해야 해. 분명 아무 이유도 없이 입학식에 오지는 않았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네, 도련님.”
“내일부터 투니오 가문에 대해 알아봐 줘.”
그러면서 루빈은 변신한 티나를 통해 쪽지 한 장을 전달해 왔다.
거기엔 루빈이 그동안 파악한 오스카 투니오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적혀 있었다. 물론 출처는 오스카와의 대화가 전부였다.
“…….”
오스카 투니오라면, 도련님의 룸메이트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는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는데?
그러나 쿠제는 조사의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루빈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알아야 할 때가 오면, 설명해 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서점에만 머무르느라 답답하던 차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임무라 생각하며 겸허히 받아들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