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20)
암살검가 로이넨-120화(120/258)
제120화. 검은 잎 (2)
“하네케, 왜 암살검가에 배신자가 없는 줄 아세요?”
한 줌의 빛도 들지 않는 지하의 공동. 눈을 감은 루빈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내면세계에 있는 하네케였으니, 대답할 목소리가 없으리라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루빈이 서 있는 이곳은, 목소리가 있었다 해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만큼 시끄러웠다.
휘이잉!
루빈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찢을 때마다, 파공음이 울어댄다. 핏빛서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리가 휘몰아치고, 흑칠의 오러에서는 열기가 방출된다.
영하의 공간에서 작열하는 검신.
이 상반된 두 힘을 통제하는 루빈의 유려한 움직임이, 밀폐된 공간 안에 가득 울리고 있었다.
-글쎄. 배신자가 왜 없을까. 혹시 쿠제가 만들고 있는 ‘검은 잎’ 때문인가?
“네, 맞아요.”
내면세계에서는 검투가 한창이었다. 휘몰아치는 하네케의 공격을 모두 받아내는 루빈. 그러다가 두 눈을 번뜩였다.
그는 현실 세계에서도 동일한 동작을 펼쳤다.
내면과 현실이라는 두 겹의 움직임.
집중력이 곱절은 필요했고, 쌓이는 피로는 배가됐다. 하지만 그만큼 성장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계속 검을 맞부딪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위층에 있는 두 가신의 대화처럼 여기서도 주제는 ‘검은 잎’이었다.
“이 세상엔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많은 비약들과 마법들이 있죠. 하지만 그 모든 걸 합쳐도 ‘검은 잎’에 비할 수는 없을 겁니다.”
양성 과정 중에 수많은 고문과 약물을 견뎌냈던 암살자들도 결국엔 ‘검은 잎 단계’에서 모든 진실을 토해내고 만다.
그건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수준의, 끝없는 고통과 공포의 늪이니까.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군.
“왜죠?”
-검은 잎 앞에선 누구라도 진실을 말한다고 했지. 그럼 암살검가의 일원들은? 누군가 악용하여 그들에게 먹이면, 암살검가의 비밀이 온 세상에 폭로되지 않겠나?
지금껏 암살검가의 비밀이 드러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때, 하네케의 검이 그의 지적만큼이나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루빈과 똑같은 흑칠의 오러였지만, 7성에 이른 대장군의 검격은 내면세계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면세계가 크게 요동치면서 현실의 루빈까지 휘청거리게 했다.
“후.”
겨우 자세를 다잡은 루빈은, 하네케의 지적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누구든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약이 있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암살자에게 쓰였을 법도 하니까.
하지만.
“검은 잎 단계를 한 번 거친 암살자는, ‘밀고’에 면역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밀고하거나 폭로하려고 하는 순간, 내재된 검은 잎의 효과가 발현한다는 뜻이에요.”
‘검은 잎 단계’는 사실상, 시험을 거치는 자에게 검은 잎의 뿌리를 박아 넣는 과정이다.
심긴 뿌리는 복용자의 내면의 깊이를 가늠하고, 가장 깊은 곳에 무형의 칼날을 심어놓는다.
암살자가 임무 중에 붙잡혀, 칙명부나 암살검가에 대한 진실을 시험당하게 될 경우, 그 칼날이 작동하는 것이다.
-발설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인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암연을 지닌 자만이 그렇게 되죠.”
암살검가에 대한 비밀을 밀고하는 순간, 혀가 검게 타들어가며 죽게 되는 것.
이걸 두고 ‘검은 잎’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당연히 이걸 아는 자는 암살검가의 일원들밖엔 없다.
-이상하군.
내면세계에서, 루빈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암살검가의 검식을 펼친다. 하네케의 뺨에 상처를 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
동시에, 현실 세계의 캄캄한 공간 속에서는 루빈의 일격과 함께, 핏빛서리가 작은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대장군부에서 여러 암살 사건들을 조사한 적이 있었네. 몇몇은 내가 직접 살폈고.
하네케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 당시엔 암살검가의 소행이란 걸 몰랐지만, 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암살검가의 임무로 보이는 사례들이 있는 듯했다.
“몇몇은 진짜 암살검가가 관여한 사건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칙명부는 대장군부의 군인들마저도 주기적으로 갈아 치웠으니까.”
당연히 실패한 암살 사건도 많았다. 그때마다 암살자의 시체를 철저히 조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혀가 검게 물든 암살자의 시체는 하네케의 기억에 없었다. 그만큼 괴이한 보고였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기억해 두었을 텐데.
“그야 간단합니다. 붙잡혀 진실을 밀고하는 대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거죠.”
-충성심 때문인가?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충성심이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진실을 밀고하면, ‘검은 잎’에 따라 어쨌든 죽고 만다. 다만, 죽기 직전까지 지금껏 자신이 경험했던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보다 편안한 죽음을 위해.
-…비극적이로군. 그래서, 저 약으로 뭘 어찌할 겐가?
“가이젠 교수를 찾아갈 겁니다. 그리고 정보를 얻어내야겠죠. 왜 칙명부와 결탁했는지, 왜 페르를 죽이려 하는지요.”
‘검은 잎’은 암연이 없는 자를 죽이지 못한다. 진실을 캐낼 뿐이다. 하지만 암연과 상관없이, 극한의 공포와 고통만은 동일하다.
루빈의 예상대로라면, 가이젠은 차라리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 * *
마법학교의 개학 첫 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주말이 되면서, 생도들은 카포티니를 벗어나 인근 도시까지 나가보는 자유를 누렸다.
외박이 가능했기에, 귀족 가문 자제들을 집으로 모셔 가기 위한 하인들이 마탑지구 밖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반면, 가이젠 교수의 실험실은 주말임에도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톰슨! 이 마핵초, 뿌리 손상된 거 안 보여?”
“죄송합니다.”
“도대체 토요일 아침부터 죄송하다는 말만 몇 번씩 듣는지 모르겠군!”
가이젠 교수의 힐난에 톰슨 조교가 움찔거렸다.
가이젠은 침이라도 뱉을 것처럼 입술을 오므렸다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였다. 그의 신경질적인 동작에 약제 도구 일부가 우당탕탕 떨어지기도 했다.
톰슨 조교는 울상이었다. 까다로운 가이젠의 조교가 된 뒤로 힘든 적이 많았지만, 최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화요일에 있었던 C반에서의 수업 이후. 가이젠 교수는 내내 이를 갈았다. 그날 이후로 마핵초라도 씹어 먹을 것처럼 약제 실험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마법약을 만들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톰슨에게조차 그 제작 과정을 공개하지 않았다.
‘또 신입생도들 전체 대상으로 뭘 하려는 건가?’
그 정도로만 추측할 뿐이었다. 제약 중인 마법약 양만 보면, 신입생도 전원이 복용하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그럼, 톰슨.”
“예, 교수님.”
“오늘은 주말이니까…….”
톰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주말 근무에서 벗어나는 건가?
“두 시간 줄 테니, 나가서 점심부터 해결하고 와.”
“아…….”
“왜, 모자라나?”
“아, 아닙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빨리 오라는 뜻은 아니야. 나도 주말 내내 네 얼굴만 보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거든. 딱 두 시간 후에 오면, 곧바로 마핵초 분열 작업부터 시작하도록.”
그럼 그렇지. 톰슨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실험실을 나섰다.
가이젠은 교수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작업대에는 그가 만들고 있는 수백 병의 마법약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 그가 준비하는 것은 ‘자백’ 효과를 지닌 마법약이었다. 이걸 복용한 자는 뭐든 고백하게 되어 있다.
오래전 저지른 범죄부터,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던 음흉한 생각까지.
더 나아가 본인이 ‘페르 로렌치니’인지, 혹은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까지도 술술 말하게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자백 마법약에 담긴 마법 술식은 간단치 않다. 혹여 복용자의 저항력을 훨씬 웃도는 술식이 담기면, 신체나 정신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마법약의 농도를 달리해야 했다.
이는 이미 첫 수업에서 측정한 생도들의 저항력 수치에 맞춰 제조했으니,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었다.
‘문제는 루든, 그놈인데.’
저항력을 측정하지 못한 유일한 신입생도.
물론 다른 학생들의 것을 측정했으니, 녀석 하나쯤 건너뛰어도 상관은 없지만.
‘건방진 자식.’
루든의 도전적인 태도가 다시금 떠올랐다. 마법약에 전력(全力)의 절반밖에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그 오만한 모습이.
마법약에 취해, 온갖 추잡한 이야기를 술술 뱉어내는 그 모습을 반드시 보고 싶었는데.
“그놈은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
가이젠은 혼잣말을 하면서 눈앞에 놓인 병 하나를 움켜쥐었다.
이 병에는 자백 마법이 가미되어 있었다. 희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액 그대로의 마법약이.
그때.
똑, 똑, 똑.
“……?”
누군가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톰슨이 그새 돌아온 건가? 가이젠은 귀찮음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어먹을 조교 놈이 맞는다면 한차례 호통을 쳐줄 심산이었다. 뭣 하러 노크를 하느냐고, 이참에 제대로 혼쭐을…….
“……?”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공손하게 인사를 해오는 루든의 모습에, 가이젠은 눈만 끔뻑였다.
“무슨 일이지? 루든 생도.”
“연구실에 가보았는데 여기 계신 걸로 표시가 되어 있어서요.”
“실험 중이었다. 주말인데 왜 학교에 남아 있는 거지?”
“죄송하지만, 안에서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공손해 보이면서도 은근한 오만함이 밴 태도. 그렇다고 지적하기도 애매했다. 못마땅했지만 들여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한창 약제가 진행되고 있는 작업대를 발견한 루든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마법약을 만들고 계셨군요. 이미 마법 술식이 가미된 건가요?”
“지금은 농도를 조절하는 중이다. 아무 의자에나 앉아라.”
“예, 교수님, 감사합니다.”
루든은 교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여전히 신기한 광경에 매료된 얼굴이었다. 순수하게 감격한 것 같았고, 가이젠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동경심까지 배어났다.
하긴, 보조학생을 자처한 놈이었으니 약제 하는 과정이 흥미로울 테지. 가이젠은 코웃음 치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보조학생으로서 다음 주 수업 때 교수님을 도울 일이 있나 궁금해서 왔습니다.”
“그래? 아직 우리 학교 시스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군, 루든 생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얼굴의 루든.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기에, 가이젠은 그러려니 했다.
“수업표는 매주 새롭게 구성된다. 수업이 요일마다 반복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 잘 생각해 봐, 자네한테는 아직 진행되지 않은 수업도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운신마법학’과 ‘공격마법학’ 수업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가이젠 말처럼,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수업은 일주일마다 새롭게 구성된다.
이번 주 화요일에 ‘마법약제조학’ 수업이 진행됐다고 해서 그다음 주에도 동일한 시간에 그 수업이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쩔 땐, 일주일 내내 특정 수업으로만 가득 채워질 수도 있었다.
이는 형식적이고 편의주의적 교육이 아닌, 실리적이고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방식이었다.
“어쨌든, 다음 주에는 마법약제조학 수업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 이미 기숙사에도 다음 주 수업표가 게재되었을 텐데?”
“미처 확인을 못 했습니다.”
“알았으면 이만 돌아가라.”
가이젠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나 작업대로 다가갔다. 그럼에도 루든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 더 할 말이라도 있나?”
“…교수님, 실은 제가 마법약을 한번 만들어봤습니다.”
그때, 녀석이 들고 있는 주머니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루든은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끌렀다. 안에서 나온 건 손가락만큼 작은 병이었다.
“네가 마법약을 만들 줄 안다고? 입학 전에 누구한테 배우기라도 했던 거냐?”
“교재를 보고 해보았을 뿐입니다.”
“그래?”
가이젠은 병을 받아 들었다. 어떤 마법이 얼마큼의 농도로 들어가 있는지, 눈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감별해 주는 마도구가 있긴 했지만, 하필 지금은 연구실에 가져다 놓은 상태였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고 마법약을 만들었다? 가이젠은 루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마법약제조학은 책을 보고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마법이 들어가 있지?”
“…자백 마법입니다.”
가이젠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우연일까?
“재밌는 우연이군. 마침 나도 똑같은 마법약을 만들고 있었다.”
가이젠은 원액 상태의 자백 마법약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걸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우연 치곤 신기하네요.”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자백 마법은 네겐 어려운 술식이었을 텐데? 그걸 마핵초에 각인했다니 믿지 못하겠군.”
“그래서 교수님께 가져온 겁니다. 제가 제대로 제약한 건지 확인해 주시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이젠은 순순히 루든 맞은편에 앉았다. 망설이지 않고 루든의 마법약 뚜껑을 땄다.
다만 그걸 곧바로 들이켜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이 만든 마법약을 루든 쪽으로 내밀었다.
“저번 수업이 생각나는군. 그때 네 저항력 수치를 알아내지 못했는데.”
그러곤 제 마법약을 살살 흔들었다. 지난 수업에서 마셨던 게 20단계였다면, 이건 그 두 배였다.
가이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마법약. 심지어 자백 마법을 각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의 마나의 환은 지금도 회복 중이었으니.
“마침 잘됐군. 온 김에 네 저항력 수치를 확인해 보면 되겠어.”
루든의 얼굴에 겁먹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게 연기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가이젠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라, 루든 생도. 저번 수업처럼 위험한 마법 효과는 없을 테니까. 어찌, 마셔 볼 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