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21)
암살검가 로이넨-121화(121/258)
제121화. 검은 잎 (3)
“마시겠습니다.”
루든의 덤덤한 대답이 이어졌다. 가이젠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는 겁에 질린 표정이더니, 냉큼 받아들이는군.
“그래. 네 것과 직접 비교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라. 운이 좋은 거지.”
그러면서 가이젠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가져왔다.
기다란 원통형의 병이었고, 마법약으로 보이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가이젠은 그 안에 유리막대를 잠깐 담갔다가 그걸 자신의 ‘자백’ 마법약병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상태로, 유리막대를 휘저었다. 내부에서 뭔가가 섞여가는 게 보였다.
“그건 뭔가요?”
“희석제다. 농도를 옅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망각’ 마법약의 일부를 혼합하는 것이다.
제대로 발현된다면, 이걸 복용한 루든은 모든 사실을 술술 털어놓고도 정작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희석시키면 또 제 저항력 수치를 확인하지 못 할 수도 있는데요, 교수님.”
“또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이군. 약간만 희석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럴 리가 없지. 가이젠의 전력을 담은 마법약이었으니.
가이젠은 마법약 내부에서 ‘망각’과 ‘자백’이 고루 섞였음을 확인하고는, 약병을 루든에게 건넸다.
루든은 일말의 경계심도 없이, 곧장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다.
“…….”
그 순간, 루든의 몸에서 힘이 푸르륵 빠져나가는 것이 확실하게 보였다. 처음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는데 어느새 중심이 허물어졌다.
가이젠은 팔짱을 끼고 몸을 벽에 비스듬히 기댔다. 그 상태로 루든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마법 효과 ‘자백’의 발현 시점은, 3분 뒤였다.
“루든 포이넨.”
마침내 시간이 되었을 때, 가이젠이 호명했다.
“…….”
침묵. 그 사실에 가이젠의 입가로 미소가 생겨났다. 자백 마법에서 호명에 대한 침묵은 좋은 징조였기 때문이다.
즉, 마법이 제대로 발현되어 심층(心層)까지 침투했다는 의미였다.
“루든 포이넨. 이제 진실을 말할 수 있겠나? 한 점의 거짓도 없이,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말할 수 있겠나?”
가이젠은 잠자코 기다렸다. 이제 이어질 대답에 따라 마법의 최종적인 발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윽고, 루든의 입술이 들썩이며 나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예,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후우…….”
제대로 됐다. 가이젠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서둘러야 해.’
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이 자백 마법은 신입 마법생도 전원을 대상으로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마법약의 지속 시간을 그리 길게 잡지 않았다.
문답이 두세 번 오가는 사이에 마법약의 기운은 자연스럽게 소진될 터.
그랬기에, 애초부터 가이젠의 질문도 페르 로렌치니를 찾아내는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네 이름, 루든 포이넨은 본명이 맞느냐?”
“…아닙니다.”
여유롭게 등을 기대고 있던 가이젠이 사뭇 진지해지며 상체를 앞으로 뺐다.
본명이 아니다?
그저 추측뿐이던 생각이 확신이 되려는 순간이다. 그의 등줄기에 서늘한 한기가 생겨났다.
가이젠은 루든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
“그럼, 본명은 뭐지?”
“페르 로렌치니.”
“…허.”
루든이 페르라고? 자신이 찾아 죽여야 하는 그 페르 로렌치니란 말인가?
모든 게 너무 쉽게 풀려나가는데도, 가이젠은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자신이 만든 마법약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그는 대놓고 입 밖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하!”
역시 자신의 짐작이 맞았노라고, 가이젠은 흡족해했다. 애초부터 이 루든이라는 놈은 모든 면에서 기이했다. 말도 안 되는 저항력에, 위더스푼과의 친교까지.
아니, 그러면 위더스푼도 페르와 관련해 뭔가 있다는 말이 되나? 게다가 이놈은 베니테즈가 선점한 학생인데, 그러면 베니테즈까지도 연관되어 있다는 뜻?
이러저런 의문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그걸 찬찬히 따져볼 시간이 없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지속시간을 길게 해둘걸.’
교수는 루든의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페르를 찾았으니 이제는 제거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루든을 죽일 방법까지 준비해 두진 않았다. 이토록 쉽게 해결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난데없이 모든 매듭이 풀려버린 거다.
물론 당장 이 자리에서 공격마법으로 죽일 수도 있지만.
‘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지.’
실험실에서 생도를 죽인다는 건 위험한 짓이었다. 용의자로 자신이 지목될 게 빤했다.
더군다나 시체를 어찌 처리할지 계획이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페르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은밀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많다. 천천히 준비하면 될 것이다.
‘이제 곧 깨어나겠군.’
루든의 목에 댔던 손을 슬쩍 떼어내는 가이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 *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실험실에 울렸다.
“…….”
루빈은 감았던 눈을 떴다. 넓게 펼친 그의 암연으로, 실험실 밖으로 나간 가이젠이 복도를 걸어가는 게 느껴졌다.
저벅저벅.
마법약은 통하지 않았다. 전부 루빈의 간단한 연기였을 뿐이다. 마법약을 과신하는 교수를 속이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그는 암연의 존재 자체를 모를 테니까.
물론 루빈의 사전 준비가 철저한 덕도 있었다. 가이젠 교수의 주말 일정을 숙지했고, 전날에는 실험실에 직접 틈입하기도 했다. 덕분에 선반에 비치된 마법약들까지 모두 파악해 놓을 수 있었다.
희석제라며 섞어 넣었던 약물이 실은 망각 마법약이라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었다.
‘돌아온다.’
루빈의 암연 위로 복도를 걸어오는 인영이 나타난다.
다시 문 앞에 선 가이젠.
지금까지는 가이젠이 심문의 주체였다면, 이젠 루빈의 차례였다
문이 열리자, 루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어느새 그 모습은 혼란에 빠진 어수룩한 생도로 변했다.
“교수님…….”
“깨어났군.”
“머, 머리가 아픕니다. 꺠질 듯이요.”
“이걸 마셔.”
루빈은 가이젠이 건넨 음료를 받아 들이켰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래, 그럴 거다. 아무래도 마법약의 수준이 네 저항력을 훨씬 뛰어넘은 것 같군.”
“…….”
“기억 못 하겠지만, 너는 보조학생으로서 내 자백 마법을 미리 체험했다. 희석을 했는데도 마법약이 약간의 기억 손상을 일으킨 모양이군.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흔히 있는, 경미한 부작용이니까.”
“…그렇군요.”
“자, 이제 볼 일은 다 끝난 거 같은데?”
가이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만 실험실을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는 당연히 루든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거라 예상했다.
“저, 교수님? 아직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았는데요.”
“부탁이라니?”
“교수님은 제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본 자백 마법약을 시음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가이젠이 회색머리를 쓱쓱 다듬었다. 망각마법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건가? 망각마법에 의해 실험실에 온 목적마저 잊을 줄 알았는데.
“…….”
루빈은 뚜껑이 열려 있는 자신의 마법약을 가리켰다.
가이젠은 잠시 망설였지만, 금세 받아들였다. 뭐, 망각 효과가 부분적으로만 나타나는 사람들도 종종 있으니까.
“아, 그랬지…. 깜빡했군.”
“제 마법약의 미흡한 지점을 지적해 주시죠.”
“미흡한 지점이라.”
병으로 향하던 손이 움찔거렸다. 본능적으로 발동된 망설임이었다. 가이젠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몸이 주저하고 있다. 어째서? 본인조차 제 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신입생도가 만들어온 마법약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 거지? 그래봤자 엉터리 마법약일 게 분명한데.
두려움? 가이젠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두려움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이었다.
‘이상한데.’
오랜 세월 제조학에 몸을 담은 약제사로서 그의 몸에는 마법약에 대한 내성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적어도 ‘마법약 때문에’ 겁을 먹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뭐지? 이 두려움은.’
신입생도가 만든, 엉터리 작품일 게 빤한 이 마법약 앞에서 물밀 듯 끼쳐오는 두려움.
“자, 그럼.”
루빈이 한 발 다가왔다. 꼐름칙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이젠은 루빈이 건넨 마법약을 입으로 가져가 기울였다.
병 자체가 워낙 작은 데다, 그마저도 절반밖에 차 있지 않았으므로 내용물은 곧바로 목젖을 넘어갔다.
뭔가를 마셨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만큼의 극소량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루든 생도, 아무래도 이건 실패작인 것 같군.”
마법약의 구색이라도 갖췄다면, 그가 충분히 감별해냈을 터였다. 발현되지 않더라도 약물 속에 배어 있는 마나가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마나는커녕 편린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즉, 잘못된 휘식을 입력했거나 휘식의 상태가 심각하게 부실했다는 뜻이다.
가이젠은 고개를 내저으며 쯧쯧 혀를 찼다.
그때였다.
“……!”
가이젠의 모든 숨구멍이 턱 막혔다.
“크헙!”
일순간 동공이 커지고, 온몸의 핏대가 올올히 도드라진다. 시야가 어둑하게 스러지고, 몸은 경직되었다.
서 있는 그 상태로 굳어버린 몸. 어떻게든 통제해 보려 하지만, 한없이 무력할 뿐이다.
온몸이, 그가 지닌 실체감이 하나씩 절단되는 순간이었다.
축축한 촉수가 땅 아래서부터 튀어나와 두 다리 저 아래쪽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느낌.
그와 동시에, 가이젠은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심해 깊숙한 곳으로 끌어내려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공포.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가이젠을 뒤덮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무력하게 스러지고 붕괴되는 괴현상.
“어… 어허…. 크흐으…….”
가이젠은 눈물을 흘렸다. 흘리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서 있는 그 상태로 오줌을 지리기까지 했으니.
마법약 제조학의 교수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공포에 잠식되어가는 이때.
저벅저벅.
루빈은 태연히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망각’ 마법약은 가이젠이 이미 가져다 놨으니, 다음으로 필요한 마법약만 챙겨두면 되겠지.
루빈은 ‘암시’ 마법약을 병째로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가이젠을 의자에 앉혔다.
이제는 ‘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차례였다.
“가이젠.”
“…….”
가이젠은 온몸을 옹송그렸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검은 잎’을 마신 자는 모든 면에서 무력해진다. 특히 육체와 정신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진다.
더불어, 그를 향하는 목소리가 마치 신의 목소리처럼 절대적인 무언가로 체감된다.
“어쨰서 칙명부의 끄나풀이 된 거지?”
“치, 칙명부가 무엇일지…….”
“칙명부를 몰라?”
“그, 그, 그렇습니다.”
칙명부를 모른다니. 그럼 그날 밤, 자택에서 받은 그 지령은 누가 내린 거지? 하나씩 캐묻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
“그럼 페르 로렌치니에 대해선 얼마나 알고 있지?”
“저를 협박하는 자들이 페르 로렌치니를 찾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저는 페르 로렌치니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협박하는 자들?”
그날 밤 지령을 내렸던 자들을 말하는 거였다. 루빈은 심문을 이어나갔고, 그때마다 가이젠은 하나씩 실토했다.
아베른 시에서 정체 모를 세력과 얽히게 된 연유. 그들에게 협박과 회유를 당했으며, 자신은 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영양가 없는 끄나풀이었네.’
가이젠의 정보가 제한적일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실토하는 사실들 중 루빈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건 좀 의외였다.
‘이래서는 칙명부가 왜 페르를 죽이려 하는지가 밝혀지지 않는데.’
확실한 것은, 페르를 관련하여 모든 상황이 초입에 있다는 것이다.
페르는 아직 대마법사의 면모를 드러내지 않았고, 칙명부는 그저 그를 제거 대상으로만 알고 있다는 것.
‘그래도 소득이라면…….’
루빈은 벌벌 떨고 있는 가이젠을 바라봤다. 이게 중요했다. 칙명부와 페르 사이의 연결고리를, 루빈이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칙명부는 가이젠을 자신들의 도구로 생각하겠지만, 정작 그 도구가 그들에게 상흔을 남길 수 있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를 테니까.
이제부터 루빈은, 이 칼날을 칙명부에게 겨눠볼 작정이었다.
“네 계획은 뭐였지, 가이젠?”
“…계획이라면.”
“페르를 찾은 이후에, 뭘 어쩔 작정이었냐고.”
“마핵초를 채집하는 야외 수업을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업에서…….”
루빈은 가이젠의 페르 제거 계획을 모두 들었다. 야외 수업 중에 벌어지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라. 그럴싸했지만, 루빈이 알게 된 이상 별거 아니었다.
“가이젠. 이걸 마셔.”
루빈은 그의 손에 망각 마법약을 쥐어주었다. 그가 루빈에게 했던 똑같은 방식. 그는 신의 목소리에 복종했다.
망각 마법약을 들이켰으니, 이제 여기에서 벌어진 일은 가이젠의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이번에 손에 쥐어준 건, 암시 마법약이었다.
암시 마법도 인간의 심리를 조작하는 심층 마법 중 하나. 직접적인 마법 발현보다는 마법약을 통해야 그 효과가 더 뛰어난 것이었다.
벌컥벌컥.
가이젠이 만든 약을 가이젠에게 써먹게 되다니. 루빈은 점점 힘이 풀리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전 신입생도한테 자백 마법약을 먹이려던 계획은 폐기될 거야.”
“…….”
가이젠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머릿속 계획은 루빈의 입맛에 맞게 완벽히 조작되는 중이었다.
깨어난다면, 그는 왠지 모를 이유로 자신의 계획들을 수정해 나가게 될 터였다.
“그리고 루든 포이넨이 페르 로렌치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반복하게 될 거다. 원인 모를 두려움과 함께.”
“…….”
망각 마법으로 인해, 가이젠은 루빈이 페르 로렌치니라 대답했던 순간을 잊게 될 것이다.
대신, 암시 마법의 영향으로 루빈이 페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마핵초 채집을 위한 야외 수업은 그대로 진행될 거야. 다만,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겠어.”
“…….”
루빈은 두 손으로 가이젠의 머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눈동자를 피하는 그를 마주보았다.
칙명부를 곤란에 빠트릴 루빈의 계획이, 가이젠의 머릿속에 하나씩 입력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