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25)
암살검가 로이넨-125화(125/258)
제125화. 각성의 사슬 (2)
‘검은 잎’이 스며드는 오스카의 무의식.
“……!”
오스카는 자신에게 들러붙는 촉수를 느꼈다. 촉수는 스멀스멀 올라와 오스카를 휘감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떴지만, 목까지 점령한 촉수는 이윽고 오스카의 눈마저 뒤엎고 말았다. 그때부터 끊어지지 않는 어둠이 펼쳐졌다.
어떤 소리도 울리지 않는 공간.
아무리 소리를 쳐봐도 끝내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검은 잎’은 오스카를 파고들어 무의식 깊숙한 곳까지 고통과 공포로 물들여 버렸다.
‘으으…….’
‘몽환숲’에서 채취한 희귀 식물을 첨가해 만든 ‘검은 잎’은, 음독한 자의 가장 무너지기 쉬운 지점부터 공격한다.
누군가에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상실되는 듯한 느낌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익사 직전의 공포일 수도 있었다.
오스카, 아니 페르의 공포에는 어떤 연쇄적인 기억들이 있었다. 그가 본능적으로 떠올린 것은 카포티니로 오기 전의 기억들이었다.
살기 위해 도망만 쳤던 나날들.
그 이전에는 평화롭기 그지없던 날들이 있었지. 페르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 엔조, 어머니 릴리와 함께 웃으며 지낼 수 있었던 때.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모든 게 깨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페르, 너와 나 사이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깃들어 있단다. 이게 알려지면 우리 인생은 다시는 온전해질 수 없다.
-잠재력이요?
-언젠가 알게 될 거다.
-어, 어머니는요? 죽은 건가요?
-…그래. 죽었다. 이제 우리도 도망쳐야 해. 우리가 가진 힘은 마법사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해.
터전을 떠나야 했다. 살아왔던 집이 불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어머니의 시신이 잿더미가 되는 걸 바라봐야만 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 그곳으로 가자.
하지만 그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자는 우릴 배신했다. 우린 도망쳤던 곳으로부터 또다시 도망쳐야만 했다.
-페르, 우리가 함께 있으면 너무 위험해. 흩어져야 한다. 너는 한동안 카포티니에서 숨어 지내게 될 거다. 그리로 가거라.
마지막 날, 아버지는 페르를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페르, 미안하다. 내가 널 ‘각성의 사슬’로 엮어버렸구나. 내가 너를… 오래전 그 사고만 아니었다면…….
옛 기억은 페르를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괴로운 기억 속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때였다.
“오스카 투니오.”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에 어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르는 이 목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다고 생각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 퍼졌다.
“네 이름을 말해. 너의 본명을.”
페르는 본능적으로 이 목소리에 의존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끝나지 않는 공포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는 걸 알았다.
“…페르 로렌치니.”
페르가 대답하자, 다음 질문이 내려왔다.
“로이넨가에 대해 알고 있나? 암살검가에 대해선?”
로이넨 가문? 암살검가?
페르에게는 생경할 뿐인 명칭이었다.
* * *
다행이라 해야 하나.
페르는 암살검가와 로이넨을 모른다고 대답했다. 루빈은 로이넨과 암살자에 관하여 새로운 질문들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모른다.”
“…모른다.”
이어진 질문에도 페르의 대답은 똑같았다. 암연도, 로이네크로우도, 칙명부도, 칙명부 수장 룰포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흠. 거짓말하는 게 아닐까.
하네케의 의심에 루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검은 잎’이 스며든 걸 분명히 확인했다. 루빈이 전생에서 겪어본 바, 음독한 자가 거짓말을 말하면, 그건 목소리로 나오지 않는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건, 음독한 자 본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무의식을 통과하지 못하면 발설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암살검가에 대한 증오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는 건데.’
언제, 어떻게 페르가 암살검가를 증오하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게 문제였다. 그 지점을 알 수 있다면, 비틀어볼 수도 있을 텐데.
‘지금은 아니라 해도 언젠가 암살검가의 적이 될 거야.’
전생에서 페르는, 토벌군의 선봉장으로서 수많은 암살자를 죽였다. 루빈이 미리 막지 못한다면, 기어이 똑같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틀 수 없다면, 지금에라도 끊어내야 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그와 동시에 루빈은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그 속에는 영혼무구 핏빛서리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 질문 다음엔, 오로지 죽음뿐이리라.
“페르 로렌치니, 네가 원하는 건 뭐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 도망치지 않고 사는 것.”
“그렇겠지.”
여기까지다. 더 이상 질문할 가치가 없다. 더 질문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알아낼 건 모두 알아낸 것이다.
이젠 죽여야 했다.
녀석이 황제의 선봉장이 되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스스스스.
루빈은 아공간 주머니 속에서 핏빛서리를 움켜쥐었다. 냉기가 손을 타고 사방을 가득 채운다. 이걸 그대로 녀석의 심장에…….
그때.
페르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리고 황제를 죽이는 것.”
“……?!”
또렷한 한마디를 듣는 순간, 루빈은 검을 쥐었던 손을 풀었다.
황제 텔마흐를 죽이겠다고?
토벌군의 선봉장이었던 그 페르 로렌치니가, 텔마흐를?
“페르, 다시 대답해. 네가 죽이겠다는 사람이 누군지. ‘황제’라면, 그게 누굴 의미하는 건지.”
“…황제 텔마흐를 죽이겠어.”
그 이름이 발음되자 루빈은 짧게 심호흡을 했다. 내면 속 하네케한테서도 간결한 파동이 느껴졌다. 루빈만이 아니라 대장군 역시 텔마흐를 증오하고 있으니.
“죽이려는 이유는?”
“황제가 우리의 힘을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너 말고 또 다른 자가 있나?”
“아버지. 엔조 로렌치니.”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루빈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황제가 너희 부자의 힘을 원한다는 게 무슨 뜻이지?”
“나와 아버지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 사이엔 거대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 황제가 그걸 가지려 한다.”
-거대한 힘? 연결? 도대체 뭔 소리인지…….
듣고 있던 하네케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배어났다.
-황제가 원하는 힘이라면서, 왜 칙명부가 페르를 찾아 죽이려 한단 말인가?
‘전 알 것 같습니다.’
-……?
‘어쩌면요. 페르가 대답해 줄 겁니다.’
페르의 말은, 회귀 전 루빈이 우연히 알게 된 어느 개념과 맞닿아 있었다. 루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물었다.
“페르. ‘각성의 사슬’을 말하는 건가? 혹시 너랑 네 아버지가 ‘각성의 사슬’로 엮여있나?”
페르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베일에 싸여 있던 모든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각성의 사슬? 그게 뭔가?
‘일종의 저주입니다. 신들의 장난이라고도 하고요.’
각성의 사슬. 사슬로 엮인 두 사람 중 하나가 죽으면, 남은 사람을 각성하게 만드는 저주.
여기서 ‘각성의 효과’는 당사자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가공할 만한 힘을 얻게 됨에는 틀림없었다.
반대로,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각성의 사슬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그럼 둘은 영원히 각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황제의 속셈은 페르와 아버지 중 하나를 죽여서 각성시키려는 게로군.
‘맞아요. 정확히 봤습니다. 그다음, 암살자들에게 모든 죄를 씌워서 남은 이에게 원한을 심어 주겠죠. 회귀 전처럼, 복수심에 불타 모든 암살검가를 멸문시키게끔요.’
-…끔찍하군. 자넨 대체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지? 아니, 세상에 얼마나 많은 비밀들이 숨어 있는 겐가?
대륙을 통틀어 ‘각성의 사슬’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때 제국 대장군조차 모를 정도이니, 대륙의 숨겨진 비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회귀자인 루빈도 ‘각성의 사슬’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가 알게 된 것도 죽음이 가까워졌을 무렵이었으니.
‘저라고 전부 아는 건 아닙니다.’
루빈은 잠든 페르를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했다.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가 각성한다. 그가 아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렇다면, 이들 부자에겐 대체 어떤 ‘각성의 효과’가 있는 걸까. 페르는 어떤 힘을 지니게 될까?
‘발현되는 능력은 사람 따라 제각각이라고 했는데.’
그야,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페르. 너와 네 아버지 사이에는 어떤 각성의 효과가 있는 거지?”
“…잠재력의 등반.”
‘아.’
말 그대로다.
각성하게 되면, 지니고 있는 잠재력의 극한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회귀 전 페르가 왜 그렇게 강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회귀 전의 페르는 서른 살의 나이에 7성 대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전부 ‘각성의 사슬’ 덕분이었다.
페르가 가진 엄청난 잠재력과, 각성의 효과인 ‘잠재력의 등반’이 만나 대마법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루빈이 학교에서 지켜봤듯, 실제 페르에게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었다. 마나의 환은 견고했고, 환을 이루는 마나는 깊었으며,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유려했다.
‘그런데도 칙명부는 이런 페르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지.’
그 사실이 떠올랐다.
‘잠깐, 상황을 정리해 보자.’
곧 루빈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사실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우선 첫 번째. 칙명부는 아직 페르의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둘째. 페르의 엄청난 잠재력을 알게 된다면, 칙명부의 살해 대상은 페르가 아닌 페르의 아버지로 바뀔 거다. 그들은 더 강하고 확실한 무기를 원할 테니까.
그리고 셋째. 페르의 아버지, 엔조의 행방. 루빈의 추측이지만 아마 현재 황제의 손아귀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페르의 아비가 지금 칙명부와 함께 있을 거란 말인가?
‘네. 맞아요.’
그렇지 않으면 칙명부가 페르를 죽일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아버지를 데리고 있기 때문에, 페르를 찾아 죽이는 선택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루빈은 다시 물었다.
“페르.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
“안전한 장소에, 믿을 만한 사람들과.”
대체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다는 걸까.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페르도 잘 모르는 듯했다.
약의 효과가 얼마 남지 않았다. 루빈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페르, 네가 가장 증오하는 자가 누구지?”
“텔마흐.”
이대로라면, 텔마흐를 향했던 페르의 증오는 결국 암살검가에게로 옮겨질 것이다. 황제의 계략에 의해서.
하지만 이번 생엔 다를 것이다.
“내가 네 그 증오심을 키워주지.”
키울 만큼 키워서, 황제를 향하게끔 해주마.
그때, 루빈의 마음을 읽은 하네케가 의외라는 듯 물어왔다.
-자네, 설마 페르의 아비를 죽일 셈인가?
그렇게 되면, 페르는 이번에도 ‘잠재력의 등반’이 발현되면서 대마법사로 각성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때, 암살을 칙명부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기만 한다면, 그 증오는 자연스레 황제로 향하게 되겠지.
회귀 전 황제가 했던 만행을 거꾸로 갚아줄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그건 루빈의 방식이 아니다.
황제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제2의 텔마흐가 될 뿐.
‘아뇨, 안 죽일 겁니다. 온갖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살릴 거예요. 살려서, 여기로 데려올 겁니다.’
-둘 다 살리겠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아무도 각성하지 못한다고 했잖나?
‘상관없습니다. 전 페르의 잠재력을 알아요. ‘각성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도, 오로지 내 손만으로 대마법사를 만들 수 있는 방법도요.’
루빈은 황제의 방식이 아닌, 저만의 방식으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