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31)
암살검가 로이넨-131화(131/258)
제131화. 구출 작전 (4)
화르륵! 화르륵!
열기로 가득한 시체 소각장. 소각 작업이 한창이다. 엔조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두꺼운 방화벽 너머 이글거리는 불이 내다보였다.
지금 그와 쿠제는 소각장 앞에서 멈춘 상태. 다친 다리로 힘겹게 도망쳐 왔지만 아직까지 ‘협곡 감옥’을 벗어난 건 아니었다.
“이봐, 소각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건가, 아니면 나를 여기에 처넣어 불태우려는 건가?”
“소각장 중간에 우리가 빠져나갈 틈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렇게 불이 거센데? 그리고 자네 도련님을 놔두고 가겠다고?”
“…소각장의 불은 15분에 한 번씩, 45초간 멈춥니다. 그때를 노리면 됩니다. 그리고 저희 도련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 아이 혼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보셨을 텐데요.”
마치 지금 여기서 가장 걱정해야 할 건 엔조 당신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때, 감옥 곳곳이 일제히 소란스러워졌다. 뒤이어 쁘후우우우, 하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상 상황이라는 것이다.
‘나 하나 때문인가? 아냐, 아… 그럼 그 아이가?’
감옥 층층이 진동에 휩싸였다. 죄수들인지, 간수들인지 발소리와 고성이 난무하고 있었다. 흑발의 아이가 감옥을 제대로 뒤엎고 있는 모양이었다.
“감옥 근접 거리에 제국군이 있어. 그들까지 투입됐을지 몰라.”
“걱정할 거 없습니다. 자, 시간이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쿠제는 곧바로 엔조를 들쳐 맸다.
“다리가 불편하시니 이렇게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진짜 살아 나가는 방법이 맞는 건가?”
“네, 그럼요. 그것도 가장 능률적으로 살아나가는 방법이죠.”
스르르르.
소각장의 불길이 잠시 멎는다. 화염이 방사되지 않는 45초가 시작된 것이다.
쿠제는 힘을 쏟아내며 두꺼운 방화문을 열어젖혔다.
문 너머엔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같이 불에 그슬렸고, 연탄처럼 불씨를 머금고 있었다.
푸득, 푸득 푸득.
쿠제는 빠르게 위를 향해 나아갔다. 발을 옮길 때마다 시체가 짓물러지고 뼈는 바스러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길!”
업혀 있는 엔조의 시야에 제국군 장교와 병사 열댓 명이 들어왔다. 소각장을 확인하는 임무를 맡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제국군은 곧바로 추격할 태세를 갖췄다.
“저, 저기 제국군이 우릴 봤어!”
“…….”
“이봐, 내 말 듣고 있냐고!”
쿠제가 답답하리만치 대꾸하지 않는 그때.
어디선가 루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때 왔네.”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거리는 잔상만 봤을 뿐, 엔조는 루빈이 정확히 어느 방향에서 나타난 건지 헷갈렸다.
다음 순간.
내달리던 쿠제의 등 뒤로 루빈이 등장했다. 마치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히는 것처럼.
샤삿.
부드럽게 착지한 루빈 주변으로, 불티가 프스스 피어올랐다. 그가 덧붙였다.
“걱정 마시죠, 엔조.”
“…….”
“전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쿠제는 루빈을 두고 홀로 내달리면서, 소각장의 틈으로 향했다. 그곳이 루빈이 계획한 탈출로였다.
반면 루빈은, 탈출로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엔조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봐! 어디 가나? 쿠제! 네 도련님을 저렇게 놔둘 건가? 이제 곧 불길이 뿜어질 거라고.”
“압니다.”
“알면 도와줘야지!”
“저도, 마법사님도 방해만 될 텐데요.”
“…뭐?”
그 태연한 대꾸에, 엔조는 결국 루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불티가 흩날리는 시체 산을 빠르게 내려가는 루빈. 그 맞은편에는 제국군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건데.
“여기군요.”
얼굴을 잔뜩 구기는 엔조와 달리, 쿠제는 탈출구를 찾는 데만 집중했다.
마침내 밖으로 통하는 하나뿐인 틈을 찾아냈고, 일단 엔조부터 밀어넣었다.
“지금까지 30초.”
소각장 화염이 다시 방사될 때까지는 15초가 남았다.
이제 쿠제의 역할은 끝났다.
말했다시피 루빈을 돕는 건 방해가 될 뿐이기에, 쿠제는 가만히 기다렸다.
다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암연을 섬세하게 다듬어 저 아래쪽으로 펼쳤다.
루빈이 어떻게 전투를 벌이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접 지켜볼 수는 없지만, 암연이 그 전투의 윤곽을 알려줄 터였다.
이윽고, 루빈의 인영이 나타났다.
‘도련님의 전투를 다시 보는 건 2년 만인가.’
2년 전, 흑색탑 이후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림자 역장’의 단련을 함께하긴 했지만, 그건 실전이 아니었다. 또 루빈은, 검술 훈련할 때도 단독으로 했었다.
‘얼마나 성장하셨을지.’
암연이 그려내는 전투 현장의 윤곽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제국군을 향해 돌진하는 루빈. 그 검신에 응집한 흑칠 오러의 위세는, 지켜보는 쿠제를 압박할 지경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오러의 흔적을 남기는 데 집중하시려는 거구나.’
루빈이 보이는 모든 움직임에서 암살검가의 흔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드러내더라도, 그걸 알아보는 제국군은 한 명도 없겠지만, 루빈은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신경 썼다.
‘허어.’
하나둘 쓰러져 가는 제국군 병사들.
그 모습은 실로 감탄스러웠다. 아니, 경이로웠다.
멀리서 암연으로 감지하고 있을 뿐인데도, 여기까지 그 파장이 느껴지는 오러의 위세. 마치 쿠제의 암연을 찢어버릴 정도였다.
모르긴 몰라도, 고작 2년 만에 흑칠의 오러 경지가 최소 두 배는 성장한 것 같았다.
‘검술명가의 자제라 해도 믿겠군.’
흑칠의 오러는 멈추지 않고 제국군 병사들의 몸을 갈랐다. 갑옷을 뚫고, 팔을 잘라내고, 발목을 끊어냈다.
오러 3성은 될 법한 제국군 장교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푸슉!
결국, 검을 세 번 맞부딪치는 데 그친 제국군 장교의 심장 깊숙이, 루빈의 검이 박혀 들어갔다.
프스스.
흑칠의 오러가 발산하는 열기가 엄청났다. 소각장의 열기마저 뒤엎을 만큼이나.
‘끝났군.’
이 모든 게, 불길이 잠시 멈춘 10초 사이에 벌어진 일. 곧 소각장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
“도련님! 이제 몇 초 안 남았습니다!”
“먼저 피해. 가는 중이야.”
쿠제는 솟구칠 화염에 대비해, 엔조가 숨은 틈으로 먼저 들어갔다. 루빈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화르르르륵!
마침내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방금 전, 제국군을 모조리 베어 넘긴 루빈의 활약을 모르는 엔조가 소리쳤다.
“부, 불길이! 네 도련님은 어쩌고……”
때마침 불기둥 속을 파헤치며 달려오는 하나의 인영.
엔조가 무어라 소리치기도 전에, 불길을 뚫어내며 루빈이 나타났다. 온몸이 불탔을 거라 예상했건만,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온몸이 차갑잖아.”
핏빛서리의 혹한이, 불지옥 같던 불길을 짓누르며 루빈을 보호한 것이었다.
“대체……?”
엔조는 놀랄 틈도 없이, 루빈의 손아귀에 꽉 붙들려 이끌렸다.
“이제 안전합니다. 나가시죠.”
* * *
소각장의 틈에서부터 시작한 탈출로는 좁은 동굴로 연결됐다. 몸을 낮춘 상태로 한 시간 동안 나아갔다.
그다음부터는 지대가 바뀌는 것 같았다. 드디어 허리를 펴고 걸을 수 있게 되자, 다들 한숨 돌렸다.
루빈이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현재 속도로 한 시간만 더 걸으면 트레스덴을 벗어날 겁니다. 그곳에서 지상으로 올라간 뒤로는 말을 이용해서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도련님.”
“좋아. 엔조, 다친 데 없죠?”
“…괜찮아.”
엔조는, 방금 전 소각장에서의 일로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열 명이 넘던 제국군은 어떻게 되었으며, 루빈은 대체 어떻게 불길을 뚫고 나왔는지. 아까 꽁꽁 얼어버릴 만큼 차가웠던 기운은 뭔지.
‘마법은 분명 아니었는데. 저 꼬마, 대체 정체가 뭐지?’
잘 모르겠지만, 엄청난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런 자가 자신을 돕고 있으니, 일단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내가 시간을 잡아먹어서 미안하군.”
절뚝이는 제 다리 때문에 폐를 끼친다 생각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엔조였다. 그가 이어 물었다.
“그나저나, 내 다리에 심어져 있던 추적용 마적석은? 어딨지?”
“아까 비둘기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발목에 묶어뒀어요. 한동안 시간을 끌어줄 겁니다.”
“확실하군. 너, 페르랑 동갑이라고 했지? 정말인가?”
루빈이 씩 웃자, 쿠제가 대신 답했다.
“도련님이 나이를 속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 꼬마는 의문투성이였다.
건장한 체구만 보자면 성인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은 데다, 무엇보다 저 초연함은…….
‘절대 열세 살 꼬마가 가질 수 없어.’
오러의 경지 또한 분명 놀라웠지만, 검술명가의 자제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열세 살의 나이에 저토록 침착하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던 그 눈빛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뭐 하는 꼬마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지금은 자신을 도와주고 있으니, 지나치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었다.
“좋아. 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되지? 이름이라도 알려줘. 가짜라도 좋으니까.”
“루든 포이넨.”
“가명인가?”
“페르가 알고 있는 제 이름입니다.”
애매한 대답. 엔조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럼 나도 루든이라 불러야겠군. 그나저나 페르 그놈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 잘 지내서 문제일 정도죠.”
아들 이야기가 나오자, 엔조의 경계심도 점차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다행이군. 어릴 때부터 나를 따라 이곳저곳 떠돌아다녔던 놈이니 카포티니에서도 잘 지낼 거라 생각하긴 했다만.”
그러면서 엔조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히탄한테 카포티니에 아들이 있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오스카가 페르라는 것만 알려지지 않았다면 최악은 아닙니다. 저를 페르로 오해하도록 작업을 해뒀거든요.”
“정말이냐? 그럼 네가 위험해질 텐데.”
“저들도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페르가 누군지도 모르고, 당신까지 놓쳤으니까요.”
“흠, 그건 맞는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아저씨의 행선지죠.”
“…사실 그건 생각해 놓은 데가 있어.”
“랩소디관이겠죠.”
루빈이 짐작하며 내놓은 말에, 쿠제와 엔조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쿠제가 놀란 이유는 그만큼 의외였기 때문이다. 랩소디관이라면, 마법학교의 기숙사 아닌가.
‘각성의 사슬’이 지닌 위험을 생각해 보면, 페르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합당한 법인데. 왜 랩소디관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 궁금증은 곧 풀렸다.
“놀랍군. 맞아, 랩소디관이 내가 생각한 행선지네. 어찌 그리 생각했나?”
“이번에 카포티니를 나서기 전에, 당신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됐어요. 엔조, 건축가로 기숙사 개보수 작업에 참여한 적 있죠?”
“맞아. 뭐, 거쳐 간 여러 건축가 중 하나였을 뿐이지. 워낙 오래 걸리는 공사였거든.”
“그래요? 도서관에 있는 공사기록지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던데요. 당신이 맡은 기간에 고차원의 마법건축술이 가장 많이 접목됐다고 나와 있던데.”
루빈은 기숙사에 처음 들어온 날부터 틈틈이 랩소디관을 탐색하려 시도했다.
그런데도 만족할 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던 건, 스레힘 사감이 다스리는 짐승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랩소디관은 예사 마탑이 아니었다. 학교구역 중에서, 아니 카포티니에 있는 33개 마탑 중에서 가장 난해하리만치 마법건축술이 다양하게 접목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카포티니 출신 마법사에다가 카포티니 기숙사 공사에 참여한 적 있고. 현재 페르를 카포티니로 보낸 상태라면 충분히 그렇게 유추할 수 있죠.”
엔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을 카포티니에 보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우선 지금의 키건 교장이라면 그리고 그를 따르는 베니테즈라면. 삼휘 마법생도인 아들을 지켜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13년 전, 개보수 작업에 참여했던 랩소디관. 엔조는 공사를 통해, 랩소디관의 여러 비밀 장소를 알아냈던 터였다.
‘각성의 사슬’ 역시 그 과정 중에 불가항력적으로 맞이한 것이었고.
“부정하지 않겠어.”
“저는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현재로선 가장 괜찮은 은신처인 건 사실이니까.”
이후 그들은 지하 동굴을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갔다.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말 세 필이 나무에 묶여 있었다. 그때, 쿠제가 전음을 보내왔다.
-도련님, 몇몇 가신들이 저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긴 한데, 어쩔까요?
엔조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실제로 루빈 일행 주변으로 넓게 흩어진 몇몇 암연이 느껴졌다.
-그리어스 가문일 거야. 아마 근방을 벗어날 때까지 우리를 보호하려는 거겠지.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곧 동이 트겠군. 서둘러 가면 정오쯤엔 카포티니로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에 올라탄 엔조가 말했다. 루빈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저씬 제 가신과 함께 곧장 카포티니로 가세요. 저는 따로 들를 데가 있습니다.”
“어딜?”
물론 그곳이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엔조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도련님.”
“이럇!”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루빈은 앞으로의 계획을 되뇌었다.
‘캔시온.’
설사 엔조에게 이름을 말해줬다 해도 처음 듣는 곳이었을 거다. 그만큼 작고 외진 마을이니까.
실제로 카포티니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루빈은 캔시온에 들를 계획이 없었다. 엔조를 구출하고 나면 곧장 카포티니로 향했을 터.
하지만 네이프 그리어스가 알려준 어떤 ‘중요한 사실’이 루빈의 계획을 비틀었다.
‘마법사여단의 장교육성위 놈들이 그 마을에 들른다고 했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캔시온에서 일어날 일은, 황제에게 복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없을 기회이기도 했다.
히히힝!
루빈은 허리춤에 꽂힌 핏빛서리를 감싸 쥐며 말을 출발시켰다. 힘든 하루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