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41)
암살검가 로이넨-141화(141/258)
제141화. 폭발 계획 (3)
‘제길!’
자신마저 지나쳐 나가는 루빈을 확인하자, 에릭의 눈은 시뻘게질 지경이었다.
그때, 에릭의 눈에 달리아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달리아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중심을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규칙이 있었던 거야.’
사각기둥들이 일종의 지형이라면, 달리아는 자신에게 알맞은 지형을 골라 중심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 달리아의 뒤를 쫓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는 에릭.
달리아는 뒤에 따라붙은 에릭을 의식했지만, 체력적으로 그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깃발……!’
기둥들의 중심부에 다다른 달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중앙기둥 위에 꽂힌 깃발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가장 효율적으로 정상을 향하는 경로를 찾는 게 중요했다.
루빈을 따라가는 건 무의미했다. 루빈은 가볍게 뛰어오르며 그야말로 무인의 재질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아… 하아…….”
달리아가 앞서가고, 에릭이 뒤따르는 식으로 한참 이어졌다. 당장 닿을 수 있을 것처럼 깃발이 펄럭이고 있지만 사각기둥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법만 가능했다면…. 답답한 마음에 달리아는 내부를 느껴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마나의 환은 얼어붙은 상태다.
달리아는 뒤를 슬쩍 쳐다봤다.
‘에릭…. 불안한데.’
에릭이 여전히 따라붙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아를 추월하지도, 그렇다고 그녀를 떨어트리지도 않는다.
“……!”
그런데 어느 순간. 달리아는 자신을 노리던 에릭이 행동에 옮긴다는 걸 느꼈다.
깃발까지의 경로가 훤히 보이는 지점이었다. 뒤를 돌아본 달리아의 시야에 에릭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한순간 몸의 중심을 잃으며 아래로, 한없이 깊고 아찔한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아, 안돼!”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몸을 뒤틀었다. 뭐가 됐든! 손에 걸리는 게 있다면 붙잡기 위해서.
“뭐야! 놔!”
달리아의 손에 잡힌 건, 자신을 밀치며 뛰어나가던 에릭의 발목이었다.
“하아… 못 놔. 아니, 안 놓을 거야.”
덩달아 에릭도 중심을 잃었다. 에릭은 벌레를 털어내듯이 다리를 마구 움직였다.
“떨어져, 달리아! 이러다 나까지 떨어진다고!”
“못 놓는다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어떤 손이 달리아의 팔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또 다른 사각기둥에 매달려 있는 루빈이었다.
“루든, 너 지금… 설마 나를 떨어트리려고?”
달리아는 다급하게 말했지만, 루빈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에릭의 발목을 잡고 있던 그 팔을 짓누르는 것이다.
달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역시, 너마저…….’
그 순간, 달리아는 루빈마저도 에릭에게 복속된 거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이 루빈에게 했었던 충고가 떠올랐다.
처음 등교한 날. 베니테즈 교수가 깃펜과 석판을 이용해 생도들끼리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었던 그때.
‘다음에 보면 에릭 마음에 들게끔 굽실거려. 이게 같은 반… 친구로 해주는 충고니까.’
그때 해주었던 충고가 이렇게 되돌아오는 건가. 달리아는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은 이렇게…….
“……?”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위쪽으로 몸이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루든이 자신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끼리끼리 뭉치겠다는 거냐?”
추락했어야 할 달리아가 기둥 위로 안착하는 모습에 에릭이 비아냥댔다.
“하아… 루든, 고마워. 난 네가 나를 떨어트리는 줄, 에릭한테 잘 보이려고, 나를 떨어트리는 줄…….”
그러거나 말거나 루빈은 생색을 내지도, 겸손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달리아를 탈락시키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그게 당연한 선택인 것처럼 어깨만 으쓱일 뿐.
“걸을 수 있지? 가자.”
한편, 8단계의 끝을 지켜보는 교수들과 장교들은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결국 셋이 통과했네요. 에릭, 달리아 그리고 루든.”
“루든 생도의 저 모습! 저는 감격한 거 있죠! 그리고 달리아를 끌어올리는 저 팔 힘, 보셨어요?”
치유마법학의 퀴닝 조교는 커다란 안경 너머로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였다.
그녀처럼 도드라지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다른 교수들에게도 루빈의 결정은 인상적이긴 매한가지.
흐뭇하게 수염을 만지작대던 키건은 옆에 서 있는 베니테즈의 어깨를 두드렸다.
에릭이 달리아를 밀치고, 달리아가 그런 에릭의 발목을 붙잡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두 생도의 모습이 흥미로웠던 솔라나 교수조차도, 화합하는 이 모습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장교들은 달랐다.
“멍청하군.”
폰드리안의 비릿한 한마디였다.
전우애? 동료애?
루빈이 보여준 모습은 그것 나름대로 미덕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의 선택이라는 관점에서는,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승전을 눈앞에 두고, 결국엔 놓쳐버린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결국 깃발을 가장 먼저 집어 들게 된 건 에릭이었다.
전장이었거나 실제 상황이었다면, 중요한 임무를 실패로 이끌 수도 있었던 거다.
‘물론 지금까지 획득한 점수로 보자면, 루든 저놈이 1순위인 건 달라지지 않지만.’
* * *
-루빈. 잠시 내면세계로 들어와 볼 수 있겠나?
하네케가 루빈을 찾았다.
마침 마지막 9단계가 시작되기 전, 한 시간의 휴식이 주어졌던 차였다. 루빈은 시험장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말만으로도 의사가 전달될 텐데, 내면세계로 들어와 보라니. 하네케가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시험 보는 동안 뭔가 퉁탕거린다 싶더니… 이걸 만들고 계셨던 거군요.’
내면세계 속 풍경은 어느새 새로 탈바꿈된 상태였다. 원래는 자연 속 황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대규모 공사라도 한 것 같았다.
뜯겨나간 절벽, 뒤엎어진 땅….
모두 하네케 혼자서 벌인 일이었다.
-나는 여기서 물리적인 힘밖에 못 쓰잖나.
‘저한테 말씀하셨으면 금방인데.’
내면세계에서 루빈은 하나의 신과 같았다. 손가락 하나 튕기는 것만으로 지형이든 기후든 모든 걸 마음대로 뒤바꿀 수 있었지만, 하네케는 그럴 수 없었다.
‘저번엔 훈련장을 만들더니, 이번엔 ‘라스키엔 대난전’을 구현했네요.’
루빈은 언덕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엔 축약된 형태의 전쟁터, 즉 라스키엔 고원이 작은 비율로 펼쳐져 있었다.
-전쟁을 앞두고, 전술 계획을 세우는 거라네.
‘제가 듣기로 대장군이 ‘라스키엔 대난전’의 유일무이한 절대자라던데요.’
하네케는 흐뭇한 표정으로 흰 수염을 매만졌다. 세상에 남아 있는 오래된 칭송을 굳이 부정하지 않으면서.
-장담하건대, 세상에서 날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네케.’
라스키엔 대난전은 비록 전략형 보드게임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륙의 전란기. 릴리크 제국이 아직 왕국이었던 시절. 대륙에는 8개 왕국이 존재했고, 그들은 실제 라스키엔 고원에서 전쟁을 벌였다.
동맹도 주적도 모호한, 말 그대로 대난전.
그게 보드게임 ‘라스키엔 대난전’의 모티프였다.
-간단히 말하면 8명이 상대방의 위치를 모른 채 벌이는 체스라 할 수 있지.
다만 8인 체스라는 개념만으로는 부족했다. ‘라스키엔 대난전’의 기물은 실제 부대에 더 밀접했으니까.
보병, 궁병, 중갑보병, 기병, 궁기병, 그리고 마법사부대…….
부대 운용도 실전에 기초하고 있었고, 부대만의 특성도 적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지형과 기후의 영향까지.
-마법사들이 자기들 시험에 이 보드게임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나는 잘 몰라. 다만 듣기로는, 실제 전장을 증강 구현해냈다고 하더군.
‘네, 제가 알고 있는 것도 그래요. 지휘관이 전황판 속 기물을 움직이면, 실제 부대가 마찬가지로 움직인다고 하더군요.’
당연하게도, 시험마도구 안에 마나가 가장 많이 응집될 수밖에 없다. 과거, 균열이 일어난 마도구가 결국 폭발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때였다.
-자네가 기억하는 보고서에서는 뭐라 나왔던가? 9단계에서 어쩌다 마나 폭발이 일어났다는 거지?
드드드득.
대답 대신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루빈은 가상의 전쟁터에 놓여있는 수많은 기물들 중 하나를 택했다.
마치 고차원의 염동마법처럼 루빈의 의지에 따라 허공으로 마법사부대가 떠올랐다.
-마법사부대?
‘네. 마법사부대들이 한데 뒤엉켜 동시에 마법 공격을 했던 게 마나 폭발의 원인이었어요.’
-전부 동시에? 그럴 일이 흔친 않을 텐데.
‘그렇다고 아예 없진 않죠. 궁병처럼 마법사부대도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설정이니까요.’
물론 위력으로 따지면 궁병보다 수십 배는 강력하겠지만.
하네케가 납득한다는 듯 끄덕였다.
‘마법사부대의 운용과 공격에는 시험마도구의 마나가 더욱 빨리 소진된다더군요. 그런데 하필 그 마법사부대끼리 뒤엉켜버린 거죠.’
그 말과 함께, 하네케 눈앞으로 마법사부대의 기물이 하나둘씩 추가되었다. 각기 다른 색깔, 즉 다른 왕국을 표시하는 마법사부대가 총 넷이었다.
‘그때와 똑같은 전황이라면, 네 개 왕국의 마법사부대가 한곳에 있어야 해요.’
-최소한 4개국 마법사부대를 유인해야 한다는 말이군.
‘네, 맞습니다.’
유인(誘引)과 회전(會戰).
전쟁에서도 쓰이는 여러 병법 중 하나였다. 하네케는 수염을 매만지며 고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루빈은 역시 어려운 건가 싶었다.
‘어려울까요?’
-음? 무엇이?
‘제가 말한 전략이요.’
-4개국 마법사부대를 유인하는 것? 아니, 그건 쉽지.
‘그런데 왜 그렇게 고민하는 얼굴이에요?’
-고작 4개국으론 위험하지 않겠나? 확실히 하려면 7개국 마법사부대 전부를 유인해야지. 그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네.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역시 괜한 걱정이었다. 오히려 다시금 부대를 지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장군은 적잖이 흥분한 상태였다.
-좋아. 그렇게 하면 되겠군. 루빈, 명심하게. 자네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우선 내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해.
그리고 이어지는 하네케의 계획은, 루빈의 상상을 훨씬 상회했다.
-자, 루빈. 일단 북쪽. 저 왕국의 보병대를 이쪽으로 움직여보게. 그리고…….
하네케는 머릿속에서 나온 전략‧전술은 하나같이 치밀하고 유의미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속전속결의 연속이었다.
휴식으로 주어진 한 시간 동안, 루빈은 하네케의 전술을 하나씩 이해해 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소한 전술적 운용의 맥은 짚을 수 있었다.
휴식 시간이 지나고, 루빈은 감았던 눈을 떴다. 시험관들 전원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세 명의 응시생도 앞에 일렬로 섰다.
그중 폰드리안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수고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이후, 그는 9단계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라스키엔 대난전’이 무엇이고, 응시생도들에게 왜 그것을 해보게 하는지.
“…우리는 이 전략형 보드게임을 현상마법으로 실재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너희들은 전쟁터 한가운데로 떨어질 것이다. 이번 단계에서, 우리는 너희가 지휘관으로서 지녀야 할 모든 역량을 점검할 거다.”
그러면서 그 시선이 루빈 쪽으로 향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아무리 마도무인이라 해도 부대를 지휘하는 건 다른 영역이니까.”
루빈을 정확히 겨냥한 한마디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루빈의 압도적인 면모에는 마도무인으로서의 이점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루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린 너희가 ‘라스키엔 대난전’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 전승국이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사실상 그건 불가능하지. 그러니 너희들의 자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라.”
그건 루빈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빈으로서는 차라리 이 가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더 쉬운 일이었다.
“슬슬 설명을 시작하지. 이 ‘라스키엔 대난전’은 최소 8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살아남은 생도가 3인뿐이군. 나머지 부족한 5인은 시험관들이 채울 것이다.”
“위장님도 참전하시나요?”
루빈의 당돌한 질문에, 폰드리안은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절대 봐주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폰드리안은, 제국의 전설적인 대장군 ‘하네케 브리온’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