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55)
암살검가 로이넨-155화(155/258)
제155화. 야외 수업 (5)
티나의 비웃음 섞인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루빈이 서점에서 나와 마탑구역으로 돌아가는 그 시각. 로젠탈러는 칙명부 수장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여 나누는 대화는 아니었다. 제도에서 카포티니까지. 그 엄청난 거리를 뛰어넘어 원거리 대화가 이뤄지는 중이다.
통신석을 이용한다면 수많은 회선을 거쳐야 했을 텐데, 애초에 두 사람은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칙명부의 능력이면, 그 정도는 쉬운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지랄 맞게 답답하군.”
로젠탈러의 눈앞에 있는 백여 마리 개미들. 몸체에 노란색과 하얀색의 줄무늬가 입혀져 있는 이 군집은, 모두 ‘칼리키개미’였다.
같은 여왕에게서 태어난 칼리키개미들은 대륙의 끝과 끝에서도 서로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약간의 수고만 들이면, 형제 개미들의 배치를 그대로 베끼도록 학습시킬 수도 있었다.
우선, 꿀을 묻힌 펜으로 단어나 문장을 쓰고, 칼리키개미들이 그 꿀이 만든 형상에 따라 자리를 잡도록 유도한다.
그러면, 소통 대상자의 개미들도 똑같이 움직여 이쪽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암살검가!”
물론 칙명부 수장 룰포가 모든 간부들에게 이런 소통 방식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 오직 로젠탈러에게만 그렇게 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이 속여야 하는 대상이 암살검가였으니, 시차로 인한 답답함을 감수하더라도 가장 안전한 방식을 택할 수밖에.
로젠탈러 입에서 욕설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이 소통 방식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자신의 똥 씹은 표정과 날것의 욕설을 룰포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뿐.
스스스스슷.
그때, 마침내 로젠탈러의 책상 위에 있는 개미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젠탈러는 내일 있을 작전을 막 룰포에게 전달했던 터였다. 이제는 룰포에게서 대답이 이어질 순서였다.
-히탄의
문장은 분절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 순차적으로 형성되는 주어, 서술어, 목적어 등을 순서대로 조합하는 것이다.
의미 하나가 끝나면, 다시 산개했다가 그다음 낱말들을 만들어내는 칼리키개미들의 방식은 미치도록 느리고 답답했다.
-빈자리가
-생각나지
-않도록
-해주면
-좋겠군.
“히탄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게 하라? 제길, 부담 하나 확실하게 주시네.”
-카포티니에서의
-일만
-잘 해낸다면
-너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겠지.
로젠탈러가 카포티니로 온 배경에는 마법부가 있었다. 그들과의 치열한 권력다툼으로 인해, 이른바 희생양으로서 여기 온 셈이다.
물론 마법부는 칙명부가 아니라 표면상의 이름인 ‘왕국통합부’를 찍어 누른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누군가는 표면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자신이 희생양으로 지목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로젠탈러는 룰포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제도에서의 모든 혜택과 권력을 누리면서.
스스스슷.
칼리키개미들이 다시 움직였다.
-만약
-내일 작전이
-성공적이라면
-가이젠은
-깨끗이
-없애도록.
실패했을 때를 가정한 지시는 없었다. 그건 굳이 지시로 내릴 필요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가이젠의 결말은 똑같았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놈은 죽어야 했다.
-로젠탈러.
눈앞에서 룰포가 그를 호명하기라도 한 것처럼, 로젠탈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였다.
-페르를
-찾지 못해도
-최악은
-아니다.
“……?”
순간, 로젠탈러는 제도에서 칼리키개미를 움직이고 있는 저 사람이 진짜 룰포가 맞는지 의심했다.
마치 격려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저 문장. 그가 아는 룰포라면, 저런 위로의 말 따위를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문장이 끝나기 무섭게, 칼리키개미가 또다시 움직였다.
-최악은
-세이렌의 아들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다.
“쳇, 그럼 그렇지.”
이번에야말로 룰포다운 문장. 격려는 무슨. 확실한 경고를 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벌게진 얼굴로, 황궁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급 술을 들이켜고 있을 수장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혹시라도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너를
-지울 것이다.
실각을 각오하라는 것이고, 룰포에게 실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스스스슷.
‘지울 것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그려낸 칼리키개미들은, 곧바로 산개했다. 더 이상의 소통은 없다는 듯 무질서하게 흩어져버렸다.
이내, 로젠탈러의 거친 손이 움직였다. 그는 철제 통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다 칼리키개미들을 쓸어 넣었다.
‘재수 없는 놈.’
원래는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 했지만, 어차피 내일 저녁이면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그래서 로젠탈러는 통을 숨겨놓는 대신 그대로 책상위에 놓았다.
툭.
통이 놓인 자리 옆으로, 검은색의 기다란 천이 보였다. 복면으로 쓰기 위해 미리 준비한 천이었다.
이걸 건네준 사람은 가이젠. 내일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검은색 천으로 얼굴을 가려달라는 전언 때문이었다.
가이젠은 틀림없이 ‘그 자리’로 페르를 데리고 갈 테니, 부디 실패하지 말라는 맹랑한 말까지 덧붙였다.
“건방진 새끼.”
스윽스윽.
로젠탈러는 천으로 얼굴을 둘둘 말아보았다. 표정이 사라진 그의 안면엔 섬뜩한 눈동자만 살아 번뜩였다. 그 상태로 그는 가만히 오른손을 뻗어보았다.
휘이이이잉.
그 순간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뒤편에 놓여 있던 ‘롭슨의 비검’이 바람을 가르며 그의 손으로 날아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개미들을 담은 철제 통 달그락거리며 진동했다. 마치 저들도 공포를 느꼈다는 듯이.
* * *
다음 날, 해가 떠오르는 이른 아침.
마핵초 채집을 위한 야외 수업이 시작되었다. C반 생도들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랩소디관 정문 앞으로 모였다.
졸려 하품을 쩍쩍 하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카포티니를 벗어난다는 생각에 들떠 있는 생도들. 그런 아이들을 통제하는 자는 모두 다섯이었다.
이번 야외 수업 담당교수인 가이젠.
C반 담임교수인 베니테즈.
치유마법학 교수 브첸코.
행정실장 팔란트.
그리고 평소에는 학교 내에서 보기 힘든, 색다른 한 명.
‘신경 쓸 게 하나 늘었군.’
루빈의 시선은 클로이로 향했고, 자연스레 그녀 뒤에 선 셀레스네로 옮겨갔다.
제국귀족이라는 사실과 아가씨에 대한 셀레스네의 걱정을 생각해본다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예상한 루빈이었는데, 가이젠은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제국귀족의 아성 때문에 차마 거절하지는 못하고, 그저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마침 잘 됐습니다. 루든 생도는 저와 함께 다닐 테니, 달리아 조의 머릿수를 채워주면 되겠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이젠 교수님.”
“그래도 규칙은 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법사용은 절대…….”
“네, 저 역시 규칙을 준수하여,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드리죠. 오직 저희 위더스푼가의 클로이 아가씨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만 마법을 쓰겠다는 뜻입니다.”
본래는, 카포티니 외 지역에서 마법을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당사자가 제국귀족 가문의 일원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위더스푼가의 영애를 지키기 위한 명분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네, 부디 그렇게 해주세요.”
깐깐하기 그지없는 셀레스네를 보자니, 루빈은 새삼 블루캣호의 동승자로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셀레스네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곤 했다. 셀레스네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생도들이 줄지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학교구역을 벗어나, 카포티니 도심을 가로질렀다. 생도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지만, 그것까지 까다롭게 통제하지는 않았다.
곤돌라를 이용하지 않고 육로로만 이동하기 때문에, 골목골목에서 기다란 소란이 이어졌다. 시민들 중 누구 하나 볼멘소리할 법도 한데, 조용한 반응이었다.
카포티니 시민들로서는 야외 수업이 있을 때마다 늘 보는 풍경이었기에, 그저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곧 카포티니를 벗어난 C반 생도들은 동북쪽 산 초입에 다다랐다. 그대로 줄지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곧 생도들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역시나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어, 저건 뭐지? 아, 걍 돌이네. 어, 저건 뭐냐?”
오스카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의 수다를 처음 겪는 셀레스네의 얼굴에서 짜증이 묻어날 때쯤.
‘거의 다 왔군.’
쿠제를 미리 보내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루빈이 도착했음을 알아챘다. 짐작대로, 이내 가이젠이 걸음을 멈추고 팔을 들었다.
“……?”
“이제부터 다들 천으로 얼굴을 가려라. 조장들은 조원들을 확실히 챙기고.”
어젯밤, 기숙사 점호 때 먼지에 대해 전해 들었던 터라, 생도들 전부 천을 준비한 차였다. 아이들이 천을 꺼내어 얼굴을 감싸기 시작했다.
스윽스윽.
루빈도 짙은 남색의 천을 꺼내어 얼굴을 꼼꼼히 가렸다.
마법사 로브에, 얼굴을 가리는 천까지. 이 정도라면, 로젠탈러라도 알아보지 못하고 달려들 만했다.
그런데 그때.
‘표식 마법인가?’
휘식 하나가 루빈 시야에 들어왔다. 내면화된 휘식이었지만, 글레이튼의 팔찌 덕분에 루빈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셀레스네가 만약을 대비하여 클로이에게 표식마법을 걸어놓은 것이었다.
‘셀레스네만이 아니군.’
그와 동시에 은근슬쩍 표식마법을 시전하는 또 다른 마법사.
바로 가이젠이었다. 그는 분주히 주변을 살피는 척하면서, 루빈에게 표식마법을 걸어두고 있었다.
혹시라도 루빈이 달아나거나, 멀리 떨어졌을 경우를 대비하는 거겠지. 이 역시 내면화된 휘식이어서, 루빈 말고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
그렇게 모두가 얼굴을 천으로 가린 생도들은, 곧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어두컴컴한 입구에 불과한데도 생도들한테서는 적잖은 탄성이 나왔다. 모험이라도 떠나는 기분일 게 분명했다.
“동굴에 들어가면 조별로 마핵초를 채집하면 된다. 동굴 안에는 갈림길이 많은데, 채집 장소가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내가 길을 안내할 거다.”
C반 생도들이 기대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지.”
가이젠과 루빈을 필두로 생도들이 우르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다들 잔뜩 들뜬 것이, 통제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였다.
그러든지 말든지, 가이젠은 자신이 찾아낸 비밀공간과 그곳의 식물형 괴수들을 떠올리느라 온 정신이 팔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설레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페르 로렌치니. 미안하지만, 네가 죽어야 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반면, 루빈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로젠탈러와의 싸움을 미리 그려보는 중이었다.
“윽, 어두워. 이런데도 마법 없이 마핵초를 찾으라고요?”
오스카가 따지듯이 말하는 그때.
개굴개굴.
개굴개굴.
인기척을 느낀 형광개구리들이 일제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동굴 안이 훤히 밝아졌다.
“형광개구리라니! 이러면 마법 없이도 충분하죠! 마핵초, 딱 기다려라!”
오스카가 괘씸했던지, 아니면 셀레스네라는 거슬리는 마법사를 얼른 떼어놓고 싶었던 건지. 가이젠의 지시도 곧바로 이어졌다.
“자, 첫 번째 갈림길이 나왔다. 달리아 조부터 움직인다. 일단 저쪽으로 가라.”
오스카, 클로이, 달리아가 루빈을 지나치며 한마디씩 건넸다.
“우리는 간다, 루든. 이따 끝나고 보자고. 전설급 마핵초를 캐올 테니까.”
으스대는 오스카.
“루든, 미안! 나 먼저 갈게! 좀 이따 봐!”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잔뜩 안달이 나 있는 클로이.
그리고…….
“루든. 진지하게 부탁할게. 오스카 잘 때, 입안에 마나구 좀 쑤셔넣어 줄래?”
두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는 달리아까지.
루든과 헤어져 점차 멀어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가이젠은 만족했다.
‘좋아, 페르는 한참 떨어지게 됐다. 이제 좀 안심해도 되겠군.’
이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자, 루든. 날 따라와라.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예, 교수님.”
제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루빈을 보며, 가이젠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루든, 아니 페르 로렌치니.’
그리고,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정체불명의 그 무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