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58)
암살검가 로이넨-158화(158/258)
제158화. 셀록 (2)
피이이이잉.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푸른구슬.
-허허, 내가 자네 덕분에 사멸된 종을 보게 되겠군.
흡족함이 느껴지는 하네케의 목소리. 그러나 루빈의 분위기는 그다지 여유롭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핏빛서리를 다시 움켜쥐고 있었다. 푸른구슬을 바라보는 그 눈빛엔 하네케와 같은 호기심이 아닌,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리폰이 순순히 내 말을 따를까? 확신할 수 없지.’
지금, 루빈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푸른눈과 치열하게 싸웠던 전생의 순간들이었다.
푸른눈에 의해 수십의 가신들과 그보다 배가 많은 로이네크로우들이 죽어야만 했었다.
놈을 제거하기 위해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고, 그렇게 끝내 푸른눈의 심장을 깨트린 사람도 다름 아닌 루빈이었다.
‘싸워야 할지도 몰라요. 식물괴수들이랑은 비교할 수도 없겠죠.’
-어쩌면 로젠탈러 그 이상일 수도 있겠지. 자네가 묘사한 대로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루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루가 길다는 생각을 했다.
로젠탈러와 식물괴수에 이어, 이제는 그리폰까지? 루빈은 핏빛서리를 더욱 꽉 쥐었다.
‘페르가 아닌 나를 따르게끔 하려고 했는데.’
‘숨은 상인’ 베니테즈에게서 푸른구슬을 고른 이유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페르는 제거 대상이었기에, 그저 그의 무기 중 하나를 가로채려 했던 것.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 가지 사실만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리폰은 페르의 무기가 되지 못할지언정, 그렇다고 자신의 무기가 될 수도 없으리란 사실 말이다.
‘어쩌면 페르만을 위해 존재하는 놈일지도 몰라.’
페르와 엔조가 ‘각성의 사슬’ 위에 놓여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새롭게 떠오른 가능성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루빈은 일전에 셀레스네를 통해 실험까지 해보았다. 그 결과 푸른구슬은 강렬한 마나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오직 페르 그 자체에만 반응한다는 걸 알아냈다.
잠든 페르 곁에서만, 푸른구슬은 그 생명력을 회복했고 더 안전한 상태로 돌입했었으니까.
피이이잉.
그리폰의 심장이 요동친다. 암연은 더 이상 푸른구슬을 평범한 사물로 인식하지 않았다. ‘아직’ 공격성을 띠지 않은 생명 그 자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균열이야. 푸른구슬에 균열이 일어났네.
하네케 말처럼, 발광하던 푸른구슬의 표면에선 빛이 사그라지고,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사아아아아.
자글자글 틈이 벌어지며, 푸른빛의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저 연기가 육체로 변하는 건가?’
균열 속에서 나온 연기는 푸른구슬을 감쌌고, 그대로 무언가를 형상화했다. 전장에서 마주했던 루빈이었기에, 그게 그리폰의 육체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내가 그리폰을 죽이고 심장을 적출했을 때, 그 모양이 푸른구슬이었던 이유가 이거였군.’
-자네, 경계하면서도 불안해하지는 않는군.
‘적으로 남는다면, 싸우면 되니까요. 쉽진 않겠지만 제거할 자신은 있습니다.’
왜냐고? 지금은 모든 면에서 전생의 경지를 뛰어넘은 상태였으니까.
‘다만, 확인해 보고 싶을 뿐입니다.’
-무엇을?
‘이 그리폰이, 여전히 페르의 수호마물이 될 수 있는지 말이죠. 그러면 저로선 훨씬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전생과 달리, 이번에 페르는 내 편에서 전선에 설 것이다. 그렇다면 푸른눈 또한 내 편이 되겠지.
그래서 루빈은 기다렸다. 푸른눈이 완전해질 때까지.
‘끝났군.’
푸른구슬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이제 완전히 육화(肉化)되었다. 푸른구슬은 육체 속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스스스스.
육화의 가장 마지막 순서는 머리에 돋아나는 외눈이었다. 푸른색으로 점철된 단 하나의 눈동자.
이윽고 눈동자에 영혼이 깃들며, 날카로운 눈빛이 생생히 돋아났다.
“…….”
맹금류의 상반신, 맹수의 하반신.
푸른색의 깃털과 푸른 외눈.
의문이 가득한 놈의 시선이 여기저기를 헤집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은 누구인지 궁금한 것이다.
눈을 마주쳤을 때, 루빈은 핏빛서리를 꽉 쥐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번엔 루빈의 눈빛에 의문이 담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으니까.
“여기는 어디지?”
“……!”
머릿속을 뒤흔드는 거대한 목소리.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그리폰이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루빈이었다. 적으로 마주했을 때에도 이 푸른색의 그리폰이 말을 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말을 할 수 있었나?”
그 순간, 그리폰의 푸른 눈동자가 더 날카로워졌다.
“할 수 ‘있었나?’라니. 마치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지성체로서도 낮은 수준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놈과 싸웠을 때도 그건 단순히 무력적인 충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교묘하고 영리한 놈이어서, 암살자들과 로이네크로우가 속절없이 죽어 나갔었지.
“내 말실수를 지적하는 것보단 네 소개가 먼저 아닐까?”
다행히도 놈에게선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루빈은 핏빛서리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살짝 풀었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계를 푸는 듯한 루빈의 태도가 신기했던 걸까.
그리폰의 관찰이 시작됐다. 놈은 푸른색의 날개를 몇 번 움직이더니, 루빈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면서 바닥에 쌓여있는 식물괴수들의 사체를 훑어봤다.
“네가 한 짓이냐? 이 ‘갈락스’ 시체들.”
“이놈들 이름이 갈락스였나? 처음 보는 괴수라 궁금했는데.”
“지금은, 갈락스가 흔하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
“네가 손에 쥔 단검. 그건 영혼무구 중 하나인 것 같군. 놀랍군, 놀라워…. 어린 인간이 영혼무구로부터 주인으로 인정받다니.”
루빈이야말로 놀라웠다. 이름 모르는 식물괴수를 알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단 한 번 쳐다본 것만으로도 핏빛서리를 알아보는 건 예상 밖이었다.
“그만한 영혼무구의 주인이라면, 갈락스 정돈 수십 마리라도 어렵지 않았겠지.”
“내 소개를 듣고 싶은 거면, 네 소개부터 해달라니까. 넌 누구지? 그리폰의 변종인 거냐?”
그 물음에 놈은 가볍게 웃었다.
“이봐, 네가 그리폰이라 부르는 그건 나의 하위종일 뿐이다. 나한테 그리폰이냐고 묻는 건 그만큼 실례인 거지.”
어쨌거나 계속되는 살가운 태도. 루빈도 경계심을 풀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과하지. 지금 그리폰은 멸종했거든.”
“그건 좀 안타깝네.”
이 말을 통해 루빈은 한 가지 사실을 유추했다. 이놈은 식물괴수가 ‘지금’ 시대엔 흔하지 않은 거냐고 했었고, 그리폰의 멸종을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역시, 탄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건가?
이를테면 동면?
실제로 놈은 아주 오래된 잠에서 깨어난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인간 눈에는 괴수나 마물처럼 보이겠지만, 나한테도 이름이란 게 있다. 셀록. 그게 내 이름이다.”
이제껏 그저 ‘푸른눈’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셀록이란 이름이 있었다니.
셀록은 또다시 루빈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루빈과 정면으로 마주 서곤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펼쳤다. 새삼 셀록이 더 거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너는 역시 아니군.”
“뭐가 아니라는 거지?”
“내가 다시 ‘깨어난 이유’. 네가 아니라는 말이다.”
깨어난 이유라는 것이 페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루빈은 확신했다.
“나는 ‘선택받은 마법사’를 지키는 소명과 함께 태어난다. 그것만이 내가 죽고 태어나는 이유지.”
“죽고 태어난다고?”
“봤지 않나? 내가 깨어나는 과정을.”
“방금 그걸 말하는 건가. 푸른구슬을 깨고 나온 거?”
셀록이 미소가 느껴지는 듯한 태도로 부리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곧 거리낌 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루빈을 적으로 감지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래, 나는 심장을 깨고 나와서, 그 심장을 다시 품는다. 그건 알이자, 심장인 거지. 그렇게 나는 불멸하는 거다.”
“흠.”
루빈의 침음. 루빈은 전생에 셀록을 소멸시킨 장본인이었다. 심장을 적출한 다음, 그걸 분명히 없앴었다. 심장은 구슬 상태로 산산조각 나서 바람에 흩날렸는데. 전부 착각이었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건 나중에 해결해도 그만이었다.
“‘선택받은 마법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
“그래, 그런데 너는 아무래도 ‘그’가 아닌 것 같군. 일단 본질부터가 마법사가 아닌 것 같은데.”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받은 마법사란 페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셀록은 ‘각성의 사슬’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때, 셀록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한마디는 루빈이 잠시 내려놓았던 경계심을 다시 퍼트리는 말이었다.
고작 한마디에, 루빈의 의지를 읽은 핏빛서리가 검의 울음과 함께 순식간에 눈보라를 일으켰다.
휘이이이이이.
“…방금 뭐라고 했지?”
“못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다시 말해.”
“원한다면. 네게 로이네크로우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로이네크로우의 존재도 알고 있다고?
아무리 적의가 없다 해도, 상대가 암살검가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침을 꿀꺽 삼킨 루빈은 더는 암연을 잠잠하게 놔두지 않았다. 공격적인 암연으로 돌변시켜 셀록을 감쌌다.
하지만 루빈의 급변한 기운에도 셀록의 눈동자에선 여전히 전투 의지가 담기지 않았다.
“이봐, 난 너랑 이 자리에서 싸울 생각이 없는데. 영혼무구를 좀 진정시키는 게 좋을 것 같군.”
“로이네크로우를 알고 있다는 건 내 예상 밖이야.”
“그래? 뭐가 어쨌든, 난 그것보다 좀 아쉬울 뿐이다.”
“아쉽다?”
“그리폰이 사멸한 마당에, 어째서 로이네크로우는 사멸하지 않은 건지.”
“그게… 무슨 말이지?”
“아, 모르는 건가. 하긴, 모를 수도 있겠어. 그럼 이걸 말해줘도 되려나.”
“……?”
“그리폰이 나의 하위종이듯, 로이네크로우도 ‘그놈’의 하위종이라고. 유일무이한 원류가 따로 있다는 말이지. 나에 필적하는 고등한 지성체가.”
루빈은 손을 들어 대화를 잠시 멈추었다.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다. 이는 단순히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게 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직 로이넨 가주만이 접근할 수 있는, 그만한 비밀에 한 발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름 모를 인간아.”
“……?”
“일단 그 영혼무구부터 진정시키지 그래? 어쨌든 난 너와 싸울 생각 없어. 너에게선 로이네크로우의 냄새도 나지만, 그거랑 별개로 내 주인의 강렬한 신뢰도 느껴지거든.”
내 주인은 필시 페르 로렌치니. 오스카 투니오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아이의 엄청난 신뢰가 마치 향기처럼 루빈을 감싸는 중이었고, 그게 셀록에게서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인 것이다.
만약 반대로, 루빈이 오스카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면? 셀록은 깨어나자마자 루빈을 공격했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놈과 맞섰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글쎄. 그건 아무도 모른다.
‘후…. 생각보다 훨씬 긴 하루군.’
루빈은 다시 한번 그렇게 생각했다.
* * *
그 시각.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시작하는 생도들이었다.
오전까지는 동굴에 막 들어와 들뜬 기분 속에 시간을 어영부영 보냈던 거고,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채집활동인 셈이었다.
“종유석처럼 생긴 저것도 식물이라고? 난 저런 건 처음 봐.”
“클로이 아가씨.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됐거든. 내가 할 거야.”
클로이는 적극적으로 마핵초를 채집했고, 옆에 서 있는 셀레스네는 클로이의 동작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쳇.”
아무리 제국귀족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오직 혼자서만 귀족 행세를 하는 것 같아 클로이에 또다시 열등감을 느끼는 달리아.
그런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오스카로 향했다. 지금쯤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떠들어대고 있어야 하는데? 귀가 너무 허전했다.
실제로 오전 내내 수다를 떨었던 오스카다. 조용한 순간이라곤, 셀레스네가 조원 전체에게 나눠주기 위해 따로 싸 온 특제 도시락을 공개했을 때뿐.
얼마나 떠들어댔는지, 셀레스네 쪽에서 은근히 점심 식사를 계속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할 정도였다.
그런 오스카였는데, 왜 갑자기 조용해진 거지?
그런 의문은, 마침 오스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클로이와 셀레스네 머릿속에도 똑같이 떠올랐다.
오스카가 조용해졌다는 걸 알아채기까지, 두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가씨. 정말로 저 평민… 아니, 오스카 도련님의 마나가 그리 대단하다는 건가요? 제가 보기엔 그냥 말만 많은 거 같은데.”
“나중에 제대로 마법 대련을 해보고 싶어. 진심이야. 아, 그전에 오스카한테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셀레스네.”
“말씀해 주세요.”
“블루캣 호에서 루든한테 했던 거 있잖아. 우리 가문에서 만든 마도구로 했던. 마나 감별.”
클로이가 말하는 건, 마나의 환을 감별하는 마도구였다. 모양은 모래시계처럼 생긴 것. 블루캣호에서 루빈은 한 차례 감별을 받았던 터였다
모래시계 내부의 가루가 상부로 향하면 모휘, 병목에 있으면 원휘, 하부로 향하면 삼휘.
게다가 이 마도구는 휘식만이 아니라, 마나의 양까지 감별해 주었다. 가루의 색이 검은색에 가까울수록 마나가 미미하고, 반대로 하얀색에 가까우면 풍부한 것이다. 당시, 루빈은 검은색 그 자체였었다.
“아가씨보다 더 뛰어난지 알고 싶으신 거군요?”
“응, 맞아”
“단언컨대, 아가씨와 동년배 중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대륙을 통틀어도요.”
“그건 모를 일이지.”
“알겠어요, 나중에 시간을 내서 확인해 보죠. 그런데, 오스카 도련님의 목소리가 안 들리네요?”
“어, 진짜. 그러네. 무슨 일이지?”
오스카는 한쪽에 동굴 벽을 짚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달리아가 먼저 다가갔고, 클로이와 셀레스네도 뒤따랐다.
“오스카, 너 왜 그래?”
오스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 대고 있었다. 심장 부근이었다.
“모르겠어. 갑자기 가슴 쪽이 아파서.”
“괜찮은 거야?”
그러나 심각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곧바로 셀레스네를 향한 농담이 이어졌으니까.
“설마… 좀 전에 먹은 위더스푼 시녀님의 음식에 독이라도 있었던 건가?”
“독이 아니라, 과식 때문일 것 같군요.”
“그런가? 후… 후…. 어쨌든 난 좀 쉬어야겠어.”
지금 저의 수호마물 셀록이 깨어났고, 룸메이트와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음을 알 리 없는 오스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