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59)
암살검가 로이넨-159화(159/258)
제159화. 셀록 (3)
동굴의 가장 깊은 곳.
루빈과 셀록의 말소리가 울리고 있다.
“…네가 페르의 룸메이트였던 거군.”
차분한 분위기 속에 이어지는 대화. 어느새 루빈은 핏빛서리를 거둔 상태였다. 자신을 적대하지 않는 이상, 푸른 깃털의 그리폰에게 검을 겨눌 일은 없다.
“수호마물이라고 했지? 그럼 페르 로렌치니를 느낄 수 있나?”
“그럼!”
그러면서 셀록은 부리의 방향을 한쪽으로 틀었다. 부리가 향하고 있는 벽 너머. 한참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 방향의 끝에 페르가 있다는 뜻이리라.
지금쯤 페르는 열심히, 주변 사람들을 질리게 하는 수다와 함께 마핵초를 채집하고 있을 것이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잖나? 네겐 말이야.”
셀록의 말대로였다. 페르와 수호마물의 관계는, 암살자와 로이네크로우의 관계와 같았다.
로이네크로우 또한, 한번 주인으로 받아들이면 어디든, 언제든 주인을 느낄 수 있다.
티나만 해도, 비록 다른 생물체로 있을 땐 아닐지라도 로이네크로우로 있을 때만큼은 루빈과 선명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도 네가 해준 이야기 중엔 꽤 놀라운 것도 있었다.”
“뭐, 글레이튼 이야기?”
“그래. 흥미로웠다. 몇몇 이야긴 순 엉터리였지만. 개중엔 내가 몰랐던 이야기도 있더군.”
마법사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인, ‘사라진 대마법사 글레이튼’에 대한 이야기였다.
루빈은 로이넨가 저택 서고에 있는 동안, 글레이튼에 대한 이야기들을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깊이 탐독했다.
실제로 글레이튼의 최후가 밝혀지지 않은 것과 달리, 그의 생전 행적은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 지식이 셀록에게 흥미로움을 안겨준 것이다.
물론, 그 어떤 책에도 글레이튼에게 수호마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마, 세상 그 어떤 책에서도 셀록에 대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을 거다. 회귀한 루빈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니.
“글레이튼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라.”
“그렇겠지. 그는 원래 그런 자니까. 조금은 그립군. 나의 옛 주인.”
“옛 주인? 글레이튼이 네 주인이었다고?”
“왜 놀라지?”
“주인이 바뀌기도 하나? 아니면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있는 건가?”
“아니.”
셀록의 말이 곧바로 이어졌다.
“글레이튼 그놈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난 어쩔 수 없이 다시 동면에 들어간 거다. 내가 다시 깨어난 건 페르 때문이고.”
“페르만이 네가 보호해야 할 유일한 사람이란 거구나.”
“그래, 그런 거다.”
셀록의 눈길이 루빈의 왼팔로 향했다.
“그러니, 그 팔찌를 뺏길 거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가 뺏는다 해도 순순히 뺏길 리 없겠지만.”
“…역시 알고 있었군.”
“모를 수가 없지.”
내면화된 휘식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글레이튼의 팔찌. 이름에 나와 있듯, 이 팔찌는 셀록의 이전 주인인 글레이튼이 만든 것이었다.
“글레이튼은 엄청난 마도구 제작자였다던데.”
“틀린 말은 아니지.”
“이 팔찌 정도 되는 글레이튼의 작품들은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알고 있나?”
“왜, 수집이라도 하려는 거냐?”
루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만든 마도구들은 하나같이 전설적인 것들. 글레이튼의 팔찌는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만약 몇 개 더, 아니 단 하나만이라도 더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루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질 것이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셀록이 부리를 벌리며 웃음소리를 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웃음이었다.
루빈은 단호히 말했다.
“문제 있나? 어차피 네 옛 주인의 물건들이잖아. 페르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지.”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면, 그걸 이용해서 내가 페르를 지키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어. 분명 위험한 곳에 숨겨져 있을 텐데, 페르가 직접 찾아다니는 건 좀 그렇잖아? 나한테도 페르는 중요한 동료거든.”
셀록이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설득력 있고, 꽤 합리적인 이야기라 느낀 것이다.
하지만-
“아쉽지만, 그럴 수가 없군.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난 전혀 모르거든. 글레이튼 성격상 그걸 한곳에 모아놓지도 않았을 거고. 하나하나 찾아다니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겠군”
루빈은 고갤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글레이튼은 베일에 쌓인 신비로운 인물. 그런 그의 비밀이 이렇게 쉽게 벗겨질 리 없다.
“아, 근데 말이지.”
체념하려는데, 셀록의 말이 또다시 이어졌다.
“또 모르지. 그 녀석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어쩌면 이미 몇 개 슬쩍했을지도 모르고.”
“그 녀석?”
“과거 글레이튼의 맞수 말이야. 녀석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글레이튼의 마도구를 손에 넣으려 했을 거다. 분명 목숨 걸고 찾아다녔겠지.”
글레이튼의 맞수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이어지는 셀록의 설명에 의하면, 글레이튼에겐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실력의 대장장이 호적수가 있었다고 한다.
글레이튼에 비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실력만은 글레이튼 본인 역시 인정했다고.
“그 녀석에게 물어보면 알려줄지도 모르겠어.”
“글레이튼 시대의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말인가?”
왕국이었던 릴리크가 제국이 되었음을 선포한 게 100년 전. 그리고 릴리크가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게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이다.
글레이튼은, 대륙이 왕국들의 전쟁으로 물들었던 시대의 마법사였다. 그러니까, 최소 100년 전의 인물인 것이다.
글레이튼과 동시대를 살았다면, 대장장이는 당연하게도 인간을 초월하는 수명이어야 했다.
“혹시 엘프인가?”
셀록은 대답해 주는 대신, 코웃음 치며 이렇게 되물었다.
“설마, 진짜 찾아보려는 거냐?”
하지만 루빈은 진심이었다.
글레이튼에 필적하는 대장장이라니.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라면 글레이튼의 마도구 때문이 아니라도, 찾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오히려 잘 됐다.’
어차피 루빈에겐, 1급 마적석의 탐지 마도구를 만들어주고, ‘롭슨의 비검’을 단검으로 개조해 줄 대장장이가 필요했으니까.
제작 능력이 마도구에 국한되어 있는 글레이튼. 하지만 이 대장장이라면, 무구 제작도 가능할지 몰랐다.
“진짜 진심인가 본데. 재밌군, 재밌어. 알려줄까? 나도 오랜만에 보고 싶은 참이었는데.”
“아니, 그건 나중에 알려줘도 돼.”
로젠탈러에게서 비검을 빼앗은 후에 말이지.
루빈이 페르와 척지지 않는 한, 셀록과 적대할 일은 없다. 그렇다면 언제든 원할 때 다시 물어볼 수 있다는 뜻.
루빈은 대장장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물어볼 게 아직 많았다.
무려 신에 가까운 존재와의 대화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루빈은 페르를 얼른 보고 싶어 하는 셀록을 붙잡곤,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여기에서 나가면, 셀록은 페르를 지키는 데에만 전념할 터.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힘들 것이었다.
루빈이 모르던, 그리고 앞으로도 알기 힘들 세계의 비밀들에 대해, 루빈은 질문했다.
“셀록. 또 하나 묻지.”
“또 뭐가 궁금한 거지?”
“그러면 넌 엔조 역시도 보호하는 건가? 그들 부자 사이엔 각성의 사슬이 묶여 있잖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난 각성의 사슬 때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야. ‘선택받은 마법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 말이다. 그건 각성의 사슬과는 엄연히 달라.”
각성의 사슬이 끊어졌을 때 이뤄지는 ‘잠재력의 등반’. 그건 엔조나 페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하지만 ‘선택받은 마법사’란 또 다르다는 말이었다. 그건 오직 페르에게만 해당되는 것. 셀록은 그런 페르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셀록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개 ‘선택받은 자들’은 각성의 사슬에 얽혀 있긴 하지. 글레이튼도 그랬으니까.”
“…….”
“그러니까 엔조는 죄책감을 덜어도 될 거야. 엔조야말로 페르 때문에 각성의 사슬에 놓인 꼴이니까.”
엔조는 자신 때문에 페르가 얽힌 줄 알지만, 그 반대라는 뜻이었다. 이걸 알려준다면, 엔조는 죄책감을 덜겠지.
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방금 셀록이 했던 말에서 루빈을 잡아끌었던 대목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분명 페르를 두고 ‘선택받은 마법사’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폰의 원류가 셀록이듯이, 로이네크로우의 원류도 따로 존재한다고 했었다. 셀록은 이름은 생략한 채 ‘그놈’이라 불렀지만.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건, 그렇다면 ‘선택받은 무인’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어쩌면 ‘그자’는 암살검가의 일원일지도 몰랐다.
“그 말은 한 명이 아니라는 거잖아?”
“그래, 페르만이 선택받은 건 아니니.”
“그렇다면, 로이네크로우의 원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네가 ‘그놈’이라고 말한 그 지성체 말이야. 그 지성체의 존재 이유도 있을 거잖아.”
그 순간.
셀록의 푸른 눈동자가 루빈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어지는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다.
“…미안하지만 그건 말해줄 수 없다.”
“뭐?”
“말해줄 수 없다고.”
“…페르가 명령한다고 해도?”
셀록은 페르를 따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존재, 어쩌면 그 이상. 전생에서 암살자들과 전쟁을 치렀던 것도, 텔마흐의 선봉장이었던 페르 때문이었을 터.
지성체로서 셀록의 옳고 그름보다, 존재 이유인 페르가 더 우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페르가 말해주라 하면, 어떤 비밀이든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그래, 페르가 지시한다고 해도 그건 말해줄 수 없다.”
“어째서지?”
“그건 아주 오래전, 그놈과의 약속 때문이지.”
“그놈… 로이네크로우의 원류. 너와 같은 반신(半神)의 지성체.”
본가의 가주만이 접근할 수 있는 그런 비밀이 완전히 드러나는 줄 알았는데, 그 앞에서 문이 닫히고 마는 순간이다.
루빈은 답답했다.
‘페르 같은 사람이, 셀록 같은 지성체가 암살검가에도 존재한다면…….’
텔마흐를 향한 복수에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루빈으로선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아득한 과거에 나눈 약속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니.
“나와 놈과의 약속은 깨질 수 없는 맹약이다. 놈은 자신에 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고, 난 그걸 지킬 수밖에 없지.”
“…….”
“가뜩이나 놈은 암연을 지닌 자에게는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키라고 했었지. 넌 그 일족이잖아.”
“…….”
“게다가 나는 그놈이 깨어있는지, 동면해 있는지 정말 모른단 말이야. 놈에 대해서 알아내든, 놈을 만나든…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어머니는 알까? 문득 궁금해졌다.
암살검가 본가의 가주라면, 그만한 진실에까지 닿아 있을까.
얼마나 많은 방계가문이 대륙에 퍼져 있는지. 대륙의 전란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암살검가의 기원은 어디인지.
그리고 로이네크로우의 원류는 무엇이며 ‘선택받은 자’는 존재하긴 하는지…….
이것들은 전생의 세이렌조차 루빈에게 말해주지 않은 진실들이었다.
‘알고 있다면, 어째서 말해주시지 않았던 거지, 어째서?’
텔마흐에게 절멸할 것이 빤해서, 더는 희망이 없었기에 진실이 무가치하다고 판단했던 걸까?
그래도 전생의 루빈이었다면, 적어도 세이렌에게 진실을 요구할 순 있었을 터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지.’
다시 태어난 루빈이 죽기 전보다 더 강해졌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경지일 뿐이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모든 암살검가의 가주들을 굴복시키지 않는 한 진실에 가까워질 수 없었다.
‘결국 가주가 되는 수밖에. 어머니조차 납득할 만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전생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수밖에 없다. 암살검가의 절멸을 앞두었을 때 어머니는 말해주겠지.
물론, 루빈은 그럴 결말을 원치 않았다. 절대로.
잠시 후.
“이제 페르를 만나게 되는 건가?”
셀록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가득해졌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식물괴수들을 처치하는 중에 잔뜩 너절해진 마법사 로브를 다시 입었다. 그러면서 셀록에게 물었다.
“구슬 형태로 있다가 페르가 위험해지면 나오겠다는 거지? 근데 수업 중에 착각해서 잘못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네 눈에는 괴수처럼 보이더라도 난 살아있는 역사책이란 걸 잊지 마.”
“동면기를 빼면, 괴수 수명 정도 산 거 아냐?”
“역시 까마귀들 친구라 이거지? 어쨌든, 그 정도로 사리분별이 없진 않으니 걱정 말라는 뜻이다. 페르의 목숨이 위험해질 때, 그때만 나올 테니까.”
“그래, 알겠어.”
그러면서도 루빈은 살짝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 셀록, 네 몸 안에 있는 심장을 적출하고 그걸 소멸시켜도… 그건 소멸된 게 아니라는 거지?”
대답을 미룬 셀록이 빠르게 낭떠러지 위로 올라가 버렸다. 뒤따라 루빈도 올라오자, 그제야 셀록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래. 난 소멸되는 게 아니라, 동면할 뿐이지. 죽는 것처럼 보여도.”
“흠…….”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건가?”
사실, 루빈으로선 완전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생에 셀록을 죽이고 그 심장을 적출했던 장본인이었으니까.
분명 루빈은 자신에 의해 산산조각 난 구슬을 보았었다. 어렴풋한 기억도 아닌 데다, 수십의 암살자들을 잃고 얻어낸 작은 승리였기에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게다가, 난 심장이 아작 난 것처럼 꾸며낼 수도 있지. 일종의 눈속임이지.”
역시 그랬던 건가. 만약 그렇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긴 한데.
툭툭.
“가자, 얼른.”
셀록은 통로 저쪽까지 먼저 나아가,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나무뿌리를 부리로 두드렸다. 루빈이 열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뜯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분명 생명이 스러지는 걸 암연으로 느꼈는데.’
눈속임을 넘어, 암연까지 속일 수 있다는 건가?
여전히 말끔해지지 않는 기분 속에 셀록 곁으로 다가가는데, 셀록은 푸른 구슬의 형태로 돌아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내가 소멸되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있어. 내 심장을 적출해서 부수는 놈이 ‘선택받은 자’일 때.”
말을 마친 셀록이 푸른 구슬로 돌아갔다.
피이이잉.
“…….”
루빈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푸른 구슬을 지그시 쳐다봤다. 이윽고, 그걸 다시 집어 들었지만 아공간 주머니에 넣지는 않았다.
대신 로브의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이제 곧 페르를 만나, 선물이라며 전해줘야 했으니.
‘눈속임? 아니면 선택받은 자? …뭐, 언젠가 확인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