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6)
암살검가 로이넨-16화(16/258)
제16화. 빛과 반역의 탑 (1)
“방을 내주시겠다니, 참으로 은혜로운 분이시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루빈의 호위가신이 감사를 표하자, 볼고튼 성에 거주하는 지도제작자가 살갑게 대답했다.
루빈은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모든 게 연기였다.
대화부터 몸동작까지 전부.
이 자리에 암살검가 일원들밖에 없더라도 연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관객이 없어도 암살자들의 역할은 이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남들을 도울 수 있는 날을 기다렸는걸요.”
다부지면서 선량한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었다.
“마차 안에 있는 아이도 어서 나오시라고 하시죠.”
“미겔 도련님, 나오시지요. 오늘 저희에게 선의를 베푸실 분이 기다리십니다.”
미겔. 그것이 이번 여정에서 루빈의 이름이었다.
실성하여 가끔 헛것을 보는, 실어증을 앓는 소년. 헛것을 본다는 설정이 있었던 건, 만에 하나 실수를 하더라도 쉽게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하, 반가워!”
남자가 미소를 보였음에도, 루빈은 웃는 둥 마는 둥 어정쩡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런 루빈에게 선뜻 악수를 청하는 지도제작자. 루빈은 그 손을 맞잡았다.
“이런, 지도 작업 중이라는 걸 까먹었네. 잉크를 묻혀 버렸구나. 미안하다, 꼬마야?”
의도된 실수. 루빈은 바지에 박박 문질러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아냈다.
‘3년 만인가.’
루빈은 생각했다.
어느덧 암살자 활동 2년 차에 접어든 로이넨 가문의 차남, 매피스 로이넨. 이렇게 갑자기 재회할 줄은.
그러나 잠깐 눈을 맞추었을 뿐, 두 사람은 각자의 역할을 깨트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의도인 건가?
매피스를 만나서 뭘 어떻게 하란 뜻이지?
회귀 전이든 지금이든, 어머니의 속마음은 도통 읽어내기 어려웠다.
“미겔은 항상 꿀 먹은 벙어리인가 보죠?”
저녁식사를 위해 식탁에 모여 앉았다.
볼고튼 성의 중간 계급에 걸맞게 차려진 저녁 식사. 간단한 빵과 토마토 수프, 또 물로 희석한 포도주가 올라와 있는 단출한 식탁.
매피스의 위장 신분은 지방 귀족 출생의 지도제작자, 이름은 호른이었다.
올해 스무 살이 된 그는 지난 2년 사이 칙명부가 하달한 임무를 모두 완수했다.
이제 그는 이 중간 계급의 삶이 지긋지긋해지던 차였다. 그래서 칙명부에 새로운 신분을 요청, 승인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번엔 지도제작자 따위의 신분이 아닌, 순혈 귀족 신분으로 고급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난데없는 본가의 전언을 받았다. 그로부터 3일 후에는 지금껏 잡종이라 멸시하던 막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 도련님은 지금 말을 잃으셨습니다.”
“말을 잃었다고요?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요?”
“아뇨. 동생분의 죽음을 접한 뒤로 그 충격에 그만 실어증을 앓게 되셨습니다.”
“쯧쯧, 어린 나이에 힘들겠네요.”
매피스는 한 손을 루빈의 어깨에 얹은 다음, 툭툭 두드렸다.
“힘내, 인마! 너도 네 아버지 뒤를 이어 수완 좋은 가죽 상인이 돼야지!”
무기력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루빈.
“내 고향에도 딱 이 아이만 한 동생이 있지요.”
뜬금없이 고향 이야기가 시작됐다.
“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녀석이긴 한데, 뭐랄까요, 좀 모자란 놈이었죠.”
그러면서 매피스는 다음 부분을 강조했다.
“사실 녀석은 배다른 형제거든요.”
가신들은 루빈의 표정을 살폈다.
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 중, 매피스의 가짜 고향 이야기가 실은 로이넨 가문과 루빈을 빗댄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부형제를 이복형제로 바꿨을 뿐.
“뭐, 어쨌든 같은 핏줄이긴 하지만, 저는 애초에 그 아이와 엮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호른 님께서 취하셨나 보네요.”
불안감을 느낀 한 가신이 수습에 나섰지만, 매피스는 그 수습에 응할 생각이 없다.
“제가요? 하하, 전혀요. 멀쩡합니다. 이 실어증 걸린 도련님을 보니까, 갑자기 제 고향이 생각나서 그럽니다. 그러니 제 이야기를 막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일순간 싸해지는 분위기.
지금 매피스는 연기와 본심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위험까지 무릅써야 했나.’
암살검가 임무와 상관없는 여행자들을 위장별채로 맞이하는 일은 드물다. 동시에 임무 중인 암살자들 입장에서 몹시 불쾌한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본가의 전언이 있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미천하고 더러운 이부형제라면?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이런 상황에서 매피스를 더욱 화나게 했던 건, 다름 아닌 루빈의 호위가신들이었다.
마부와 두 하인을 연기하는 가신들이 가문 안에서 얼마나 유능한 인재인지는, 매피스 본인이 더 잘 알았으니까.
‘미천한 놈에게 대체 왜 저런 특혜를 주시는 거지? 운 좋게 1차 선택에서 우승해서?’
어머니의 결정에 화가 났지만, 매피스에게 루빈은 당장 꺼트려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애였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짓밟아줄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가신들은 아니었다. 가문 안에서 루빈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제 확실히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었다.
루빈이 얼마나 나약하고 멍청한지, 그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그 모자란 동생 말고도, 제게는 형이 하나 있지요. 형과 저는 아주 돈독합니다. 서로 힘을 합쳐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만큼 끈끈하죠. 그래서 저는, 틀림없이 저와 형 중 한 명이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거로 생각한답니다.”
매피스는 루빈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오로지 세 명의 가신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지금이야 아버지가 모자란 막내 놈을 챙겨주시는 것 같은데, 그거야 한때 아니겠습니까?”
그때.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는 한 사람.
“미겔 도련님, 이제 주무시렵니까? 피곤하시겠지요. 그럼 어서 올라가시는 게…….”
한 가신이 난처함을 무마하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식탁 앞에 앉은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루빈에 집중된 상황.
루빈은 포크 하나를 집어 들어 토마토 수프에 찍은 다음, 나무 식탁 위에 글씨를 휘갈겨 썼다.
-이 아저씨 옆에 뭔가가, 뭔가가… 유령이 보여요!
실성했다는 설정이니 거기에 맞춰줘야지.
“예?”
“유령이요?”
다들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루빈은 멈추지 않았다. 다시 포크를 토마토 수프에 담갔다가 들었다.
타닥. 타닥. 타닥.
거실 한쪽에서 타오르는 장작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질 만큼, 사람들은 침 삼키는 것조차 미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루빈의 글귀는.
-어라?유령이 아니라 날파리였구나.
“크흠!”
한껏 고조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주도권을 빼앗긴 매피스는 유독 헛기침하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화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문 꼴이 우스웠다.
나이만 먹었지, 저 커다란 머릿속엔 여전히 멍청하고 유치한 꼬마 매피스가 들어있었다.
이쯤에서 루빈은 그만하기로 했다. 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시간은 앞으로도 많으니까.
-전 이만 올라가서 잘게요. 졸리네요.
포크를 접시 옆에 가지런히 놓고 루빈이 주방을 나선다. 그러자 매피스가 억지웃음을 흘렸다.
“그래, 꼬마는 어서 자야지. 난 네 하인들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야겠구나. 다 컸으니 방까지 혼자 갈 수 있겠지?”
루빈은 대꾸 없이 계단을 올라 방으로 향했다.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매피스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루빈에게만 제공된 방에 들어가 누울 때, 하네케가 끼어들었다.
-괜찮은 구경거리였네. 다들 연기에 열중이더군. 근데 저 젊은이는 누구냐?
‘매피스 루이넨. 제 이부형제예요. 작은형이죠.’
하네케가 허허,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로이넨 가문은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구먼. 재미있어.
‘형제라기보단 경쟁자죠. 태어나는 순간부터요.’
-지금도?
그럴 리가. 루빈은 가볍게 미소 짓는다. 매피스는 손쉬운 상대다. 말을 꺼낼 가치조차 없는.
내 복수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순간적으로 놈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는데. 자네도 느꼈겠지?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보다…….’
루빈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눈앞에 고요한 수련장이 펼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내면세계. 그 속에서 루빈은 하네케를 마주했다.
‘검술 가르쳐 주셔야죠.’
어느새 루빈의 손에 놓인 두 개의 목검. 하나는 루빈이 쥐고, 나머지는 하네케에게 건넸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네케는 대련을 미루려고 한다.
‘대련에 응해주지 않는다면 뭐, 또 복습해야죠.’
브리온 검법 수련을 다시 반복했다. 절제된 동작, 검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하네케가 입을 열었다.
-궁금하군.
‘뭐가요?’
-어째서 ‘빛과 반역의 탑’이지? 인제 와서 갑자기 황제한테 충성을 맹세하려는 건 아닐 테고.
루빈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한가롭게 앉아서 자신의 검술을 지켜보는 하네케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물론, 지금 당장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건 그곳에 가서 말씀드리죠.’
-흠, 뭔가 생각이 있나 보군.
다시 시작된 루빈의 검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집요하고 맹렬하고 또 유려하다.
하네케는 루빈의 움직임에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발견했다. 처음이 아니기에 놀라진 않았지만, 나서서 가르치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그는, 가까스로 욕망을 억눌렀다.
-그런데 자네 가신들,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건가? 포섭될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이 말일세.
대답 없는 루빈에게 그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자네 형도 아주 실력이 없는 건 아닐 테고. 저 가신들 실력이야 뭐, 말할 것도 없겠지. 만약 그들이 결탁하여 자네를 죽이려 들면 어쩔 건가?
여전히 루빈은 아무 대답 없이, 얼굴 위로 희미한 미소만 떠올렸다. 그런 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를.
‘저들이 왜 개 밑으로 들어가겠습니까. 늑대를 두고서요.’
루빈의 목검이 다시금 휘둘러졌다.
거리의 불빛이 모두 사라진 시간.
루빈의 내면세계에서 검술 수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
새벽 3시가 다 됐다. 집주인의 침실은 루빈의 침실 맞은편. 발소리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흠, 역시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하잖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분명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루빈은 침착하게 의식의 한쪽은 내면세계의 수련장에 두고, 다른 한쪽은 침실에 두었다.
그때.
끼이이익.
침실 문이 열렸다.
눈을 감은 루빈 위로, 평정심을 잃은 시커먼 그늘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