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66)
암살검가 로이넨-166화(166/258)
제166화. 암살 명령 (2)
“…….”
루빈과 암살자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두 사람 다 암연을 넓게 펼쳐 주변을 확인했다.
루빈은 방문자를 책장들 뒤에 숨겨져 있는 밀실로 안내했다. 서점 안에서 대화를 나눠도 안전하다는 걸 확인했지만, 신중을 기해야 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도련님.”
본가의 자제를 향한 인사를 올리고, 대화를 시작하는 암살자.
“어느 정도 예상했으니까. 이 부근에서 로젠탈러를 제거할 수 있는 자는 얼마 없지.”
“이전에 뵙고, 한 달 정도 지났습니다.”
네이프 그리어스.
그리어스가의 가주이자 베야네그로의 거점창고 관리인. ‘협곡 감옥’에서 엔조를 빼내올 땐 그리어스 가주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로젠탈러가 히탄을 제거했다는 사실을 전해주며 루빈을 돕고 있었다.
“도련님 말씀처럼, 저는 칙명부의 지시에 따라 여기로 왔습니다. 로젠탈러 암살 명령이죠.”
“나를 찾아온 이유도 있겠지.”
예상은 하고 있지만, 루빈은 넌지시 물었다.
“네. 칙명부 요원을 비밀리에 제거해야 하는 임무입니다. 칙명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지요.”
“나보고 암살자를 돕는 칙명부 역할을 하라는 거구나.”
“맞습니다. 이 역시 칙명부의 지시였습니다.”
룰포의 속셈을 알 것 같다.
룰포는 루빈이 자신들에게 품었을지도 모르는 의심을 걱정하고 있다. ‘페르-엔조 작전’의 실체가 얼마나 드러났는지 불안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루빈을 작전에 투입시키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이득이 있었다.
‘로젠탈러가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쪽에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돼버리지. 그놈은 그저 암살 대상이니까.’
만약 로젠탈러가 ‘페르-엔조 작전’의 실체를 털어놓는다 해도 마찬가지. 그가 하는 말은 칙명부로부터 배제당한 요원의 헛소리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머리를 썼군, 룰포. 로젠탈러를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어,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셈.’
그러나 이쪽은 페르에 관한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루빈이었다. 심지어 ‘선택받은 마법사’라는, 칙명부조차 모르는 사실조차 알고 있었으니. 룰포의 잔꾀도 다 루빈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그때, 네이프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도련님. 칙명부가 뭐라 해도 저는 본가의 자제를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내 할 일 정도는 할게.”
“협곡 감옥에서 마법사를 무사히 빼낼 정도로 출중하시다 한들, 아직은 로이넨서에게 교육받고 있는 중이시지 않습니까.”
“현재 카포티니 상황은 로젠탈러 때문에 아주 복잡해졌어. 도시엔 제국귀족의 막내딸도 있지. 어쩔 수 없이 내 도움이 필요할 거야.”
네이프는 적당한 정보만 제공해 주길 원하는 것 같지만, 루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네이프가 절대 원하지 않는 식으로 일을 벌일 작정이었다.
‘네이프를 속이고, 로젠탈러와 단독으로 대결하는 것.’
제거만이 유일한 목표라면, 네이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상책일 것이다.
그러나 루빈은 로젠탈러 제거가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 자체를 원했다.
강해져야만 한다. 지금보다 더 경지를 끌어올려야만 한다. 그에게 로젠탈러는 꼭 거쳐야 하는 성장의 발판이었다.
여기서 놈을 이기지 못하면, 훗날 텔마흐와는 마주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누구에게도 이 전투를 양보할 순 없었다.
‘그래도 네이프여서 다행이군.’
일전에 확인했다시피 그리어스가는 암살검가의 수많은 방계 중 본류에 속했다. 네이프 본인은 어머니와 ‘암연의 맹약’까지 맺기도 했고.
다른 암살자였다면 로젠탈러와의 싸움 이후 뒷수습에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프라면 일을 키우지 않고 넘어가 줄 게 분명했다.
“괜찮은 방법이 있어, 네이프.”
“벌써부터 칙명부 역할을 해주시려는 겁니까?”
“너의 또 다른 신분은 귀족가문 팰리스틴의 가주잖아, 그치?”
네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팰리스틴가는 베야네그로에서는 인망이 두텁고 인근 도시에까지 그 명성이 닿아 있는 귀족 가문. 네이프는 태어났을 때부터 위장 신분인 귀족가의 삶을 누려왔다.
“10일 뒤에 연회가 있어. 이엘로스 가문과 델린 가문이 합동으로 하는 축하연.”
“그들 가문이라면 저도 들어봤습니다. 니스 왕국의 마법사 가문으로 꽤 유명하지요. 그런데 그들 가문의 연회는 어째서……?”
“너의 위장 신분이라면, 거기에 참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제가 그곳에 참석을? 혹, 그곳에 로젠탈러가 나타나는 겁니까?”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회는 놈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야. 그곳에서 놈을 제거하는 건 너무 부담되니까. 그러니 그 근방에 제거할 만한 장소를 물색해 놓을게.”
어찌 됐건, 로젠탈러를 제거하기 위해선 루빈의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네이프는 루빈을 작전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로젠탈러 그놈을 죽이려면 아무래도 도련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네이프가 생각하는 루빈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칙명부를 대체하는 것. 즉, 간접적인 도움만을 원할 뿐이었다.
루빈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그는, 로젠탈러와 검을 겨누는 사람은 자신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략적으로 이야기가 매듭지어지자, 루빈은 네이프가 지낼 장소를 알려줬다.
팰리스틴 가주라는, 엄연한 양지의 신분이 있으니 함부로 거리를 나다닐 수는 없는 일.
“지하에서 지내면 될 거야. 편안한 숙소라고 할 수는 없지. 그래도 거긴 로젠탈러도 모르는 나만의 장소니까.”
“감사합니다, 도련님. 이제 학교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응, 슬슬 돌아가야겠군.”
매일 동일한 시간에 이곳으로 와서 로젠탈러 제거를 준비하기로 하고, 서점을 떠나는 루빈.
“…….”
잠시 후, 네이프는 지하 공동으로 내려왔다.
한 줌의 빛도 없이 어두운 공간. 물론 5성의 암연을 지닌 자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동안 지내야 할 공간을 확인하던 네이프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네이프 님?”
돌아보니, 쿠제가 여벌의 옷과 침구류를 든 채 눈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쿠제, 여긴 어떤 용도로 쓰이는 곳이지?”
“예?”
“벽에 빼곡한 검의 궤적들 때문에 하는 말이야. 여기에서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지?”
벽에는 검격의 흔적들로 낭자했다. 모두 루빈이 수련을 통해 남긴 것들이었다. 빛이 들지 않아도 이 검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쿠제의 대답이 이어졌다.
“전투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여긴 루빈 도련님의 수련장이지요.”
“허…. 엄청나군. 십수 년을 수련한 것 같아. 카포티니로 온 지 고작 2년밖에 안 됐을 텐데.”
쿠제를 바라보는 네이프의 눈빛엔 일종의 대견함도 배어났다. 본가의 자제를 모시는 로이넨서로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쿠제로선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나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이 나와 검술 훈련을 한 적은 거의 없는데…. 뭐, 그렇게 알고 있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혼자서 검술 수련을 한다는 것보다는 좋은 쪽으로 오해하는 게 도련님한테는 나을 것 같았다.
“검의 궤적이 독특하군. 암살검가 검식 말고도 이채로운 검식도 있는데…….”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네이프 님.”
“그래, 그러도록 해.”
쿠제는, 검흔을 관찰하며 중얼거리는 네이프를 지하 공동에 놔두곤 서둘러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 자리에 있다간 괜히 이런저런 질문과 추궁에 시달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네이프는 어둠이 익숙해질수록 더 올올하게 드러나는 검술의 흔적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전율을 느꼈다.
문득 킬리언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세이렌 가주님을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했었지.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 * *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나는 동안.
루빈과 네이프는 카포티니의 분위기를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5성의 무인에 의해 학기 중에 살해된 마법학 교수’. 이 사실 하나만으로 도시의 분위기는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것처럼 으슥해진 상태다.
“우선 도시 분위기를 바꾸려면, 그럴듯한 살해 이유를 만들어야 해. ‘마법학 교수’가 아닌 ‘가이젠’에 집중할 만한 이유.”
“마침 저희 가문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가이젠이 상업도시 아베른에서 검투 도박에 휘말렸던 적이 있더군요.”
루빈 또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칙명부는 그 사실로 가이젠을 협박했고, 페르를 찾아내는 끄나풀로 썼었지.
“그러면 그 소문을 흘리고, 가이젠을 죽인 무인이 아베른의 검투 도박에 얽혀있는 놈인 것처럼 꾸미면 되겠어.”
그렇게 되면, 니스 왕국군의 경비 태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마법학교 휴교도 연장되는 일 없이 제때 끝날 테고, 도시 분위기도 회복될 거고.
‘도시의 분위기를 바꾸는 건 중요해.’
가이젠과 관련된 소문들이 퍼지고 나면, 움츠리고 있던 로젠탈러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현재 로젠탈러는 도시 어딘가에 숨어 있어. 자신이 룰포에게 팽당했는지 어떤지 불안한 상태로 말이지. 소문을 접하고 나면, 놈은 룰포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받아들일 거야.”
로젠탈러는 칙명부 간부였기에 암살검가에 대해 잘 알았다. 만반의 대비를 한 상태로 도시 어딘가에 숨은 채 쥐 죽은 듯이 있을 게 틀림없다.
물론, 그리어스가의 가신들을 이용하면 숨어있는 로젠탈러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환경에선 여러모로 부담되는 방식이었다. 자칫 로젠탈러를 더 움츠러들게 할 수도 있다.
차라리 로젠탈러를 끌어내는 방식이 필요한 때였다.
“적당한 방법이군요.”
루빈의 전략에, 네이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본인이 전략을 짜라 해도 이렇게 짰을 것이다.
하지만 본가를 나오고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인 루빈 아니던가. 그러기엔 너무 노련했고, 교묘했다. 여러모로 자신을 놀라게 했다.
“안심한 로젠탈러가 도련님을 찾으러 여기 서점으로 올 수도 있겠군요.”
“올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놈은 틀림없이 올 거야. 이곳으로.”
루빈은 말을 이었다.
“네이프. 만약 놈이 나타나도 습격해서는 안 돼. 놈은 카포티니를 잘 알아. 놈을 제거하는 장소는 이엘로스 가문의 영지여야 해.”
네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등한 경지일 땐 최선의 장소에서 암살하는 게 상책인 법이다.
“게다가 카포티니가 더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도련님의 생활에 득 될 게 없겠죠.”
그러면서 네이프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루빈이 전해준, 이엘로스가 영지의 지도가 있었다.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부터 충분한 거리가 떨어진 곳. 거기에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로젠탈러를 유인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할 장소였다.
“놈을 유인하는 게 관건이군요. 마법사들의 연회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경계하겠지. 그래도 녀석은 올 수밖에 없을 거야.”
“놈이 그 정도로 도련님을 신뢰하는가 보군요”
네이프가 그렇게 말했고, 루빈은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로젠탈러가 루빈을 따라 저가 죽을 장소로 온다면, 그건 신뢰와는 거리가 먼 이유일 것이다. 애초에 신뢰가 형성될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
놈은, 오지 않으면 안 될 이유로 오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장소는 네이프가 바라보고 있는 X 표시의 그곳이 아니다.
네이프가 루빈이 자신을 속였다고 깨닫는 순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루빈은 로젠탈러와의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연회의 음악 소리와 폭죽도 들리겠지.’
루빈은 가만히 그날을 예상해 보았다.
한쪽에선 마법생도들의 축하연이 한창이고, 한쪽에선 암살검가 도련님을 찾는 당황스러운 방계 가주가 있을 테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겠지.
루빈은 확신했다.
‘연회가 끝나기 전에, 로젠탈러는 내 손에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