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7)
암살검가 로이넨-17화(17/258)
제17화. 빛과 반역의 탑 (2)
“…….”
루빈은 지금 침대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모를 수가 없지.’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살기.
그런 살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암연.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기에, 루빈은 매피스의 암연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역시나 그 나이대 평균치를 밑도는 수준이다.
모든 암술검가를 통틀어 밑바닥은 아니겠지만, 그 정도의 경지라면 세이렌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내밀기 어려웠다.
“일어나.”
루빈은 벽을 보고 누운 그 상태로 잠자코 있었다.
“언제까지 정신 나간 꼬마애를 연기할 거냐, 동생아.”
매피스는 이미 평정심을 잃었다.
가신들을 자기편으로 돌려놓지 못했던 건가. 아니면 식탁에서 받았던 모욕을 갚기 위해서인가. 불빛에 드리운 매피스의 그림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잠을 자는 표적을 발견한다면 단숨에 숨을 끊어내는 것이 암살검가의 방법이지만, 그렇다고 잠든 동생을 공격할 수는 없었으니.
매피스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싸움이라도 일어나나 했는데, 아니었나.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하네케의 한마디. 하지만 루빈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기다려 보시죠.’
루빈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매피스는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답 대신 뿜어낸 루빈의 공격적인 암연을 느꼈다면,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겠지.
다만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거다. 어째서 아홉 살 아이에게서 이토록 깊디깊은 암연이 느껴지는지.
뜨드득. 뜨드득.
계단이 삐걱대는 소리. 루빈은 굳이 발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1층 복도 모서리를 도는 순간.
예상했던 대로다.
맞은편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매피스가 달려들며, 루빈의 목을 움켜쥐었다.
쾅!
그대로 벽에 부딪힌 루빈, 그대로 목을 움켜쥐고 들썩이는 매피스. 놈의 실력은 둘째 치고, 터울에서 비롯된 힘의 격차가 상당했다.
“천하고 멍청한 동생아.”
숨통이 조여 숨을 쉬기 어려웠지만, 루빈은 좀 더 기다렸다. 지금 이대로 싸움을 시작하는 건 좋지 않았다. 뒷수습할 방도가 보장되어야 한다.
루빈의 목을 움켜쥐었던 매피스는 이내 손에서 힘을 풀고, 몸을 뒤로 뺐다. 그런 다음, 맞은편 벽으로 갔다.
“참을성 있는 건 여전하네.”
녀석의 비웃음은 깔끔히 무시하고 주변부터 살폈다. 이곳은…….
‘지도를 만드는 작업실.’
벽에는 여러 구역의 지도가 벽지처럼 붙어 있었다.
퀴퀴한 종이 냄새로 가득한 공간.
“네 호위가신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작업실이지만, 분명 어디선가 가신들이 지켜보고 있을 터.
“알아둬라, 동생아. 오늘 밤 우리 싸움에 끼어들 사람은 없어.”
씩 웃는 매피스. 루빈의 호위가신들을 포섭했단 뜻은 아닐 거다. 애초에 그들은 포섭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
이건 ‘훈육’의 자리였다. 스무 살의 형이 아홉 살 동생에게 하는 정당한 훈육.
“…….”
“언제까지 실어증 놀이를 할 셈이냐? 연극은 끝났다.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비밀이 될 거야.”
비밀이라.
가신들은 곧 눈과 귀로 두 로이넨 형제의 능력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다른 어디에서도 발설하지 못할 것이다. 훈육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그들의 역할은 감시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가주에게 보고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가문의 아이들을 평가하고 보고하는 건 오직 아이의 로이넨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감사하게 생각해라. 이 형님이 로이넨서 역할을 미리 맡아주는 거라고 생각해도 좋고.”
매피스는 작업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잉크펜을 주워 들었다.
그러면서 루빈에게 아무거나 들어보라는 식으로 고갯짓을 했다.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는 듯 오만한 얼굴로.
루빈은 순순히 거기에 따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매피스의 비웃음.
“하, 진심이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루빈.
루빈이 선택한 건 종이였다. 지도 제작에 쓰이는 얇고 평범한 종이. 루빈은 그걸 대각선으로 여러 번 말았다.
끝이 뾰족한 세모꼴이 되도록.
“…….”
침묵 속에 타오르는 촛불. 루빈과 매피스의 손에 들린 각각의 무기가 그림자로 드러났다. 날카로운 펜촉과 말아 쥔 종이.
스무 살과 아홉 살의 대결이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어린 동생이라 할지라도, 매피스는 여유 따윈 부리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매피스는 무자비함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암살자였다.
지이잉.
매피스의 암연이 폭발하듯 뿜어졌다. 손속을 두지 않은 최대한의 출력이었다. 차이가 현격한 상대라면 짓눌릴 수밖에 없을 암연이었다.
그러나 루빈은 끄떡하지 않았다. 도리어 거기에 맞서 제 암연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러자.
“……?”
“……!”
놀라는 건 매피스뿐만이 아니었다. 각자 흩어져 이 상황을 관찰하던 가신들 모두가 혼란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매피스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 역시 가신들의 마음과 같았다.
농도 짙은 암연.
결코 아홉 살짜리 꼬마가 뿜어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매피스는 곧장 깨달았다. 이건 최소 3성 경지 이상의 암연이라는 것을.
열한 살에 1성에서 2성 정도를 이룩하는 게 평균이라고 봤을 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아홉 살 주제에, 3성이라고?’
이게 가능한가?
이제껏 그런 자가 있었던가?
하지만 루빈은 모두가 놀라든 말든, 제 할 일을 할 뿐. 그가 딛고 있던 두 발아래에서 짙은 암연이 피어오른다.
“그러니까, 전부 침묵을 약속했다는 말이지?”
그럼, 그에 걸맞은 비밀을 만들어줘야지.
로이넨 저택을 출발한 뒤로 내내 실어증을 연기하던 루빈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
루빈이 한 발짝 내디뎠을 뿐인데, 이에 당황한 매피스가 냅다 돌진했다.
타다다닷.
펜의 날카로운 면을 루빈에게 겨냥한 돌진. 이어지는 찌르기 공격까지, 매서운 기세였다.
슉. 슉.
본격적으로 암살자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수년이 흘렀다.
그동안 매피스가 제거한 대상은 그의 수준에 알맞은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력한 상대였던 건 아니다.
그중에는 힘겹고 까다로운 표적들도 있었다. 그들을 상대하면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 매피스였는데.
그런데 어째서?
‘왜 공격이 전부 빗나가는 거지?’
굴욕적이었다.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동생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이 상황이.
아무리 집중해 봐도 펜촉은 허공만 갈랐다. 로이넨서에게서 특훈을 받았던 수십 가지 전투 기술들도 소용없었다.
‘출가 이전에는 아무런 교육도 받을 수 없을 텐데! 어머니께서 이 새끼만 특별대우 해줘서 뭔가를 가르쳤던 건가? 아냐, 어머니가 그럴 리 없지.’
암연을 최대한 끌어올려 순발력을 높여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움직임을 예측해 보려고 해도, 그런 예측조차 읽히고 있는 건지 한 템포 빠르게 벗어나 버렸다.
매피스 또한 3성을 이룩했다. 인정할 수 없지만 루빈이 정말 3성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실력 차가 날 순 없었다.
‘똑같은 3성인데? 대체 왜!’
똑같은 3성이라도, 암연을 운용하는 숙련도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매피스는 몰랐다.
붉어진 얼굴. 뿜어지는 전투의 열기.
두 사람 사이로 튀어 오르는 동글동글한 땀방울 사이로, 루빈의 미소가 드러난다.
‘…웃어?’
낭패였다.
나약한 루빈을 자신의 비교 대상으로 올리지 말라 경고하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정확히 그 정반대의 의미로 증명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한 번쯤 상상해 봤던 일인데.”
루빈의 입에서 낮은 한마디가 나왔다.
“이걸 이렇게 이루게 되네.”
그때. 지금껏 피하기만 하던 루빈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철저히 로이넨가의 검술을 토대로 움직였다.
워낙 빠르기는 해도, 익숙한 검술이었기 때문에 어찌어찌 막아내는 매피스.
그런데.
“……?”
일순간 루빈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궤적으로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체의 움직임 또한 완전히 생소한 것. 루빈이 선보이는 이 새로운 검법은, 매피스의 방어를 완전히 따돌렸다.
속수무책.
루빈의 종이 검이 순식간에 매피스의 손목, 발목, 허벅지, 종아리에 도달했다.
하지만 종이가 피부가 닿는 순간, 바람이 새어 나가듯 급감하는 위력. 가볍게 접촉만 할 뿐 정말로 베거나 찌르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매피스 입장에서 이는 명백한 농락이었다.
아무런 고통 없이, 실력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껴보라는 굴욕적인 농락.
‘…대체 무슨 검술을?’
지켜보는 모든 이가 놀라고 있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빈이 보여주는 이 움직임은 암살검가다우면서도, 암살검가를 완전히 벗어나는 움직임이었으니.
호위가신들 모두 그 검법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루빈의 내면에서 지켜보는 한 사람만은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브리온 검법 2식이로군. 그것도 완벽하게 변형된…….
그의 말대로, 루빈의 2식은 기존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진화해 있었다. 고유성을 중시하는 하네케조차 탄성을 내뱉을 정도였다.
그동안 수천 번을 반복해 수련했던 루빈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게 만약 진짜 검이었다면…….
2식을 전부 활용할 필요도 없다. 상대는 이미 3합 내에 끝났을 거다. 그 정도의 압도적 실력 차였다.
그리고 마침내, 루빈이 이 싸움의 끝을 정한다.
루빈은 일부러 몸놀림을 늦추며 공격을 생략했다. 대신 그 공백을 보법으로 사용했다. 눈 깜짝할 새에 매피스의 뒤편으로 침투한 루빈이 그의 무릎을 힘껏 찔렀다.
쿵.
무력하게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나뒹구는 매피스. 그가 쥐고 있던 날카로운 볼펜이 저 멀리 굴러갔다.
“하아, 하아…….”
“모두가 약속한 대로, 지금 여기서 일어난 일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올 수 없어.”
매피스만이 아니라 호위가신들에게도 던지는 경고였다.
오늘 일로, 이제껏 얌전한 줄만 알았던 본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뒤바뀌겠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매피스가 가신들을 휘어잡고 훗날 후계 계승을 노릴 거라는 사실을, 루빈은 알고 있으니까.
오늘의 일이 훗날 도움이 될 것이다.
“……”
말없이 거친 숨만 들이키는 매피스.
그를 뒤에 내버려둔 채 루빈은 작업실을 나와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랐다.
뜨드득. 뜨드득.
고요한 집 안에 울리는 발소리가 선명하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루빈은 굳이 발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 * *
새벽의 소란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루빈은 다시 침울한 미겔 도련님으로 돌아왔다. 지난밤의 위세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집주인께서는 밤새 과음하여 고생하시나 봅니다.”
홀에는 주인은 없고 손님들만 있었다. 매피스는 방 안에 틀어박혀 루빈 일행과의 마지막 인사도 생략했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던 루빈은 말없이 자기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미겔 도련님.”
루빈은 대답 대신 손톱으로 마차 내부를 긁었다. 출발해도 좋다는 뜻. 이윽고 루빈을 태운 마차가 매피스의 집 앞을 떠났다.
루빈 일행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해 질 녘쯤엔 네 번째 위장별채에 도착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루빈이 보여준 가공할 능력에 대해서 세 호위가신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루빈이 경고했던 대로 그날의 모습은, 영원히 비밀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여정에 오른 지 닷새째.
“오후쯤 ‘빛과 반역의 탑’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선두에서 말을 몰던 가신이 마차 옆으로 접근하며 소리쳤다. 루빈이 대답하지 않자, 한마디 덧붙였다.
“루빈 도련님?”
여정 중 처음으로 주어진 역할을 깼다.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 루빈은 듣고 있다는 의미로 손톱으로 마차 내부를 긁었다.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날 밤, 매피스 도련님이 저희를 앉혀놓고 이야기했던 것 중에 도련님께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다시 마차 내부를 긁었다.
그게 뭔가?
가신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도련님이 척살조와 같은 위장별채를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더군요. 대비하고 있으라는 본가의 지시가 있었답니다.”
척살조. 루빈은 오랜만에 듣는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다시 발음해 보았다. 아이의 몸으로 지냈던 9년 동안은 듣지 못한 이름이었다.
‘척살조가 갑자기 왜?’
척살조는 암살검가 내부의 일을 수습하기 위한 조직. 세이렌이 직접 선별한 가신들이 내부의 적을 추적하고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누굴 쫓는진 매피스 도련님도 모른다 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건 오직 가주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굳이 추측하자면, 아마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주어진 암살 임무를 저버렸거나.
로이넨가 혹은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거나.
아니면, 알아선 안 될 정보를 알게 되었거나.
“척살조와 맞닥뜨려 봐야 좋을 일이 없습니다. 최대한 피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