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70)
암살검가 로이넨-170화(170/258)
제170화. 폭죽 소리가 가까스로 닿는 곳 (2)
“그게 진짜란 말이야?”
루빈이 하나씩 진실을 드러낼 때마다, 클로이는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화를 냈다가, 허탈한 웃음을 냈다가, 입술을 모으고 볼을 빵빵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연회에 참석하는 입장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어서 드레스나 머리를 망가뜨리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거지?’
연회장에는 다시 결계가 만들어진 상태.
클로이의 완강한 태도에, 셀레스네는 어쩔 수 없이 결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대화가 길어질 때마다 시시각각 바뀌는 클로이 반응이 궁금증과 불안을 자아냈다.
셀레스네는 평소 지켜왔던 정돈된 태도까지 깨트리며,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엔조 로렌치니가 랩소디관에 숨어 있다니.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어.”
“연회가 끝난 뒤, 자정에 페르와 함께 랩소디관 정문에 서 있어. 그러면 엔조가 너희 앞에 나타날 거야.”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응. 그런데, 그 전에 페르부터 진정시켜야 할 거야. 페르가 지금까지 남들을 잘 속여 왔지만, 엔조를 만나는 건 또 다르지. 워낙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깊은 데다가 오랫동안 못 봤으니까.”
“페르… 그러니까 오스카 투니오 말이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입력을 시켰지만, 클로이는 아직도 오스카가 곧 페르라는 사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루빈으로서도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오스카에게 직접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겠지.
“페르에게 네 이야기를 해도 돼?”
클로이가 물었다.
루빈이 해준 이야기 중 놀라웠던 점 중 하나. 이 모든 일들이 당사자인 페르 모르게 진행됐다는 것이었다.
엔조를 피신시킨 것도, 다른 세력으로부터 페르를 보호했던 것도.
“해도 돼. 인사도 전해주면 좋겠고.”
“인사?”
그러고 보니, 지금 루빈의 태도에는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왠지 모르지만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는 느낌이.
오스카와 함께 엔조를 찾아가는 것도, 오스카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도 모두 클로이에게 남겨진 몫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정작 모든 일을 해낸 건 루빈이었는데.
“루든. 마치 다신 안 볼 사람처럼 말하네. 곧 나랑 오스카가 아메릭마나로 돌아가니까,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나도 카포티니를 떠날 거야, 클로이.”
“정말? 어디로 가는데?”
“그건 당연히 알려줄 수 없지.”
클로이가 또 루빈을 째려봤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데, 정체가 무엇이라고 물어봤자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순 없을 것이다.
“루든. 나는 네가 황족이 아니란 걸 알아. 현존하는 황족의 얼굴은 내가 다 아니까.”
“그렇다고 황족이 아니라 할 수도 없지.”
“…….”
‘위더스푼의 정언명’이 발현됐으니, 그 몸속에 황족의 피가 흐르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 네가 한 짓,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지? 황족이라 해서 모두 위더스푼의 충성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오직 황제 폐하만이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지닐 수 있는 거야. 만약 나중에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기라도 한다면…….”
“나는 둘째치고, 위더스푼이 정말로 위험해지겠지. 황제가 아닌 다른 황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셈이니까.”
“…….”
맞는 말이었다.
만약 텔마흐가 클로이에게서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확인하는 날이 온다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애초부터 그럴 확률은 없다고 봐야겠지만. 황제가 ‘정언명’을 성립하는 의식은 위더스푼가의 가주가 바뀔 때뿐. 현 가주인 매큐언은 정정했고, 그다음으론 두 오빠가 건재했다.
“…하긴, 대륙에 여자 가주는 있을 수 없으니.”
엄밀히 말하면 있었지만, 루빈은 그저 웃고 말았다. 그 여인은 클로이로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에 있을 테니.
‘슬슬 움직여야겠군.’
어느덧 시간이 임박했다.
수많은 참석자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위조한 초대장 때문에 그 숫자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어 주최 가문은 혼란에 빠지겠지.
그리고 그때쯤. 루빈은 또 다른 장소에서 로젠탈러를 기다릴 것이다. 그곳은 축제의 폭죽이 가까스로 닿는 곳. 폭죽과 노랫소리가 밤하늘을 밀치는 와중에, 루빈은 목숨을 걸고 마지막 매듭을 짓는 것이다.
“흐음, 어쩌지…? 달리아가 실망하겠는데.”
그때, 클로이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클로이의 염동에 의해 연회장 일부가 파손된 상태. 큰 연회를 앞두고 실망할 달리아가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루든.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알려줄 순 없었니?”
“어차피 연회 장소는 여기가 아니야.”
“여기가 아니라고? 그러면?”
“바깥. 이 연회장으론 참석자들 숫자를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하기야, 클로이 기준에서 보아도 크다곤 할 수는 없는 연회장이었다. 그래도 백여 명의 참석자를 들이기엔 충분한 곳일 텐데? 감당하지 못할 거라니, 무슨 뜻이지?
그러나 루빈에겐 일일이 말을 덧붙일 여유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아갈 방향을 가늠한다.
그 방향엔 가로막힌 벽뿐이지만, ‘그림자 장막’이 있기에 더는 제약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이만 가봐야겠어.”
“루든, 이제 다시는 못 보려나?”
“너랑 내가 계약을 맺고 있으니 언젠가 다시 볼 수 있겠지. 오스카를 잘 부탁해. 그리고 걔, 오늘 춤 연습 열심히 했거든. 혹시라도 너랑 춤추게 된다면 잘 알려줘. 아마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거야.”
루빈이 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결계를 없애면서 길을 터준 클로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연회장의 출입구는 그쪽이 아닌데.
“루든…. 거긴 나가는 길이 없는…….”
루빈은 대꾸하는 대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은 곧바로 짙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잠시 후.
아득하게 들리던 루빈의 발소리가 뚝 끊겼다.
* * *
사아아아.
연회장의 벽을 통과한 루빈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높여나갔다.
저녁의 어스름은 어느덧 내려앉았다. 이엘로스가의 드넓은 영지는 군데군데 불을 하나씩 밝히기 시작했다.
덜컹덜컹.
타다다다다.
영지의 대로에는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말들의 발굽 소리가 퍼져나가고 있다. 진본 초대장을 받은 참석자, 위조 초대장을 받은 참석자 모두가 몰려드는 중이다.
-클로이와 춤을 출 거라던 말이 이거였나?
일전에, 계획을 알고 싶어 하던 하네케에게 루빈은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었다. 연회장에서 클로이와 춤을 출 거라고.
물론 춤은 없었지만, 대신 손을 잡고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얻어낸 루빈이었다.
‘실망한 것 같네요, 하네케.’
-자네의 묘수에 대곤 딱히 첨언할 게 없지만, 연회를 즐기지 못하는 건 아쉽긴 하지. 오늘 이후로는 마법사들과 이렇게까지 가까이 지내지 못할 텐데.
하네케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어쩐지 씁쓸함이 감도는 웃음이었다.
연회와 전투.
이제 곧 벌어질, 상반된 두 상황.
지금, 루빈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춤이라면 춤이라 할 수 있겠지. 다만 핏방울이 흩날리는 검무(劍舞)겠지만.
문득, 하네케의 머릿속엔 이것이 암살검가의 숙명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쪽에선 연회가 벌어질 때, 다른 한쪽에선 검투가 벌어지는 것. 드러나지 않는 살인과 위험의 순간들.
하하호호 미소 지으며 다소곳이 손으로 입을 가리는 연회가 있다면.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쓱 훔치는 처절한 찰나도 있는 것이다.
…삼십 분의 질주 끝에 도착한 곳. 연회장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이곳은 이엘로스 영지 내 여러 와인 창고 중 하나였다.
끼이익, 끼이이익…….
바람에 표지판이 흩날린다. 와인 창고의 번호가 적혀있는 표지판은 해묵은 티를 감추지 못했다. 땅속으로 이어진 입구는 반쯤 허물어진 상태. 이엘로스가에서 10년 전부터 버려둔 창고였다.
당시 홍수가 났고, 창고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지하 심층부는 말짱했기에 와인이 담긴 오크 통 몇 개라도 건져보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인부들을 내려보낼 때마다 실족사로 인한 시체만 늘어갔으니.
결국, 최근에는 아예 잊힌 창고가 되어버렸다. 와인 창고야 넓은 영지 안에 충분했으니, 여기 하나쯤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쿠쿠쿠쿵.
루빈은 힘을 주어 무너진 바위 일부분을 옮겼다. 그러자 지하 심층부로 통하는 길이 드러났다. 마법사들은 엄두도 못 내지만, 무인이라면 능히 지나갈 수 있는 틈이었다.
‘무인들의 전투에도 들키지 않을 곳은 여기뿐이야.’
이곳은 로젠탈러와 일전을 치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넓고 견고한 심층부. 홍수 이후 오히려 지반이 더 견고해진 터라 5성 무인끼리 치열한 싸움을 벌여도, 외부에선 그 사실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테고.
타닷. 타닷. 타닷.
루빈은 풀쩍풀쩍 뛰어내리며 지하 협곡 더 깊숙이 내려갔다. 도중에 실족사한 인부들의 시체도 여럿 보였다. 깨진 오크 통 속으로 쥐들이 후다다닥 움직인다.
“…….”
그리고 가장 깊숙한 곳.
널찍하고 편평한 땅 주위로 수백 개 오크 통이 가지런히 포개진 채 둘러싸여 있었다.
파지짓.
마법이 아닌, 암살자만의 방식으로 불을 피운다. 루빈은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에 이엘로스가 영지 지도를 펼쳐보았다. 현재 상황을 짚어 보려는 것이다.
지도상으로, 연회장으로부터 동쪽으로 직선을 죽 그으면 거기엔 X 표시된 장소가 나온다.
‘현재 여기엔 쿠제가 있다.’
이번 작전에서 쿠제의 역할은, 네이프 그리어스를 붙잡아두는 것.
칙명부로부터 암살 명령을 받고 온 네이프는, 오늘 쿠제에게 붙들려 아무 활약도 하지 못할 것이다. 거짓된 장소에서 발 묶인 채 시간만 빼앗기겠지.
타닥… 타닥, 타다다…….
나뭇가지가 불타는 소리.
루빈은 가만히 눈을 감는다. 넓게 펼친 그의 암연이 와인 창고를 모두 아우르는 중이다.
쥐새끼의 움직임 하나하나, 맺힌 이슬이 톡톡 떨어져 내리는 소리까지. 그의 감각 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연회가 슬슬 시작되려나.’
먼 거리. 아득한 저쪽에 연회장이 있다. 연회장의 소리가 루빈에게 서서히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쯤 로젠탈러는…….’
연회장의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들어 있겠지. 그에게는 축하연의 위조 초대장이 아닌, 직접 쓴 밀서를 보냈던 루빈이었다.
접선을 요청했고, 로젠탈러로부턴 연회장에 나타나겠다는 회신이 왔었다.
‘날 찾아 배회하겠지만…….’
당연히 거기에 루빈은 없다. 대신, 색다른 인물. 아니, 인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
로젠탈러를 여기까지 유인해내는 담당은 티나였다. 다시 말해, 변신한 티나였다.
로젠탈러는 과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저 자신이 착각한 거라고 웃어넘길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로젠탈러는 그 거리가 얼마가 됐든, 티나를 쫓을 것이다.
그리고 티나는, ‘속도’라는 환혈족 특성을 지닌 만큼 절대 잡힐 리 없다.
* * *
그 시각, 연회장.
로젠탈러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파악한 바로는, 이번 축하연은 참석자가 극히 제한된 행사. 해봐야 백여 명 정도라고 했는데, 이건 예상치를 뛰어넘어도 한참 뛰어넘는 게 아닌가.
‘대체 이게 몇 명이지? 몇백 명은 돼 보이는데? 제기랄! 루빈은 어디에 있는 거야?’
그를 여기로 이끈 건 루빈이었다. 루빈은 이 합동 축하연의 초대장을 받은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고, 로젠탈러를 위해 자신이 ‘조치’를 취해놨다고 했었다.
‘조치라는 게, 이런 거냐?’
연회장 건물을 둘러싼 엄청난 인파. 얼핏 보면 천 명도 우습게 넘길 만한 규모였다. 귀족, 평민, 마법학 교수와 조교들까지. 신분과 직업도 다양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참석자들은 계속 늘어나는 중이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난감해하는 이엘로스 가주와 델린 가주.
그래도 당혹스러워하는 저 마법사들 꼴은 볼만했기에, 로젠탈러는 끌끌끌 웃었다.
‘루빈 놈,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아무래도 초대장을 위조하여 이 사태를 일으킨 것 같은데, 여하튼 재밌는 놈이었다. 고작 칙명부와 접선하겠다고 귀족들의 연회를 이렇게 망치다니.
로젠탈러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루빈이 곧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
로젠탈러는 눈을 부라렸다. 순간적으로, 그 눈으로 죽은 가이젠의 모습을 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그놈 시체라면 내가 제대로 헤집어놨는데. 로젠탈러는 고개를 내저으며 낮게 웃었다.
연회장 외부를 좀 더 돌아다녀 보았다. 아무래도 연회는 두 명의 가주들이 새로운 대책을 내놓을 때까지 지체될 것 같았다.
“이런… 미친!”
로젠탈러는 또다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번엔 가이젠이 아니다. 이번에 나타난 그 얼굴은 엔조 로렌치니였다.
‘엔조가 여기에 있어?’
잘못 본 게 아니다.
엔조가 ‘협곡 감옥’에 있을 때, 멀리서 그를 본 적이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러니 그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엔조 쪽으로 걸어갔다.
단숨에 다가가 엔조의 어깨에 두툼한 손을 내려놓으려는데.
접근하는 그를 알아차린 건지, 엔조가 방향을 틀더니 황급히 저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젠장, 도망치려는 건가?’
엔조는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 틈으로 빠져나가며 계속 멀어졌다. 로젠탈러는 그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정말 엔조라면… 아니, 엔조여야 한다.’
로젠탈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룰포에게 잃은 신뢰를 회복하려면, 무조건 저놈은 엔조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