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75)
암살검가 로이넨-175화(175/258)
제175화. 징벌 (1)
밤하늘 속 날갯짓 소리.
민트색 눈동자의 로이네크로우, 티나는 루빈을 등에 태운 채 날아가고 있었다. 이엘로스 영지를 벗어나 카포티니를 향하여.
“괜찮냐, 너?”
티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루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견딜 만해.”
로젠탈러를 죽일 수 있었지만, 결코 손쉬운 승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전초전과 맞춤 대비가 없었다면 어찌 됐을지는 알 수 없는 일.
‘비검을 얻었고, 또… 오러를 연성했다.’
이번 결전은 비검 말고도 또 하나의 소득을 남겼다. 바로, 브리온 오러가 4성에 진입했다는 것. 아무래도 로젠탈러와 검을 맞부딪치는 순간에 각성한 것 같았다.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격전이었기에, 로젠탈러를 상대로 4성의 오러를 시도해볼 순 없었다.
그래서 실전 감각을 익히려면 또 며칠이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데이몬은 서점으로 간 건가?’
유유히 나타나, 자신과 로젠탈러의 싸움을 지켜봤던 데이몬. 그는 또다시 사라진 상태였다.
짐작하건대, 직속가신이 카포티니에 온 목적은 자신을 만나기 위함일 터. 단순한 관찰, 혹은 로젠탈러와의 싸움에 개입하는 게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우르르… 쾅! 쾅!
“엥?”
티나가 깜짝 놀라며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는 통에 하마터면 루빈을 떨어트릴 뻔했다.
“갑자기 왜 비가 내리냐. 불길하게. 루빈, 괜찮아?”
“이상 없어. 얼마나 남았지?”
“다 왔어, 지금 카포티니 상공이다. 이제 비구름을 뚫고 내려갈 거거든? 꽉 붙잡아.”
티나가 지상을 향해 빠르게 강하했다. 비바람이 몰아쳤다. 서점이 위치한 골목에 도착했을 때에는, 루빈의 몸이 잔뜩 젖어버린 뒤였다.
“도련님 몰골이 말이 아니네. 그래도 가끔 너도 그렇게 처참해 보일 때가 필요하긴 해. 자, 빨리 들어가자.”
어느새 고양이로 변한 티나. 꼬리를 흔들며 루빈의 다리에 제 몸을 비벼댔다. 다시 돋아나는 고통에, 루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서점을 향해 힘겨운 발을 내디뎠다.
“어라, 쿠제는 아직 안 왔잖아. 설마… 그리어스 가주가 걜 죽인 건 아니겠지?”
“그러진 않았을 거야. 일단… 나는 좀 쉬어야겠어.”
적요한 서점. 골목의 빗소리만 울려대고 있다.
루빈은 한쪽 책장 앞으로 걸어가 등을 기댔다. 그 상태로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또다시 고통이 올라왔다.
그사이, 이번에는 민트색 머리칼의 여인으로 변한 티나가 호들갑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넌 마법생도잖아. 치유마법 같은 거 몰라?”
“치유마법이 쉬운 게 아냐. 퀴닝 조교가 괜히 고급 인력일까.”
“그럼 그 조교, 내가 납치해올까?”
“농담할 시간에 쿠제의 방에 가서 약 좀 찾아줘.”
치유마법처럼 즉효는 없지만, 암살자들에겐 그들에게 맞는 특제 약이 있었다. 쿠제가 어디엔가 비치해두었을 것이다.
퉁! 푸르륵!
쾅! 쨍그랑!
티나가 쿠제의 물건들을 쓰러트리고 깨트리면서 소란스레 약을 찾는 동안, 루빈은 젖은 상의를 벗었다.
암연이 상처를 최대한 다스리고 있었기에 피는 멎은 상태. 몸에는 검이 스쳐 지나간 궤적이 낭자했다.
그런 몸을 드러내놓고, 루빈은 잠시 선잠에 빠졌다.
의식이 얇아졌을 때.
“…….”
서점으로 접근하는 또 하나의 인영. 이를 감지한 암연이 루빈의 의식을 흔들었다. 루빈은 힘겹게 눈을 들어 올렸다.
-루빈, 이제 일어나야겠는데.
그를 깨운 건 암연만이 아니었다. 하네케도 그에게 불청객이 왔음을 알려줬다.
-이거, 문제로군. 제 아가씨 걱정밖에 없는 셀레스네야. 지금 자네 몸 상태라면 셀레스네한테 벗어나기 힘들 거 같은데.
루빈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네케. 지금 상황에선, 저보다 셀레스네를 걱정해줘야 합니다.’
-음?
하네케가 알아차린 건 셀레스네 하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정작 셀레스네는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지만, 지금 그녀 주변으로 여러 인영이 다가들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빗소리로 가득한 골목.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린다.
우르르, 쾅! 쾅!
끼이이이익.
염동으로 서점의 문을 열어버린 셀레스네가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책장에 기대고 주저앉아 있는 루빈을 알아차린다. 입을 열 때는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다는 게 느껴졌다.
“루든 도련님.”
“셀레스네. 연회는 잘 끝났어?”
“…아가씨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
아마 클로이는 ‘위더스푼의 정언명’을 뺀 모든 이야기를 제 시녀에게 했겠지.
셀레스네가 이토록 날카로운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루빈이 클로이의 마나의 환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일 테니까.
“어떻게 로렌치니 부자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죠?”
역시나 셀레스네가 경계하는 것은, 루빈이 로렌치니 부자와 위더스푼가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점인 것 같았다.
루빈이 셀레스네를 지그시 바라봤다.
“셀레스네, 그 전에 충고 하나 할게. 혹시라도 여기서 마법을 시전하려 하진 마. 그러다가는…….”
결국, 말을 끝맺지 않은 채로 루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어이 셀레스네가 말을 무시하고 휘식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
마법은 발현되지 않았다. 셀레스네가 휘식을 도중에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에 닿는 서늘한 칼끝. 게다가 그녀 주변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서 있었다.
“어,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번개가 한 번 번쩍이는 그 찰나였을 뿐인데. 그 순간이 지나가자, 그녀 주위에 사람이 늘어나 있었다.
번쩍!
복면을 쓴 다섯 명의 무인.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루빈에겐 익숙한 자들이었다.
일단, 셀레스네 목에 칼날을 대고 있는 두 명. 척살조의 샤르코, 비르코였다.
둘과 몇 걸음 떨어진 채 위더스푼가의 시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남자. 그는 척살조장 그로칼 랭.
한편, 네이프 그리어스는 문가에 어깨를 기대고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데이몬. 이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암살자이자 본가의 직속가신. 그의 위치는 루빈 옆이었다. 무엇보다 셀레스네를 압박하고 있는 건 데이몬의 존재감이었다.
“셀레스네, 방금 전에 너 죽을 뻔했어.”
루빈이 전음으로 멈추라고 지시하지 않았더라면, 아주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샤르코와 비르코의 검이 그녀 몸을 가르고, 심장을 찍어 눌렀을 터. 그녀는 죽는 순간에조차 자신이 죽는다는 걸 깨닫지 못했겠지.
“…어, 어떻게?”
그때, 루빈이 앉은 몸을 일으켰다. 번개가 또 번쩍였고, 상체를 벗은 루빈의 몸이 모두의 눈에 비쳤다.
셀레스네로선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러가 남긴 상흔이 빼곡한 상태. 말짱히 서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도대체… 루든… 정체가 뭐지?’
셀레스네가 제 팔을 부여잡았다.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두 칼날은 여전히 그녀 목에 닿아 있었다.
“클로이한테 돌아가. 아메릭마나로 귀환해. 그리고 페르와 엔조를 잘 지켜. 그게 내가 널 살려주는 이유야.”
이제껏 보지 못했던 냉혹한 모습이다. 루든이라는 가면 속에 드러나지 않았던 루빈의 본모습에 셀레스네가 숨을 삼켰다.
그녀는 이들이 자신이 감당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목에 닿아 있는 칼이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텨볼 수 있을까. 한 명이나 죽일 수 있을까.
“쿠제.”
루빈이 쿠제를 불렀다. 그제야 서점 밖에서 비를 맞고 있던 쿠제가 긴장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셀레스네를 데려고 나가. 돌아오면 곧바로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해.”
“…알겠습니다.”
쿠제가 셀레스네한테 다가가자, 두 칼날이 내려졌다.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빗줄기가 빼곡한 거리로 나서는 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루빈은 시선을 데이몬 쪽으로 돌렸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 * *
미뤄졌던 인사가 오갔다. 데이몬과 랭 척살조, 그리고 네이프까지 루빈을 향해 예를 갖췄다.
“티나, 나와도 돼.”
루빈은 이들에게 티나를 숨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데이몬과 랭 척살조는 티나가 환혈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이프만이 예외였는데, ‘암연의 맹약’으로 맺어진 자였으니 본가를 배신하지는 못할 터.
“야, 나 진짜로 나가도 돼……?”
밀실 저편에서 티나의 조심스러운 말소리가 건너온다. 티나답지 않게 긴장한 목소리였다.
데이몬은 피식 웃었지만, 랭 척살조 3인방은 험상궂은 얼굴이 되었다. 지난날, 그들을 애먹였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나 진짜 나간다?”
“그래, 나와.”
그때, 새로운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던 네이프가 데이몬을 불렀다.
“데이몬, 티나가 누구지?”
“막내 도련님의 로이네크로우입니다.”
“지금, 농담하는 건가?”
“티나는 환혈족 여인이지요.”
“뭐, 뭐! 환혈족?”
때마침 티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쭈뼛거리며 걸어 나와, 랭 척살조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잘들 살아 있었네. 언제나 보기 좋구나, 너희 셋은.”
“…….”
“욕하고 싶은 얼굴인 거 같은데… 어쩌지, 나는 막내 도련님이 애지중지하는 까마귀라서 말이지, 호호호.”
샤르코가 심호흡을 하며 눈을 부라렸고, 비르코는 화풀이를 하듯 자신의 푸짐한 배를 두드렸다.
“그런데 환혈족이라면…….”
반면 네이프의 표정은 심각했다. 환혈족이 어떤 자들인지 떠올리는 건 쉬웠다.
그 변신 능력을 믿을 수 없어 황제에 의해 몰살된 부족. 그런 환혈족이 가신이라니. 놀라우면서도 불안했다.
“그리어스 가주님.”
불안을 눈치챈 데이몬이 말을 이었다.
“물론, 저희 가주님이 허락한 일입니다.”
“…아, 그렇군.”
가주 세이렌이 알고 있다는 것. 사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세이렌이 승인한 일을 그가 문제시할 수는 없는 일. 불안은 빠르게 스러졌다.
“게다가, 이 정도로 놀라기엔 이르죠. 앞으로도 쭉 막내 도련님과 소통하고 지내신다면, 그리어스 가주님께서 놀라실 일이 계속 생겨날 테니 말입니다.”
데이몬의 이 말은, 은근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루빈에 관한 칭찬이기도 하면서, 그리어스에 대한 본가의 신뢰마저 느끼게 했다.
네이프는 흡족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도련님.”
데이몬이 루빈을 바라봤다. 잠시 흐트러졌던 대화가 다시 정돈되고, 이제 본격적인 주제가 나오려는 것이다.
“오늘 훌륭한 싸움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싸움은 가주님께서도 알게 되겠지?”
오러의 발현.
마법의 시전.
그리고 쿠제와 함께 만들어낸 독창적인 암술들.
흑색탑에서 만났던 킬리언도 루빈의 오러를 알게 됐지만, 그 사실이 어머니에게까지 전달됐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데이몬은 달랐다. 세이렌 앞에서 어떤 비밀도 남겨놓을 수 없는 직속가신이었으니까.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건 세이렌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이제 어머니가 날 어찌 판단하실지.’
루빈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가 어떻게 매겨지는지 알고 싶었다.
‘반신의 지성체’ 셀록의 등장 이후. 루빈은 차기 가주로 인정받는 날을 더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기 가주로 공인되어야 더 많은 비밀에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가주님의 반응이 궁금하시겠지만, 두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두려운 게 아냐. 얼마큼 날 인정해주실지 그게 궁금한 거지. 도리언 형님과 매피스 형님을 제치고 가주가 되고 싶거든.”
사실을 짚자면, 도리언과 매피스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예의상 경쟁자로 넣어주었다.
그런데.
‘뭐지?’
가주 후보의 패도적인 모습을 싫어할 리 없는 가신들인데.
분위기가 미세하게 틀어지는 게 느껴졌다. 특히 데이몬과 그로칼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루빈은 두 형제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부터였다는 걸 깨달았다.
‘도리언, 아니면 매피스. 그게 저들이 날 찾아온 이유인가?’
루빈이 말을 이었다.
“데이몬, 왜 날 찾아온 거지? 그것도 척살조와 함께 말이지. 설마 이 부근에 문제를 일으킨 암살자가 있나?”
그럴 리는 없겠지.
복장을 보면 척살조는 임무 수행 중이 아니다. 본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주의 명에 따라 데이몬을 보좌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데이몬이 직접 움직인 것도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다음 순간, 기다리던 대답이 이어졌다. 처음엔 루빈은 귀를 의심했다. 그 정도로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장례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