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82)
암살검가 로이넨-182화(182/258)
제182화. 돌아오다 (3)
“루빈?”
도리언은 문 앞에 서 있는 루빈을 보곤 놀랐다. 둘의 별채는 바로 인접해 있지만, 막내가 직접 자신을 찾아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던 터였다.
“형님, 제가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저를 ‘뼈의 정원’에 데려다주실 수 있으신지요.”
“…뼈의 정원에?”
“예, 예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본가의 혈통은 로이넨서와 위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진 가문에서 어떤 훈련도 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자격도 되니 한번 가보고 싶다는 것이냐?”
도리언은 수염을 만지작댔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빌미를 찾던 차였다. 이제 막 4성에 진입한 그는 대외적으로 자신의 경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막내가 이렇게 제물을 자처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이런 상황을 조장하려 했었다.
“흠…. ‘뼈의 정원’에 가려면 최소 4성이 되어야 하긴 하지.”
“제가 알고 있는 대로군요. 그래서 형님을 찾아온 겁니다. 게다가 전 위치도 잘 모르고요.”
“그래? 그렇다면야 얼마든지.”
도리언은 무구를 챙기며 소리가 울리지 않을 정도로만 흥얼거렸다.
루빈이 1, 2차 선택에서 우승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지겹도록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임무 중에 어쩌다 만나는 방계 가문 사람마다 빠짐없이 그 이야기를 해댔으니.
‘그따위 시험, 실전이 얼마나 다른지 알려줘야겠어. 매피스, 그놈이 없는 게 아쉽군.’
임무 중에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린 매피스가 떠올랐다. 죽지만 않았다면 차기 가주로 올라서려는 자신을 충직하게 보좌했을 녀석인데.
매피스는 루빈에 대해 유독 예민했다. 1년 전쯤 만났을 땐, 루빈 이야기를 꺼냈더니 서둘러 다른 이야기로 돌려댔었지.
그 모습은 마치 무서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문의 흐름이 막내 놈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그걸 막을 필요가 있어.’
저벅저벅.
‘뼈의 정원’으로 향하는 내내, 그들은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둘째 형님의 장례식은 언제 치러지는 건지 아십니까?”
“칙명부 수장이 참석한다 했으니, 그자가 와야 시작하겠지. 오늘 도착한 너까지 해서 필수 참석자가 모두 모였으니,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둘이 처음 향한 곳은 저택의 뒤편 숲.
키 높은 나무들이 울창한데, 곳곳에 지하로 연결된 통로가 있었다.
“여기가 ‘뼈의 정원’으로 가는 길이군요.”
“어떤 통로를 선택하든 상관없다. 결국에 도착하는 곳은 똑같으니까.”
둘은 지하통로를 죽 걸어 나갔다. 통로 밖으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을 에워싼 건 안개 성벽이었다. 안개가 단숨에 그들을 집어삼켰고, 이내 그들의 발소리만 나직하게 울렸다.
‘여기가 뼈의 정원…….’
이는 안개 속에 파묻혀 있는 본가의 훈련장을 의미한다.
곳곳에서 땅을 꿰뚫고 기둥처럼 솟아난 거대한 뼈들.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피를 함유한 듯 안개는 붉은빛을 띤다.
그 한가운데에 거대한 돔 구조 건물이 버티고 있는데, 흡사 뼈가 뒤엉킨 기괴한 형상이다.
“너도 알고 있겠지. ‘뼈의 정원’은 4성 이상의 가신들을 위해 마련된 훈련장이라는 거. 4성이라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여길 이용하는 가신들 숫자는 극히 드물지.”
루빈은 아는 척하는 도리언의 입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척살조 가신들 아니면 데이몬이나 쓸까 싶구나. 자, 이걸 봐라. 이게 바로 입구지.”
훈련장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검붉은 괴석이 나왔다. ‘4성 이상’에게만 허락된 장소라 했던 이유. 이 괴석을 움직이려면 어지간한 암연으론 어림도 없었다.
심지어.
“…흐으으윽! 젠장할.”
4성에 진입했다는 도리언조차 쉽지 않았다. 괴석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암연을 불어넣었지만, 괴석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
루빈은 낑낑대는 제 이부형제를 묵묵히 바라봤다. 역시나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제아무리 4성이 되었다지만, 아직 도리언은 암연의 환을 온전히 운용할 수 없는 것이다.
“제가 도와드리죠.”
“…뭐? 네까짓 게 뭘 도와준다고. 가만히…….”
“부족하지만 힘을 합치면 될 겁니다.”
루빈은 오른손을 얹고, 암연을 불어넣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리언의 암연 따위 필요 없었다. 자신의 두 개의 암연 중 하나만 써도 충분했으니.
다음 순간.
피잉.
청명한 울림이 공간을 긋는다. 앞을 막아섰던 괴석이 매끈하게 움직였고, 일순간 도리언의 눈동자가 떨렸다.
설마? 놀라는 얼굴로 루빈을 돌아봤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무게를 싣지는 않았다. 너무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지. 방금 이놈이 했던 말처럼, 힘을 합쳐서 된 거야. 근데, 그게 가능했던가?’
두 사람의 암연을 합쳐 문을 여는 것 말이다. 그런 세부적인 내용까진 도리언도 잘 몰랐다.
‘글쎄. 뭐, 가능하니까 이렇게 열렸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열릴 리가 없다. 그렇게 믿은 도리언은 이 일을 금세 잊어버렸다.
수련장의 내부.
여기도 안개로 가득했다. 이곳이야말로 안개의 진원지 같았다.
짙고 강렬한 안개가 공간을 가득 메워, 바로 앞에 있는 사람조차 한 걸음만 멀어지면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여기에 와 있었군.’
그 순간.
루빈의 시선은 짙은 안개 저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선명하게 감지되는 두 명의 인영이 있었다. 도리언은 아직 감지하지 못했겠지만.
“루빈, 신기하더냐?”
“…….”
루빈은 ‘저들’ 쪽으로 다가갔다. 저벅저벅. 좀 더 다가가자, 일순간 저들의 암연이 결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저들의 반경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겠지. 루빈과 도리언의 접근을 알아차린 저들은 두 사람을 탐색하려는 것 같았다.
“이런, 우리만 여길 찾은 게 아니었군.”
목소리가 먼저 건너왔다.
이제는 저쪽에서 꽤 속도를 내며 걸어왔다. 마침내 모든 안개를 헤치며 두 사람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 감지해낸 것처럼, 저들도 둘이었다.
한 명은 구릿빛 피부의 거구 남자.
다른 한 명은 창백한 피부에 왜소한 체구, 그리고 입술이 검푸른 남자.
“…….”
네 사람 다 초면이었기에, 잠깐 동안 아슬아슬한 침묵이 채워졌다.
“이봐, 마렉.”
“예.”
“우리가 본가에 머무는 동안, 여기 훈련장엔 가신들이 안 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건가?”
구릿빛 거구가 말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공간을 울린다. 우락부락하기 그지없는 그의 몸은 암살검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루빈으로서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토록 ‘은신’, ‘잠행’과 거리가 먼 암살자의 몸은 처음이었다.
‘암살의 업(業)에서 벗어나 무의 극(極)을 추구하는 자군.’
때마침, 마렉이라 불린 사람이 입을 열었다. 동상에 걸린 사람처럼 창백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착오가 아닙니다, 디븐 님. 저도 그렇게 들었거든요.”
“흐음! 아직 전달이 안 됐나 보군. 어이, 이봐. 너희! 본가의 가신들이냐?”
디븐이 성큼 걸어왔다. 고작 한 발짝 다가왔을 뿐인데 시야를 꽉 채운다.
그 순간 루빈은, 디븐의 버릇 하나를 알아차린다. 말을 할 때마다 코를 벌렁거리고 눈을 부라리는 버릇. 마치 거친 숨을 고르는 성난 호랑이 같다.
“지금 본가의 가신들이냐 묻잖아?”
하지만 도리언은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두 눈만 끔뻑일 뿐이다. 루빈이 나서서 대답했다.
“저희는 본가의 가신이 아닙니다.”
“가신이 아니다?”
“두 분은 아무래도 흑영가주님들인 것 같군요. 디븐 칼둔 님과 마렉 헬리드 님이 맞으시지요?”
현시점 흑영 8인에 속하는 자들. 방금 두 사람의 말에서 ‘디븐’과 ‘마렉’이라는 이름으로 그 가문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위 4인에 있었던 흑영들.’
흑영들 중 일부가 틀림없이 ‘뼈의 정원’에 오리라고 예상했다.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시간을 낭비하려 하진 않겠지.
죽음을 기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암살검가를 관통하는 문화. 저들에게 이번 장례식은 그저 황명에 따르고, 다른 흑영들을 마주할 기회에 지나지 않았다.
“저는 루빈 로이넨이라 합니다.”
“…….”
“마렉, 지금 로이넨이라고 한 거지?”
“…저희가 몰라봤군요. 루빈 도련님.”
“아, 루빈 도련님. 저는 칼둔가의 가주 디븐입니다.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요. 그럼 저 뒤에 있는 아이는 누굽니까?”
“…저는 도리언 로이넨이라 합니다.”
이후 판에 박힌 예우가 오갔다. 본가의 자제였지만 흑영의 지위를 감안하여 존대했고, 흑영들 또한 예를 갖췄다.
“우리는 여기서 비무를 좀 하려고 했습니다.”
“크흐으음, 흑영의 지위를 걸고 하는 사투는 아니라 이겁니다! 오해하지 마시지요!”
“디븐 님, 흑영끼리 싸워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에헤이, 아니지! 내가 널 죽이면 빈자리가 하나 생길 거 아니냐!”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베닉 베나르 님에게 패배한 가주가 되돌아오게 되겠죠.”
“크하하, 농담이야 농담!”
디븐과 마렉은 꽤 절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우렁찬 목소리에 호탕한 어법의 디븐. 역시나 보면 볼수록 암살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마렉은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나름 차근차근 대화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두 분께선 여기에 왜 오신 건지 궁금하군요.”
“마렉, 뭐긴 뭐겠어?”
“예?”
“아, 넌 형제가 없어서 모르겠군. 훈련을 빙자한 훈육 아니겠냐?”
그러자 마렉은 날카로운 눈으로 루빈과 도리언을 번갈아 살폈다. 제 계획이 들켰다는 사실에 도리언이 헛기침을 하는데, 이어진 말은 그 얼굴을 순식간에 붉게 만들었다.
“훈육이라뇨, 디븐 님. 동생이 형을 훈육하기도 합니까? 아, 로이넨가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가벼운 말투였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날카로웠다.
‘알아차린 건가?’
사실, 루빈은 ‘뼈의 정원’에 들어온 직후, 저의 두 암연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아무리 흑영이라도, 자신의 암연이 도리언보다 더 강대하다는 걸 감별하지 못하도록.
디븐 칼둔은 가래침이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나직하게 웃더니, 도리언을 쳐다봤다.
“크하하, 도리언 도련님. 오해하지 마십쇼. 마렉 이놈이 잔재주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약한 자를 구별할 줄 아니까요.”
“…….”
이미 도리언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흑영가주들에게 대놓고 모욕을 당했다 여긴 것이다.
반면, 루빈은 디븐의 말에서 뼈를 찾아냈다. 디븐은 잔재주라 표현했지만-
‘잔재주? 그럴 리가.’
마렉이 가진 6성 암연의 고유 능력을 말하는 거겠지.
저 말에 따르면, 아마 마렉의 시야엔 ‘최약체가 표시’되는 듯했다. 상대를 감지하는 암연이 아무리 섬세할지라도, 최약체를 단번에 구분해내는 능력은 별개의 문제다.
“특별한 재주를 가지셨군요. 아마 마렉 님만의 ‘특성’이겠지요.”
루빈의 나직한 한마디. 두 흑영가주들을 확 끌어당기는 말이었다.
“으허, 뭐야, 루빈 도련님은 벌써 그걸 알고 계신 겁니까?”
“그런 것 같군요. 도리언 도련님은 아직 모르고 계신 것 같지만요.”
“아, 맞다! 마렉, 나 생각났어. 본가에서 1, 2차 시험을 우승했다는 본가의 자제, 그게 루빈 도련님이었어!”
디븐이 갑자기 소리쳤다. 귀가 떨어져나갈 듯한 고함이었지만, 이미 익숙한지 마렉은 자신의 한쪽 귀를 괜히 잡아당겼다.
“맞습니다. 도련님. 그게 저의 6성 특성입니다.”
물론, 무리 중에서 최약체를 가려내는 건 특성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마렉에겐 더 주효한 특성이 따로 있을 거라고, 루빈은 짐작했다.
뭘까, 전투 중에 상대의 약점이 표시되는 걸까? 아니면 상대의 암연을 읽을 수 있는 건가?
회귀 전에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알기 위해선, 직접 지켜보는 수밖에 없겠지.
“괜찮다면, 두 분의 비무를 지켜봐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대화를 주도하고 있는 건 루빈이었다. 도리언은 그저 흑영의 기세에 짓눌려 우물쭈물할 할 뿐.
“흐어엄, 저와 마렉의 비무를? 아무리 그래도 본가의 자제들 앞에서 흑영들이 비무를 하는 건 영 이상한 그림인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한 디븐은 상체의 근육을 실룩샐룩 움직이면서 마렉을 쳐다보았다.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마렉은 달랐다. 창백한 그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마치 시체가 웃는 것 같았다.
“루빈 도련님께서 저희의 경지를 가늠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
“그렇다면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차라리 도련님과 제가 비무를 해보도록 하죠.”
“어이, 마렉. 아무리 그래도 여긴 본가야. 그거, 선 넘는 거라고.”
“사실 루빈 도련님께서 저희의 경지를 알고 싶은 것처럼, 저 역시 루빈 도련님의 경지가 궁금하거든요. 보아하니, 여기 도리언 도련님의 경지는 이미 오래전에 훌쩍 뛰어넘으신 것 같은데.”
루빈으로선 바라던 바였다. 몸으로 부딪쳐 느끼는 것만큼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어차피 마렉을 이기려는 목적도 아니었고.
자신의 경지를 드러냄으로써 세이렌의 뒤를 이을 자가 누구인지, 그걸 선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덩달아 이 자리에 도리언을 데려옴으로써, 그에게도 격차를 보여주고자 했다. 다시는 차기 가주 자리에 욕심을 내지 않도록.
‘그런데 의외군. 나는 저 덩치를 노렸는데.’
거구 디븐은 마렉을 하대하고 있지만, 그 표현에는 미묘한 벽이 있다.
보이는 것과 달리, 디븐과 마렉 중에 더 강한 쪽은 마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성격이 더 나긋한 쪽이 마렉이어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사실상 디븐은 마렉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건 마렉이었다.
‘둘 중 누가 강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거나 이들이 하위 흑영인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루빈은 도리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원하는 대답이 없자, 마렉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
“도리언 형님.”
“……?”
“제게 검을 빌려주시겠습니까?”
“뭐? 내 검을?”
자신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러니 흑영들에게 영혼무구 핏빛서리를 보여줄 필요까진 없겠지.
“못 들으셨는지요? 마렉 헬리드 가주님과 비무를 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