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85)
암살검가 로이넨-185화(185/258)
제185화. 황명 (2)
“오랜만입니다.”
세이렌이 차가운 인상을 풍기며 말했다.
루빈과 두 흑영의 호위 속에, 룰포가 로이넨 저택으로 들어온 상태. 그는 자신이 통과한 안개 성벽이 거슬리는지 모래폭풍에 시달린 사람처럼 제 몸을 여러 번 털어냈다.
“거슬리는 독성이군.”
룰포가 보기에 로이넨 저택은 물리적인 방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음에도 견고한, 일종의 요새 같았다.
안개는 독성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정신을 조작하는지 마치 길이 뒤흔들리는 느낌을 주었으니까.
두 흑영이 앞과 뒤에서 행렬을 유지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길 찾기에 화가 뻗쳐버려 난동을 부렸을지 모른다.
“휴우…….”
룰포는 숨을 내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넓은 정원은 조경이 잘 갖춰져 있었고, 본채와 별채 모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겉만 보기엔 일반 귀족가의 저택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군.’
룰포 정도의 무인이라면 모를 리 없다. 마치 황궁에 고차원의 경비용 마도구들이 내장되어 있듯, 저택 곳곳엔 가신들이 은신해 있었다.
몇몇은 룰포에게조차 감지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택을 모두 돌아다녀 보고 싶지만, 로이넨 가주가 허락해줄 리 없다.
아무리 황제의 사신으로 여기에 왔을지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니.
“…그럼, 다음 장소로 안내해 주시오.”
룰포는 황명을 서둘러 전하고 싶은 듯 절차를 재촉했다. 그리고 곧 세이렌 뒤편으로 죽 서있는 흑영 8인과 마주했다.
여기야말로 루빈이 기다리던 대목이었다. 루빈에겐 상위 흑영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룰포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였다.
룰포가 상위 흑영들과 가벼운 인사말이라도 주고받는다면, 조금이나마 그들에 대해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음.”
룰포가 흑영들을 스윽 쳐다보았다. 흑영들의 악명은 그도 익히 들어보았을 터. 과연 말을 걸까?
하지만-
“…….”
룰포는 별다른 인사말 없이 흑영들을 지나쳤다. 간결한 눈인사로 대체한 것이다.
그러다가 멈칫.
콧잔등이 없고 귀가 찢겨 있는 섬뜩한 베닉 베나르 앞에서 얼굴을 잠시 찡그렸는데, 그뿐이었다.
‘상위 흑영들에 대해 뭐라도 알아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뭐, 다음 기회가 있겠지.’
아쉬움을 감춘 루빈은 여덟 명의 흑영 앞을 지나며 빠르게 관찰했다.
어제 훈련장에서 만났던 디븐 칼둔과 마렉 헬리드. 오늘 함께 호위를 맡았던 샤케스 페아르. 이전부터 얼굴을 알고 있던 카반 크로키슨.
그 외에도 루빈이 짐작할 수 있는 흑영이 한 명 더 있었다.
‘저자가 베닉 베나르구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기괴한 몰골. 루빈은 저자가 흑영 지위에 집착하는 늙은 가주 베닉이라는 걸 알아봤다.
‘가장 약한 가주로 공인됐다 했지. 그럼 하위 흑영의 서열은… 샤케스, 마렉, 디븐, 베닉 순인가.’
다들 어스름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루빈은 뒤처져 걷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베닉이 다가왔다. 그는 헤벌쭉 웃어 보였다.
“가장 늙은 자와 가장 젊은 자의 만남이로군요. 비록 기분 좋은 날은 아니지만, 루빈 도련님을 이렇게 뵙게 되었네요.”
“베닉 베나르. 저 역시 그렇습니다.”
“도련님도 절 알고 있는 걸 보니 제 기괴함도 그사이 꽤 유명해졌나 봅니다.”
“흑영들을 마주하기에 앞서 공부를 좀 해봤습니다.”
베닉이 흐뭇하게 웃었다.
“공부라…. 보아하니 어제는 마렉 헬리드와 무기를 맞대는 공부까지 해본 것 같은데,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의외였다. 마렉이 어제 일을 말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자존심의 상처가 작지 않았을 텐데.
정말로 상위 4인과 하위 4인은 각각의 파벌이라도 있는 걸까? 알고 보니 마렉이 훨씬 대인배였거나. 혹은 하위 흑영들이 끈끈한 연대를 구축했거나.
그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베닉이 손사래를 쳤다.
“오해하진 마시지요. 헬리드 가주가 내게 말해준 건 아니니.”
“그러면 짐작하셨다는 말인가요?”
“오랫동안 흑영의 말단에 머물면서 먹은 눈칫밥이 그만큼 쌓였다는 뜻이겠지요.”
“…예?”
“도련님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는 마렉과 디븐, 그런데 마렉의 몸 곳곳에 어제 아침에 봤을 때만 해도 없던 전투의 상흔이 있더군요. 도련님도 마찬가지이시고. 뭐, 이 정도로 지레짐작해본 것뿐입니다.”
지레짐작이라는 말은 겸손에 불과하다. 베닉의 관찰력이 그걸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이지.
털어놓은 근거들 말고도, 그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저렇게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루빈은 베닉 베나르를 가만히 쳐다봤다. 베닉은 잔잔한 미소를 짓는 것 같지만, 그 특유의 몰골로 인해 기괴함만 가중시켰다.
‘흑영에 집착하는 노인’이라는 악명과 달리 그 태도는 정중하고, 또 날카로웠다. 그리고 무서우리만치 여유로웠다.
‘저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노회하다는 것만이 유일한 근거는 아닐 거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일행은 어스름홀에 다다랐다. 어스름홀 특유의 냉랭함이 스멀스멀 번져온다. 안 그래도 매피스의 죽음으로 엄숙한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
한 명씩 어스름홀로 들어가고 있는 와중.
베닉은 문 앞에 멈춘 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희멀건 눈동자에 햇빛이 담긴다.
루빈은 그런 그를 면밀히 관찰했다.
‘생각해보자. 베닉 그리고 베나르 가문…. 회귀 전엔 어떻게 됐었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루빈과의 접점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그들과 관련한 기억 자체가 없을 수도 있었다.
“도련님!”
그때, 다급한 쿠제가 루빈 곁으로 다가왔다.
“어서 들어가시죠. 이제 곧 매피스 도련님의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아, 그러지.”
루빈은 상념을 멈추었다. 베닉에 대한 기억은 천천히 떠올리면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텔마흐가 내린 황명이다. 과연 어떤 황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잠시 후.
어스름홀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세이렌을 비롯한 로이넨 혈통이 앞에 서 있고, 흑영 8인이 뒤에 도열했다. 룰포는 그들로부터 좀 떨어져 팔짱을 낀 채 혼잣말했다.
“암살검가의 장례는 어떨지 기대가 되는군.”
기대가 된다니. 마치 연극 관람하는 사람처럼 가볍게 말하는 룰포. 그러거나 말거나, 루빈을 비롯한 암살자들은 초연했다.
-알 수 없는 문화로군. 가문의 적자가 죽었는데, 어찌 이리 냉정할 수가.
하네케 또한 낯설긴 마찬가지. 조금은 설명해줘도 좋겠다고 루빈은 생각했다.
‘암살검가에서의 죽음은 결코 불상사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죠.’
-모든 죽음이 그렇다지만, 우린 감정이 있는 인간이잖은가? 모든 이는 애도를 받을 자격이 있네.
‘암살검가의 수백 년 역사 동안, 그러니까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기도 훨씬 이전부터 우리 암살자들은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린, 우리 또한 언제든 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빼앗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 중 하나일 뿐이다. 하네케는 비록 공감하진 못했지만 이해는 했다는 듯, 말없이 스르르 물러났다.
“내 처음 보오. 암살검가의 장례라니.”
마침 룰포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는 루빈도 마찬가지였다. 회귀 전이나 후나, 그는 암살자의 장례식 따위 들어본 적 없다.
그러자 세이렌이 답한다.
“저희는 릴리크 제국에 헌신하기 이전의 시대부터, 죽은 동료를 이렇게 보냈습니다.”
건조한 대답. 그런 다음 세이렌은 자신 앞에 놓인 매피스의 시체를 검은 피륙으로 둘둘 쌌다.
“본가의 핏줄이라 할지라도 특별할 건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외부인’이 그걸 지켜보게 됐군요.”
세이렌은 자신의 검을 뽑아 아주 간결한 동작으로 내리쳤다. 내리치는 지점은 놀랍게도 매피스의 심장 부근.
푸슉!
퍼드덕, 퍼드덕!
그와 동시에 어스름홀에 날갯짓 소리가 울렸다. 어스름홀 천장 부근에서부터 날아오는 커다랗고 새까만 새.
-로이네크로우인가?
하네케가 물었다. 그 역시 룰포와 같은 외부인이었니 놀랄 수밖에
그 말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 로이네크로우였다. 죽은 매피스가 선택했던 로이네크로우임이 틀림없었다.
로이네크로우는 시신 위에 내려앉더니, 그대로 검은 피륙에 싸매진 매피스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날갯짓이 시작됐는데, 이번엔 아주 거칠었다. 시신을 움켜쥐고 날아올라야 했던 것이다. 그 날갯짓에 근처 사람들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룰포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릴 때쯤. 안정적으로 비행을 시작한 로이네크로우는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그대로 날아갔다.
-까마귀와 함께 사라지는 건가. 역시 일반 장례식과는 차원이 다르군.
‘하네케, 이 정도면 형식을 굉장히 잘 지킨 편입니다.’
만약 임무 중에 죽으면, 이런 절차도 대부분 생략된다. 로이네크로우가 죽은 암살자의 시체를 들고 날아가는 건 똑같지만, 시체를 검은 피륙으로 싸지는 않는다.
‘그마저도 시급할 땐, 로이네크로우가 제 부리로 암살자의 가슴을 파헤치죠. 시신은 놔두고 그 심장만이라도 가지고 날아가는 겁니다.’
하네케는 납득했다. 그래서 세이렌이 매피스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그러자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시신이나 심장은 어디로 옮겨지는 건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주인을 잃은 로이네크로우를 다시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 추측으로는 길리필드 수목원으로 가지 않을까 싶지만, 거기서도 주인의 흔적을 찾은 적은 없었죠.’
-아직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많군.
그때, 룰포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끝난 것이오?”
“네. 이게 저희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장례입니다.”
“…허, 좀 실망스럽군.”
룰포는 고개까지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앞쪽으로 걸어 나갔다. 방금 전까지 매피스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그럼, 간결한 장례식도 끝났겠다, 밥이라도 먹은 다음에 황명을 받겠소? 아니면…….”
루빈은 룰포가 로이넨가에서 최대한 머물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훗날의 ‘중요한 계획’ 때문이겠지.
언젠가 암살검가를 토벌하려면, 로이넨 저택에 대한 정보도 많을수록 유용할 테니까.
그러나 황제의 사람이 자신의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1초라도 늘어나는 걸 원치 않는 세이렌이었다. 그녀는 룰포의 말을 도중에 잘라버렸다.
“지금 당장 황명을 받지요.”
“…마음이 급하시군. 뭐, 정 그렇다면야…….”
룰포는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려면 황명을 받드는 자의 예의 정도는 갖춰야겠지 않겠소? 흑영가주들이든 본가의 가신들이든 간에 일단 무기부터 내려놓으시오. 무기가 당신들한테 심장과 같다는 건 알지만, 일단 지금은 전시가 아니잖소.”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저의를 의심하게 하는 요구였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전시가 아닌 바에야 무장한 채 황명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지요.”
세이렌이 손짓하자, 먼저 데이몬과 킬리언이 자신들의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다음에는 루빈과 도리언이.
흑영 8인도 거구의 디븐만 언짢은 기색을 보였을 뿐, 순순히 따랐다. 어차피 무기는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지, 그들이 가진 힘의 근원은 아니었으니까.
“루빈.”
“예, 가주님.”
“가서, 흑영가주들에게 무기를 받아 뒤쪽으로 옮겨다 놓아라.”
“알겠습니다.”
루빈은 세이렌의 명대로, 흑영가주들의 무기를 조심스레 어스름홀 뒤쪽에 옮겨다 놓았다.
-샤케스 페아르라 했나? 작가라는 양반 말일세. 정말로 무기를 낸 거 맞나?
샤케스가 낸 건 두툼한 실뭉치였다. 실 가닥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다. 보기엔 거미줄보다도 가늘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겉모습일 뿐, 이는 굉장한 강도를 자랑한다. 실 한 가닥 한 가닥이 어지간한 검으로 끊어낼 수 없을 만큼 강했는데, 대륙에서도 무기 제작 재료로 유명한 적광석의 조합체, ‘혈광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혈광석 재질의 실로 어떻게 싸울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샤케르 페아르의 평판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그다음은 마렉 헬리드의 무기였다. 창으로 결합이 가능한 장침들을 넘겨받을 때, 마렉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쩌면 자넨 회귀 전 이들의 무구를 한 번씩 봤을 수도 있겠군. 거점창고 관리인이었다 했잖나?
회귀 전, 킬리언에 뒤이어 흑색구역의 거점창고를 관리했던 루빈. 그래서 이래저래 수집된 무구들을 본가에 보내거나, 방계가문에 배분하는 일이 잦았다.
가끔은 방계 가주가 임무 중에 얻은 보구급 무기를 거점창고에 내놓는 일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방계가주들은 자기 가신들이나 자식들에게 무기를 내주기에, 그런 적은 드물었지만.
‘아, 그러고 보니까 떠올랐네요.’
-무엇이 말인가?
‘제가 거점창고 관리인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베닉 베나르와 접촉한 적이 있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직접적인 접촉은 아니었다.
베닉 베나르는 임무 중에 얻은 무기를 본가에 내주기로 했고, 그걸 회수해왔던 게 루빈이었다.
숨겨놓은 무기를 찾아오는 것이어서 베닉을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빈 도련님, 내 애검을 잘 부탁합니다.”
때마침 베닉의 무기를 건네받았다. 단조로운 형태의 단검이었는데, 다른 흑영들의 무기에 비하면 평범했다. 흑영의 말단이라 그런 걸까.
이후, 루빈은 릴 제파드, 아논 데스릴 릴덴스, 아논 아스칼지의 무기를 건네받았다.
그들에게서 검을 받아들 때마다, 루빈은 조금씩 동요했다. 그 동요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네케만은 알아차렸다.
-갑자기 왜 그런가?
‘하네케. 흑영 8인 중에서 누가 최강자인지, 찾아낸 것 같아요. 방금 말입니다.’
-……?
루빈은 흑영들의 무기를 모두 뒤편에 진열해놓은 뒤,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직후 루빈의 시선이 향한 곳은 베닉 베나르였다.
-저 늙은이는 흑영의 말단이라며?
‘제가 저번에 말했던 거 생각나세요? 15년쯤 지나면 릴, 아논, 데스릴 이렇게 세 명의 흑영은 증발한다고요.’
각각 이명으로 더 유명한 자들이었다.
무영귀 릴, 유령검 아논, 지옥연환 데스릴.
훗날 그들은 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하고 말았는데, 지금 막 루빈이 그 흔적을 찾은 것 같았다.
‘회귀 전 거점창고 관리인이었던 제게 베닉은 세 차례나 무기를 보내왔어요. 그리고 그때 그 무기들이 지금의 릴, 아논, 데스릴의 무기들이었고요.’
미래의 언젠가, 베닉이 그들 세 사람을 죽였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베닉이 그들의 무기를 본가에 내놓을 리 없었다.
-그러면, 앞으로 10년 사이에 베닉이 엄청나게 강해지기라도 해서 저들을 따라잡는다는 건가? 저 반송장 같은 자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루빈의 관점은 달랐다.
‘제가 현시점 흑영의 최강자를 찾았다고 했잖아요. 제가 보기엔, 베닉은 일부러 흑영을 들락날락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일부러?
흑영에 집착한다는 악평은 잘못된 걸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그러니까 이를 달리 해석하면-
‘언제든 자기가 원할 때마다 흑영가주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만큼 강하단 뜻이죠.’
다만, 베닉이 왜 흑영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온 건지는 아직 몰랐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빈에겐 베닉에 대한 의문을 더 파고들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폐하의 뜻을 전하겠소!”
한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룰포. 방금까지 불콰했던 얼굴색마저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강건하게 서서는, 세이렌을 비롯한 암살검가 전원을 쓱 훑어봤다.
“명을 내린다!”
황명을 대독하는 순간.
룰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황명 아래 몸을 낮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