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87)
암살검가 로이넨-187화(187/258)
제187화. 황명 (4)
“루빈.”
한결 고요해진 어스름홀.
흑영들만이 아니라 데이몬을 비롯한 본가의 가신들까지 내보낸 세이렌이었다. 같은 로이넨 혈통인 도리언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해보아라. 네가 생각해낸 3안. 나를 설득하고 흑영들까지 설득할 수 있다면, 기꺼이 폐하께 말씀드려주지.”
카반 크로키슨이 지적했던 것처럼, 황제는 새로운 의견을 낼 자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세이렌이라면 가능했다. 그녀는 암살검가 본가 가주이면서 황제의 이복동생.
무엇보다, 황제에게 가장 유용한 암살검이었다. 이제껏 그녀가 실패한 암살은 없었고, 이게 곧 그녀에게 발언권이 허락된 이유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텔마흐는 새로운 뜻을 내비치는 것 정도는 용서해주겠지만, 가당치도 않은 방안이라면 더 큰 분노를 사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황제를 설득할 만한 방안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입에 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루빈은 숨을 고른 후 말했다
“폐하와 흑영들. 그 안에 있는 욕망을 자극할 것입니다.”
“욕망을 자극한다?”
“제가 제물이 되겠습니다.”
제물이 되겠다, 루빈의 그 한마디가 불러온 정적. 아들을 바라보던 세이렌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역시 어머니 또한 이 승부수를 고려했던 거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을 뿐이지. 절망하는 세이렌 모습에, 루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어떤 식으로 제물이 될 건지가 중요할 겁니다.”
“…계속 말해 보거라.”
“흑영을 포함한 모든 방계가의 자제들 대신,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황궁으로 들어가겠다는 걸까. 제국군에 복무하겠다는 걸까. 그런 세이렌의 의문을 짐작한 듯, 루빈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황궁도 아니고, 제국군도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시점부터 임무를 수행할 겁니다. 암살 임무든, 첩보 임무든 말이죠.”
다음 순간, 세이렌은 말을 삼켰다.
‘너는 이제 열세 살일 뿐이다.’
물론,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위협적인 열세 살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어머니.”
“……?”
어머니. 세이렌으로선 낯선 호칭이었다. 세 형제 모두 어머니라는 말보다 가주님이라는 말을 먼저 터득해야 했다.
그런 호칭은 가칙(家則)이 아닌, 서늘한 가풍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문화.
물론, 루빈도 다른 사람 앞에서 세이렌을 두고 어머니라 지칭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해 직접 그렇게 부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는 희생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성장을 위한 길을 택하는 겁니다.”
“…….”
“황제 폐하께서 내려주신 징벌을 감내하면서, 경지를 끌어올리겠습니다.”
5성의 벽을 넘기 위해선 수련만으로는 부족했다. 로젠탈러를 제거하면서 깨달았듯 적수와의 사투, 그만한 경험이야말로 한계를 뛰어넘는 성장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나 혼자서 성장하면 의미가 없지.’
의도대로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루빈에겐 꾸준히 임무가 주어질 터.
완수해나가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차 고난도의 임무가 내려지리라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임무를 맡을 때마다, 방계가의 자제 중 한 명을 동료로 택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홀로 임무에 나서겠다 요청한 것도 모자라서, 방계 자제들까지 데려가겠다?”
“제가 요청드린 3안에 비하면, 이건 별것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임무의 완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더냐?”
“대외적인 이유론 그렇습니다.”
“그럼, 진짜 이유는 무엇이지?”
“저는 저 자신을 성장시키는 한편, 방계가의 자제들 또한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함께 성장한다라…….”
“암살검가를 빛낼 인재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저 이기적인 흑영들을 밀어낼 만한 재목들이요.”
하밀 쿠니틀리, 블라네 크리거. 쿤 크로키슨.
물론 쿤은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엄청난 재능만은 탐이 나더라도, 그 녀석의 마음을 제대로 휘어잡을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럿이다. 전생에선 명성으로만 들어왔던 재능 있는 자제들이 많았으니까.
‘그 아이들이 사지에 떨어지는 걸 두고 볼 순 없지.’
“흑영은 본가의 견제 세력이란 걸 알고 있지 않더냐. 네가 성장시켜주면 그 아이들이 본가의 친위대라도 될 것 같더냐?”
“글쎄요, 친위대는 모르겠지만, 선봉장만큼은 기꺼이 되어줄 겁니다.”
텔마흐와의 전쟁을 대비해야 했기에 ‘선봉장’이라 표현했다. 세이렌은 그 단어를 중요하게 받아들이진 않는 것 같지만.
잠시 생각에 잠기는 세이렌. 곧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좋다. 3안도, 네 추가 요청도. 네가 방계 자제들과 함께 임무를 받든다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겠지.”
지금 루빈은 칙명부의 이목을 끌고 있다.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통과했음은 물론이고, 장교육성위에서의 활약까지. 또한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강하다. 그만큼 노려질 위험도 컸다.
하지만 루빈의 방법대로라면, 실력을 숨길 수 있다. 칙명부가 루빈의 경지를 정확히 판단하는 데 시간을 끌게 해줄 것이다.
‘이로써 명분 또한 성립되겠지.’
본가가 자처하여 방계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것. 암살검가 육성 방식의 타당성을 다시금 증명해 보일 기회인 것이다.
“아마 허락하시더라도 조건부일 것이다. 1안과 2안은 폐기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 네가 실패하는 그 순간, 집행될 것이다.”
“단지 시간 끌기에 불과할지라도, 전 괜찮습니다.”
“죽지 않을 자신이 있더냐.”
세이렌은 피식 웃었다. 저 끝을 모를 자신감. 루빈을 보고 있자면, 오래전에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온 대륙을 비추는 빛과 같은 황제 텔마흐. 그의 제국이, 그의 힘이 완전해지는 만큼 어둠의 존재인 세이렌은 제국의 굴레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내가 품은 절망에 균열을 내는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빈이 제시한 방안만이 암살검가를 지켜나가는 최선의 수라는 걸.
루빈 말대로 그건 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고, 흑영들 또한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칙명부로부터 임무를 받게 되는 걸 흑영들은 오히려 반길 겁니다.”
흑영들은 루빈에 대한 세이렌의 신뢰를 읽어낸 터였다. 게다가 그들은 암연을 지녔기에 루빈의 경지가 심상치 않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마렉과 디븐은 직접 경험하기도 했고.
세이렌을 뒤이을 또 하나의 경이로운 가주가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루빈이, 칙명부의 징벌을 자처하여 받는다고 한다면?
흑영으로선 거부할 명분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거절하고 싶지도 않을 거였다.
“루빈.”
세이렌은 가주석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루빈을 지긋이 바라봤다. 이미 결심은 세워졌다. 루빈의 뜻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네 목표가 무엇이더냐? 흑영들처럼 끝없이 강해지는 것이더냐. 아니면,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 로이넨가의 가주가 되려는 것이냐.”
루빈에겐 늘 준비된 대답이 있었다. 더 강해지려는 것도, 가주가 되려는 것도 결국 하나만을 위한 길에 불과했으니.
“가문을 지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순간적으로 세이렌의 머릿속에 루빈에 관한 자잘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냉엄한 가주이긴 하나, 이 아이에게서 발견한 이상한 느낌들.
루빈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계획적이었고 필사적이었다. 하네케의 검날 조각, 티나, 쿠제, 카포티니…. 이 모든 게 루빈의 흔들림 없는 결정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루빈은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지만, 한편으론 뭔가에 대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이렌은 그걸 꿰뚫어보았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 가문을 지키려는 거지?”
저 아이를 추동하는 게 무엇인지, 그것만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이에 루빈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제 대답은 ‘무엇으로부터’라는 말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가문을 지키겠다는 생각입니다.”
세이렌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어스름홀 바깥에 대기 중이던 가신들을 불렀다.
문이 열렸다. 데이몬과 킬리언, 그리고 쿠제가 하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서, 흑영들을 데려와.”
* * *
흑영들이 다시 어스름홀로 돌아왔다.
그들은 어스름홀의 달라진 구도를 곧바로 깨달았다. 루빈은 가주석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루빈 옆으로 데이몬과 킬리언, 쿠제가 서 있었다.
쿠제는 그렇다 쳐도, 두 가신이 루빈을 위시하는 듯한 풍경은 흑영들에게 묘한 압박감을 일으켰다.
“허허, 가주님께서 설득되셨나 봅니다!”
디븐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평소에도 디븐을 못마땅해하던 카반 크로키슨과 데스릴 릴덴스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디븐이 그리 소리치지 않아도, 다들 똑같이 생각하고 있던 터.
“루빈. 흑영가주들에게 네 뜻을 말해보아라.”
세이렌의 허락하에 루빈이 자신의 방안을 공개했다. 흑영들은 루빈의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루빈의 말이 모두 끝났을 때, 디븐은 다시 한번 껄껄 웃었다.
“이런 계획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러면 본가가 모든 걸 떠안고 가는 거잖아?”
샤케스도 한마디했다.
“그야말로 영웅담이군요. 다음 희곡에 써봐도 괜찮을 만한 이야깃거리가 되겠어요.”
마렉은 창백한 얼굴을 긁적이기만 했고, 아논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과 함께 그저 웃었다.
릴 제파드는 묵묵히 팔짱을 꼈고, 카반은 고개를 반쯤 숙이고 괜히 이마를 짚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두의 시선을 빼앗는 박수 소리가 났는데, 베닉 베나르였다.
베닉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왠지 모를 승리감이 배어나는 표정으로 다른 흑영들을 쳐다봤다.
“이 늙은이가 부끄러워질 만한 결정이로군요. 도련님께서 첫 번째 동료로 저희 베나르 가문의 아이를 선택하신다 해도, 아쉬움 없이 보낼 수 있겠습니다.”
“베닉, 앞서가지 마시지요. 아직 황제께서 윤허하신 것도 아닙니다.”
카반의 목소리엔 짜증이 가득했다.
“어차피 흑영들은 다 찬성하는 거 아닙니까. 맞죠, 카반 크로키슨?”
“…….”
“흑영 8인이 모두 찬성했다는 걸 아신다면, 황제께서도 훨씬 관대하게 생각해주실 겁니다.”
예상했던 대로 흑영들 중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몇몇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를지도 몰랐다.
“이제 룰포 님이 돌아올 내일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하지만 그때-
“아니요, 흑영들께선 떠날 채비를 미리 해두셔도 됩니다.”
세이렌이 단언하듯 말했다. 흑영들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예?”
“폐하께선 주저하는 걸 경멸하는 분이십니다. 칙명부 수장의 말대로요.”
“그렇다면…….”
“흑영들께서도 모두 찬성했으니, 더 지체할 필요가 있을까요. 무엇보다, 로이넨 저택 근처에 그랑버드가 배회하고 있는 게 견디기 힘들군요. 제가 직접 칙명부 수장에게 다녀오도록 하죠, 루빈과 함께.”
황제가 거부할 경우엔 다시 1안과 2안을 두고 흑영들과 줄다리기를 해야겠지만, 세이렌은 3안이 받아들여질 거라 확신했다.
그녀는 가문의 위기가 도래하기 이전보다 더 담대해진 상태. 어스름홀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분명 루빈의 영향 때문이리라. 가주는 아들의 용기와 긍지에 자극을 받는 것이다.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지금 이 자리는 차기 가주로서의 루빈 로이넨을 선보이는 자리나 다름없었으니.
“다녀오겠습니다.”
루빈이 여덟 가주를 향해 예를 표했다. 그러자 흑영들도 마주 인사했다.
흑영 입장에선 아무런 피해도 없을뿐더러, 본가가 모든 위기를 짊어지게 되었으니 가장 만족할 만한 결과라 해야 할 텐데. 어쩐지 뒷맛이 씁쓸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흑영으로서의 자긍심이 구겨지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역시 루빈이 의도한 또 하나의 효과이기도 했다.
저벅저벅.
루빈은 세이렌과 함께 어스름홀을 떠났고, 문은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흑영들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있었다.
* * *
사아아아악.
로이넨 저택을 둘러싼 안개 성벽을 뚫고 나오며 비행하는 한 마리의 로이네크로우.
붉은 눈의 로이네크로우 로호.
그 위에는 세이렌이 올라타 있었다. 로호의 다리에 묶여있는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건 루빈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상태에서도 로호의 날갯짓은 힘이 넘쳤다.
잠시 후, 날갯짓 소리와 함께 로호 곁으로 또 하나의 로이네크로우가 날아들었다. 세이렌은 티나의 민트색 눈동자를 힐끗 바라봤다.
“티나.”
“안녕, 세이렌? 오랜만이야. 아무리 로호가 최강의 로이네크로우라지만, 루빈까지 태워가는 건 힘들지 않겠어? 그거 1인승이잖아?”
세이렌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목적지가 그랑버드라 기껏 빼줬더니. 옛날보다 겁이 없어진 것 같구나.”
“원래부터 겁은 없었거든요? 뭐… 네 막내아들의 로이네크로우로 살다 보니까, 덩달아 나까지 막무가내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해.”
시선을 주고받는 루빈과 티나. 티나가 날갯짓을 조정하며 로호 아래로 비행하자, 루빈은 그 위로 내려앉았다.
휘이이이익. 휘이이익.
두 로이네크로우가 구름을 향해 비상한다. 거센 바람 소리 틈으로 티나가 속삭이듯 물어왔다.
“루빈. 룰포의 그랑버드에 미리 통보 안 해도 되나?”
“그럴 필요 없어.”
“칙명부가 우릴 침입자로 오해해서 공격하면 어쩌려고?”
“바라던 바지.”
티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의미로 부리를 열어 까아아악 울어댔다.
그렇게 어느덧 그랑버드의 상공. 다행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랑버드에게 감지되지 않으려 일부러 더 높은 상공 비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하강하거라, 루빈.”
“예, 가주님.”
티나의 부리가 아래를 향했다. 날개를 접고 그랑버드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상공의 바람이 찢겨나가고, 그랑버드의 거대한 몸체가 드러난다.
그제야 로이네크로우의 접근을 알아차린 그랑버드가 그우우우우우 울어댔다. 이에 루빈은 내심 각오를 다졌다.
‘텔마흐, 네 아가리 속으로 내 친히 들어가주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건 질색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