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89)
암살검가 로이넨-189화(189/258)
제189화. 황제와 대면하다 (2)
룰포는 부하들을 시켜 막사 내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밖으로 내놓았다.
텅 비어버린 막사. 화상을 통한 대화이긴 해도,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다. 황제의 눈에 거치적거릴 게 있어서는 안 됐다.
모든 게 정리된 뒤, 룰포는 세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위에는 1급 마적석이 놓여 있었다.
“…….”
세이렌은 1급 마적석을 받아들었다. 이것은 황족만이 작동할 수 있으니, 그녀가 직접 작동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거기에 내장된 마법은 하나뿐. 폐하와의 소통만을 위해 마련된 것이오. 그저 손으로 감싸기만 하면, 마법이 발현될 거요.”
세이렌은 마적석을 감싸기 전에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
루빈과의 짧은 시선 교환. 이윽고 마적석을 작동시켰다.
피이이잉.
마적석에서 빛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룰포는 그걸 다시 받아들었고, 막사 앞쪽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세이렌 옆으로 돌아와 황제를 맞이할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몸을 낮추고, 황제 폐하께서 찾아주실 때까지 기다리시오.”
무릎을 꿇은 세 사람은 바닥에 얼굴이 닿을 듯한 자세로 황제를 기다렸다.
“…….”
“…….”
침묵이 길게 이어졌지만, 황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 목소리. 그 눈동자.
‘텔마흐…….’
루빈은 자신의 생이 다하는 순간에 마주했던 황제를 떠올려 보았다.
모든 게 선명했다. 텔마흐가 자신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을 때, 어깨에 돋아나던 그 근육마저도.
문득 2년 전 ‘2차 선택’ 중, 내면의 두려움 속에서 마주했던 텔마흐가 떠올랐다.
그때 몽환거미가 만들어낸 텔마흐는 루빈을 알아보았다. 그는 루빈의 전생까지 포함한, ‘두려움의 육화(肉化)’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나타날 텔마흐는 루빈이 회귀자라는 걸 알지 못했다.
세이렌의 막내아들. 암살검가의 막내아들. 오직 그렇게만 알고 있을 터.
‘만약 화상 대화가 아니었다면…….’
놈을 죽일 수 있을까?
텔마흐가 내 눈앞에 실존한다면…….
바닥에 닿을 듯한 루빈의 눈빛이 짙어졌다. 당연히 혼자서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함께라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차라리 자신과 세이렌이 황궁에서 텔마흐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면 좋았으리라 생각하는 루빈.
그때였다.
-루빈!
암연을 기반으로 한 전음.
어머니의 호명에 루빈은 상념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암연을 다듬어라! 그 누구도 아닌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것이다. 털끝만 한 불만도 들켜서는 안 된다. 네가 원하는 목표, 그 누구도 암살검가를 위협할 수 없게 하겠다는 그 목표…! 그걸 위해선, 이 순간을 넘겨야 해.
세이렌의 호통.
그녀는 루빈의 암연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것이다. 루빈은 빠르게 암연을 가다듬었다. 텔마흐에 대한 상념에 빠지다 보니, 자연스레 적의가 함유되었나 보다.
…바로 그 순간.
루빈의 귓가에 나긋한 목소리가 닿았다.
“세이렌, 나의 누이. 하나뿐인 내 여동생.”
간신히 가다듬었던 암연이었건만, 하마터면 또다시 날뛸 뻔했다.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였다. 그자가 손을 뻗어온다면, 어머니의 얼굴을 만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루빈은 눈을 들 수 없었다. 눈을 여전히 땅에 박아두어만 했다. 이번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모든 암살검가의 주인, 세이렌 로이넨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고개를 들라.”
“…….”
“오랜만인데, 눈은 맞추고 이야기해야지.”
루빈과 룰포는 여전히 몸을 조아린 상태. 세이렌만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눈앞에 있는 텔마흐를 바라봤다.
휘이이잉.
1급 마적석에 의해 중계되는 텔마흐의 공간. 그 목소리가 실재하듯, 빛의 파장 속에 드러나는 황궁 역시 너무도 선명했다.
황좌에 앉아 있는 텔마흐는 장막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노란 눈동자만은 장막을 꿰뚫었다.
황제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세이렌, 너는 여전히 아름답구나.”
“…….”
“너 어렸을 때, 암레트 삼촌이 했던 말 기억해? 불꽃을 얼릴 수 있다면 꼭 너와 같을 거라고 했었지…. 그땐 삼촌 말이 무슨 뜻인가 했는데, 지금 널 보니 이해가 되네.”
“…….”
“아, 삼촌 하니까 생각나네. 나한테도 조카가 있었지. 내 조카의 장례는 잘 치렀지? 이름이… 뭐였더라?”
그제야 힘겹게 대답하는 세이렌이었다.
“매피스입니다.”
세이렌에게, 텔마흐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암기와 같았다. 날아들며 그녀의 살갗을 베어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텔마흐를 잘 알았다. 반갑다며 저리 살갑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는 온 대륙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자.
세상의 그 어떤 명가(名家)도, 왕가도. 그의 변덕만으로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장례는 잘 치렀습니다.”
아주 미세했지만, 루빈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암살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회귀 전에서조차 보지 못한 모습이다. 이를 본 루빈은 내면 깊은 곳에서 분노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흠…. 우리가 이렇게 마주한 건, 내게 제안할 게 있다는 뜻이겠지?”
“…….”
“걱정 마, 세이렌…. 네겐 얼마든지 생각을 내뱉을 자유가 있으니까. 너라면, 가능하지.”
그러나.
반가움으로 포장됐던 분위기는 빠르게 얼어붙어 갔다. 점차 텔마흐의 목소리에서 권태감이 묻어났으니까.
“말해, 세이렌.”
그 한마디는 너무도 서늘했다.
“내 눈을 보면서 말해, 세이렌.”
“…폐하가 친히 내려주신 개혁의 뜻을 실행치 않으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희에게 속죄의 기회를 내주시옵소서.”
“속죄의 기회?”
“매피스의 실책은 곧 본가의 실책입니다. 그 아이는 죽었지만, 죽음만으로는 폐하의 실망을 만회할 수 없사옵니다.”
세이렌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어깨 너머, 온몸을 수그리고 있는 루빈 쪽으로.
그런 뒤, 다시 황제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의 다른 아들이 폐하께서 내주신 과업을 수행하겠나이다. 저 아이가 매 임무마다 방계가의 자제를 선택하여 함께 수행하겠사옵니다.”
“…….”
그 순간, 루빈은 자신에게 향하는 텔마흐의 시선을 느꼈다.
“검은 머리라… 네 막내 아이인가?”
“그렇사옵니다.”
“일어나 보라.”
드디어.
루빈에게도 대면의 순간이 찾아왔다.
스르륵, 몸을 일으키는 루빈.
“나를 보라. 짐과 눈을 맞추어라.”
원하는 대로 했다. 루빈의 검은 눈동자가 텔마흐에게 향했다. 장막 너머, 노란 눈동자가 보인다.
“루빈 로이넨,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루빈이라. 들어본 적이 있다. 암레트가 죽을 때, 필리몬드에 있었다지? 생각했던 것보다 꽤 늠름하군.”
그러더니, 텔마흐는 룰포를 불렀다.
“예, 폐하!”
대답하는 룰포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에게서 풍겨오던 취기는 말끔히 사라졌고, 또렷한 정신과 충정이 배어났다.
“네가 보기에, 저 아이는 쓸 만한 아이더냐?”
텔마흐는 곧바로 자신의 말을 고쳤다.
“아, 아니지…. 네가 보기에, 저 아이는 세이렌이 아끼는 아이 같더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 말에 텔마흐는 피식 웃었다.
“재밌군. 제물을 바쳐서 징벌을 유예하겠다?”
마치 속마음을 읊는 것 같았다. 대륙의 유일무이한 존재, 황제만이 가능한 어법이리라.
“세이렌. 너는 여전하구나. 오래전의 선택을 다시 반복하는 걸 보니까. 여전히도 암살검가를 끔찍이 아끼는구나.”
‘……?’
이상한 말이었다. 루빈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전의 선택을 다시 반복한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세이렌을 관통했다.
감겨있던 그녀의 암연이 부릅뜨는 게 느껴졌으니까. 마치 황제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언제든 쌍둥이의 얼굴이 궁금하다면, 황궁으로 오거라.”
“…….”
“그리고, 네 다섯 번째 아이를 마음껏 봐둬. 내 과업을 수행하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말이지.”
쌍둥이? 황궁?
다섯 번째 아이?
그 무엇보다 루빈을 궁금하게 하는 건, 세이렌에게서 풍기는 슬픔이었다. 분노에 일그러지는 듯했던 어머니의 암연은 빠르게 사그라졌고, 이젠 슬픔이 배어나고 있었다.
“룰포.”
“예, 폐하.”
“세이렌의 청을 기꺼이 윤허하겠다. 단, 저 아이가 죽는다면 내가 내놓은 개혁안을 모두 실행할 것이다. 선택권 없이, 둘 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과업들을 모두 완수한다면… 짐을 위한 쓸 만한 검이 제련되었다 생각하면 되겠지. 세이렌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더니, 텔마흐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황좌 팔걸이에 올려놓은 손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뭔가를 골똘히 떠올리는 듯했다.
“생각났다, 룰포.”
“……?”
“첫 번째 과업을 무엇으로 내줄지 말이다.”
“하명하여 주신다면, 속히 진행토록 조치하겠나이다.”
“그때 그대가 나한테 말했던 거 있잖느냐. 북부초원에서 발견됐다던.”
“…없어졌어야 했을 오러, 혹 이를 조사하는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래. 없어졌어야 했는데 어째서 없어지지 않은 것인지. 짐의 신경을 지독히도 거슬리게 했지. 그게 좋겠다.”
“알겠사옵나이다.”
북부초원의 오러? 조사?
정확히 무슨 임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일단 다행이었다. 북부초원이라면, 루빈 역시 언젠가 들러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오히려 잘 된 거야. 셀록이 알려준 대장장이를 만날 수 있겠어.’
“처음은 그 정도로 해주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황제는 이제는 세이렌에 대한 반가움도, 루빈에 대한 흥미도 떨어졌는지 그대로 화상 대화를 끝내버렸다.
피이이잉.
“…….”
황제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세 사람은 한동안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대기했다.
황제가 다시 그들을 찾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룰포가 침묵을 끊어냈다.
“…로이넨 가주, 이제 그대의 장소로 돌아가시오. 가주의 뜻은 받아들여졌고, 루빈 공자는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거요.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루빈 공자가 훌륭히 과업을 수행하는 한, 암살검가에 대한 징벌은 유예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루빈.”
“예, 가주님.”
세이렌이 몸을 돌려 막사를 나선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곧바로 그랑버드 몸체의 끝으로 걸어갔다. 휘이이이이. 상공의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를 흩날린다.
“…어머니.”
루빈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게 의도대로 되었다. 암살검가에 당장의 위험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루빈은 더 강해질 수 있는 시간과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세이렌은 이전과 좀 달라진 모습이다.
텔마흐의 말이 그녀를 헤집어놓은 것이다.
황궁에 있는 쌍둥이…. 그 발언이 어머니를 가장 크게 흔들리게 했으리라 루빈은 짐작했다.
“…내게 질문하지 말거라, 루빈. 그것에 관해 알아내려 하지도 말고.”
루빈의 궁금증을 짐작한 세이렌의 단언이었다.
“킬리언에게도 물어선 안 된다. 너는 그저 황제 폐하의 과업에만 몰두하면 돼.”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다스렸다.
하늘 저편에서 두 로이네크로우가 나타날 때쯤, 그녀에게서 배어나던 슬픔은 바람에라도 날아간 것처럼 온데간데없었다.
어느새 세이렌은, 루빈이 알고 있는 사상 최강의 가주로 돌아와 있었다.
“북부초원, 오러. 너는 아리송하겠지만, 마침 잘 됐구나. 우리 쪽에도 그와 관련한 첩보가 있었으니. 저택으로 돌아가면 설명해주겠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이윽고, 세이렌이 그랑버드 밖으로 도약했다. 루빈도 뒤따라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휘이이이이.
로호와 티나가 각각의 주인을 등에 태웠다. 빠르게 그랑버드로부터 멀어지는 그들.
‘텔마흐, 새로운 판이 시작됐다. 오늘의 이 짧은 만남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해주지.’
힘찬 날갯짓과 함께 그들이 구름에 파묻히자, 그제야 그랑버드는 안심하는 듯했다.
그으우우우.
그랑버드의 우렁찬 울음이 천둥처럼 울렸다. 긴장감에 오소소 솟았던 거대한 깃털들이 다시 잦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