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92)
암살검가 로이넨-192화(192/258)
제192화. 조력자들 (2)
다음 날.
세이렌은 뼈의 정원에 들렀다. 루빈과 쿠제가 가신들을 대상으로 ‘그림자 역장’ 수업을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뼈의 정원 출입구 앞으로 가신들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킬리언, 데이몬, 랭 척살조. 그리고 쿠제까지. 수업의 당사자들이었다. 암연으로 좀 더 자세히 살피자, 대략적인 상황이 가늠되었다.
“흠…….”
훈련장에는 단 두 사람뿐이었다. 보아하니,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매듭지어야 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세이렌.”
킬리언은 오아쿰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크하, 소리를 내곤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형제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깐만 나가 있어 달라더군. 도리언은 이 자리에 불려 나오는 것 자체가 굴욕적이었을 거야. 근데, 루빈 말로는 네가 허락했다던데?”
“맞아, 내가 허락한 일이야.”
“하여간 루빈…. 형제를 찍어누르는 방식까지 남다르다니깐.”
지금, 두 사람의 격차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다. 루빈의 행동은 도리언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장 강한 자가 가주를 계승하는 것. 그게 암살검가 로이넨의 방식이었지만, 킬리언은 찝찝했다. 지나친 억압은 악심만 불러일으킬 뿐인데.
‘두고 봐야지.’
세이렌은 어제 루빈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도리언을 능욕하려는 게 아니라고 했었지. 고유한 암술을 전파함으로써 도리언에게도 무기 하나를 갖게 할 거라고.
세이렌의 눈에는 그 모습이 강자의 오만으로 보이진 않았다. 연대와 신뢰를 위한 길을 닦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나중에 다시 와보도록 하지.”
훈련이 끝날 때쯤에는 두 형제가 어떤 모습일지. 세이렌은 기대감 속에 발걸음을 돌렸다.
뼈의 정원 속 훈련장.
“…….”
루빈과 도리언 사이에는 아슬아슬한 침묵이 놓여 있었다.
굴욕감. 패배감. 그럼에도 꿈틀대는 증오심. 그게 루빈을 노려보는 도리언의 심정이었다.
도리언은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으드득, 이를 갈 듯이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며 말했다.
“가신들을 물리는 모습, 잘 봤다. 제도의 유서 깊은 귀족가 공자님이라도 보는 것 같더구나.”
방금 전,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루빈의 한마디에 직속가신 데이몬이 다른 가신들을 데리고 훈련장 밖으로 나갔다.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데이몬이 데리고 나간 가신들의 정체. 그야말로 도리언의 머리통을 크게 후려치는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
‘늙은 암살자가 가주님의 로이넨서였고, 나머지 셋은 랭 척살조였다고?’
말로만 들었던 본가의 저력들.
정작 도리언은 오늘에야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됐는데, 루빈은 이전부터 그들과 알고 지낸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이 훈련장에 나타난 이유가 루빈으로부터 암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니.
“하지만 네가 아직 차기 가주로 지명된 건 아니지 않더냐?”
아득바득 말을 이어나가는 도리언의 말에, 루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저도 형님께 오만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루빈이 젖먹이일 때, ‘100일의 요람’에서 그 갓난쟁이를 훔쳐봤던 그때 죽였어야 했어. 그런 생각과 함께 도리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적으로 배어 나오는 도리언의 살기. 다만, 억눌린 살기였다. 도리언의 이성이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루빈을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다. 죽이려 든다면, 정작 자신이 죽고 만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 무력감…. 그건 공감해줄 수 있지.’
무력감이라면, 루빈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이 전혀 다를지라도, 루빈에겐 사라지지 않을 상흔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도리언, 너한테는 이 빌어먹을 기억이 없지. 하지만 내겐 암살검가가 무너지는 모든 순간이 머릿속에 박혀 있단 말이다.’
“……!”
도리언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억눌린 살기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진득한 살기.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들 사이에 안개가 메워졌다. 그러나 루빈은 안개 사이로 눈동자를 빛내며 도리언을 향해 한 걸음 따라붙었다. 마치 육박해오는 괴수처럼.
“형님.”
“……?”
결국 이놈이… 가신들을 물리고는 자신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런데 다음 순간.
살기 어렸던 암연이 스스슷 흩어졌다. 목에 가져다 댄 칼날이 쓱 거둬지는 느낌이었다.
“저는 형님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려는 게 아닙니다. 치욕을 입히려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진심으로 형님께 제 로이넨서가 창안한 암술을 알려드리려는 겁니다.”
“…진심으로? 어디서 그런 낭만적인 언사를 배웠다더냐. 네가 그리 말하면 내가 감사하다고 해줄 줄 알았냐?”
“…….”
“매피스는 생전에 너에 관한 이야기를 삼갔지. 그놈이 왜 그랬던 건지, 이제는 알 것 같네. 너와 매피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겠지.”
“…예, 매피스 형님과는 4년 전에 일전을 치룬 적이 있지요.”
도리언은 침을 꿀꺽 삼켰다. 4년 전이라니. 당시 루빈의 나이를 가늠해본 그의 입 밖으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이놈은 아주 오래전부터 제 경지를 숨겨왔던 거군. 태생이 기이했던 거다. 1차 선택과 2차 선택에서 우승하는 것도 예정됐던 거고.’
“4년 전이라… 지금 내가 느낀 굴욕감은 죽은 매피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냐? 그러니까 잔말 말고 네가 가르쳐주는 암술이나 잘 배워두기나 하라고?”
“아닙니다.”
“가식적인 새끼.”
루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을 향한 도리언의 적대감이 조금도 옅어지지 않고 있었다.
역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나으려나?
그러나 루빈은 곧 생각을 지웠다.
누군가를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탄압보다 협상이 낫고, 협상보단 신뢰가 낫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루빈은 곧바로 자신이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마침 매피스 형님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잘됐네요. 방금 말했듯 4년 전에 형님과 무위를 겨룬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뭘 말이냐?”
“이번 사태의 발단이었던 매피스 형님의 죽음. 그 과오와 뒤따랐던 징벌. 거기엔 음침한 내막이 있다는 걸요.”
설명이 더 필요해 보이는 표정에, 루빈은 빠르게 다음 말을 이었다.
“칙명부 수장이 여기로 왔을 때, 제가 마중을 나갔었죠. 그리고 수장이 시키는 대로 매피스 형님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매피스 형님의 죽음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를 거라 확신합니다.”
도리언은 눈에 힘을 주며 매피스 죽음에 관해 떠올려 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에 따르면, 매피스는 암살을 정해진 시각에 완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엔 제거 대상마저 착각하면서 죽음을 자초했다.
“형님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해서?”
“물론 강했다면 좀 더 버텨냈겠죠. 하지만 그래도 형님은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함정이었다는 말이냐?”
“제가 확인한 형님의 시신에는 두 종류의 전투 흔적이 있었습니다. 저희한테 내려온 보고에 따르면, 크라투 왕실의 기사단장이 남긴 흔적이 그 하나겠지요.”
그게 매피스 죽음의 표면적인 이유.
크라투 왕국 수도에 들른 상인 하나를 암살하는 게 본래 임무였는데, 그걸 실패하더니 같은 공간에 있던 왕실기사단장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칙명부의 비전검술입니다.”
칙명부 자체적으로 검술이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도리언이었다.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물론 이렇게 생각하시겠죠. 사고 수습을 위해 칙명부가 개입한 거라고.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
“시점상으로, 칙명부의 오러가 적어도 하루 이상 앞섰습니다.”
도리언의 눈빛이 짙어졌다. 루빈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칙명부의 누군가가 매피스를 공격했고, 매피스는 하루 정도 도피하다가 끝내 크라투 왕실기사단장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
“…허무맹랑한 추측이다.”
“그리 받아들이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칙명부의 비전검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울 테죠. 하지만 애초부터 이 징벌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제 생각은 틀림없습니다.”
그 순간, 루빈은 ‘그림자 역장’을 펼쳤다. 앞으로 도리언에게 가르쳐줄 암술이었다.
도리언은 두 사람을 에워싼 반구형의 암연을 체감했다.
‘무중력 공간.’
암연을 지닌 자들에겐 자유롭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의 움직임을 억제할 공간.
“네 말대로, 칙명부가 암살검가를, 그것도 본가의 아들을 죽였다면…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있겠느냐?”
“그래서 형님이 더 강해지길 원하는 겁니다.”
“…….”
“저나 형님이 죽어버려서, 로이넨 혈통이 끊겨서는 안 되니까.”
그 말과 함께, 그림자 역장이 사라졌다. 공기의 차이가 섬세하게 다가왔다. 솔직히 도리언으로서는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암술이었다.
“저는 형님이 이 자리에 와주시길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로이넨가만을 위해서요. 결정은 형님이 알아서 하시죠.”
“…….”
“그럼 이만, 가신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몸을 돌린 루빈은, 곧장 훈련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시 돌아왔을 때, 도리언은 남아 있을까? 알 수 없다.
도리언 로이넨.
그릇된 욕심과 사사로운 감정에 잠식된 범재.
하지만 재능이란 다른 게 아니다. 마음 속의 불순물을 걷어내면, 그리고 향상심을 품는다면 얼마든지 범재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 있다.
회귀 전, 루빈이 몸소 경험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부턴 도리언의 의지와 선택에 달렸다.
“이제 시작할 거야. 다들 안으로 들어와.”
기다리던 가신들이 루빈을 따랐다. 앞장서 걸으면서, 루빈은 안개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궁금했다. 저를 따르는 가신들처럼, 과연 도리언도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회귀 전과 똑같은 운명을 걷게 될지.
그리고-
“…….”
도리언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결연한 얼굴. 방금 도리언은 저의 운명을 스스로 뒤틀었다.
“…나도 훈련에 임하겠다. 진심으로, 루빈.”
“쉽지 않을 겁니다.”
“각오하고 있어. 잘 부탁한다.”
그러곤 같은 의미로 가신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가신들 역시 도리언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도리언은 머쓱한지 머리를 매만졌다.
“쿠제.”
“예, 도련님.”
“이제부턴 네가 해.”
이 암술의 창안자는 쿠제였다. 모든 건 크로키슨가에서 몽상가로 힐난받던 그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것이니. 자격은 충분했다.
“알겠습니다.”
쿠제가 앞으로 나아가, 다른 가신들을 돌아봤다. 쿠제로서는 기라성 같은 가신들의 얼굴에 숨이 턱 막힐 정도다. 그러나 바로 맞은편에 서 있는 루빈의 얼굴을 보며 자신감을 회복했다.
루빈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도리언과 눈을 마주쳤다. 도리언은 또다시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어째서 수련 시작 전에 나와 이야기를 했는지 알겠군. 나를 설득하려는 것도 있지만, 쿠제의 가르침을 수월하게 하려는 거였어.’
도리언은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게 저만한 성과가 있었다면? 루빈은 내게도 주목받을 기회를 내주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기는 도리언. 하지만 이어지는 쿠제의 목소리에 잡념은 흩어져버렸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암연을 방출하되, 기준 축인 몸으로 돌아오게 하지 마십시오. 순수한 분출에만 집중할 것. 그게 이 ‘그림자 역장’의 핵심입니다…….”
쿠제는 설명을 이어나갔고, 가신들은 하나씩 그림자 역장을 시연해보기 시작했다.
훈련장을 메운 안개가 점차 짙어졌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모습조차 가려질 정도였다. 쿠제는 안개 속을 헤집고 다니며, 한 명씩 세세하게 가르쳤다.
“쿠제.”
“예, 도리언 도련님.”
“이리 와서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지 봐주겠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가겠습니다.”
도리언은 열의를 보였다. 루빈을 빼면 이 자리에서 유일한 신출내기라 할 수 있는 그였기에, 쿠제를 부르는 일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인가.’
수련 대열에서 빠져나온 루빈이 다른 가신들이 잘 해나가는지 확인하려는데, 훈련장 외부에서 거대한 암연이 감지되었다.
저벅저벅.
예상처럼 세이렌이었다. 루빈은 다가오는 그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팔짱을 낀 채 흡족한 눈으로 훈련을 살피는 세이렌. 그녀가 루빈에게 물었다.
“잘 되어가고 있구나. 언제쯤 마무리되겠느냐?”
“킬리언과 데이몬은 내일 중 기초적인 운용까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숙달까진 아직 멀었습니다.”
“강한 자들이니 빠르게 익힐 것이다. 그 외 나머지는?”
“좀 더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 랭 척살조와 도리언까지는 걱정하지 말거라. 데이몬이 가르치면 되니까.”
“네, 가주님.”
“이틀 후에 북부초원으로 출발하거라.”
루빈은 멈칫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생각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벌써 칙명부의 정식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첫 동료로 누굴 선택할지 결정했느냐?”
세이렌의 붉은 눈동자가 루빈을 향했다. 찰나였지만, 그 속에 담긴 호기심을 루빈은 보았다. 가주는 루빈의 선택을 궁금해하고 있다.
“예. 물론입니다.”
“누구지?”
첫 번째 과업을 함께할 동료. 그거라면 과업이 내려졌던 순간부터 이미 결정을 내린 터였다.
“제 첫 번째 동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