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194)
암살검가 로이넨-194화(194/258)
제194화. 조력자들 (4)
까아아아악.
하늘로 솟구친 로이네크로우가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크게 울어댔다. 다른 미약한 새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행의 궤도를 틀었다.
“아차차, 기지개를 키려던 건데…….”
티나는 민트색 눈을 끔뻑이며, 다시 지상으로 하강했다. 무성한 나무들이 터널을 형성한 지점으로 쇄도했다.
숲을 빠져나올 때, 그녀는 더 이상 로이네크로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뽀르르 날아가는 조그마한 참새가 되어, 앞서가고 있는 루빈과 쿠제를 따라갔다.
툭.
잠시 후, 쿠제의 정수리에 부드럽게 내려앉는 티나.
“…….”
부글부글 끓는 속을 열심히 삭이는 쿠제의 모습에 루빈이 가볍게 웃었다.
루빈과 쿠제는 아디엔에서 구입한 준마를 한 필씩 몰고 있었다.
마차를 이용하면 훨씬 편안한 여정이 되겠지만, 루빈의 목적지 중에는 마차로는 닿을 수 없는 곳도 있었다.
“쿠제! 쿠제!”
“…왜요, 티나 님.”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일단 아베른으로 갈 겁니다. 도련님과 함께 임무를 수행할 자제분을 만나야 하니까요.”
“방금 상업도시를 떠났는데, 또 상업도시구나.”
티나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황제의 과업을 수행해야 했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었으니까. 지긋지긋하던 로이넨 저택을 벗어났다는 점도 그녀를 들뜨게 했고.
“아베른이라… 아베른이라…….”
티나는 조그마한 부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뭔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아베른에서 로이넨서와 위장생활을 하고 있는 자제가 누구인지 생각해내려는 것이다.
“…아 맞다, 난 2년 전에 그 자리에 없었지. 쿠제, 넌 알고 있지? 누가 아베른에서 살고 있는지.”
“글쎄요.”
“알잖아! 일단 쿤인가 뭔가 하는 그 애는 아니라는 건 알겠어. 걘 저어기, 크룰티에서 해적을 잡고 있다며.”
“네, 이번 여정엔 쿤 도련님이 참여하지 않습니다. 다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누구냐고오. 스무고개 하자는 거야?”
“궁금하시죠? 그러면 이참에 ‘그림자 역장’을 배워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택을 나서기 전까지 쿠제는 본가의 가신들에게 그림자 역장을 가르쳤던 터였다.
불과 며칠뿐이었지만 킬리언과 데이몬은 6성답게 빠르게 체득해 이제는 남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다. 랭 척살조와 도리언은 아직 미흡했지만, 그래도 개념은 이해한 상태.
“또 지겨운 소리 하시네. 그럼 너도 변신 배워보든가!”
티나가 한 마리 붉은색 여우로 변신하면서 길바닥으로 뛰쳐나왔다. 잔뜩 성이 났는지 꼬리를 흔들며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다.
“티나 님, 그쪽 방향 아닙니다.”
“…뭐?”
티나가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말을 멈춰 세운 두 사람. 쿠제는 오른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하지만 거긴 길도 나 있지 않은 숲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 하늘을 날았던 티나는 그 방향으로 쭉 나아가면 늪지대가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긴 늪지대밖엔 없는데? 지름길이야?”
“그렇습니다.”
쿠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루빈은 말머리를 돌리고 숲속으로 나아간 터였다.
“에휴.”
티나는 한숨을 내쉬고, 쿠제가 타고 있는 말의 등에 뛰어올랐다. 지름길도 지름길 나름이지. 좀 심하네.
물론 루빈이 굳이 이 길을 택한 데에는 그의 애검 핏빛서리를 달래주기 위해서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저택에 있는 내내 아공간 주머니 속에만 있어야 했던 핏빛서리. 분명 흑영들이 지닌 보구들의 울부짖음을 느꼈을 것이다.
하나, 살기를 나눌 만한 상대를 만났음에도 그 기회를 누릴 수 없었으니 답답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아쉬운 대로 괴수들을 상대로 검을 벼리는 수밖에.
하지만.
“…이상하군요.”
“그러게.”
핏빛서리를 달래줄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늪지대에는 ‘늪해마’라는 괴수가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있는 ‘늪해마’가 없었다. 모두 죽어버려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누군가 선수를 쳤네요. 상당한 솜씨입니다.”
루빈은 말을 전진시켰다. 둥둥 떠 있는 해마의 사체에 발굽을 올렸는데도, 해마는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죽고 나면 몸의 부력이 견고해지는 게 늪해마의 특징이었다. 다만, 어설픈 검으로는 이만한 부력을 끌어낼 수 없었다.
이는 ‘늪해마’를 처리한 무인의 경지를 방증하는 셈.
“늪을 더 편하게 가로지르게 됐군.”
루빈은 죽은 괴수를 징검돌 삼아 말을 전진시켰다. 편해졌다고는 하나 거슬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일부러 자신에게서 기회를 빼앗은 것 같았으니까.
‘누구지?’
* * *
꾸웨웨웨엑!
늪에서 뛰쳐나오며 처절하게 울어대는 늪해마.
스읏.
울음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기도 전에, 한 자루 검이 그 목숨을 끊어낸다. 이윽고, 사체가 되어 늪을 떠다니는 괴수.
“흐음.”
베닉 베나르는 발을 내디뎌보면서 죽은 늪해마의 부력이 썩 괜찮다는 걸 확인했다.
늪지대는 넓었다. 듬성듬성 늪이 자리 잡고 있었고, 거기엔 어김없이 늪해마가 있었다.
이놈들은 위험한 괴수는 아니었지만, 한번 뒤엉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여행자들과 상인들도 되도록이면 지름길을 놔두고 우회하는 노선을 택했을 정도.
‘하지만 아디엔에서 아베른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지.’
베닉은 루빈이 아베른으로 가기 위해 이 지름길을 이용하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앞서 나가 루빈을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늪지대를 지나면 도련님을 기다려야겠군.’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베닉은 몸을 뒤로 돌아 징검돌이 되어 있는 늪해마들을 죽 살폈다.
문득, 어쩌면 루빈 도련님이 검을 달래줄 구실을 찾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
순간적으로 놀라며, 베닉은 빠르게 하늘을 쳐다봤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로이네크로우 ‘베르데’가 원을 그리고 있어야 할 하늘.
그런데 지금은 베르데 혼자가 아니었다. 또 다른 로이네크로우가 나타난 것이다. 까아아아, 그르르르.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피식, 베닉은 웃고 말았다.
고개를 내리면 그의 옆으로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깨달은 것이다.
“누가 앞에서 길을 터주고 있나 했더니, 베닉 베나르셨군요.”
역시나 루빈의 목소리였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귀와 눈. 베닉은 그 흉스러운 얼굴을 가리기 위해 복면을 쓰고 있던 터였다.
“저를 앞지르셨군요. 누군가의 자취를 놓쳐보긴 실로 오랜만입니다.”
“운이 좋았죠.”
“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지요.”
베닉은 루빈을 향해 예를 표했다. 루빈 또한 고개를 숙인다. 그런 꼬마 도련님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베닉, 저희보다 3시간쯤 일찍 떠났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방향인 줄은 몰랐네요. 베나르 가문의 근거지는 대륙 남부가 아니던가요?”
“대륙을 유랑할 수 있는 건 흑영의 특권이지요. 그렇다고 제 행선지가 아베른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 길목까지만 동행하려 했습니다.”
역시. 어딜 가려는 건지 이미 알고 있었나. 하긴, 그러니까 앞서가며 지름길을 모두 정돈해놨겠지.
루빈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베닉이 끌끌 웃으며 덧붙였다.
“가주님께 들은 것이니 경계를 푸셔도 됩니다, 도련님.”
“그렇군요.”
“또한-”
하나뿐인 베닉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거기엔 활공하는 두 로이네크로우가 있었다.
“또다시 놀라실까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도련님의 로이네크로우가 실은 환혈족 여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흐음.”
“그러니 굳이 까마귀 모습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뭘까. 어째서 어머니는 베닉에게 이런 중요한 비밀들을 내어주신 걸까.
문득, 로이넨과 베나르가 ‘암연의 맹약’으로 엮여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목숨을 담보로 충성서약을 했다면, 그만한 비밀도 내어줄 만하니까. 네이프 그리어스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푸드덕! 푸드덕!
내려오라는 루빈의 전언에 따라 티나가 그들 곁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티나. 다른 모습으로 변해도 돼.”
까아아악? 그르르르.
“괜찮아. 우리의 비밀을 많이 아는 만큼, 베닉 베나르도 우리에게 비밀을 내어주려는 것 같으니까.”
다소 도전적인 말이었지만, 베닉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흡족하게 웃었다.
추측건대, 현시점 흑영 8인 중에서 최강의 무위를 지닌 남자다. 릴, 아논, 데스릴이 이자의 손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루빈은 계속해서 되뇌었다. 언제나 진실은 은폐되는 법이니까.
“그리해주실 겁니까, 베닉?”
“얼마든지요. 제가 내놓는 비밀들로 도련님의 궁금증이 해소된다면야, 기꺼이.”
루빈은 동행의 청을 받아주었다. 어차피 내일쯤이면 끝날 동행이었으니.
* * *
대화도 대화였지만, 일단은 늪지대의 괴수들부터 처리해두는 게 우선이었다.
그들은 늪지대가 끝날 때까지 대화를 유보하고 검을 휘둘렀다. 사실상 베닉이 나서서 모든 걸 해결해나갔기에, 루빈에겐 검을 휘두를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참에 베닉의 6성 특성이 무엇인지 알아볼까.’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베닉의 전투를 관찰하는 루빈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가 자신에게 내보이는 호의와는 별개로,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6성 특성을 알아두면, 혹시 모를 일의 대비도 가능할 터.
하지만.
‘보는 것만으론 알아낼 수 없겠는데.’
그 모습에서는 6성 특성이랄 게 드러나지 않았다. 킬리언처럼 전투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특성인 걸까?
지금까지 루빈이 판단해본 바, 암연이 6성에 도달하면 부여되는 고유한 특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전투 중 발휘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킬리언은 ‘무결한 암연’, 즉 감지되지 않는 암연을 지녔다. 그것이 암살자들에게는 공포마저 일으킬 만한 특성인 건 사실이지만, 전투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순 없었다.
반면, 훈련장에서 한 번 겨뤄본 바 있는 마렉 헬리드는 달랐다. 그의 특성은 전투의 시시각각 상대의 취약점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럼 베닉은 무얼까? 루빈이 궁금해하는 사이, 베닉이 옷을 털어내며 말했다.
“날이 저물었군요. 마침 늪지대도 끝났으니, 여기서 밤을 보내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시죠.”
모닥불을 피워놓고, 저녁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이보게, 로이넨서. 내가 저녁을 책임지지. 이래 봬도 한때 요리사로 위장생활을 했던 몸이거든.”
“하지만…….”
“심지어 유명하기까지 했어. 지금의 샤케스 페아르, 그 작가 양반만큼은 아니어도 위페르 왕국에선 꽤 유명인사였다고.”
쿠제를 대신하여 저녁을 책임지겠다는 베닉이었다. 호언한 대로, 그는 수준급의 요리를 뽐냈다. 티나까지 눈동자를 빛내며 포식할 정도였으니까.
“어떠십니까, 도련님.”
“늪해마가 식용이 가능하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군요.”
그 말에 베닉이 끌끌 웃었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 루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
“베닉, 이제 슬슬 미뤄둔 얘기를 했으면 합니다. 제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시려고 절 기다리신 겁니까?”
그러면서 루빈은 아공간 주머니를 펼쳤다. 마도구를 숨김없이 사용하는 그 모습에 베닉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윽고 그 안에서 나온 건, 흑영에게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영혼무구. 핏빛서리였다.
루빈의 무기가 핏빛서리라는 사실. 세이렌은 이미 데이몬과 킬리언을 통해 알고 있을 테고, 어쩌면 베닉에게도 전달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보인 루빈의 행동이었다.
만약 이자가 어머니의 신뢰를 받고 있는 인물이라면…….
‘역시 놀라지 않는군.’
예상대로였다. 베닉은 놀라기는커녕 그저 숨을 크게 들이마실 뿐이었다. 그런 베닉의 의도를 루빈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저의 6성 특성이 궁금하시겠죠. 그래서 검을 맞대고 싶으신 겁니까?”
저녁 식사가 끝나자마자 찾아온 차가운 분위기. 실제로, 핏빛서리에 의해 타오르던 모닥불은 스스슷 꺼지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주인의 위험을 감지한 로이네크로우 베르데가 그르르르 울었다.
“하나-”
베닉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다시 모닥불을 붙였다. 불이 화르륵 피어올랐고, 루빈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핏빛서리를 통제했다. 모닥불 근처, 주홍빛으로 물드는 사람들.
“저는 도련님과 검을 맞대지 않을 겁니다.”
“…….”
“다만, 제 잔재주에 대해 알려드릴 순 있지요.”
루빈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저는 상대와 무기를 맞댔을 때-”
“…….”
“그자와 관련한 미래를 봅니다.”
“예에?”
깜짝 놀란 쿠제의 헛바람섞인 반문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베닉은 실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온 것 같았다.
“그렇기에, 도련님과 검을 맞댈 수 없습니다. 도련님의 미래만큼은 알고 싶지 않으니까요. 차라리 검을 휘두르고 싶으시다면, 제 목숨을 거둬가도록 해드리죠.”
“…그게 무슨.”
베닉의 말에는 처절함이 묻어났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걸까.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루빈의 미래를 보기 싫다고?
물론, 아직까진 베닉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루빈이었다.
“……!”
그러나 이어지는 베닉의 이야기가 끝났을 땐 달랐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루빈은 베닉이 미래시(未來視)의 암살자라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