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05)
암살검가 로이넨-205화(205/258)
제205화. 내면에 닿는 눈 (1)
라유비아라는 저 여자아이.
투흔족의 관습대로라면 부족명을 앞에 붙이면서 자신을 소개했어야 했다. ‘쇄골부족의 딸, 라유비아’라는 식으로.
가족 개념이 제국민보다 넓을 뿐만 아니라, 공동양육을 하는 투흔족의 문화 때문이다.
‘누블라의 딸이라.’
투흔인이 부족명이 아닌 인명을 앞에 두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자신을 낳아준 어미가 살아있지 않을 때.
루빈은 이마를 긁적였다. 펠키온이 브리온 오러를 전승했을 것으로 가장 유력했던 누블라였다. 그런 투흔인이 죽었으니 브리온 오러의 행방이 다시 묘연해지는 셈이었다.
누블라의 죽음이 거짓으로 꾸며졌을 경우?
그럴 확률은 없었다. 투흔족은 죽음을 위장하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이마카룸이 초원에 돌아와 있길 빌어야겠네.’
이마카룸을 통해 추적을 이어가는 것. 차선책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루빈은 지시를 내렸다.
“블라네, 무기를 내려.”
“예, 알겠습니다.”
투흔족 소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기 위해 말을 천천히 전진시키는 루빈.
호기롭던 등장과는 달리, 라유비아는 타고 있는 늑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다.
-투흔족이 늑대를 타고 다닌다는 말은 못 들어봤는데.
하네케 말대로, 투흔족과 늑대는 쉽게 섞일 수 없는 운명이다. 투흔마 목축에 피해를 끼치는 짐승 중 하나가 바로 늑대였으니까.
혐오를 하면 모를까, 저렇게 말처럼 타고 다니는 건 의외였다.
‘특이한 아이네.’
루빈이 점차 다가가자, 늑대가 몸을 낮추며 크르르르 소리를 낸다. 기꺼이 달려들 기세였다.
그런 늑대의 등 위에서 마찬가지로 바짝 몸을 낮춘 라유비아. 손에는 하잘것없는 뭉툭한 검이 들려 있었다.
‘전신에 화상이라도 입었나?’
늑대를 타고 있다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아이의 몸을 감싼 붕대였다.
투흔족답게 거친 옷감에 시원한 옷차림이긴 했지만, 피부를 감추려는지 아이의 상체 전부가 붕대로 감겨 있었다.
그르르르.
늑대가 앞발의 발톱을 세우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제법 매서웠다. 라유비아 만큼이나 늑대도 독특하긴 마찬가지.
그때, 네르하임이 라유비아 쪽으로 접근했다.
‘늑대를 욕심내는 건가?’
어지간한 괴수 따위는 단숨에 권속으로 만드는 네르하임이었다. 그런데 저 늑대는 아직 변화가 없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르하임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듯했다.
루빈이 나섰다.
“아이에게 늑대를 빼앗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
네르하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언짢음을 숨기지 않았다.
“감찰관님, 저 아이가 제게 뭐라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오크의 구린내를 향수처럼 뿌리는 수혈인이라 했죠.”
“아주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저 또한 제국의 한 관인으로서 이건 매듭짓고 가야겠습니다. 아무리 대족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해도 말이죠.”
물러설 생각이 없는 네르하임. 사실 그녀에게 투흔족 소녀의 모욕은 핑계에 불과했다. 정신 지배가 통하지 않는 늑대에 대한 야욕이겠지.
“저 아이의 목숨을 거둬도 모자랄 텐데, 고작 늑대 하나로 퉁 칠 수 있다면 대족장도 감사함을 느끼겠죠.”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아이가 벌인 일이라는 걸 감안한다 해도, 투흔마 보급 책임자를 모욕한 것은 중죄다. 외교적 문제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투흔족에 책임을 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네르하임이 상황을 어지럽히는 걸 용납할 수 없는 루빈이었다.
“경고는 이번뿐입니다, 히베르다드 성주님.”
“…예?”
루빈은 네르하임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섰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에, 점점 난감해지는 네르하임의 얼굴이 담겼다.
“늑대를 취하는 걸 금하지는 않겠습니다.”
“…….”
“다만, 그건 제가 황명을 완수하여 이곳을 떠난 뒤에 하시죠.”
네르하임은 입술을 떨어트리기가 조심스러웠다. 내뱉는 한마디가 감찰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었다.
루빈의 다음 말이 결정적이었다.
“그레하임의 후손으로서 누리는 특권을 과신하지 마십시오. 제가 정한 선을 당신이 넘어온다면, 그것으로 그레하임의 후대도 끝이 나는 겁니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그녀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내 혈통을 알고 있었어?’
그레하임의 후손으로서 수많은 특권을 누려왔던 그녀였지만, 단 한 번도 혈통을 입 밖으로 내비친 적은 없었다.
물론, 그녀의 남다른 면모에 많은 이들이 추측해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걸 단언하지는 않았다. 입을 잘못 놀리다간 황실의 처분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현재 그레하임의 후손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소수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고, 이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막강한 힘을 지녔다는 걸 의미했다.
네르하임이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걸로 네르하임은 해결했고.’
초원에 들어서기 전, 로이넨 저택에서는 루빈의 요청에 대해 이미 확인해준 터였다.
수혈인 성주 네르하임이 그레하임의 후손이며, 황궁에서도 그녀의 존재 가치를 크게 두지는 않는다는 의견까지 덧붙여서.
“…제가 잠시 마음이 앞섰군요. 죄송합니다, 감찰관님.”
이제부터는 루빈 혼자서만 말을 전진시킨다. 경고를 받아들인 네르하임은 더 접근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크르르르.
이윽고, 루빈은 언덕 위로 올라와 라유비아와 마주했다. 경지의 격차를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님을 깨달은 걸까.
라유비아와 늑대는 루빈을 노려볼 뿐이었다.
“라유비아라고 했지, 반갑구나.”
“저 수혈인 여자는 왜 안 올라오지?”
“내가 지시했다.”
“…진짜? 그러면 네가 저 사람보다 센 사람인 거야?”
루빈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난 루한 멜라스라고 한다. 너희 대족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지.”
“뭐? 대족장님이 만난다는 사람이 너였어?”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유비아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충 짐작이 간다. 이 아이는 네르하임만 오는 줄 안 모양이었다.
혈족과도 같은 투흔마를 계속 빼앗긴다고 생각했으니, 그 책임자인 네르하임을 적대시하는 건 당연했다. 어리고 순수한 마음에 독단적으로 네르하임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끝까지 달려들지 않은 건 잘했다. 달려들었으면 너는 크게 다치고, 그 늑대는 죽었을 테니까.”
“…….”
“이제 우리 일행을 대족장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주면 좋겠는데.”
“…….”
라유비아는 괜히 늑대의 털을 쓰다듬으며 뜸을 들였다.
쿤달리트가 쇄골부족 사람들을 모아놓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민족 사람이 들어올 텐데, 절대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했었지.
그래서 화가 난 나머지, 아무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여기로 온 거였다. 지금쯤 부족 사람들은 그녀를 찾고 있을 터.
이대로 돌아가서는 크게 혼이 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수혈인 여자한테 소리친 것까지 알려진다면…….
“…아까 내가 저 여자한테 했던 말, 그거 우리 쪽에서는 아주 나쁜 욕은 아니야.”
“그럼?”
“어… 살짝 나쁜 욕.”
루빈이 피식 웃었다.
“걱정 마. 대족장한테는 내가 잘 말해두지.”
“흠…. 나쁜 제국인처럼 보이진 않네.”
루빈을 바라보던 라유비아의 눈빛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제국 사람이었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눈동자와 머리칼이 밤하늘처럼 새까맣다는 것과, 우스꽝스러운 제국인 복장까지. 전부 이상했지만, 라유비아 눈에도 루빈이 잘생기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마카룸보다 잘생긴 남자가 있었구나. 싸움도 이마카룸처럼 잘하려나?’
투흔인들에겐 ‘투흔의 바람’이라는 영웅이 존재했기에, 미형(美形)의 기준도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거한에 우락부락한 이마카룸과 비교해보자면, 루빈의 외형은 어쩐지 고요한 연못처럼 빨아들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라유비아.
‘안 돼, 안 돼! 제국인들 앞에서 이마카룸을 떠올려선 안 돼.’
감옥에 있어야 할 이마카룸이 초원에 있다는 것을, 특히 제국 사람에겐 들켜선 안 된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루한, 날 따라와. 네 부족 사람들을 데리고.”
“부족 사람이라. 그러도록 하지.”
라유비아와 늑대가 앞장섰고, 루빈은 다른 일행이 따르도록 지시했다.
그들 모두, 해가 뜬 동안에는 대화 없이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투흔인들만의 특별한 짐승인 건지, 늑대는 속도와 체력 모두 투흔마를 상회했다.
가끔 속도감에 취한 늑대가 앞서 나갈 때마다, 뒤따르는 네르하임의 눈이 반짝거리는 건 당연했다. 어서 빨리 감찰관이 떠나는 날만을 고대하는 것 같았다.
-블라네.
-예, 도련님.
날이 어두워지고, 투흔마도 회복이 필요했기에 일행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를 늦췄다.
선두의 라유비아 옆자리를 지키던 루빈은 슬쩍 뒤로 빠졌다. 그러면서 블라네를 라유비아에 접근시켰다.
-밤 동안 이 투흔족 아이랑 얘기 좀 나눠 봐.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친구? 블라네는 잠시 멈칫하더니 되물었다.
-어떤 정보를 끄집어낼까요?
다짜고짜 친구가 되라는 말에, 필요한 정보를 캐내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우리에 대한 경계심만 없애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잠시 후.
라유비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가, 루빈 대신 웬 새침한 여자아이의 모습에 인상을 팍 구겼다.
“넌 뭐야? 네 부족장은 어디 갔어?”
“부족장이 아니라 루한 감찰관님이겠지.”
“그게 그거지. 우린 대족장님 빼고는 아무한테도 존대 안 해. 그리고 그 루한이라는 사람…….”
라유비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빈은 뒤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아예 행렬에서 떨어져 나간 뒤였다.
“나랑 떨어져 있으면 해일에서 비껴가지 못 할 텐데. 빨리 찾아서 내 옆으로 오라고 해.”
블라네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루한 님은 일부러 ‘투흔의 해일’을 맞으려고 멀찌감치 떨어지신 거야. 수련의 일종이지.”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블라네와 쿠제에겐 힘겹기 그지없는 ‘투흔의 해일’. 그러나 루빈에겐 놓치기 아쉬운 수련 기회였다.
“루한은 멍청한 남자였구나.”
“…….”
블라네는 애써 미소 지었다. 나이는 똑같은 열세 살이었지만, 블라네와 라유비아는 결이 다른 인생을 살아왔다.
암살검가의 엄격한 가풍을 견뎌왔고 위장생활도 2년이나 보낸 블라네. 반면, 라유비아는 오늘 처음 제국인을 만난 초원의 소녀일 뿐이다.
그래서 루빈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전략적 수정이 필요하다는 걸 블라네는 깨달았다.
우선, 이 유목민족 꼬마애가 다가오기 편하도록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근데 너, 왜 몸에 붕대를 감고 있어? 어디 다친 거야?”
“…비밀이야.”
“그래? 난 여기 화상 자국 있는데. 봐봐.”
블라네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상처를 보여줬다. 목에서부터 팔에까지 이어지는 긴 상처.
이를 쳐다보는 라유비아는 자신이 상처를 입은 것처럼, 아픈 표정을 지었다.
“아프겠다! 어쩌다 생긴 거야?”
“어렸을 때. 불장난 하다가.”
“얼마나 어렸을 때?”
“음, 여섯 살 때.”
블라네는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마구 지어냈고, 그걸 알 리 없는 라유비아는 점점 블라네가 편해졌다.
“너도 흉터 때문에 붕대 감은 거지? 언제 생긴 건데?”
“…난 기억이 안 나. 아주 어렸을 때야. 근데 흉터는 아냐.”
붕대에 관한 이야기가 싫은지, 라유비아는 말을 돌렸다. 그 눈길이 블라네의 신발 쪽으로 향했다.
“근데 그거, 안 불편해?”
“아, 너는 맨발이구나.”
“투흔 사람은 발을 감추지 않아.”
“멋지네. 발도 예쁘고.”
“흠. 너, 눈이 나쁜 편은 아니구나.”
“…….”
“발가락을 감춘 자들은 심장이 까맣다고 했어.”
블라네는 라유비아가 자신을 경계하는가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데 널 보니까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갑작스러우면서도 순수한 칭찬에 블라네가 과장스럽게 웃었다. 이 아이를 꾀어내는 건 너무나 간단했다.
“그나저나, 잘생긴 루한은 진짜 해일에 맞서고 있는 거야?”
“뭐, ‘잘생긴 루한’?”
블라네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루빈이 잘생겼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루한은 죽을지도 몰라. 우리 엄마도 그렇게 죽을 뻔한 제국 사람을 구해준 적 있거든. 그 사람도 미남이라고 했어. 미남은 투흔초원이 일찍 품는다는 말도 있어.”
“…그분은 죽을 리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나저나, 진짜 너랑 같이 있으니까 ‘투흔의 해일’이 없네? 신기하다!”
재잘재잘.
블라네는 라유비아와의 깊은 친밀감을 이끌어 낼 정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밤이 깊어지는 만큼, 블라네와 라유비아의 수다도 계속 이어졌다.
* * *
한편, 루빈은 다른 일행들까지 떨어트리고 나서야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밤새 ‘투흔의 해일’을 견뎌내는 건 기본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내면세계에서 하네케와의 검투까지 펼쳐나가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무너져 내리는 절벽. 하네케의 검격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대장군의 시야에서 사라진 루빈은 어느 틈에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스윽.
지물 속에서 나타난 루빈이 기습적으로 검격을 날린다.
-크윽!
하네케는 다름 아닌 브리온 검식에 공격을 허용했고, 꽤 심각한 검상을 입었다. 그러나 얼굴엔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이젠 정말 호각이로군. 암술의 활용이 다양해지면서 까다롭기 그지없네.
‘7성의 검을 받아내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루빈도 얼굴 가득한 피를 닦아냈다. 하네케에게 검상을 입혔다지만, 이걸 두고 그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네케는 7성 오러의 일부만 발휘했을 뿐이다. 반면 루빈은 4성 오러에, 5성과 4성의 암연을 모두 끌어올렸고, 전투하는 내내 ‘파공’과 암술을 활용했다.
한마디로 전력을 다한 셈. 그랬기에 호각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눈에 띄게 성장했음은 틀림없었다.
‘투흔의 해일이 특히 효과적인 것 같네요.’
-이제 곧 해가 떠오를 테지?
‘예, 그럴 겁니다. 오늘의 마지막 해일이 지나갔으니까요.’
하네케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쓱 돌렸다.
마치 종말을 연상하게 내면세계의 풍경. 두 사람의 검투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이 처참한 풍경의 진짜 원인은 ‘투흔의 해일’이었다.
-루빈.
‘예, 하네케.’
-오늘은 그냥 해일을 피하라 말하려 했었네.
‘피하라고요?’
하네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현실세계의 해가 떠오르고 있음이 루빈의 감각을 통해 그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햇빛을 느끼며, 하네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루빈도 검을 내려놓고 대장군 옆에 앉았다. 루빈만큼이나 ‘투흔의 해일’에 호의적이었던 하네케가, 오늘은 뭔가 달라 보였다.
-‘투흔의 해일’ 덕분에 단 며칠 만에 자네의 경지는 또 한 단계 성장했지. 그건 두말할 수 없는 사실이야.
‘…….’
-하나 급격한 성장만큼, 내면세계가 이전보다 훨씬 불안해졌어.
하네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곳 내면세계만큼은 루빈보다 하네케가 더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루빈이 검날 조각을 처음 쥐었던 갓난아이 때부터, 하네케는 이곳에 잠재되어 있었다.
루빈이 아홉 살 때에야 다시 만나게 되면서 하네케의 깊은 잠도 그때 깬 셈이지만, 사실 이건 의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면세계의 상태는 하네케와 온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마령, 기억하나?
‘잊을 리가요. 기괴한 놈이었죠.’
-그래, 최근에 그 마령의 말이 생각났네.
블루캣 호에서의 일이었다. 마령이 깃든 목걸이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마령이 루빈의 내면세계에 침투했던 사건.
마령이 그때 했던 얘기라면, 루빈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마령인 자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언젠가 내면세계가 붕괴할 수도 있다고 했지.
-그때 놈은 대략 10년 후를 얘기했었지.
그렇다면 루빈의 나이 스물한 살 무렵.
하지만 루빈의 성장이 가속되었음을 감안해야 했다. 성장을 앞당긴 만큼 붕괴의 시간도 앞당겨졌을 테니까.
어쩌면 열일곱 살, 최악엔 그 이전으로 당겨졌을지도 모른다는 게 하네케의 생각이었다.
‘그때도 마령 앞에서 제가 얘기했잖아요. 저는 대장군이 소멸하게 놔두지 않을 거라고요.’
-나는 내 소멸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영혼으로서 비집고 들어와 있는 것이 루빈의 생명을 갉아먹을까, 그걸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네케.’
루빈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어느덧 날이 밝았고, 이제는 다시 앞선 행렬에 붙어야 할 때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임무가 끝나면 곧바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했어요.’
-해결책?
‘마령술사라는 놈들이 있듯이, 그와 비슷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겠죠. 어머니도 하네케의 존재를 알고 계시니, 본가의 능력까지 동원하면 곧바로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저 멀리, 고개를 내미는 일출. 하네케의 얼굴이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루빈이 내면세계에 관여해 실제와 비슷한 태양을 띄운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세계로 돌아가기 전, 루빈이 하네케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은 강해지는 게 우선입니다. 적어도 이번 임무까지는 말이죠. 우선 브리온 오러부터 찾아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