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07)
암살검가 로이넨-207화(207/258)
제207화. 내면에 닿는 눈 (3)
“…이럴 수가.”
대족장 이냐키투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완전한 칠흑의 공간. 그 한가운데 이냐키투는 내던져진 상태였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껏 그가 접했던 내면세계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제국민이어서 그런 걸까? 아니다. 수많은 제국민들의 내면을 경험한 그조차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복잡한 세상에서 사는 제국민들은 대개 투흔인의 내면보다 복잡하면 복잡했지, 이토록 무(無)의 공간일 순 없었다.
‘정말 여기가 내면세계가 맞나?’
하지만 쓸데없는 의심. 이곳이 내면세계가 아니란 가능성은 전무했다.
‘내 다리가 말짱하니까.’
노환으로 인해 수년 전부터 걸을 수 없었던 그였다. 원래대로라면 발을 움직일 수조차 없어야 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초원을 질주하던 젊은 나날이 떠오를 만큼 두 다리엔 힘이 넘쳤다.
“어서 오세요, 이냐키투.”
“……!”
“내면세계에 들어올 수 있다더니 거짓이 아니었군요.”
공간 가득히 울리는 목소리. 루빈이 이냐키투 앞으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놀라신 것 같네요.”
“…당연합니다, 루한. 이런 적은 처음이거든요. 이런 완전한 무의 공간. 그리고 여기서 다른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것도요.”
본래 내면세계는 무인(無人)의 풍경. 즉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말의 의미는, 그 주인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는 지대를 이냐키투 혼자서 활보하고 탐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로 하여, 그자의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것인데.
“말하지 않았던가요, 저는 내면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요.”
“…태어났을 때부터였습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루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면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건 온전히 하네케 덕분이겠지. 이냐키투에게 그걸 설명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루빈은 하네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치를 해둔 터였다.
“원래 이런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던 겁니까?”
이냐키투는 눈앞의 이 청년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무엇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때, 루빈이 대족장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손을 내보였다. 이내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틱, 소리가 울리며 그들이 발을 디디고 있던 공간에 격변이 일어났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
웅성웅성.
‘…여기는?’
이냐키투는 처음 보는 광경에 움찔했다. 지금 이 둘은, 난데없이 시끌벅적한 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색적인 건물이며 골목길, 좌판에 깔린 과일과 생선들. 이제껏 초원을 벗어난 적이 없는 투흔인에게는 이조차 신기한 게 당연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웅성거리는 사람의 소리만 있을 뿐 정작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면세계에서 저는 신(神)과 같습니다만, 생명체까지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틱, 소리와 함께 루빈은 또다시 변화를 일으켰다. 두 사람의 시야로 짙은 초록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이냐키투에게 익숙한 투흔초원이었다. 감격스러워진 그 얼굴을 보며 루빈은 가볍게 웃었다.
“투흔의 해일을 겪어보시죠.”
그러자 초원 저쪽에서 투흔의 해일이 몰려든다. 투흔의 해일이란 이방인에겐 필연적인 자연현상. 거꾸로 말하면, 투흔인들은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바람이 그들을 덮친다. 물론, 실제 이방인이 겪을 만한 고통까지 선사해줄 순 없었다. 그건 루빈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이냐키투는 자신을 관통한 공기의 일렁임이 흥미로웠는지 웃으며 돌아봤다.
“…내면세계를 통제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군요. 이젠 믿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틱.
루빈은 다시 손가락을 튕겨 그들 앞으로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를 만들어냈다.
염력으로 의자를 뒤로 빼는 그때, 아차 싶었다. 투흔족에겐 탁자 문화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괜찮습니다. 제가 초대를 받은 거니까요.”
이냐키투는 개의치 않고 의자에 앉았다.
“현실의 몸은 대족장의 투흔푸 안에 있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초대했다니요.”
“그런 말 마십시오. 이걸 초대라 하지 않는다면 제가 침범한 꼴이지 않습니까. 투흔인은 그 누구의 집도 침범하지 않지요. 그나저나 루한.”
“예?”
“혹시, 눈을 내릴 수도 있습니까? 투흔인은 눈을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말로만 들었을 뿐이지.”
“음, 폭설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냐키투는 잠시 고개를 들어 아이처럼 눈을 맞았다.
광활한 초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탁자와 의자. 눈이 빠르게 쌓이자 초원의 풍경은 사라지고, 이제 설원만이 펼쳐져 있다.
“…….”
신기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이냐키투. 그러더니, 눈을 감고 뭔가를 감지해내려 했다.
“왜 그러시죠, 이냐키투.”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내놓았다.
“루한, 전 타인의 눈동자를 통해 신언의 겹을 들여다볼 수 있지요. 실제로 생애 수많은 이들의 내면세계를 엿보았고, 그보다 더 많은 마령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 보니, 갑자기 오래전에 엿들었던 한 대화가 떠올라서 말입니다. 한번 확인해본 겁니다.”
“어떤 대화이기에?”
하나 이냐키투는 이번에도 질문을 했다.
“이전에 루한 님이 얽혔다는 그 마령 말입니다. 당연히 실물이었겠죠?
마령이란, 마령술사라는 통로를 이용해 현실의 층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대부분의 마령은 현실 층위에 틈입하면서 인간 눈에 보이게 되고, 물리적으로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실물(實物)’의 형태가 된다. 이럴 경우, 마령은 괴수와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냐키투는 이를 묻는 것이었다.
“그럼요, 제가 죽이니까 눈앞에서 스르륵 날아갔습니다.”
“아, 퇴치하셨단 말씀이군요. 잘하셨습니다. 대개 한 번 퇴치당한 녀석들은 겁을 먹어 다시는 얼씬거리지 않거든요. 그런데 가끔은, 아주 재밌는 일이 일어난답니다.”
루빈이 궁금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이냐키투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끔 마령 중에는 특이한 놈들이 있지요. 예를 들어, 원한을 품고 다시 내면세계에 침투해 그 인간을 집어삼킨다든지요. 다만-”
“다만?”
그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예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루빈은 처음 듣는 척 연기했다.
“다만 그런 놈들은 실물이 아닌, 사물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에 나타난답니다.”
“사물을 통한다라.”
“예, 사물이요. 제가 엿들은 대화 중 하날 말씀드리지요. 한 마령 놈이 떠들기를, 어떤 마령이 누군가의 내면세계에 침투했다가 꼼짝없이 퇴치당했다는 소릴 들었다고 떠드는 겁니다. 그런데 더 재밌는 점은…….”
이냐키투의 눈이 반짝 빛났다.
“퇴치당할 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 온통 만신창이가 돼서는 이를 갈고 있다더군요. 다시 현실 층위에 침투하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요.”
“그래서, 그게 바로 저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이냐키투.
“아니요, 절대요.”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도 궁금한데요.”
그러자 그가 대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끝없는 설원 위엔 오직 두 사람, 그뿐이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거기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또 다른 인물이요?”
“내면세계를 지키는 노년의 무인이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그 마령 놈은 그자에 의해 퇴치당했단 뜻이지요. 하지만 보아하니, 여기엔 저희 말곤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하네케가 드러나지 않게끔 조치해두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대족장이 하네케를 마주했다면 어떻게 나올지는 자명했다. 하네케는 투흔족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제국군, 그중에서도 대장군이었던 몸이니.
‘일단 이마카룸이 여기에 왔는지부터 알아볼까.’
루빈은 화제를 돌렸다.
“그냥 대화하긴 섭섭하니, 이거라도 드시지요. 대족장 말씀처럼, 제가 초대한 거니까요.”
이냐키투는 어느새 탁자 위에 차려진 수많은 유리병들을 발견했다. 온갖 종류의 술과 음료들로 즐비했다.
“음료수가 좋겠군요.”
“그럼 카포닐리아를 추천드리지요. 대륙 서부권에 있는 한 도시의 특제 음료입니다.”
곧 루빈의 손에 잔이 나타났고, 이내 카포닐리아가 가득 채워졌다.
“호오, 독특한 향이군요.”
“청량함도 색다를 겁니다.”
이냐키투는 잔을 들고 가만히 음료를 내려다보곤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천천히 목 뒤로 넘겼다.
사아아아.
그 순간, 루빈의 암연이 카포닐리아를 타고 이냐키투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냐키투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은밀한 암연.
대족장을 공격하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이제부터 던질 말에 대한 반응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대족장.”
“말씀하시지요, 루한.”
“이마카룸이 탈옥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들어보셨는지요?”
순간, 이냐키투의 혈류가 격렬히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카룸이요? 투흔의 바람?”
“예, 저도 얼핏 들은 겁니다. 헛소문일 수도 있죠.”
“…그놈이 탈옥했다면 당연히 초원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러면 제가 모를 리 없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다행이군요. 역시 헛소문일 줄 알았습니다. 대륙 서부권의 1급 감옥인데, 거기서 도망쳐 나온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마 나왔다고 해도 수배령이 떨어져 얼마 도망가지 못했을 겁니다.”
낌새를 알아차리기 전에, 루빈은 서둘러 암연을 거둬들였다. 대족장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으니.
“조심하십시오, 대족장. 그 헛소문 때문에라도 현상금 사냥꾼들이 몰려들 수 있으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소문 하나로 투흔초원에 발을 디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긴. 그 말도 맞는군요.”
웃으며 응수하는 루빈. 하지만 루빈은 확신했다.
‘이마카룸은 투흔초원에 있다.’
그때, 카포닐리아를 다 들이킨 이냐키투는 루빈이 창조해놓은 또 다른 유리병을 집었다. 그건 로이넨 가문주(酒) ‘오아쿰’이었다.
한 모금 들이키곤 역시나 만족스러워하는 이냐키투. 그러면서도 잔을 내려놓는 그 눈빛엔 왠지 모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이마카룸의 유무도 알아냈겠다, 이제 슬슬 판을 벌여볼까.’
틱.
폭설이 멈추었다. 짧은 사이였지만 어느새 눈은 두 사람의 정강이까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대족장, 슬슬 본론을 꺼낼까 합니다. 제가 대족장을 찾아온 이유를요.”
“좋습니다. 초원에 술이나 음료를 팔겠다고 오신 건 아닐 테니.”
“사실 저는, 대족장께서 보관 중인 열쇠 때문에 온 겁니다.”
“…열쇠요?”
“극지 장벽에 있는 일곱 망루. 그중 가장 동쪽 끝에 있는 망루 말입니다. 그곳으로 가는 열쇠를 받았으면 합니다.”
“…거길 왜?”
이냐키투는 제 귀를 의심했다.
초원 동북쪽에 자리 잡은 거대한 장벽. 이는 극지의 괴수들을 막아내기 위해 지어졌지만, 그것이 곧 안전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장벽의 최우선 목표는, 대형 괴수들을 막아내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이를 거꾸로 말하면, 큰 골칫거리가 안 되는 조그만 괴수들은 장벽의 저지 대상이 아니란 뜻도 되었다.
“장벽에 무수히 많은 틈이 나 있음을 잘 압니다. 그곳으로 조그만 괴수들이 들락날락한다는 것도요.”
“미약한 놈들이지요. 제 무리에서 설 자리를 잃은 쥐새끼들이 인간 눈에 띄는 것처럼. 혹 그게 걱정되어 조사하시려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어차피 장벽을 넘어온 놈들은 하루 안에 절멸하고 말겠지요. 투흔의 해일 때문에요.”
“잘 아시는군요. 그런데 그곳은 왜 가시려는 겁니까?”
이냐키투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루빈은 마지못한 척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야 제 신분을 밝히게 됐군요. 저는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대륙 곳곳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하는 일을 하지요.”
“나도 그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히베르다드 성주의 안내까지 받을 정도라면…….”
“예, 황실의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대륙 동북쪽의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장소를 돌아다니고 있지요.”
“극지 장벽에 고고학적 가치가 있단 말씀입니까?”
“콕 집어 장벽이라기보다는 그 인근 지역에 관심이 있지요.”
루빈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이미 대족장을 만나기 전에 세워두었던 설정이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루빈이 동쪽 망루로 가려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스카의 신수(神獸), 셀록’
그리고 셀록이 알려준 대장장이의 거처가 그쪽으로 통해 있었으니까. 물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남아 있었지만, 그 출발지는 동쪽 망루가 맞았다.
“…황실의 후원을 받는 고고학자라니, 제가 어찌해볼 순 없겠군요. 열쇠는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열쇠는 망루로 들어가는 용도이지, 나오는 용도는 아닙니다.”
“장벽에 커다란 틈이 생기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겠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나름의 비책이 있으시겠지만,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는 것을 부디 그곳에서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염려 고맙습니다.”
“오아쿰이라고 했던가요? 개인적인 소망으로, 언젠가 다시 한번 맛보았으면 좋겠군요.”
평생 초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의 투흔족이다. 이는 다시 재회해 내면세계에서 만나자는 정중한 의미의 말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내면세계에서의 대화라 그런지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루빈은 또 하나의 계획을 풀어나갔다.
“망루 인근까지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흐음, 누가 좋을지…….”
“쇄골부족 족장, 쿤달리트가 안내를 해주었으면 좋겠군요.”
쿤달리트는 이마카룸이 믿고 따르는 투흔인. 루빈에게는 이마카룸을 그의 눈앞에 나타나게 해줄 미끼였다.
이냐키투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뒤를 이어 대족장에 오를 자로 쿤달리트를 낙점해둔 그였으니까.
또한 그보다 더 믿을 만한 자가 없기도 해서, 루빈이 아니었대도 쿤달리트를 추천하려 했었다.
이냐키투는 흡족스럽게 웃었다.
“그라면 제대로 길 안내를 해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