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09)
암살검가 로이넨-209화(209/258)
제209화. 검의 길 (2)
‘투흔의 바람’이 놀라운 속도로 밤의 초원을 가르며 접근하고 있는 그 시각.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루빈과 쿤달리트는 이제 막 장벽에 도착했다.
깊은 밤이었다. 쿤달리트는 날이 밝아야 망루에 오를 수 있을 거라 했고, 둘은 날이 밝기 전까지 시간을 보낼 작정으로 근처 동굴 안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워두었다.
“장벽과 망루 위에는 수백 기의 골렘들이 하루 종일 경계하고 있습니다.”
괴수들과 인간을 구분하도록 설계된 파수 골렘들. 낮에는 인간의 다가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날이 어두워진 다음에는 장벽의 이쪽과 저쪽 상관없이 접근하는 어떤 인간도 괴수와 똑같은 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타닥, 타닥.
“그래도 이런 동굴이 있어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루빈의 얼굴이 모닥불을 받아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말에 쿤달리트 또한 동의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골렘들의 경계선 바깥, 기암들이 땅에 박혀 있는 지대. 이곳엔 바위와 바위 사이, 널찍한 공동(空洞)을 형성한 지형이 꽤 많았다. 둘은 그 중 한 곳을 택하여 들어와 있는 것이다.
투흔인들이 인근에서 밤을 보낼 때 이용하는 곳이라 했다. 여러모로 유용한 곳이었다. 괴수들이 출몰할 경우를 대비해 바위로 입구를 틀어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괴수들이 출몰하면 우리의 혈족들이 알려줄 겁니다.”
“투흔마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타고 온 말들은 동굴 바깥에 묶어둔 상태. 그들이 경비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투흔마의 감각보다 넓게 펼쳐놓은 루빈의 암연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암연은 저 앞으로 내다보이는 장벽 앞까지 닿아 있었으니.
‘티나가 제대로 속였다면, 어쩌면 밤이 지나기 전에 이마카룸을 마주할 수도 있겠어.’
티나의 역할은 라유비아로 변신하여 쿤달리트의 위험을 알리는 것. 속이는 건 티나의 장기였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투흔인은 거짓말에 취약하기 그지없는 이들이었으니까.
‘투흔의 오러에다가 수인화까지 가능한 자라면… 쉽진 않겠지.’
이마카룸. 루빈을 한 단계 성장시켜줄 투흔인.
물론, 브리온 오러의 열쇠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라는 걸 잊진 않았다. 하지만 호적수로서 더욱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루빈은 동굴 바깥, 괴수를 틀어막는 저 높다란 장벽처럼, 루빈에게도 상징적인 거벽이 있었다.
‘5성의 벽.’
전생에 넘지 못했던 벽이었지만, 어쩌면 오늘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개의 환 중, 전생의 환은 이미 전생에서 이룩한 최대 경지에 다다른 상태였다. 여기서 결정적인 계기만 더해진다면, 6성 경지가 펼쳐지리라는 걸 루빈은 직감했다.
“라유비아가 길 안내를 잘 하고 있을지 불안한데요.”
콜록콜록!
쿤달리트가 또다시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장벽에 오기까지, 쿤달리트는 쉽사리 그치지 않는 기침을 여러 번 했었다.
감기라고 했던가. 증상만은 감기라고 둘러댈 수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닌 것 같았다.
“거참, 감기가 좀처럼 떨어지질 않습니다. 투흔인으로서 부끄럽습니다.”
“…….”
“사실 투흔초원에서는 감기를 치료하는 명약(名藥)이 늑대고기인데, 라유비아가 제 친구로 들이고 나서는 꿈도 못 꾸고 있죠.”
기침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루빈의 눈길을 의식하는지, 쿤달리트가 계속 둘러댔다.
하지만 루빈은 이미 오래전에 알아챘다. 저건 감기가 아니다.
“투흔인들은 거짓말이 서툴다더니, 정말이군요.”
“이런 제길.”
쿤달리트는 몸이 부서질 것처럼 기침하더니, 곧 입을 틀어막은 제 손에 그만 검붉은 피를 묻히고 말았다.
“아무리 감기가 심해도 그만큼의 피를 토하진 않습니다, 쿤달리트.”
“…….”
피를 뱉어내고 나니 순식간에 온몸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쿤달리트에겐 이마저도 익숙한 지경인 듯했다.
그는 투흔인답게 초원에 불경한 피를 묻힐 수 없다며, 대신 제 몸 여러 부위에다가 피를 쓱쓱 닦아냈다.
“초원을 떠나기 전까진 비밀로 해주십시오, 루한.”
“원하신다면야.”
“투흔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초원은 미남을 일찍 품는다’. 내가 미남이었다니.”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죽음을 웃어넘기려 했지만, 묻어나는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
“제기랄.”
“불치병입니까?”
“비슷하지요.”
태도로 보아하니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마땅한 의료체계나 치유마법이 갖춰지지 않은 이곳에선 병사(病死)가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초원을 앗아간 제국에 목숨을 구걸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거야말로 이들에겐 명예로운 일이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루한. 다만-”
쿤달리트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의 쇄골부족엔 그 말고는 족장의 자리에 걸맞은 이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엔, 다른 부족에 합병될 수도 있었다.
“라유비아가 스물이 될 때까지만. 초원이 날 데려가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증상이 꽤 힘들었는지, 쿤달리트의 눈이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움츠러든 몸을 바닥에 뉘었다.
“…이러다가도 조금 있으면 금방 나아집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부족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지요. 다만, 이냐키투에겐 내 영혼이 들킬까 봐 최대한 조심하고 있지만요.”
‘만약 이마카룸이 온다면, 그 분노를 끌어낼 만한 구도가 되겠는데.’
피를 토하고 드러누운 쿤달리트. 약간만 손을 쓰면 그가 깨어나지 못하도록 기절시켜둘 순 있었다.
따로 연출할 필요도 없이 이마카룸의 전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것이다. 족장의 자리를 내어줄 만큼 쿤달리트를 믿고 따른다고 했으니까.
“라유비아… 라유비아…….”
잠이 들기까지 그는 중얼거렸다. 몽롱한 와중에도 라유비아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쇄골부족의 유일한 아이를 향한 걱정과 희망이 엄청난 것 같았다.
문득, 루빈의 머릿속에도 라유비아가 떠올랐다.
장벽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 라유비아와 블라네는 루빈 일행과 갈라섰다. 이마카룸이 ‘진짜’ 라유비아와 맞닥뜨리지 않도록, 루빈이 둘을 일부러 서쪽으로 보내둔 것이었다.
지금쯤 두 소녀도 밤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잡았을 터. 어쩌면 역병으로 죽은 쇄골부족 사람들의 무덤에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 * *
휘이이이잉, 푸슉!
루빈의 예상과 달리 블라네와 라유비아 상황은 그다지 평화롭지 않았다.
휘이이이- 푸슉!
연달아 날아가는 화살이 괴수의 몸통을 관통한다. 꾸엑, 하는 고통에 찬 외침이 울리더니 저격당한 괴수가 절벽에서 떨어진다.
“…….”
블라네는 다가가 괴수의 몸에서 화살을 빼낸다. 아직 괴수의 목숨이 끊어진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손에 쥔 화살을 놈의 목에 박아 넣는다. 푸슉!
“대단하다, 블라네!”
라유비아가 손뼉이라도 칠 것처럼 탄성을 내질렀다.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라지만, 여유를 부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블라네가 처치한 괴수만 벌써 여섯 마리째였으니까.
“라유비아, 원래 여기에 괴수들이 있어?”
“원래는 이 정도까진 아니야.”
쇄골부족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목. 장벽의 서쪽 끝으로부터 전방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장벽의 틈으로 빠져나온 괴수들이 여기까지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면, 극지의 괴수들 생태계에 뭔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괴수들이 이쪽에 나타난 건 얼마 안 됐어.”
“그래?”
“그래서 가끔 엄마를 보기 위해 여기 올 때마다 엘키오가 고생했지.”
“엘키오? 아, 늑대.”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늑대가 보이지 않았다.
“뭐 해?”
“네 친구, 엘키오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려고.”
블라네는 늑대의 흔적을 알아보려 활을 하늘 쪽으로 겨냥해 보았다. 화살촉에 그녀 로이네크로우 오호스의 깃털을 매단 화살이었다.
피융-
화살을 하늘로 날리고, 곧장 암연을 퍼뜨렸다. 화살이 날아가면서, 순간적으로 암연의 폭이 방대해졌다. 그만큼 감지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진 것이다. 쿠제 덕분에 터득한 기술이었다.
‘괴수 사체가 하나, 둘, 셋, 넷…….’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전부 엘키오에게 사냥당한 것들이었다.
놀라웠다. 예사 늑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인간의 무위로 보자면 최소 2성의 경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네르하임이 관심을 가질 만하네.”
“음?”
“…아냐. 그래서 쇄골부족의 무덤이 어디야?”
“아! 이쪽이야, 블라네.”
맨발로 괴수의 사체를 밟으며 나아가는 라유비아.
역병이 휩쓸고 간 쇄골부족의 무덤. 거기에 라유비아의 어미를 비롯해서, 한때 같이 말을 타는 법을 배웠던 친구들도 묻혀 있다고 했다.
“여기야?”
무덤이라고 해도, 대륙의 여타 왕국의 문화와는 달랐다. 그저 협곡 아래 편평한 땅속에 모두를 한데 묻고, 그 위로 수많은 돌멩이를 쌓아둔 형태였다. 이마저도 풍장이 주를 이루는 투흔족으로서는 예외적인 사례.
라유비아는 주변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워서는, 돌무더기 위로 올라갔다. 맨 위에 돌멩이 하나를 얹고는 아래쪽에 있는 블라네를 쳐다봤다.
“올라와, 블라네!”
블라네는 활을 어깨에 메고는 돌무더기 위로 올라갔다.
“여기에 온 사람 중에, 나 말고 어린애는 네가 처음이야. 우리 부족 애들은 죄다 여기 밑에 있으니까.”
“…….”
짧은 시간이었지만, 라유비아에게 블라네는 둘도 없는 친구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블라네는 그저 어린 동생을 다루듯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또래 없이 자란 라유비아였다. 그마저도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쓰윽.
“봐봐, 블라네.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그때, 라유비아가 자신의 맨살을 감추고 있던 붕대 일부분을 드러냈다. 친구에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역병이 남긴 상처일 줄 알았는데.”
문신. 책 속의 글자처럼 자잘한 문신이 라유비아의 살갗 가득히 새겨져 있었다.
“이거 투흔족의 문자야?”
“이건 문자가 아니야. 엄마는 이걸 ‘검의 길’이라고 불렀어.”
검의 길?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블라네는 라유비아가 자신한테 드러낸 왼쪽의 팔뚝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점과 선. 곡선과 직선. 그리고 가끔 보이는 인간의 형상.
“온몸에 이런 문신이 새겨져 있어.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새겨진 거야.”
“누가 그런 거야? 네 엄마, 누블라가 그런 거야?”
라유비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아빠가.”
“아빠? 그럼 이거, 투흔의 검법이나 비전 같은 건가.”
투흔족에도 오러는 존재한다. 그 위력이 대단치 않아 제국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블라네는 이 역시 투흔족의 문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갓난아이에게 ‘검의 길’을 새기는 문화가 있는 거라고.
“아냐, 이건 제국의 검술이야.”
“뭐?”
왜 그랬을까. 뒤이어질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음에도 블라네는 제 단검에 손을 가져갔다. 이건 직감이었다.
“엄마가 죽기 전에 알려줬어. 내 몸에 가득한 이 문신에 대해서.”
“…….”
“자기가 죽고 난 뒤 스스로를 지키고 싶다면, 이 ‘검의 길’을 지겹도록 반복하라고. 이게 내 아빠의 흔적이니까 어쩌면 날 성장시켜줄 거라고.”
“아빠의 흔적…….”
“아빠는 제국의 반역자였대. 수도로 호출되기 전, 자신이 죽을 걸 알고 내 몸에 이런 문신을 새긴 거래. 가문의 검술은 오직 핏줄한테만 이어져야 한다면서.”
“…….”
블라네는 암연을 넓게 펼쳐보았다. 라유비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 따로 있었다.
‘늑대…….’
다행히 근처에서는 늑대가 느껴지지 않았다.
“블라네, 내 비밀 얘기에 놀란 거구나?”
라유비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친구를 쳐다봤다. 블라네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녀 눈동자는 빠르게 차가워지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라유비아가…….
“제국 사람들한테는 숨겨야 한다면서, 쿤달리트가 붕대로 감싸준 거야. 하지만 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 고마워, 라유비아. 그러면 혹시, 그 검의 길은 다 터득했어?”
결코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늑대의 이름도 ‘그자’의 이름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 말은… 혹시 오러도 발현할 수 있느냐는 뜻이야.”
“오러? 보고 싶어?”
“가능하다면.”
라유비아는 허리춤에 있던 자신의 뭉툭한 단검을 빼 들었다. 그러더니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블라네는 남몰래 등 뒤로 자신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스스스스스.
손길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검신에 검은색의 오러가 느릿하게 씌워지기 시작했다.
아주 미약한 수준. 1성의 오러라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불안정했다.
문신으로 새겨진 검의 궤적만 흉내낸 것이니 그게 제대로 된 단련이 될 수는 없었겠지.
그래도 어쨌거나 발현된 오러였다. 블라네는 흑칠의 오러를 바라봤다. 이제는 이 오러가, 루빈과 대련하면서 대비해두었던 그 브리온 오러가 맞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내 검으로 잠깐만 갖다 대볼게, 라유비아.”
“응.”
블라네는 단검을 빼들어 흑칠의 오러에 가져다 대면서, 이렇게 물었다.
“혹시…….”
“음?”
“몇 개월 전에, 접경지역 농부의 가축을 죽인 적 있어? 이 오러로.”
라유비아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투흔마를 훔치려던 괘씸한 농부를 응징하려 그 가축을 죽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워낙 오러가 미약하여 죽이는 데 애를 먹긴 했는데.
“딱 한 번. 하지만 그때 쿤달리트한테 혼나고 나선 다시는 안 그래.”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어도 상관없었다. 그 대답보다 중요한 증거가 이제 막 나왔으니까.
제 단검이 흑칠의 오러에 닿는 순간, 이것이 브리온 오러라는 걸 깨달은 블라네였다.
“…찾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목소리가 왜 이렇게 차가워진 거냐고 라유비아는 물으려 했지만.
그럴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 순간. 루빈이 찾던 브리온 오러의 발현자를 향해, 블라네가 달려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