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14)
암살검가 로이넨-214화(214/258)
제214화. 선택받은 자 (2)
티나의 까마귀 부리가 닿는 순간, 루빈은 그녀 몸에 흐르는 암연을 느꼈다. 이질적이긴 했지만 루빈 자신이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전이시킬 수 있는 양이었다.
‘이것이 암연 전이(轉移).’
티나의 암연은 그녀의 환에 잠시 응집되었다가, 곧바로 루빈에게 흘러들어왔다.
그러자 당황해하는 티나. 전투를 치른 직후처럼 암연이 약해지자, 티나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루빈……?”
전이는 순조로웠다. 과정이 끝나자, 루빈의 암연이 일시적으로 증폭했다. 본래부터 지녔던 두 개의 암연과는 결이 달랐으나, 무리 없이 하나로 뭉쳐졌다. 확실히 제 것처럼 다룰 자신이 있었다.
‘다시 보내볼까.’
하지만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끌어올 수는 있지만, 그걸 되돌려줄 수는 없는 듯했다.
‘다 쓰거나, 시간이 흘러 소진되거나.’
그렇다면 정확히는 암연이 아닌, 암연의 환 일부를 빌려오는 방식일 것이다. 환을 끌어와 암연을 생성해 빌려 쓴 후, 다시 환을 되돌려주는 구조인 셈.
‘암연 전이’의 작동원리를 깨달은 루빈은 흡족한 듯 웃었다. 그러나 문득 또 다른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럼 대상은? 암연의 환을 가진 자라면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건가? 그럼 어머니에게도?’
그건 아닐 것이다. 직감이 그러했다.
‘암연의 환’은 경지가 높을수록 무겁고 끈끈하다. 이쪽으로 끌어당기기는커녕 오히려 거꾸로 빼앗길 수도 있지 않을까.
방금은 티나와의 격차가 컸기에 순조롭게 해냈겠지만, 어머니나 혹은 그에 필적하는 암살자들에게 전이를 일으키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성장의 속도를 높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괜찮아, 티나? 왜 그래?”
“그게 아니라… 갑자기 내 암연이 훅 새어나간 기분이 들어서. 뭐지?”
의아해하는 티나에, 루빈은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대부분 기분 탓이더라고. 그나저나…….”
루빈은 블라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막 혈투를 벌인 사람처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루빈이 궁금해한다고 생각한 블라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었으니까.
“그 늑대랑 싸웠구나.”
“어? 어떻게 알았어? 아직 말 안 했는데?”
“딱 보면 알지. 상처 자국만 봐도.”
루빈은 대충 둘러대면서도 내심 감탄했다.
‘암연의 환뿐 아니라 기억까지 전이되는구나.’
루빈이 티나에게서 얻어낸 건 암연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기억의 일부 또한 읽어낸 것이다.
그 기억을 통해, 엘키오와 싸웠던 블라네의 모습을 보았다. 또, 엘키오가 신수였다는 사실 또한.
파편적이긴 하지만, 상대방의 기억까지 읽어내는 것. 어쩌면 암연을 증폭시키는 것보다도 더 특별한 보상일지도 몰랐다.
‘그건 그렇고, 라유비아가 하네케의 증손녀였다니.’
지금껏 미심쩍게 생각했던 또 하나의 의문도 풀어낼 수 있었다. 황제가 조사하라 명했던 브리온 오러의 흔적. 그건 라유비아가 남긴 것이었다.
‘하네케. 보고 계십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진실이군.
루빈이 티나의 기억을 받아내는 순간, 내면세계에도 온전히 전달되었다. 그 덕에 하네케 역시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예감했던 펠키온이 갓난아이의 몸에 가문의 검식을 새겨 넣었으며, 그 덕분에 브리온 혈통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내 증손녀라니. 좀… 혼란스럽군…….
‘걱정하지 마시죠. 제가 하네케의 증손녀를 제국에 갖다 바칠 일은 없을 테니까,’
-왜? 내 증손녀라서? 아니면, 그 아이가 ‘적운의 성주’라서?
적운의 성주, 라유비아.
오스카와 달리 그녀는 아직 루빈의 편이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현재 상황만 보자면 루빈을 적대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그녀의 신수인 엘키오를 소멸시킬 계획은 없었다. 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하네케, 당신의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또 브리온 오러를 이어나갈 유일한 아이이기도 하고요. 반드시 지킬 겁니다.’
-지킨다? 누굴 위해서?
‘하네케, 당신을 위해서. 그리고 내 복수를 위해서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내 부탁하나 함세.
‘말씀하시죠. 대장군.’
하네케의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어려운 부탁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대륙을 호령했던 전설적인 대장군조차 망설이게 만드는 부탁이란, 대체 뭘까.
-라유비아라 했나? 내 증손녀의 얼굴을 한번, 마주하고 싶은데… 혹 가능한가?
다시 라유비아를 만난다면, 그 아이 얼굴에서 손자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브리온 혈통은 얼마나 강건한 모습일까? 붕대로 감추었다는 ‘검의 길’은?
온갖 상념들이 한데 섞여들었다. 루빈은 하네케의 복잡한 심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럴 수 있겠나? 늑대와 함께 멀리 도망갔다고 하지 않았나? 굳이 고생해서 쫓아갈 필요까지는…….
‘다음 목적지에서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설마, 그 대장장이 말인가?
‘네. 어쩌면요.’
로이네크로우가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도주를 결심한 엘키오. 암연의 일족에게 추적당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안전한 은신처를 택했을 것이다. 셀록이 그랬던 것처럼, 엘키오가 그 대장장이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곳을 은신처로 택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들은 내가 암연의 선택을 받았다는 걸 모르고 있어. 그러니 틀림없이 그곳으로 갔을 거야.’
비로소 안도하는 하네케. 그 걱정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루빈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대장간으로 향하는 길을 찾기 전에, 일단은 이곳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티나가 물었다.
“저 죄수는 어쩔 거야, 루빈?”
이마카룸의 처우를 묻는 것이다. 루빈은 대수롭지 않게 지시했다.
“구속해 놔. 회복할 수 있게 간단히 치료해주고. 동굴 안에 쿤달리트도 있으니 그 사람도 같이.”
“오케이.”
“낮에 쿠제가 합류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나랑 쿠제 둘이서 여길 지키고 있으라는 거지? 너희가 잠깐 자리를 비울 동안?”
“그래. 나랑 블라네는 대장장이를 만날 거야. 금방 다녀올 테니까, 망루 위에서 우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돼.”
* * *
날이 밝자, 루빈의 말대로 쿠제가 합류했다.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할 때쯤, 루빈과 블라네는 다음 위치로 이동했다.
날이 완전히 저물면, 망루의 골렘들은 제국인조차 적대시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망루에 올라가 있으면 골렘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 밤을 보낼 수 있었다.
“…….”
쿤달리트와 이마카룸 둘 다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의식을 찾으려 하면, 쿠제의 암연이 억압하여 다시 기절시켰다.
거한으로 변신한 티나가 이마카룸을 짊어지고, 쿠제는 쿤달리트를 짊어졌다. 그들 모두 장벽의 계단을 올랐다.
장벽 위.
지이이이이.
골렘들이 루빈 일행을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공격해올 것처럼 보였으나, 인간임을 인식하자 금세 잠잠해졌다.
허술한 경비 체계인 것 같아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애초부터 무인지대인 이곳에선, 인간으로 인식되는 것만으로도 통행 자격이 되었다.
장벽의 안쪽은 투흔인들의 드넓은 초원. 자칫하면 누구든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흔의 해일이 관문 역할을 했다.
장벽의 다른 쪽은 거대한 협곡이 펼쳐져 있는 괴수들의 터전. 이마카룸 같은 제국의 범죄자가 아닌 바에야, 일부러 그곳을 거쳐 초원으로 넘어올 생각은 안 할 것이다.
루빈은 안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이냐키투가 준 동쪽 망루의 열쇠.’
활처럼 생긴 그것을 동쪽 망루의 문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쿠쿠쿵 소리와 함께, 기둥의 외벽으로 나선 계단이 나타났다.
휘이이이.
위로 오를수록 바람이 거세졌다. 바람결에서 극지 특유의 야생의 냄새가 묻어났다. 괴수들의 체취와 짙은 피비린내 또한 진동한다.
크어어어어.
크아아아아.
장벽의 저쪽은 얼음으로 가득 뒤덮인 협곡지대였다. 이른바 극지. 협곡 곳곳에서 서로를 죽여 나가는 괴수들의 울음이 건너왔다.
털썩.
“으쌰.”
기절한 두 투흔인을 내려놓는 쿠제와 티나. 혹시 저들이 깨어난다 해도 괜찮았다. 암살검가의 속박을 풀어내진 못할 테니까.
“…….”
등 뒤로 해가 지고 있었다. 루빈은 눈앞의 험준한 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셀록의 말에 따르면, 햇빛이 스러지는 마지막 순간. 동쪽 산의 하늘 위로 길이 나타날 거라 했다.
모호하고 비유적인 설명이었지만, 이는 첫 번째 수수께끼일 뿐이다. 대장간으로 향하는 길은 그 후로도 비유적인 수수께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
의외로 대장장이를 만나는 길은 훨씬 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얇은 어둠이 내리깔린 망루 위. 그리고 골렘들의 붉은 외눈이 점등되며 밤의 경비를 시작하는 이 순간.
루빈의 시야에만 드러나는 하얀 빛들이 있었다. 그 빛은 어딘가로 모여들고 있었고, 루빈은 그게 곧 자신에게만 주어진 출입구라는 걸 알아차렸다.
“네? 제 눈에는 안 보입니다, 도련님.”
이에 대해 블라네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루빈은 셀록의 설명을 헤집으며 대장간으로 가는 길을 탐색해야 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사이 루빈의 신분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암연의 ‘선택받은 자’가 됐으니까.’
루빈은 블라네에게 지시를 내렸다.
“블라네, 오호스를 불러.”
“예, 도련님.”
“티나.”
“응!”
티나가 망루 밖으로 뛰어오르며 로이네크로우로 변신, 오호스 또한 큼직한 날갯짓과 함께 상공에 나타났다.
두 로이네크로우가 활공하며 망루를 지나치는 순간, 루빈과 블라네는 크게 도약하여 그들 등 위에 올라탔다.
지이이이이.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골렘의 인식이 달라졌다. 상공에 떠 있는 인간과 두 까마귀를 향한 외눈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곧 골렘들은 어깨에 매립되어 있던 쇠사슬 달린 거대한 투창을 꺼내 들었다.
투웅!
루빈과 블라네가 더 높이 떠오르자, 두 기의 골렘으로부터 투창이 속절없이 날아왔다. 차르르르르르. 쇠사슬이 풀려나가는 굉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내가 처리하지.”
로이네크로우의 비행 속도와 방향까지 가늠한 기계적인 사출이었지만, 루빈 앞에선 무력했다.
루빈은 뒤로 돌아서서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거대괴수를 노리고 제작된 투창이어서 그 크기는 엄청났지만, 그래서 루빈이 그 위로 올라가기에도 제격이었다.
루빈은 ‘그림자 역장’을 펼쳐 투창의 속도를 줄인 뒤, ‘파공’으로 투창의 발사 각도를 흩트렸다.
루빈의 조치에 무력해진 투창은, 곧장 지상을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차라라라라, 콰쾅!
나머지 투창도 똑같이 조치하자, 골렘은 추가적인 공격을 포기했다. 그러기엔 루빈과 블라네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잠시 후, 동쪽 산 정상의 상공에 도달한 두 사람. 대장간으로 향하는 길이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루빈 눈에만 보이는 빛의 길은 어느새 선연한 백색의 기둥을 만들었다. 이제 완전히 하늘 높이 치솟은 상태였다.
“이제 뛰어내려!”
“……?”
언제나 즉각적으로 지시를 따르는 블라네조차 잠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로이네크로우에서 뛰어내려, 낙하의 흐름 속에 루빈 쪽으로 다가갔다.
루빈이 보기에 이건 일종의 ‘틈’. 그리고 이 틈은 대장장이와 곧장 연결된 통로이자,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아마 나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겠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로 인해 블라네는 그대로 추락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위험 부담 속에서도, 반드시 블라네를 데리고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쪽으로!”
빛의 기둥에 스며들기 직전. 루빈은 허공에서 낙하하는 블라네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옷을 잡아채고, 그대로 빛기둥으로 향했다. 이렇게 하면, 어쩌면 함께 틈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다행히 루빈의 예상은 적중했다.
루빈이 틀어쥐지 않았더라면, 블라네는 그대로 틈에 빨려들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을 터. 블라네는 루빈 덕분에 난생처음 공간 이동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블라네는, 눈앞에 펼쳐진 경악할 만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