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15)
암살검가 로이넨-215화(215/258)
제215화. 그림자 망치 (1)
짹짹. 짹짹.
조그맣고 색이 알록달록한 새 두 마리가 날아든다. 새는 허공을 맴돌다가 한쪽에 내려앉으며 서로 몸을 비빈다.
짹짹.
새 한 마리가 라유비아에게 호기심을 보인다. 신기한지 라유비아를 가만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그녀에게서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라유비아의 몸에 새겨진 표식들. 바로 펠키온 브리온이 자신의 하나뿐인 딸에게 직접 새겨넣은, ‘검의 길’이라 불리는 브리온 검식이었다.
차마 갓난아기의 몸에다 모든 검식을 새길 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5식까지만 새겼던 터.
“저리 가라”
그때, 낮게 울리는 목소리.
그제야 새들은 옆에서 엄한 눈동자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늑대를 발견한다. 놀란 날갯짓으로 라유비아의 몸 위에서 도망친다.
“…….”
자신의 코를 잠든 라유비아에게 들이 밀어보는 엘키오. 아이가 더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준 것이다.
그때, 그들 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울린다.
“엘키오.”
엘키오를 부른 이는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등장에, 방금 전 엘키오한테 쫓겨난 새들이 그에게로 친근하게 날아들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제 손가락에 두 마리의 작은 새가 내려앉게 해주는 노인.
노인과 엘키오가 있는 곳은 나무가 무성한 숲 한가운데였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투흔초원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풍경.
그중에서 라유비아가 잠들어 있는 곳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연못가였다.
이윽고, 노인이 걸음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다가온다. 그러더니 연못 속에 손을 넣어본다.
“적운(積雲)의 파수, 엘키오… 흠, ‘엘키오’라는 이번 이름은 좀처럼 입에 달라붙지 않는구나.”
“라유비아가 제 생부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거다. 그나저나 라유비아가 좀처럼 깨어나질 않는데. 혹, 충격이 컸던 건가.”
노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여기에 오기엔 준비가 안 되었다는 뜻이지. 좀 더 경지를 끌어올린 뒤에 왔어야 했다.”
“네 대장간엔 ‘선택받은 자’들만 오는 건 아니잖아?”
“그들은 오히려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 ‘선택받은 자’들만이 영향을 받는 거지. 라유비아는 너무 미약한 경지여서 영향을 크게 받는 거고.”
“쳇, 그런 건가. 나는 또 투흔인이라 그런 줄 알았네.”
그 순간, 노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 앞에서 투흔인을 모욕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나도 그 정도 처세는 할 줄 알아, 캄누이트. 그냥 적운의 성주가 투흔 사람인 건 처음이라 말해본 거야.”
엘키오는 캄누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캄누이트.
백발의 노인은 숨겨진 대장간의 주인이자 유일한 일군이었다. 전설의 대장장이였으며, ‘선택받은 자’들의 중개자.
또 특이한 건, 시력을 상실한 맹인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눈꺼풀을 올려보면 희멀건 백안(白眼)뿐이었다.
“엘키오, 네 주인이 ‘적운(積雲)’을 부르려면 얼마나 걸릴 거 같나?”
“그게 문제야. 검의 경지가 올라야 ‘적운’이 나타날 텐데, 이제 고작 1성이 될까 말까 해.”
캄누이트는 끌끌 웃었다. 엘키오의 답답함도 이해가 됐다.
지금까지 라유비아 이전 ‘적운의 성주’는 모두 6성 경지에 오른 이들이었다. 그 정도 수준에야 ‘오러’의 선택을 받아 적운의 파수를 만나는 것인데.
이번처럼 열세 살의 아이에게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군다나 마땅한 검술조차 없는 투흔인이 적운의 성주라니.
캄누이트가 생각하기에도 ‘오러’의 기묘한 선택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 아이 몸에 새겨진 검식이 중요할 거다. ‘오러’가 괜히 그 아일 택하진 않았을 테니까.”
캄누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숲인 동시에 대장간인 이곳에서 그가 보낸 시간은 인간의 범주를 초월했다. 200년의 시간 동안 머문 곳이어서,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모든 게 익숙했다.
“……!”
그래서 캄누이트가 걸음을 떼던 도중에 우뚝 멈춘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
캄누이트뿐만 아니라, 엘키오도 느끼고 있었다. 대장간에 그들 말고 새로운 출입자가 있다는 것을.
“누구지? ‘선택받은 자’ 말고 여길 아는 자들이 있었나, 캄누이트?”
엘키오는 몸을 일으키며 캄누이트 근처로 왔다. 휘이이이, 불어오는 바람에 늑대의 털이 한쪽으로 퍼져나간다. 그 눈동자엔 적의가 서려 있다.
“아니, 지금 들어온 자는 ‘선택받은 자’다.”
“누구지?”
“누군지는 나도 몰라. 지금으로선 ‘선택받은 자’라는 것만 알겠군.”
캄누이트는 엘키오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건 칠흑뿐이지만,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검은자가 사라진 눈으로 엘키오에게 경고했다.
“다만, 명심해라. 엘키오. 이곳은 ‘오러’와 ‘마나’가 합의한 평화지대라는 걸.”
당연히 엘키오도 모르지 않았다. 엘키오는 잠든 라유비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쳇! 셀록이면 좋겠군. ‘마나’의 신수 중에서 그나마 친한 건 그놈인데.”
* * *
“도련님, 여기가 어디죠?”
블라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그래도 루빈한테는 가시적인 빛기둥이라도 있었지만, 블라네에겐 아니었다. 아무런 현상도 없이 순식간에 공간 이동을 체험한 셈이니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괴석지대와 키 작은 풀밖에 없던 초원에서, 한순간 만에 밀림으로 이동하다니.
게다가 뭔가 이상했다. 나무들이며 새며 그 기운이 남달랐다. 암연을 지닌 자라면 너무도 또렷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차이였다.
“대륙의 어떤 지도도 여길 기록할 순 없겠는데.”
“예?”
루빈은 덤덤하게 하늘을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던 블라네는 압도될 수밖에 없는 광경을 마주했다.
“…저희가 지금 ‘몽환거미’가 만들어낸 몽환세계에 온 건가요?”
그게 가장 일리 있는 의심이겠지.
“아냐. 여긴 실재하는 세계야.”
“그럼 어떻게 달이 세 개씩이나…….”
대륙의 달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육안으로 보기에 그 크기는 하늘 속 손톱만 한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곳은 시야를 가득 채울 만한 크기의 달이, 무려 세 개나 떠 있었다. 그것도 각기 다른 색을 품은 채로.
적월, 청월, 흑월.
이곳에 오기 직전에 ‘암연’과 대화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저 세 개의 달이 각각 뭘 의미하는지 몰랐을 테니까.
푸른색 달의 주인은 마나일 것이고, 붉은 달은 오러. 마지막 흑색 달은 암연의 것이었다.
‘세 기운이 모두 느껴져.’
루빈은 암연과 마나, 오러를 모두 지닌 자.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몸속에 담긴 그 힘들이 공명하고 있었다.
“여긴 또 다른 세계야. 마령세계 같은, 그와 비슷한 세계.”
어쩌면 대장장이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오러와 마나 그리고 암연이 모두 합의한 공통의 공간이라고.
“블라네. 눈앞에 누가 나타나든, 함부로 무기를 꺼내지 마. 공격을 해온다면 피하기만 하고, 절대 반격하지 마.”
“예, 명심하겠습니다.”
둘은 경계하며 밀림속을 걸어 나갔다.
이곳엔 갖가지 짐승들이 있었다. 원대대로라면 사나운 맹수여야 할 놈들이, 여기선 유순했다. 오히려 장난기를 보일 정도였다.
세 가지 달빛 아래, 곰도 독수리도 사슴도 신기한 눈으로 루빈과 블라네를 쳐다보기만 했다.
“도련님!”
저 앞, 나무가 무성하여 그늘이 짙은 곳. 달갑지 않은 한 맹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잿빛의 거대한 늑대였다.
크르르르.
블라네는 자신의 활을 움켜쥐었다. 짐승이 아닌, 신수다. 치욕적이었던 사투가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목숨을 건졌지만 패배나 다름없었던 사투. 당장이라도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도련님은 여기에 엘키오가 있었다는 걸 알고 계셨구나. 그래서 나한테 아무 대응도 하지 말라고 하셨던 거야.’
루빈의 당부가 떠올랐다. 결국 활을 움켜쥘 뿐, 그걸 빼 들지는 못하는 블라네였다.
“엘키오.”
루빈이 그 이름을 부르자, 엘키오가 적개심이 가득한 울음소리를 냈다.
“암연의 일족…. 이 지독한 놈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쫓아왔다기보다는 우연히 만난 거지, 적운의 파수.”
크르르카아!
루빈 입에서 ‘적운의 파수’라는 이명이 나오는 순간, 살기를 터뜨리며 포효하는 엘키오.
이에 숲속의 짐승들이 혼비백산 흩어졌다. 새떼가 나무 위로 푸드덕 날아오른다.
“…….”
새 떼의 날갯짓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자, 숲에는 아슬아슬한 정적만 내려앉았다.
엘키오는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거라 생각했다. 암연의 일족이 끝내 라유비아가 ‘선택받은 자’라는 걸 알아낸 거라고. 그래서, 싹을 잘라내려 이곳까지 찾아온 거라고.
그때, 엘키오 뒤로 걸어 나오는 한 사람.
“아니다, 엘키오.”
“캄누이트.”
그늘을 벗어나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대장장이. 그의 등장에 루빈은 숨을 멈추고 두 눈을 빛냈다.
“도련님, 저 사람이 그 대장장이인가요?”
블라네의 속삭임도 무시한 채, 루빈은 예부터 갖추었다. 본능적으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눈앞의 저 대장장이는 대단한 무위를 지닌 건 아니지만, 분명 이 땅의 주인이었다.
루빈이 몸을 수그리자, 블라네도 이를 따랐다.
“캄누이트. 아까 네가 말했던 자가 저 인간이야?”
“그래, 저자가 암연의 선택을 받은 자다.”
“…그럴 리가. 암연이 누군가를 선택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나도 ‘이계의 대장장이’로 발탁된 이래 처음이야. 200년? 300년? 내가 여기서 보낸 세월도 이젠 가물가물하군. 하여튼, 저자는 암연의 ‘선택받은 자’다. 이곳을 자유로이 출입할 자격이 있지.”
엘키오는 부정하고 싶은지, 매서운 눈으로 루빈을 노려보며 고개를 이리저리 내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인간에게는 신수가 없다. 그렇다면… 붙어볼 만하지 않을까?
이를 짐작했는지, 캄누이트가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명심해, 엘키오. 이곳은 평화지대야.”
“하지만 그 맹약에 ‘암연’은 빠져 있지.”
“빠져 있는 게 아니라,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제껏 암연의 선택을 받은 자는 없었으니까. 네 말대로 암연이 정말 빠진 거라면, 어째서 흑색의 달이 여길 비추겠어?”
그걸 떠나서, 엘키오를 위해서라도 싸움을 막아야만 했다. 신수는 불사의 존재라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에 한해서였다. ‘선택받은 자’에게 죽임을 당할 경우엔, 신수는 영멸(靈滅)하고 만다.
그리고 또 하나. 아무리 ‘적운의 파수’라 해도 저 인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걸, 캄누이트는 알고 있었다.
“자네, 이름을 알고 싶네.”
“루빈 로이넨입니다.”
“역시 그랬나. 로이넨이라면, 암연 일족의 뿌리로군.”
눈을 감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노인.
루빈은 그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맹인이라는 건 알겠고, 더불어 그의 출생지를 가늠할 만한 부분들도 보였다.
‘투흔인이라. 그렇다면 설마?’
순간 루빈의 머릿속으로 역사 속 한 사람에 관한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조금 뒤로 미뤄야 했다. 우선은 대화 흐름을 따라야 했으니까.
“그나저나 루빈, 영혼무구를 가지고 있군.”
눈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영혼무구들의 고향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계의 대장장이’는 대개 ‘선택받은 자’들의 의뢰를 받았을 때 작품을 만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의뢰가 있어야만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의뢰가 없을 때는, 창작을 위한 고독과 고찰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수백 년의 세월을 말이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틈’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든다. 100년에 하나 만들까 말까 한 작품들. 그게 바로 ‘영혼무구’, ‘영혼마도구’라 불리는 것들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루빈은 캄누이트에게 자신의 애검을 건넸다.
맹인 대장장이는 루빈의 손을 더듬더니 그 검을 집어 들었다. 눈을 감은 채로도 영혼무구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 핏빛서리! 한 천년쯤 된, 내 이전 대장장이의 작품이로군. 혹한과 설원을 정수로 담은 걸작이야. 결코 깨지지도, 녹슬지도 않고. 오직 검이 인정한 주인만이 다스릴 수 있지.”
옛 시대의 명작을 마주하니 그 역시 들뜬 것 같았다. 한결 온화해진 목소리로 계속해서 핏빛서리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사라진 대마법사’ 글레이튼의 팔찌가 채워져 있는 팔목. 상대 마법사의 휘식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마도구였다.
이 역시 대단한 작품이긴 했지만, 엄격하게 보자면 영혼무구나 영혼마도구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캄누이트에겐 의미가 남다르겠지.’
그 예상처럼 캄누이트는 꽤 놀란 기색이었다. 이제껏 보여주지 않았던 백색뿐인 눈동자까지 내보였으니까.
“이건… 글레이튼의 팔찌?”
“예.”
문득 셀록의 말이 생각났다. 이 맹인 대장장이를 표현하길, 한때 글레이튼에게 열등감을 품었었던 대장장이라 했었지.
그리고 루빈에겐 이 대장장이에 대한 기억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카포티니 마법학교의 마법학 수업 중 하나.
‘아마 가이젠의 마법약제조학 수업이었지. 마법약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의 예를 달리아가 말했었지.’
“사라진 대마법사 글레이튼의 일화입니다. 그가 투흔족 족장에게 걸었던 실명(失明)이 있습니다. 투흔족 족장은 대마법사와의 내기에서 져서 그가 만든 마법약을 마셨고, 당시 나이 스무 살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시력을 잃었습니다.”
루빈의 머릿속에서 달리아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제가 마주한 이가 어떤 분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캄누이트, 한때 글레이튼과의 내기에 졌다는 투흔인이셨군요.”
“…….”
제 손가락으로 ‘글레이튼의 팔찌’를 느껴보던 캄누이트는 끌끌 웃으며 손을 내렸다.
“맞아, 글레이튼 그놈 덕분에 그래도 내가 대륙 역사의 한 귀퉁이에 이름을 내걸었구먼.”
이젠 글레이튼에 대한 악감정도 옛말이 되었나보다. 하긴, 지금은 글레이튼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을 테니.
대장장이는 루빈에게 핏빛서리를 돌려주며 돌아섰다.
“그래도 글레이튼 덕분에 이곳으로 올 수 있었지. 그놈이 날 ‘이계의 대장장이’로 추천해주었거든.”
캄누이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루빈과 블라네는 캄누이트의 비밀 하나를 발견했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대한 비밀을.
‘…그림자가 없다.’
오직 캄누이트만 그림자가 없었다. 문득 이것이 ‘이계의 대장장이’ 능력과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캄누이트가 루빈을 향해 손짓했다.
“내 말동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따라오게. 내 대장간으로 가자고. 거기서 자네 얘길 들어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