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17)
암살검가 로이넨-217화(217/258)
제217화. 그림자 망치 (3)
-날 되살린다고?
‘물론, 죽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건 아닐 겁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제가 검을 쥘 때만 당신은 내면세계를 벗어나 세상에 육화(肉化)되는 형태겠죠.’
캄누이트를 보고 깨달은 사실이었다.
현재 캄누이트는 살아 있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그런 그가 ‘그림자 망치’를 쥐는 순간 육체를 얻었다.
존재하지 않던 그의 그림자가 돌아왔고, 루빈의 암연에는 그의 존재가 새롭게 감지된 것이다.
만약 루빈이 저 그림자 망치를 쥔다면?
루빈 그 자체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림자 망치는 오직 죽은 자의 영혼에만 영향을 끼치니까.
그렇다면 현재 영혼 상태인 하네케는 어떻게 될까?
루빈은 하네케의 영혼이 내면세계로부터 끌려나올 거라 예상했다. 아마 일시적이겠지만 말이다.
‘신의 조각으로 만들어졌다는 망치와 모루. 그 도구들에만 깃들어 있는 힘인 거죠. 하지만, 그 도구들을 제가 가져가는 건 불가능할 거고요.’
-그래서 대장장이한테 허락을 받아 그 도구의 일부를 얻어내겠다는 거군. 그런데… 쉽지 않아 보이는데.
하네케의 의문도 캄누이트와 다르지 않았다. 망치와 모루에 담긴 그 특별함. 그게 정말로 영혼을 육화시킨다 할지라도, 그걸 깨트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어떤 영혼무구로도 부수지 못한다고 했죠.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
‘간단하죠. 망치가 모루에 부서지거나. 혹은 그 반대거나.’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루빈은 그림자 망치 앞에 섰다. 내면의 하네케를 향하던 목소리는 이번엔 육성이 되어 대장장이에게 향했다.
“캄누이트, 잠시 망치 좀 빌릴게요.”
캄누이트는 루빈의 확신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놔두었다. 대신, 밖에 있는 엘키오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대장간 밖에서 달빛을 맞고 있던 엘키오가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눈이 멀었잖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 좀 해줘.”
“왜 저자가 망치 앞에 서 있는 거지?”
“빌려달라는군. 나를 설득하겠다는 거야.”
“뭐? 빌려?”
그 순간, 루빈의 손이 망치로 다가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어떻게 됐지?”
“아무것도.”
“역시, 아무런 일도 없는 거지?”
엘키오는 그렇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냥 루빈이 망치를 잡아보는 체험에 그치는 줄만 알았으니까.
“……!”
그런데 대답이 이어져야 할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캄누이트가 엘키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그의 시력이 온전했다면, 지금 보게 될 모습은 불안하게 전율하는 엘키오였을 것이다.
“음?”
캄누이트는 엘키오의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대신 대장간의 공기가 미세하게 틀어지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냐니까, 엘키오?
“저건 누구지?”
“뭐? 누구냐니?”
“저자의 그림자에서… 웬 노인이 튀어나왔다면, 믿겠어?”
“그게 무슨…….”
“그뿐만이 아니야. 망치까지 들어 올렸어.”
“…농담하지 마, 엘키오. 그건 산 자는 들 수 없는 망치라고.”
루빈은 들고 있는 망치를 내려다봤다. 의외로 망치는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쥐는 순간, 몸의 일부가 탈각(脫殼)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면세계에서 하네케의 존재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
벽에 드리운 그의 그림자.
처음엔 그림자에서 검은 가루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루는 한곳에 응집하기 시작하더니, 하반신을 시작으로 하네케의 몸을 육화하기에 이르렀다.
“…허.”
하네케의 탄성이 대장간을 채운다. 내면세계에 울리는 사념이 아닌, 산 자의 실제 육성이었다.
하네케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고,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왼발로 땅을 짚고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봤다. 육체와 영혼 중간쯤의 상태. 놀라운 일이었다.
하네케의 시야에 이계의 맹인 대장장이와 적운의 파수가 들어왔다. 그 뒤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블라네까지.
방금 전까지 대장간 밖에 있던 블라네는, 심상치 않은 흐름을 느끼고 안으로 들어왔던 터였다.
“루빈.”
하네케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떨렸다. 그 말을 들은 캄누이트는, 이제야 루빈의 그림자에서 노인이 튀어나왔다는 엘키오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인사부터 해야겠군. 난 하네케 브리온이라 하오.”
캄누이트와 엘키오는 하네케가 어떤 위명을 지닌 자인지 알지 못했다. 캄누이트가 대륙을 떠나 이곳으로 온 지는 200년이 거뜬히 넘었으니까.
그가 기억하는 세상은 릴리크가 제국을 선포하기 이전이었다. 최근에 다시 태어난 엘키오도 마찬가지였다.
“하네케…? 대장군 하네케 브리온?”
블라네만이 눈앞의 백발노인이 생전 제국의 대장군이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망치를 움켜쥔 루빈이 하네케 옆에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캄누이트. 지금 당신 앞에, 제 안의 또 다른 영혼이 육화해 있습니다.”
“또 다른 영혼?”
“7성의 오러를 지닌 무인이자, 제국의 전대 대장군. 그리고-”
이번엔 루빈의 시선이 엘키오에게 향했다.
“라유비아와는 피로 연결된 사람입니다.”
“피로 연결됐다? 라유비아의 조상이란 말이냐?”
엘키오가 끼어들었고, 거기엔 하네케가 응했다.
“그렇소. 라유비아는 내 증손녀요. 내 손자 펠키온과 투흔인 누블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펠키온은 내게 전수받은 브리온 검술을 라유비아의 몸에 새겨넣었다지. 완전하진 않지만, 브리온 검식의 일부를 말이오. ‘검의 길’이라고 했던가.”
말을 마친 대장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벽에 걸려 있는, 나무로 된 측정용 자 하나를 그러쥐었다.
오러의 발현. 그거라면 엘키오를 믿게 할 수 있겠지.
위우우웅.
그저 길이를 재는 용도에 불과했던 자에 일순간 흑칠의 겹이 씌워지기 시작했다.
“그건, 라유비아의 오러……?”
그러나 그 경지가 같을 순 없었다. 라유비아는 간신히 오러를 덧씌우는 데 그치지만, 하네케는 무려 7성의 경지를 지닌 자였다.
자에 씌워지는 흑칠의 오러는 하나둘 늘어나더니, 모두 일곱 겹이나 되었다.
오러의 발현에 따라 대장간의 기압도 올라갔다. 이계의 대장장이는 그런 변화를 감지했을 뿐만 아니라, 달빛에 일어난 변화까지도 알아차렸다.
“엘키오, 오러의 달이 반응하는 게 느껴지지? 일찌감치 세상을 등진 나는 브리온 오러가 뭔지는 몰라도, 저 사람이 7성의 오러를 지녔다는 건 믿을 수밖에 없겠네.”
스스스스.
증명은 끝났다. 자에 발현했던 오러를 거둬들이는 하네케. 그러면서 잠시 블라네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 블라네는 위압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루빈 도련님이 브리온 오러를 쓸 수 있었던 이유도 대장군의 영혼 덕분이었구나.’
또한 자신이 라유비아에게 저지른 일을 대장군이 알고 있음을 직감하는 블라네였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하네케가 부드럽게 말했다.
“블라네. 네게 악감정은 없으니 걱정 말거라. 라유비아를 죽이려던 게 아님을 알고 있으니. 진실이 가려져 있을 땐, 으레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법이지. 다만-”
하네케는 엘키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죽은 몸이 아니었다면, 내 증손녀가 그리 무력하게 당하진 않았겠지.”
라유비아가 가진 검의 재능을 꽃피우지 않고 썩히고 있는, 엘키오를 향한 힐난이기도 했다. 엘키오로선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루빈, 죽은 자의 영혼이 어떻게 자네 몸에 있었던 거지?”
캄누이트가 물었고, 루빈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제 어머니가 대장군을 암살했고, 대장군은 어머니의 몸에 검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100일의 요람’이라는 의식을 통해 어머니 몸에 새겨졌던 검혼을 제가 받아들였고요. 그 이후 하네케는 줄곧 제 내면에 머물면서 검술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흠, 검혼이라…….”
검혼에 대해서는 캄누이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무인이 내리친 최후의 일격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영화(靈化) 과정. 이 또한 세계가 품은 수많은 비밀 중 하나였다.
그때, 엘키오가 끼어들었다.
“저를 암살한 자의 아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고?”
“암살이란 건,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가벼운 명분일 뿐이지. 나와 세이렌의 대결은 무의 극을 향한 대결이었소. 내 인생의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할 수 있어서, 나는 좋았소.”
“…….”
“그리고 나와 루빈의 목적이 일치했거든.”
“목적?”
루빈이 대신 대답했다.
“황제를 향한 복수죠. 하네케를 죽이고, 펠키오를 반역자로 둔갑시켜 브리온가를 멸문시킨 자요. 그리고 현시점 모든 암살검가를 손에 움켜쥐고서 조종하고 있는 인간.”
“그자가 균형을 잃어버린 이 세상의 원인이겠군. 암연이 자네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할 거고.”
“예, 캄누이트. 저는 그자와 암살검가 사이의 악연을 끊어버릴 겁니다. 암살검가를 수백 년 전으로, ‘암연’이 내린 신탁을 수행하던 때로 되돌릴 겁니다. 순수한 사명감 아래 목숨을 거두던 그때로요.”
그제야 상황을 납득한 캄누이트였다.
“왜 ‘신의 조각’의 일부가 필요하다는 건지 이해했네. 저 죽은 대장군을 몸 밖으로 불러내어 함께 싸우려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루빈이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였다.
대족장의 진단에 따르면 내면세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기간은 앞으로 3년이었다.
그러나 망치를 쥐는 순간, 루빈은 자신의 또 다른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걸 느꼈다.
하네케가 육화해 있는 이 잠깐 동안, 내면세계의 폭주가 일시에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빠르게 안정성을 회복되고 있었다. 3년이라는 시한부 수명이 늘어난 것이다.
“엘키오.”
“말해, 캄누이트.”
“정말 루빈이 망치를 들고 있어?”
“그래, 그 망치 덕분에 죽은 대장군이 나온 거잖아.”
“…어쩌면. 루빈의 말대로 될지도 모르겠군.”
“음? 망치나 모루를 부수는 일 말이냐?”
“그래. 지금껏 그 누구도 저 망치를 들 수 없었어. 오직 신들이 임명한 대장장이여야만 들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루빈이 그 오랜 규칙을 깼다.”
“규칙을 어겼다는 거냐?”
“아니, 정확히는 숨겨져 있던 세계의 법칙을 발견한 거지. ‘죽은 자의 영혼을 품은 자는, 신의 조각을 다룰 자격을 얻는다’는.”
“그렇다면…….”
엘키오는 추측해보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도 절대자들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망치나 모루를 부수겠다는 루빈의 각오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예외적인 존재.
절대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예외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 않은가? 루빈 로이넨이라는 이 인간이 말이다.
어쨌든 확실한 건, 대장장이의 세계를 만든 그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저 ‘선택받은 자’가 망치로 모루를 내리쳤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젠 나도 모르겠군.”
망치와 모루를 써도 된다는, 캄누이트의 에두른 허락이었다.
루빈은 그림자 망치를 들고 모루 앞에 섰다. 모루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에 조응하여 망치에도 잠시 빛이 응집됐다.
오러의 발현은 아니었다. 신의 조각이 ‘예외적인 존재’와 마주하면서 내보이는 반응이었으니까. 그게 호의인지 적의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
루빈은 짧게 심호흡을 내쉬곤, 텅 비어 있는 모루 위로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림자의 충돌로 무기를 만들어냈던 캄누이트. 그러나 루빈은 ‘산 자’였다. 망치질을 한다면, 그건 그림자가 아닌 실제이리라.
“좀 시끄러울 겁니다.”
그림자의 충돌 땐 마찰음이 없었지만, 이번엔 다를 터였다.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망치질 소리가 대장간을 가득 메울 것이다.
휘이이이.
망치가 벼락처럼 떨어진다.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저릿하게 들려온다. 이윽고 망치가 모루에 떨어지는 순간, 루빈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투우우웅!
거대한 울림이 대장장이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사나운 폭풍을 맞이한 것처럼, 모루를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일었다.
엘키오의 잿빛 털이 일제히 흩날렸고, 블라네는 저 멀리 밀려나려는 몸의 중심을 꽉 잡아야 했다. 하네케는 해풍을 맞이하는 선장처럼 굳건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고요.
“어떻게 됐지? 신의 도구에 균열이 일었나?”
가장 궁금해하는 건 캄누이트였다. 이십 대에 글레이튼과의 내기 때문에 눈이 먼 이래, 오늘만큼 앞을 보지 못해 답답한 적은 처음이었다.
캄누이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루빈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묵묵부답. 답답한 나머지 그는 엘키오를 찾았다.
“엘키오, 어떻게 됐어?”
“…….”
“엘키오? 루빈?”
길게 이어지던 침묵. 그 침묵을 깬 건, 누군가의 말소리가 아니었다. 사실 말은 필요 없었다.
쩌저저적.
“……!”
앞을 보지 못하는 캄누이트는, 무언가가 쪼개지는 균열의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