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20)
암살검가 로이넨-220화(220/258)
제220화. 두 개의 검 (1)
“하아, 하아…….”
라유비아가 털썩 주저앉는다.
허벅지며 팔목이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지? 느낌상으론 두 시간이 지난 것 같지만, 고작 삼 분이 지났을 뿐이다.
라유비아는 아랫입술을 질근 깨물며 루빈을 노려봤다.
“…….”
루빈은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심지어 단검 길이에 불과한 막대기다. 고작 저따위 막대기로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
하잘것없는 수련용 검이라지만, 자신이 들고 있는 건 그래도 검이었다. 한낱 막대기 따위에 밀려난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라유비아, 내 안의 하네케가 탄식하고 있어. 칠십 대 노인이 와도 너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것 같다고 하는군.”
“…정말?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어깨를 으쓱이는 루빈.
사실, 하네케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저 루빈의 시야를 공유하며 라유비아가 보완할 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네 생각은 어떤데! 내가 그렇게 형편없었어?”
“투흔의 피가 섞였다고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가. 좀 실망스럽긴 해.”
라유비아의 눈에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렇게 분노해봤자 오늘 수업에서 배우게 될 것은 바뀌지 않을 터.
‘무력감.’
라유비아가 오늘 배울 건 이것이었다.
투흔인이자 브리온가의 한 사람으로서 황제를 향한 복수심은 가득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오러의 ‘선택받은 자’로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만 알고 있지, 그녀 앞길에 어떤 괴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몰랐으니까.
“다시 일어서, 라유비아. 아직 해야 할 게 많아.”
“일어나려고 했거든!”
라유비아는 검 끝으로 바닥을 짚으며 힘겹게 일어났다. 루빈 뒤편으로, 묵묵히 참관 중인 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블라네.”
친구로 여겼던 블라네에게 받은 배신감이 루빈의 공격에 당한 것보다 아팠다.
루빈도 그 시선의 의미를 읽었다.
“이쯤에서 이 수련 최종 목표를 알려주지. 여길 떠나기 전에, 블라네와의 대련에서 열 번의 공격을 연속해서 막아내는 것.”
“…그게 내 최종 목표라고? 두 달 동안 수련하는데, 고작 그거야?”
“왜, 너무 어렵나?”
“…빨리 시작해. 당장!”
입을 앙다물고 부들부들 떠는 라유비아. 곧 그녀의 온몸에 브리온 오러가 발현됐다. 불안정하면서도 과한 출력이었다.
라유비아가 검 끝을 루빈에게 겨냥했다.
그런데-
“뭐 하는 거야?”
루빈이 눈을 감아버리는 게 아닌가. 마치 눈감고도 너 따위는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이.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굴욕감이 전신을 뒤덮어 몸의 중심이 흐트러질 지경이었다.
결국 ‘선공은 루빈이 한다’는 수업 규칙 따위 개나 줘버리고, 무작정 달려드는 라유비아. 이야야아앗, 하는 살기 어린 기합에 루빈은 피식 웃으며 반격을 펼쳤다.
딱! 딱! 딱!
청명한 타격음.
숲속 짐승들이 고개를 내밀며 바라볼 정도로 커다란 울림이었다.
눈을 감는다고 루빈이 열세가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두 눈만으로 상대하는 게 훨씬 불리하리라.
루빈은 지금, 암연을 이용해 상대를 감지하고 있었다.
“헉. 헉…….”
또다시 털썩 무릎 꿇는 라유비아.
“역시 너무 어렵나?”
“끄흑…….”
너무도 분했지만, 다 맞는 말이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라유비아에게 루빈이 인심 쓰듯 말했다.
“좋아. 이번엔 두 눈에 왼발까지 안 써줄게.”
이를 악문 라유비아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오러를 쥐어짜냈고, 다시 브리온 검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두 눈이랑 왼발 따위 안 써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금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거칠게 내쉬는 라유비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덧 분노와 복수심이라는 감정은 낯설어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앞선 감정들보다 중요한 건 오직 무력감과 절망감뿐. 이것들이 그녀 심장을 쥐고 흔드는 중이다.
‘왜? 왜 나 따위가 오러의 ‘선택받은 자’인 거지? 이렇게나 약한데?’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복수를 할 수나 있을는지, 정말 ‘적운의 성주’로서 힘을 지닐 수 있을지.
“일어나, 라유비아.”
아직 답도 얻지 못했는데, 루빈의 목소리가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라유비아는 검을 부여잡으며 다시 일어섰다. 이 수련의 끝에 다다르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흐압!”
브리온 검식을 펼치는 라유비아, 그걸 간단히 파쇄하는 루빈. 똑같은 결과의 반복이었다.
이 수련의 유일한 변화라면, 검투가 거듭될 때마다 루빈이 스스로 제한 사항을 늘려간다는 것뿐이었다.
“하아, 하아.”
라유비아는 밤하늘 세 개의 달을 바라보며 대자로 뻗어버렸다. 방금 전의 검투는 검투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많은 페널티를 둔 싸움이었다.
“두 눈에 왼발. 거기다가 공격이라곤 찌르기밖에 안 했는데?”
“…….”
-절망과 무력감이 배어들고 있군.
주저앉은 라유비아를 지켜보던 하네케가 넌지시 말했다. 그는 루빈이 어떻게 라유비아의 기초를 잡으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알고 있었다.
절망감과 무력감. 이 감정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겸손의 토대지만, 브리온 검술로 한정한다면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브리온 검술은, 아군이 모두 죽은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한 군인에게서 탄생했다. 브리온 검술의 창안자이자, 라유비아와 하네케 혈통의 조상에게서 말이다.
그의 절망감은 실제였고, 그건 바로 검식 1식에 담겨 있었다. 전장에서의 생존만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말이다. 희망이나 패기는 희박했고, 오직 울분과 분노, 독기만이 가득한 몸부림.
머리로, 몸으로 검식을 체득한 라유비아는 브리온 검의 ‘맥’을 형성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검의 ‘결’은 부재했다.
똑같이 검을 휘두른다 해도, ‘검결’의 유무에 따라 전혀 다른 검이 되는 법.
-전장의 동료를 진혼(鎭魂)하며 절망하는 것. 그게 브리온의 검결이지. 이 검결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게야. 내가 자네를 가르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지만… 오히려 이런 접근법이 더 옳다고 해야겠지.
그야 루빈은 이미 암살검가의 검결이 배어 있는 몸이자, 브리온의 검결에 대해서도 깨우친 상태였으니까. 검결에 대한 개념과 중요성은 이미 통달했다.
게다가 루빈은 암살검가의 검결에 브리온의 검맥을 입힌 셈.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검결’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브리온 오러의 뿌리는 절망감과 무력감입니다.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절망감을 느낄 때까지 계속할 겁니다. 며칠은 걸리겠죠.’
라유비아는 앞으로도 한참이나 연거푸 패배하는 나날들만 있으리란 건 알지 못했다. 진짜 수련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이후, 루빈은 두 가지 방식으로 라유비아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곳은 영원한 밤의 세계였으나, 그들을 위한 시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캄누이트가 오래전에 만든 이 커다란 모래시계는, 시간의 인력을 파악하여 모래를 낙하시켰다.
루빈은 이 모래시계를 토대로, 본래 세계에서의 하루만큼 시간을 분배했다.
수련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치러졌다. 오전에는 검식을 다듬었고, 오후에는 앞선 대련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오전 수련을 통해 검식의 정교함을 더하면서 조금이라도 자신감이 붙었던 라유비아. 그러나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헉. 헉…. 근데 루빈, 저기. 검은색 연기 보여?”
대장간으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였다. 이는 첫 번째 무구가 완성됐음을 뜻했다.
수련을 잠시 멈춘 루빈은 곧바로 대장간으로 향했다. 막 작업을 끝낸 캄누이트가 반겨주었다.
“왔군. 수련은 잘 되고 있나?”
“그럭저럭요. 틀은 엉망이지만 전투 본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검투가 있을 때마다 무력하게 패배하는 라유비아지만, 루빈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짐승에 가까운 본능을 지녔다. 단지 몸이 본능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뿐.
이는 자신이 그만한 재능과 가능성을 지녔다는 걸 아직 모르기 때문이었다.
“비검, 완성된 겁니까?”
그러자 캄누이트가 옆으로 비켜섰다. 그의 작업대 위에 완성된 작품이 놓여져 있었다.
비검.
로젠탈러가 지녔을 때하고는 판이한 모습이었다. 검신이 단검에 맞게 짧아지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검신은 특이하게도 검은색이었고, 그 모양은 불규칙적인 파형이었다. 물결무늬 같았다.
“흥미로운 작업이었네. 비행 능력, 몸과 떨어져 있어도 오러를 응집할 수 있는 능력. 전부 다 담아냈지. 물론 기존보다 강화된 형태로.”
물론, 검의 주인으로 인정받느냐는 별개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본질적으로 영혼무구는 아니기에, 허락하지 않는 주인을 절멸의 대상으로 인식하지는 않겠지만…….
“검의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그 특성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을 거야. 비행하지 못한다든지, 오러를 응집할 수 없다든지.”
“반쪽짜리, 아니 이름뿐인 검이 될 수도 있겠군요.”
루빈이 쓰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러한 제약은 오히려 좋았다. 루빈이 아니면 누구도 제대로 쓸 수 없을 테니.
루빈은 살며시 검을 쥐었다. 검의 울음소리가 아스라이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미간을 좁힌 채로, 허공에 검을 쓱쓱 그어보았다.
“어때? 검이 주인으로 인식한 것 같나?”
루빈은 검을 다시 작업대 위에 내려놓곤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확인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언제 확인하겠다고?”
“비검의 진가를 확인하려면 그에 맞는 검투가 있어야겠죠.”
이는 육화한 하네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와의 검투 정도는 되어야 비검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캄누이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그럼 이어서 두 번째 의뢰품을 진행해 주시죠. 라유비아의 검이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일주일쯤 걸릴 걸세.”
일주일이라. 그럼 수련이 끝나기 전에 라유비아에게 검을 쥐여줄 수 있을 것이다.
대장장이 세계에서 머무는 기간을 3개월로 잡아두고 있던 터였다. 이 시기는 ‘시간의 만조’이니, 계산대로라면 쿠제가 장벽 위에서 두 번째 해 질 녘을 맞을 때쯤이면 수련도 끝날 것이다.
“아, 그리고 가능하다먄 연무장 하나를 만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연무장?”
그렇지 않아도 캄누이트 역시 숲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라유비아와의 수련에 그친다면 숲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루빈과 하네케의 검투라면, 그 격이 달랐다.
“그러지. 어려울 건 없네.”
대장장이 세계에 연무장이라.
암연과 오러 그리고 마나가 이곳을 평화지대로 정해 맹약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련을 위한 것이니 맹약을 깨트리는 거라고 볼 순 없겠지만, 캄누이트로선 이 모순적인 상황에 웃음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그사이 루빈과 라유비아에겐 새로운 연무장이 생겼다.
캄누이트는 최대한 간단하게 연무장을 구축했다. 숲속의 일부를 공터로 만든 다음, 그곳에 팔각형이 되도록 쇠막대를 꽂았다. 막대와 막대 사이는 허공처럼 보여도 강력한 결계마법이 서려 있었다.
“흐음.”
처음으로 연무장을 쓰기로 한 날.
라유비아는 막대와 막대 사이에 검을 가져다 대보았다. 그러자 허공이 일렁이며 반투명한 장막이 드러났다. 장막을 찢을 수 있으려나? 라유비아는 검을 밀어 넣었다.
쑤욱.
검이 쑥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 탄력을 회복한 장막에 의해 튕겨 나갔다. 여러 번 반복해도 마찬가지, 무슨 수를 써도 검만으로는 장막을 찢을 수 없었다.
쿵!
“아앗!”
몸이 붕 뜨면서 연무장 가운데로 날아간 라유비아. 눈을 부라리며 씩씩대기 시작했다.
“어?”
이번엔 결계를 향해 돌진하려 마음먹는 그때. 엘키오가 연무장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보자기에 싸인 뭔가를 입에 문 채였다.
“엘키오, 그게 뭐야?”
“방금 완성된 네 무기.”
“내 무기?”
그렇게 말하는 엘키오 눈엔 기대감이 가득했다. 신의 조각과 하네케의 검날 조각을 조합하여 만든 검인데,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툭.
엘키오는 연무장 안으로 들어와서는 라유비아 앞에 검을 내려놓았다.
“흑혼검(黑魂劍). 캄누이트가 지어준 이름이야.”
라유비아는 서둘러서 보자기를 끌렀다. 장검 규격엔 살짝 못 미치는 중검(中劍).
이름에 ‘흑’ 자가 들어가 있는 것과 달리, 검의 손잡이는 작은 얼룩도 눈에 띌 만큼 백색이었다.
“잡아봐.”
연무장 밖에 있던 루빈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그의 내면에선 하네케가 두 번째 육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제 자네도 새로 태어난 비검을 확인해볼 수 있겠군.
라유비아의 손이 흑혼검의 손잡이를 감싼다. 그 순간, 루빈은 내면세계에 있던 하네케의 존재감이 스르륵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윽고 라유비아의 그림자에서 풀려나오는 검은 형상. 하반신을 시작으로 하네케가 다시 한번 육체를 얻었다.
그제야 왜 이 검의 이름이 흑혼검인지 알 것 같았다. 백색이었던 손잡이가 어느새 검게 칠해져 있었다.
“역시 살아 숨 쉬는 지금이 훨씬 좋군.”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하네케.
“라유비아. 내가 돌아왔단다.”
하네케는 라유비아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라유비아가 그동안 수련할 때 썼던 형편없는 장검이었다.
“곧바로 수련하는 거예요?”
“그건 나중이다. 루빈의 비검이 제대로 제작됐는지 확인해야 하거든. 잠깐 연무장 밖으로 나가 있으렴. 흑혼검은 놓지 말고.”
하네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빈은 이미 하네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육화한 하네케를 향해 비검을 겨눈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