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35)
암살검가 로이넨-235화(235/258)
제235화. 그레하임의 심장
‘거조상황판’이 떠오르기 전, 룰포는 자연스레 한 이름을 떠올렸다.
대륙사에 가장 선명하게 이름을 남긴 수혈인, 그레하임.
200여 년 전. 그랑버드를 정신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수혈인이었던 그가 릴리크의 편에서지 않았다면, 제국은 완성됐을까.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릴리크가 그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통제력을 물려주지 않았다면, 제국은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런 의문이 당연할 정도로, 그가 제국에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랑버드의 존재가 곧 제국을 상징했고, 제국의 모든 이들이 그랑버드의 그늘 속에 숨을 죽여야만 했으니까.
‘그레하임이 죽은 뒤에도 제국은 어떻게 그랑버드의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이것은 수많은 수혈인과 마법사를 넘어, 황궁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조차 품는 의문이었다. 심지어 대장군부의 수장도, 마법부의 수장도 알지 못했다.
혹자는 그 능력을 이어받은 그레하임의 후손이 황궁 안에 머물면서 모든 그랑버드를 통제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의 후손인 네르하임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녀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랑버드를 다스릴 정도까진 아니었다.
게다가 룰포가 알기로 네르하임은 지금 초원 접경 지역에서 성주로 있으면서 제국에 투흔마를 보급하는 일을 맡은 터.
“…….”
룰포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황제 앞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로서도 ‘거조상황판’을 보는 게 꽤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칙명부 수장께선 긴장을 푸시지요.”
카랑카 중 카랑이 룰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긴장은 무슨.”
그때, 피이이이잉 소리와 함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양옆으로 대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은 길 한가운데, 카랑카의 바로 앞으로 갑자기 투명한 구(球) 나타난 것이다.
커다란 유리구슬 같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었다. 투명한 구의 내부 한가운데에 떠 있는 기이한 사물. 핵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두근! 두근두근두근!
순간, 룰포는 자신의 심장박동에 변화가 생긴 줄 착각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가 ‘거조상황판’을 볼 때마다 번번이 하게 되는 착각. 심장박동 소리가 점점 커다랗게 울렸다.
두근두근두근!
룰포의 눈앞에는 벌떡거리는 심장이 있었다. 투명한 구 안에 떠 있는 심장은 본래 크기보다 확대된 상태.
룰포가 알기로는 처음 적출됐을 때, 마법과 약물을 통해 확대된 거라 했다.
‘그레하임의 후손이라고? 범인(凡人)들의 상상력이란… 늘 온건한 법이지.’
룰포는 비웃었다.
그레하임이 죽은 뒤에도 제국이 여전히 그랑버드를 지배할 수 있는 이유. 그 비밀은 이 적출된 심장에 있었다.
기꺼이 릴리크에 헌신했던 그레하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했다. 헌신이라는 그 말에 자신의 심장이 적출된다는 것까지 포함될 줄은.
두근두근두근.
“오, 그레하임. 오랜만이야. 널 볼 때마다 내 참 편안해진단 말이지.”
텔마흐의 나직한 한마디가 울린다. 그 말에 반응하는지 그레하임의 심장이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듯했다.
거조상황판. 그것은 살아 있는 채로 적출당한 그레하임의 심장 그 자체였다.
오래전에 죽은 그레하임이었으니 룰포로서는 그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이곳에만 오면, 고통에 차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릴리크의 빛나는 길을 열었던 시황(始皇)께선 참으로 존엄한 결정을 내리셨던 겁니다.”
거조통제관 카랑이 말하고 랑카 또한 실실거렸지만, 텔마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현재 대륙에 퍼져 있는 그랑버드들 상태나 띄워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카랑카가 두 손을 구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투명한 구의 표면이 순간 물컹거리는가 싶더니, 카랑카의 팔을 받아들였다.
심장을 건드리지 않은 채 두 팔을 마구 움직이는 카랑카. 도합 네 개의 눈동자에는 진지함이 서렸다.
푸드드드드.
이윽고 변화가 일어나는 그레하임의 심장. 괴이한 소리와 함께 심장에서 혈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뻗어 나온 수십 개의 혈관은 투명한 구의 표면으로 향했다.
이 혈관 하나하나가 각 그랑버드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저기가 필리아르크인가 보군.’
열 개가 넘는 혈관이 모이는 곳. 필시 그곳이 제도 필리아르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 그랑버드 중 3할이 집결해 있었으니.
이외 제국이 굴복시킨 여덟 왕궁을 상징하는 여덟 첨탑 위에 각 1기씩, 동서남북의 제도방위 군영과 각 요충지에도 1기씩 존재했다.
제도를 제외하면, 그랑버드들은 대륙 곳곳에 고르게 흩어져 있는 셈이었다.
프스스. 프스스.
혈관들 중 몇몇은 투명한 구 표면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이는 현재 그랑버드가 이동 중이라는 걸 의미했다.
“몇 시간 전 제도를 벗어나 초원 접경 지역으로 향하는 이 그랑버드에, 대장군이 타고 있습니다.”
카랑의 설명이 이어졌다.
“대장군을 태운 그랑버드까지 합하면, 현재 북부2군단에만 그랑버드 세 기가 대기하게 됩니다. 이 정도면 작전 수행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기라면 만에 하나 북부초원에서 돌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안정적으로 제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때.
“……?”
거조통제관 카랑카의 행동이 룰포의 시선을 끌었다. 카랑카의 두 손이 그레하임의 심장 왼편에 머물면서, 마치 허공에 바느질을 하듯 움직여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쪽엔 구의 외면까지 뻗어 올라가지 못한 혈관 하나가 살랑대고 있었다. 카랑카의 손동작 때문인지, 중간이 잘려 있는 혈관의 끝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룰포가 물었다.
“뭐 하는 거지, 카랑카?”
“그랑버드 하나가 새로 태어나도록 하는 겁니다.”
“그랑버드의 숫자는 변동될 수 없는 거 아니었나?”
그레하임이 죽기 전까지 통제할 수 있는 그랑버드는 모두 40기. 그리고 심장이 적출되면서 제국이 유지할 수 있는 그랑버드의 숫자도 그와 같았다.
“그렇죠. 얼마 전에 한 놈이 죽지 않았습니까. 아, 얼마 전이라고 할 수도 없겠네요. 한 2년쯤 전이이니까.”
2년 전에 그랑버드가 죽는 일이 있었던가. 룰포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카랑카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 암살검가의 가주가 직접 죽이지 않았습니까. 법무대신 암레트를 암살하는 과정에서.”
그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났다. 필리몬드에서 있었던 ‘표백의 아침’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필리몬드의 백색탑 상공엔 암레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러나 실상은 그를 감시하는 역할로 그랑버드가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세이렌이 암레트를 죽이는 과정에서 그 그랑버드를 죽여 추락시킨 것이다. 백색탑 아래로 떨어진 그랑버드로 인해, 대륙 곳곳에 파다한 소문을 남겼던 사건이었다.
“죽일 땐 한순간이지만, 그랑버드 하나 태어나게 하는 데엔 2년이 넘게 걸립니다. 이렇게 제가 공을 들여야 하지요.”
룰포는 카랑의 말을 무시했다. 폐하 앞에서 저딴 소릴 지껄이다니, 재수 없고 건방졌다.
하지만 룰포로선 어찌할 수 없다. 거조를 통제하는 능력 하나로 목숨을 부지하는 저놈이 황제의 눈 밖에 나기만을 기대하는 수밖에.
그래도 랑카는 우직한 면이라도 있으니, 목을 자른다면 카랑의 것만 자르면 좋겠다고 룰포는 생각했다.
“폐하, 이 작전에 대장군이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인지요?”
룰포는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개척 작전에 대한 정보를 드러냈으니, 질문의 권리도 주어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대장군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랑버드라는 이동수단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그랑버드를 타고 출정했다는 것은, 이번 개척 작전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대장군이 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리라.
군단장에게 중요한 물건을 전달하거나, 황제의 명을 전하는 등. 다양한 경우가 룰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장군은 북부2군단장과 함께 이 작전을 시찰할 거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경우엔 직접 상황을 통제하겠지.”
문제가 발생할 경우라.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만큼, 문제가 발생한다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대장군이 통제하는 상황이 오는 것부터 이미 작전은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부분에서, 룰포는 황제가 자신에게 개척 작전에 대한 정보를 드러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이는 간단하고 쉬웠다.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칙명부가 나서야 한다는 뜻이겠지.’
* * *
제국의 대장군이 히클리온으로 향하고 있는 그 무렵.
드넓은 투흔초원의 한쪽에선 작은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림자 하나가 초원 위로 길게 늘어진다. 지나가는 누가 이를 보았다면 여행자라 착각했겠지만, 모닥불에 비쳐 주홍빛으로 물드는 얼굴은 사람의 형체가 아니었다.
“…….”
표범의 모습을 한 수인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모닥불을 바라봤다. 이따금 발톱으로 장작을 헤집었는데, 그때마다 불티가 허공에 흩날렸다.
적색의 표범. 그는 며칠 전 루빈과 흩어져 홀로 초원으로 들어온 쿤달리트였다.
‘얼마 만에 수인화인지 모르겠군.’
문득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이나 오래된 기억이었다.
수인화는 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흔족이 택한 금기. 그래서 열네 살의 의례 때 딱 한 번 수인체가 되어보고는, 그 이후론 평생 그 모습을 멀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쿤달리트라고 다르지 않았다.
‘30년도 더 된 것 같은데.’
어색한 것도 당연했다. 이렇게 수인체의 모습으로 초원 위를 주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금기는 깨졌습니다, 쿤달리트. 초원을 지키려면 이제 투흔인 모두가 강해져야 할 겁니다.’
루한 멜라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만 벌써 수십 번째였다.
‘제기랄.’
제국군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줬던 그 검은머리 감찰관과는 접경 지역까지 함께 이동했던 터.
그 과정에서 루한은 오크 군단과 극지 괴수를 통해 초원을 깨끗이 비워내려는 제국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또한, 대족장이 ‘침묵의 맹세’를 깨고 ‘포효의 맹세’를 내놓았다는 것도.
쿤달리트가 초원으로 안전하게 틈입하는 것까지 도와준 감찰관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기 위해 접경 지역에 남았다. 바로 면역 무효화 약물을 얻어내는 일이라 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몸 안에 펠키온의 할아비 영혼을 품고 있는 자. 제국감찰관이지만 제국에 검을 겨누고 있는 자.
‘내가 당신들의 운명에 끼어든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어째서 투흔의 운명에 목숨까지 거느냐고 물었을 때,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참 아리송했다.
투흔을 위해 그가 목숨을 거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를 위해 투흔이 싸워주는 것이기도 하다니.
‘투흔이 끝내 제국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 그렇게 이 대륙에 대항의 뿔나팔을 불어야 세상에 움츠린 자들이 하나둘씩 깨어날 겁니다. 그게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는 최초의 움직임이 되겠죠.’
그때 보았던 검은 눈동자엔 왠지 모를 슬픔이 범람하고 있었고, 동시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마치 제국에게서 모든 걸 빼앗겼었던 사람의 그것처럼.
그때만큼은, 그 눈동자만큼은 제국인이 아닌 투흔인의 것처럼 보였었다.
프스스슷-
쿤달리트는 물을 뿌려 모닥불을 꺼버렸다. 그의 뒷발이 미처 꺼지지 않은 불씨를 짓밟자, 피어오르던 연기마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어쨌거나, 결국 투흔족 모두가 수인체가 되는 날이 온 거지.”
그는 중얼거리며 새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들의 터전이 사라질지도 몰라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하늘의 문신’이 더 영롱해보였다.
불현듯 죽은 누블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라유비아의 어미이자, 제국인을 사랑했던 내 동생.
그와 누블라와 이마카룸은 한 살씩 차이가 나서, 쇄골부족 안에선 삼총사로 유명했었다. 셋 중 가장 늠름하고 강인한 건 늘 누블라였고.
가장 나이가 어린 누블라가 열네 살의 의례를 맞이한 날,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인화를 해보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모든 투흔족이 마음껏 수인화를 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마 둘 중 하나겠지? 투흔의 미래가 끝장나거나, 아니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거나.’
늘 그랬듯,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쿤달리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길고도 짧은 휴식이 끝났으니 다시 출발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쇄골부족 영역을 향해 걸으면서, 가만히 기원했다.
‘부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