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36)
암살검가 로이넨-236화(236/258)
제236화. 전운과 적운
쿤달리트가 적색 표범의 수인체로 다시 초원을 주파한 지 얼마나 됐을까.
“……!”
뭔가가 느껴져 질주를 멈췄다.
두두두두두두두.
수인화 덕분에 더 섬세해진 그의 감각으로, 초원의 진동이 전해졌다. 투흔의 해일인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투흔의 해일은 아닌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초원의 숨결을 몸 안 가득히 집어넣었을 때. 그는 익숙하고도 애틋한 투흔마의 냄새를 맡았다.
‘투흔마가 있어. 꽤 많이.’
이 부근에서 투흔마가 떼를 지어 이동한다니. 뭔가 이상했다. 투흔의 다섯 부족은 계절별로 옮겨 다니며 말을 목축하지만, 현재 쿤달리트가 멈춘 곳은 어느 부족의 영역도 아니었다.
‘설마.’
쿤달리트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쳐다봤다. 그제야 원을 그리고 있는 새가 눈에 들어왔다.
새의 모습은 좀 독특했는데, 깃털로 몸을 감쌌긴 했어도 다리는 인간형이었다.
‘눈동자부족!’
독수리를 수인체로 하는 투흔인들이었다.
이윽고, 하늘에 떠 있는 눈동자부족 사람 쪽에서도 쿤달리트를 알아본 것 같았다. 날개를 퍼덕거리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쿤달리트? 맞네! 쿤달리트! 네가 이쪽을 지나칠 거라더니 정말이었잖아!”
“어, 너는… 탈라스쿤?”
쿤달리트라고 눈동자부족 사람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아는 건 아니지만, 이 걸출한 젊은이와는 안면이 있었다.
눈동자부족의 차기 부족장으로 내정됐던 자였다. 부족장들끼리 만나는 자리에서도 자주 어울렸었다.
“그런데,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단 말이야?”
“대족장이 알려줬거든.”
그러고 보니, 루빈과 하네케는 소통이 가능했고 하네케는 라유비아 곁에서 육화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쪽에서도 쿤달리트가 초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럼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 말에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내젓는 탈라스쿤이었다. 크게 펼친 날개가 쿤달리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건 아냐. 지금 나는 무릎부족 사람들의 투흔마를 이동시키는 걸 돕고 있었어. 하늘에 머물면서 혹시라도 제국 놈들이 나타나는지 살피는 중이었지.”
그러고 보니 하늘엔 탈라스쿤 말고도 다른 눈동자부족 사람들이 대열을 이루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아, 그래서 투흔마의 냄새가 났었던 거구나.”
잠시 후, 수천 마리의 투흔마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투흔마 행렬 틈틈이 보이는 우람한 근육의 캥거루 수인들. 그들이 바로 무릎부족 사람들이었다.
저쪽에서도 쿤달리트와 탈라스쿤을 발견했는지, 무릎부족 사람 하나가 캥거루 특유의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누구지 싶었지만 알고 보니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캥거루 수인으로서의 모습을 몰라봤을 뿐이었다.
“쿤달리트. 돌아왔네.”
귀에 익은 낭랑한 목소리. 현재 무릎부족을 이끄는 ‘바하나’였다. 쿤달리트가 계속 긴가민가해 하자 그녀는 수인화를 끝내며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안, 바하나. 못 알아봤어. 무릎부족의 수인체는 처음 보는 거거든.”
“나도 내 모습이 어색한데, 너라고 안 그러겠어?”
“그건 나도 그래. 내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서 튀어 올랐다니까.”
쿤달리트의 말에 다들 공감하며 웃어댔다. 쿤달리트는 두 사람을 보자 ‘포효의 맹세’가 시작됐다는 게 실감이 갔다.
“근데 이 모습으로 있으면 너무 편안한 것도 사실이지.”
바하나가 기다란 캥거루 꼬리를 살랑대며 말했다.
“너무 오랫동안 참아왔던 거야.”
맞는 말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지는 또 하나의 모습을 그저 감춰왔던 것이다.
“근데 바하나, 말들을 어디로 이동시키는 거야?”
“일단은 송곳니부족의 영역으로.”
“송곳니부족의 영역?”
“우리가 이기려면 전장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게 대족장의 생각이거든. 투흔마들을 제한된 전장 안에서 활용하려고 집결시키는 중이야.”
바하나는 생각났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아, 정확하게 말하면 대족장보다는 그 할아범의 생각인 거지.”
“할아범?”
대족장 이냐키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대족장이 부족장들을 모두 모았을 때, 같이 온 전술가 할아범. 엄청 똑똑하던데! 코후르트랑 마냐스크가 완전히 깨져버렸지.”
코후르트와 마냐스크. 각각 발등부족과 송곳니부족을 이끄는 자들이었다.
알고 보니, 대족장이 모든 부족장들을 모아놓고 투흔의 위험에 대해 말하는 그 자리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말 그대로 약간의 갈등으로 끝났지만, 어쩌면 심각한 내분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었다고 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코후르트랑 마냐스크, 걔네들은 대족장의 뜻에 따르지 않으려고 했어.”
듣고 있던 탈라스쿤이 말했다.
어쩌면 예견된 과정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침묵의 맹세’를 깨는 일이었다. 투흔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으니, 아무리 대족장의 말이라도 그걸 쉬이 따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싸움이 있었던 거구나.”
“걔네 둘이 어떤 놈들인지 알지? 전술가 할아범이 뭘 증명해보이기도 전에 그냥 미친 오크처럼 달려들었지.”
무효화된 투흔의 해일을 증명하는 것. 그게 대족장과 하네케의 애초 계획이었지만, 하네케는 두 부족장의 공격부터 맞닥뜨려야 했다.
심지어 수인화한 상태였다고 했다.
“너, 발등부족이랑 송곳니부족 수인화 본 적 있어?”
“어렸을 때 한 번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
“코후르트는 저기 저 장벽 위에 있는 골렘보다도 큰 코뿔소로 변했고, 마냐스크는 악어인간으로 변했어. 살벌하더라. 그 상태로 달려든 거야.”
하지만 상황은 코후르트와 마냐스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7성의 경지를 지닌 하네케가 코뿔소 수인 코후르트를 제압하는 데는 잠깐이면 족했다.
그나마 악어 수인 마냐스크는 무인의 기질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하필 하네케를 도와 그를 막아선 사람이 이마카룸이었다.
도울 필요가 없긴 했지만, 하네네에 대한 쇄골부족의 신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역시 ‘투흔의 바람’이더라. 엄청 강해.”
“그 다음엔?”
무력으로 압도했다고 해서, 발등부족과 송곳니부족이 ‘포효의 맹세’에 곧바로 찬동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 다음엔, 극지바퀴를 두고 증명을 했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투흔의 해일’에 죽지 않았던 극지바퀴. 쇄골부족이 그랬듯, 부족장들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후르트와 마냐스크는 마지막 반대에 나섰다.
제국의 계획이 사실이고 하네케가 강한 것도 사실이지만, 몰아쳐올 오크와 괴수들로부터 지켜주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또 대결을 했지.”
“어떤 방식인지는 몰라도, 결과는 알겠네.”
“맞아, 거기서 그 전술가 할아범이 모두를 납득시켰거든.”
“바하나, 네가 계속 하네케를 전술가라고 하는 걸 보니까 뭘 보여줬는지 알 것 같다.”
“아, 맞아! 그 사람 이름이 하네케였지. 넌 그 할아범을 잘 알지?”
“나도 잘 아는 건 아냐. 본 적도 없으니까.”
“본 적도 없다고?”
그간에 초원에서 발생한 커다란 사건들은 모두 쿤달리트가 루빈과 함께 초원을 나온 이후에 일어난 것들이었다. 라유비아의 적운, 그리고 전술가 할아범의 존재.
“이야기만 들었거든. 나는 라유비아의 적운도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어. 구름의 성이라니.”
“적운을 모른단 말야?”
“너희 둘은 이미 적운을 본 모양이네.”
“당연하지! 그날 코후르트와 마냐스크가 세 번째로 작살나는 걸 거기서 봤으니까.”
하네케가 투흔인들에게 보여준 건 그의 전술적 능력이었다.
송곳니부족장과 발등부족장에게 투흔마와 투흔인들을 내주고, 하네케 본인도 똑같이 병력을 운용하는 것.
특정한 모의 전쟁터를 구축하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하네케는 이게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송곳니부족장과 발등부족장 뿐만 아니라 모든 투흔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으니.
“정말 싱겁게 끝났지.”
“둘 다 아주 개박살이 났다니까.”
간소화한 모의 전투였다지만, 모두의 신뢰를 얻어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였다고 했다.
사실, 투흔마를 다루는 데 있어 투흔인들의 능력은 절대적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투흔초원이지 않던가.
말하자면 하네케는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적진에 들어선 셈. 그런데도 예상을 뒤집은 것이다.
이날, 하네케는 전략이란 게 무엇인지 알려줬다. 그간 보아온 투흔인들의 습성과 심리를 제대로 이용했다.
예컨대 두 부족장을 자극하기 위해 거짓으로 투흔마 시체를 만들어내고, 서로를 오인하여 공격하게 만드는 식이었다.
“그 덕분에 이제는 아무도 전술가 할아범을 의심하지 않지. 강하고, 똑똑하니까.”
다행이다. 여기에 루빈이 면역 무효화 약물까지 구해낸다면, 정말이지 초원을 지켜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맞다! 너, 송곳니부족의 영역으로 같이 가자. 거기에 가면 라유비아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적운도 볼 수 있을걸!”
바하나가 소리쳤다.
“투흔의 아이들을 모두 적운에 대피시키는 중이거든. 송곳니부족이 마지막 차례야. 그래서 오늘 아이들을 태우러 온다고 했어.”
정말이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때마침 세 사람 머리 위로 빠르게 지나가나는 구름이 보였으니까.
구름은 지상과 가까이 육박해오는 중이었고, 그 덕분에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쿤달리트의 시야를 채울 만큼 웅장하고 장엄했다.
“쿤달리트, 내 등에 타. 데려다줄게.”
탈라스쿤이 말했다. 대화하는 도중에 수인화를 풀었던 그는 어느새 다시 독수리 수인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전술가 할아범이 우리 눈동자부족한테는 뭐부터 시킨 줄 알아? 쇄골부족 전사들을 침투시키는 데 써야한다면서 계속 누군가를 탑승시키는 것만 시켰어.”
적운은 그들을 지나쳐 빠르게 송곳니부족의 영역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적운을 바라보던 쿤달리트가 탈라스쿤의 등에 올라탔다.
“그렇다면야.”
올라타기 무섭게 탈라스쿤이 팽팽하게 근육이 올라온 두 다리로 뛰기 시작했다.
바닥을 차고 오르기 무섭게 날개를 활짝 펼친다. 힘찬 날갯짓으로 공기를 밀어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너랑 이마카룸이 애지중지하던 애가 영웅이 됐으니까 행복하겠다!”
지상에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바하나의 목소리. 쿤달리트는 피식 웃었다.
적운을 확인하는 건 둘째이고, 빨리 라유비아와 이마카룸 얼굴부터 보고 싶었다. 영원한 이별일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거였으니까.
휘우우우우.
탈라스쿤이 적운의 후미에 따라붙었다. 적운의 후미에는 눈동자부족의 독수리 수인들이 무리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탈라스쿤을 발견하고는 팔을 크게 휘저어 수신호를 보냈다.
“아군이란 걸 식별해줬으니 이제 더 가까이 접근해도 되겠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네케와 라유비아의 주도하에 투흔인들은 군인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탈라스쿤은 적운의 상공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쿤달리트로선 구름을 눈 아래 두는 것도 꿈에서도 누려보지 못한 경험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구름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 그거야말로 그 눈을 사로잡았다.
구름 위에는 왁자지껄 아이들의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모두들 라유비아 또래이거나 그보다 어린아이들. 아직 열네 살의 의례도 거치지 않아 자신의 수인체도 확인하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만으로 하나의 부족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이 멍청아! 투흔푸는 그렇게 펴는 거 아니라니까!”
“그럼 네가 만든 그건, 투흔푸야? 오크 무덤인 줄 알았어.”
“코뿔소처럼 생긴 게 너 발등부족 사람이냐?”
“응, 넌 오크 머리카락이나 빗어줘라!”
티격태격하는 모습마저 쿤달리트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쇄골부족에서는 끊겨버린 지 오래였다. 역병이 돌아 모든 아이들이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라유비아였으니까.
그렇게 외롭게 성장한 라유비아가 적운의 성주로서 모든 아이들을 지켜주고 있다니.
“쿤달리트. 아무리 신기해도 내 등에다가 침을 흘리진 마.”
“아, 미안하다.”
탈라스쿤의 말에 쿤달리트는 눈물을 닦아냈다.
“저기에 라유비아가 있네. 전술가 할아범도 있고. 이마카룸은 안 보이네?”
사실, 둘은 모르고 있지만 이마카룸은 아까부터 둘을 발견하고 적운 위를 질주해오는 중이었다. 흑표의 모습으로 말이다.
한편, 라유비아는 적운을 다스려 지상에 더 가까이 하강시키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적운을 끌고 있는 엘키오와 정신적인 교감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결국 독수리 수인의 접근을 알아차린 건 하네케였다.
“라유비아, 드디어 너희 부족장이 왔…….”
탈라스쿤이 적운 위에 막 착지하고, 쿤달리트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 그 순간.
하네케 옆을 휙 지나쳐 나아가는 검은 형체. 냅다 쿤달리트를 낚아챘다.
“으악! 뭐야, 너!”
“너, 진짜 살아서 온 거야? 유령 아니야?”
바닥을 몇 바퀴나 뒹군 이마카룸과 쿤달리트. 흑표는 그 두꺼운 발로 쿤달리트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래, 살아있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쿤달리트! 우리 부족에만 제국의 죄수가 둘이나 있네! 근데 다 살아서 돌아온 거지!”
쿤달리트가 일어서며 몸을 털어댔다. 퍼석거리는 구름의 감촉에 집중하며 다시 발을 몇 번 움직여보았다.
“나는 성주로서 체통이라는 게 있어서 달려들진 못해, 쿤달리트.”
라유비아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아이들의 눈길이 이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적운의 성주는 투흔의 부족장과는 또 달랐다. 라유비아는 함선의 선장이자 전투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붙드는 정신적 지주였다.
흑혼검으로 가만히 구름을 짚는 라유비아 모습에 쿤달리트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때, 하네케가 나섰다.
“그래, 체통이 실종된 건 이마카룸이면 충분하지. 반갑군, 쿤달리트. 나야 루한의 내면에서 자넬 지켜봐왔지만, 우린 초면이지?”
“예. 하네케. 역시 펠키온이 당신을 빼닮았던 거군요.”
쿤달리트는 문득 생각나서 곧바로 물었다.
“루한 멜라스와는 이틀 전에 헤어졌습니다. 잘 지내고 있답니까?”
하네케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전운이 감도는 이때에 적진에 침투해 있는 사람일세. 잘 지낸다고 할 순 없겠지. 그래도 계속해서 귀한 정보들을 전해주고 있어. 내일이면 제국의 대장군을 태운 그랑버드가 그곳으로 도착한다더군.”
전쟁이 머지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