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38)
암살검가 로이넨-238화(238/258)
제238화. 시작하라
북부2군단 본부의 특별회의실.
제국 대장군 레먼리브는 상좌를 차지하고 앉아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회의용 탁자에 올라온 찻잔을 만지작대면서 회의실을 둘러봤다.
참모와 부관들을 동석시키지 않는 내밀한 자리였다. 참석자는 모두 셋. 대장군 레먼리브와 북부2군단장 덤프 그리고 칼란타 군영의 임시 부관 네르하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섯이었다. 루빈과 루빈의 내면 속 하네케까지 포함해야 하니.
-너도 많이 늙었군, 레먼리브.
죽은 대장군이 산 대장군을 향해 말했다. 들리지 않을 말이 분명한데도 마치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수련을 게을리했구나.
‘그렇게 느껴지세요?’
루빈이 물었다. 특별회의실 주변으로 삼엄한 경비를 뚫어내고 지금은 벽에 스며들어 있는 루빈. 그 어느 때보다 은신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군인으로서 더 높이 올라갈수록, 무기를 움켜쥐는 시간이 줄어드는 법이지.
하네케 역시 그랬으니까. 군단장에 이어 대장군까지 올라섰으니 너무도 신경 쓸 게 많았을 터.
-나야 대장군으로 있으면서 게을리했던 수련을, 죽고 나서 몰아서 한 셈이지만.
그는 레먼리브가 그 경지의 정점을 찍었던 시절을 알고 있었다. 그때와 비교해보자면 ‘층’까진 아니더라도 두세 ‘계단’은 내려온 성싶었다.
간신히 7성에 걸친 정도랄까. 그래서 그런지 하네케에게선 왠지 모르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래도 저 팔에서 뿜어지는 기운은 대단한데요. 왜 ‘은벽의 기계수’라 불렸는지 알 것 같습니다.’
녹슬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7성의 무인이니까. 특히 그의 기계수는 암연에 공명을 일으킬 정도로 선명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때.
“덤프, 시작 해.”
대장군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 말에 덤프 장군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르하임이 신기한 듯 덤프를 바라봤다. 잠잘 때 빼고는 손에서 담배를 놓지 않는다는 그였는데, 아침부터 그에게선 담배 냄새 하나 나지 않았다.
역시 대장군과 동석하는 자리에선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번 ‘일몰 작전’은…….”
덤프 장군의 보고가 이어졌다. 현재 장벽 괴수들의 면역 정도를 비롯해, 예상 가능한 전개들을 죽 나열했다.
“지금 투흔인들의 동태는?”
“장벽을 넘나드는 그랑버드를 통해 관찰해본 바, 평상시와 똑같습니다.”
루빈이 전해준 정보에 따라, 하네케는 투흔인들의 거주 환경을 평소와 똑같이 유지해 두었다.
각 부족의 영역에 투흔푸를 그대로 두었고, 겉으로 보기엔 구성원들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게끔 일상적인 모습까지 연출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눈동자부족의 독수리 수인들 덕분에 그랑버드의 움직임은 이쪽에서 먼저 파악하고 있었으니, 기만 작전은 주효해 보였다.
“…장벽과 가장 가까운 곳이 쇄골부족의 영역입니다. 예상 소요 시간 1시간. 그 정도면 괴수에 의해 모두 몰살될 것입니다.”
“적당하군.”
“괴수들의 이동속도로 보자면, 쇄골부족 섬멸 후 가장 근접한 부족의 영역까지 약 하루가 소요됩니다. 괴수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지면 더 소요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괴수들의 이동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방법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랑버드를 통해 괴수들을 몰아가는 방법이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레먼리브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작전의 첫 번째 목적은 면역 약물의 최종적인 검증이다. 괴수들이 마음껏 헤매게 놔둬. 어차피 놈들은 뜯어먹을 고기를 찾아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투흔인들을 섬멸하는 역할은 따로 있잖나?”
자연스레 네르하임이 나설 차례가 되었다. 네르하임은 칼란타 군영에 배속된 이후로 관찰하며 분석해온 것들을 말했다.
그다음엔, 오크 수송 작전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설명했다. 다섯 부족의 영역이 그려진 상황판이 동원되었고, 오크들의 전개 방향도 직접 그려나갔다.
모든 정보가 적장 하네케의 머릿속에 입력되고 있는 줄도 모르면서.
“그, 오크 지휘관. 이름이 기억 안 나는군.”
“칼란타입니다.”
“그래. 그자가 날 보고 싶어 할 거 같은데, 맞나?”
“…그렇습니다.”
레먼리브는 잔잔하게 웃었다.
대장군부가 오크 군대를 양성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는 건 그리 좋지 못했다. 대장군이 직접 관여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놈 얼굴은 모든 게 마무리된 후에 보도록 하지.”
모든 게 마무리된 후. 즉, 오크 군단이 성공적으로 초원 청소를 끝마치고, 쓸모를 다한 놈들을 그 자리에서 섬멸하게 되는 때를 말했다.
다만, 그즈음엔 대륙에 대대적인 선전 자료가 퍼져나가 있을 것이다. 투흔인들이 괴수와 오크에게 몰살됐으며, 제국군은 악의 군단을 심판하기 위해 출정할 거라고.
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레먼리브가 손잡이가 달린 철제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것이다.
“귀관들은 ‘일몰 작전’ 이후의 계획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레먼리브는 기계수로 철제 상자를 쓱 쓸어보았다.
저 안에 뭐가 담겨있을지 루빈은 알 것 같았다. 면역 무효화 약물이리라. 바로 이 전쟁의 또 다른 판도를 가져올 물건이었다.
“대장군, 면역 무효화 약물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철제 상자를 여는 레먼리브. 잠금장치는 간단했다. 딸각 소리와 함께 곧바로 열렸다.
“폐하께서는, 이 약물의 보안을 위해 1급 마적석을 내어주려 하셨다. 물론 나는 차마 그 뜻을 받들 수 없었지.”
“…….”
대장군은 자신의 목 뒤편을 툭툭 건드렸다.
“1급 마적석이 얼마나 귀하고 숭고한 것인지 귀관들도 알 터. 그런데 이 작전엔 이미 1급 마적석 하나가 쓰이고 있다. 바로 오크 군단장의 모가지에 말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지원을 받는다면, 군단급 작전을 지휘하는 자로서 치욕이지 않겠나?”
마침내 상자 뚜껑이 열렸고, 약물이 채워진 작은 유리병 10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덤프, 나와서 이걸 받도록.”
덤프 장군이 저벅저벅 걸어 대장군 앞에 섰다.
“북부2군단 내에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딘가? 어차피 귀관은 작전을 살피러 나갈 테고.”
“현재 운영되고 있는 제한구역 내에 특별제한구역을 구획하겠습니다. 정예 병사들이 지키도록 조치해두겠습니다.”
“5성 경지의 장교도 둘 이상 배치해.”
결국엔 예, 라고 대답했지만 덤프 장군은 살짝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오크를 내세울 뿐 제국군이 직접 작전에 나서진 않는다지만, 5성급 장교는 군단 내에서 중요자원이었다.
그만한 경지를 지닌 자들 대부분은 고위장교에 속했다. 둘씩이나 빼놓아 배치시킬 필요가 있을까.
덤프의 머릿속에 그런 의심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까지 작전의 진행 상황은 완벽해 보였다. 소수 인원을 제외한 누구도 ‘일몰 작전’의 존재조차 모른다.
더군다나 저 면역 무효화 약물을 누군가 탈취한다 해도, 그걸 어디에 쓰겠는가.
‘뭐, 어쩔 수 없지.’
이윽고, 철제 상자를 받아들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덤프 장군.
“대외적으로 내 일정은 북부 3개 군단 시찰이다. 그 기간은 2주이고, 여기 북부2군단 말고도 나머지 두 곳을 더 들러야 하지.”
그러면서 대장군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한 지점에서 멈춰섰다. 루빈이 스며들어 있는 지점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장군이 도약한다면, 곧장 닿을 만한 거리였다.
‘설마… 알아차린 건가?’
숨죽인 루빈은 공격에 대비했다. 여기서 들킨다면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다.
“…….”
대장군의 눈길이 벽 쪽으로 향하더니-
“이틀 뒤가 좋겠군.”
“예?”
다시 몸을 돌렸다.
다행히 루빈을 발견한 건 아니었다. 루빈이 암연의 경지 6성에 등반하지 않았다면, 대장군이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대장군은 돌아서서 덤프와 네르하임을 바라봤다.
“작전의 개시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틀 뒤 해가 지는 그때, 극지 장벽을 개방할 것이다. ‘투흔의 해일’에 면역을 갖춘 5천의 괴수들을 들이고, 장벽은 다시 닫는다. 그리고 날이 완전히 저물면 오크의 수송도 시작하도록.”
회의실을 나가기 전, 대장군은 덤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개시 시점을 정해주었으니 이제 작전의 수행자는 덤프 장군이 되는 것이다.
“그 오크가 광기에 빠질 만한 일은 없겠지만, 혹여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잘 처리하도록.”
네르하임에겐 그런 말을 남긴 뒤, 대장군은 회의실을 나갔다.
-이틀 뒤, 해가 질 때.
하네케는 다시 한번 시점을 확인했다. 대장군의 지시는 선전포고라 할 순 없지만, 하네케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결전의 시작인 것이다.
‘하네케, 저는 면역 무효화 약물이 제한구역으로 옮겨지는 대로 탈취를 시도하겠습니다. 아마 작전이 개시된 이후일 겁니다.’
-그래, 대량생산을 하려면 오크들이 군영을 비운 다음이어야 하니까. 그 전까지 우리의 계획이 알려지면 안 되겠지.
‘최대한 앞당겨보도록 할게요. 그때까진 투흔의 순수한 전력으로 버텨내야 할 거예요.’
-첩보전에서 이만큼 우위에 있는데, 지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래도 많은 투흔인들이 목숨을 잃을 겁니다.’
-알고 있네. 그리고 모두가 그걸 각오하고 있지. 라유비아도 마찬가지.
* * *
이틀이 지났다.
그사이, 대장군 레먼리브는 북부1군단과 북부3군단의 시찰을 이어나갔다.
당연하게도, 장군들은 대장군의 일정이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초원 개척이라는 엄청난 작전이 숨겨져 있다는 것도.
“대장군님.”
레먼리브가 북부3군단장으로부터 북부 왕국들 내에 정치 흐름과 최근 군사력 추이를 보고받고 있을 때였다.
참모가 조심스레 다가와 몸을 낮추었다.
“예정대로, 장벽 개방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10분 후 개방됩니다.”
“그러고 보니, 날이 저물고 있군.”
레먼리브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 북부3군단장과 그 휘하 장교들 전부가 창밖을 바라봤다.
그 시각, 극지의 장벽.
지이이이이잉.
장벽 위를 지키던 골렘들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반응을 일으켰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작동을 멈춰버렸다. 초원 안으로 틈입해오는 괴수를 제거하는 임무. 그것이 중지된 것이다.
해는 지평선으로 떨어져 내렸고 어둠이 몰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굉음과 함께 장벽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쿵.
맞닿아 있던 장벽들이 틈을 넓히며 문을 개방한다. 그리고 장벽이 열리기 무섭게, 극지의 괴수들이 초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후다다닥 내달리던 극지바퀴가 터져버렸다. 투흔의 바람 때문이 아니다. 거대하고 포악한 또 다른 괴수가 발로 밟아버린 것이다.
처음으로 장벽이 개방된 것인데, 괴수들은 어떤 수상함도 느끼지 않았다. 그만한 지성조차 없었고, 놈들을 채운 건 그저 허기를 없애려는 욕망뿐이었다.
해일, 말 그대로 해일이었다. 댐이 무너지고 물길이 쏟아지듯, 괴수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초원의 초록색 위로, 잿빛과 핏빛의 괴수들이 빠르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크고 작은 괴수들 앞으로, 공기가 단단하게 뭉쳐나갔다. 투흔의 해일이 기마대처럼 일렬로 서서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크르르르카아아아.
크르르르!
괴수들은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서로를 뭉개고 짓이기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투흔의 해일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두두두두.
마침내 투흔의 해일이 괴수들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괴수들이 면역체를 형성한 터. 괴수들은 투흔의 해일에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바람결을 맞듯 스쳐 지나갈 뿐.
물론, 개중엔 약물을 충분히 투여하지 못해 면역체가 형성되지 않은 놈도 있었다.
그런 괴수들은 투흔의 해일에 몸이 터져버리거나 배를 뒤집고 죽어갔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일 뿐.
밀려든 괴수들 중 상당수가 살아남았다.
“이… 이럴 수가.”
독수리로 변한 수인들 중 일부가 하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족장과 하네케 덕분에 모든 걸 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범람하는 괴수들을 보니 어쩔 수 없는 공포감에 물들었다.
“정신 차려. 이제 시작일 뿐이야!”
가장 먼저 이성을 회복한 건 차기 족장 탈라스쿤이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떠는 자에게 다가가 거칠게 날갯짓하며 소리쳤다.
“우린, 준비한 대로 움직이면 돼. 자, 따라와!”
또다시, 레먼리브.
북부3군단의 시찰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대장군은 만찬장으로 이동했다.
제국군 장교들과 장교 가족들, 그리고 가까운 왕국의 일부 귀족들까지 참석한 성대한 만찬이었다.
먼 곳에서 온 귀족도 적지 않았다. 모두들 제국 대장군부의 수장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짝짝짝짝!
레먼리브가 우직함이 한껏 배어나는 건배사를 내놓자, 참석자들에게서 박수가 쏟아졌다. 대장군은 예를 갖추며 몸을 숙였다.
그러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날이 저문 뒤였다. 지금쯤이면 오크 수송 작전이 시작됐을 거라고, 대장군은 생각했다. 입안에 도는 와인 향이 참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