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39)
암살검가 로이넨-239화(239/258)
제239화. 그랑버드의 천적
“겁먹은 쥐새끼 같아 보이는데, 네르하임.”
“들뜬 걸로 생각해주시죠.”
“흠, 뭐가 무서운 거지? 그랑버드에 올라타는 게 무섭나, 아니면 초원에서 맞닥뜨릴 괴수들?”
네르하임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지휘관 오크에게는 두려움을 감지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싶다.
그랑버드에 올라타는 것? 장벽 너머 괴수들?
수송 작전이 시작되려는 이때, 그녀가 느끼는 두려움은 그런 것들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
네르하임은 난간 앞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절로 입술을 달싹이게 되는 광경이자 두려움의 원인.
인정하긴 싫었다. 제국군의 위상을 구겨버리는 셈이었으니까.
‘무슨 말들을 하는 거지, 케르르카? 크르케르카? 이런 소리로 소통이 된다니, 놀랍네.’
그랑버드에 탑승하기 앞서, 칼란타 휘하의 오크 장수들이 오크들의 투지를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그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었지만 심지어 거기에 유머도 섞여 있는 모양인지, 운집해 있는 1만 오크들은 연설 중간마다 크륵크륵 거칠게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연설의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협곡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크아! 크아! 크아!
그 모습을 보자니, 이제는 오크라는 종족에 익숙해진 줄 알았던 네르하임조차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위험하다. 본능이 그렇게 외쳐댔다. 훗날 오크마저 섬멸한다는 대장군부의 계획이 순탄하게 진행될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칼란타! 칼란타! 칼란타!
이제, 함성은 칼란타를 향한 연호로 바뀌었다. 연호에 화답하듯 군단장 오크가 네르하임 옆으로 다가와 모습을 드러내자, 또다시 협곡이 뒤흔드는 함성이 이어졌다.
“장군의 연설이 필요한 시점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네르하임은 하늘 쪽을 쳐다봤다. 어느덧 오크들을 수송해줄 그랑버드가 도착했다.
현재, 칼란타 군영이 위치한 협곡은 여러 산들이 동그랗게 모여 어깨동무를 한 것 같은 형태. 오크들은 흩어져 각각의 산꼭대기에 올라 그랑버드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그때, 칼란타가 자신의 무기인 도끼와 해머를 어깨 위로 들어올린다. 칼란타가 연설을 시작하리란 걸 알아챘는지, 오크들의 함성이 뚝 끊겼다.
“(오크를 위한 새로운 땅이 기다리고 있다! 릴리크의 저 거대한 날 것에 올라라. 깃털을 밟으며 제국을 향한 복수심을 키워라!)”
길지 않은 말이 이어졌다. 오크의 언어를 모르는 네르하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한 거죠?”
“투흔인을 죽이고, 괴수를 죽이며 피의 축제를 즐기라고 했다.”
“피의 축제라. 오크다운 어휘네요. 어쨌거나 병사들 가슴을 울리는 데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요.”
쿵! 쿵! 쿵!
한쪽 발에 힘을 주며 바닥을 내리치는 오크들. 전의를 불태우며 각각 정해진 방향으로 흩어졌다.
“우리도 가지.”
칼란타는 산 정상에 올라, 그랑버드를 내려다봤다. 여러 방향에서 뻗어 나온 도합 스무 개의 가교. 그 끝에 닿게끔 그랑버드가 머무르고 있다.
우르르르르.
오크들이 빠르게 가교를 건너 그랑버드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1만 오크 전원을 그랑버드 하나에 태울 수는 없으니, 5천씩 두 그랑버드에 나눠 태우는 방식.
그중 2천5백은 그랑버드의 등 위에, 나머지 2천5백은 그랑버드가 매고 있는 거대한 운반함에 올라타는 것이다.
휘이이이이이이, 쿵!
칼란타는 가교 위를 걸어 탑승하지 않았다. 산 정상부에서 그대로 도약하여 그랑버드 위에 착지했다. 그 높이만도 엄청난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이다.
“내가 그랑버드에 올라타게 될 줄이야.”
그랑버드의 등 위에서, 가만히 발아래를 눌러보는 칼란타.
정상적으로 가교를 건너온 네르하임은 인간에 비해 훨씬 크고 두꺼운 군단장 오크의 발을 내려다봤다.
“이 거대한 새가, 9왕국 시대 때 수혈인 때문에 제국의 손으로 넘어갔다면서?”
네르하임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 수혈인이 바로 네르하임의 조상인 그레하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서가 아니다. ‘9왕국’이라는 표현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9왕국이라고 했습니까, 장군? 재밌네요. 제가 배우기론 8왕국 시대인데.”
“그 시대엔 오크 왕도 있었다. 너희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랬군요. 오크의 왕국이라.”
비아냥대는 태도에 칼란타가 노려보자, 네르하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네르하임, 너의 능력으로는 이 그랑버드를 지배할 수 없나?”
“못 합니다, 저는.”
“그러면 저 조종사는 뭐지?”
“저 사람도 ‘거조통제실’에서 승인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장군이 저자를 죽인다고 해도 그랑버드를 지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죠.”
“그런 건가.”
“어쨌든, 아쉽게도 제 능력으론 그랑버드를 한 마리도 지배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저를 협박해서 그랑버드를 취할 생각이라면, 그것도 접어 두시죠.”
“아쉽구나. 네가 가능하다면, 네 심장이라도 떼어내어 그랑버드를 지배하려 했거든.”
유머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에 네르하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녀도 물러서진 않았다.
이전부터 칼란타와 각을 세울 만큼 꼿꼿했던 그녀였지만, 며칠 전에 대장군 레먼리브를 만난 다음부터는 더 의기양양해졌던 터.
“심장을 갖게 된다고 그 능력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저라도 칼란타 장군의 심장을 뜯어낼 겁니다. 저도 1만 오크를 지배해보고 싶으니까요.”
칼란타는 섬뜩하게 웃었다.
“그래, 그 정도 심장은 되어야 뜯어낼 맛이 나겠지.”
이후, 1만 오크가 그랑버드 두 기에 나누어 탑승하자 오크 부관이 다가왔다. 파열음이 뒤섞인 특유의 오크 언어가 오갔고, 칼란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르하임, 가서 그랑버드를 출발시켜라.”
이윽고 그랑버드는 조종사에 의해 상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크들로서는 생경한 경험일 텐데도 그랑버드에 올라탄 오크들이나, 운반함에 탑승하고 있는 오크들이나 모두 침착하기만 했다.
이게 지휘관 오크의 힘이었다. 일정한 권역에 속한 오크들의 사기는 고양시키고, 두려움은 반감하게 하는 것.
휘우우웅! 휘우우웅!
힘찬 날갯짓과 함께 밤하늘을 나아가는 그랑버드. 오래지 않아 북부2군단이 관할하는 초원의 경계를 넘어갔다.
“이제 착륙지점입니다. 강하합니다.”
경계를 넘어선 지 얼마 안 되어 착륙지점이 나타났다. 망설일 것 없는 오크들은 차례차례 강하를 준비했다. 운반함의 오크들부터 시작해 하나둘 빠르게 초원에 내려서기 시작했다.
중심부까지 이동할 수 있는데도 외곽을 착륙지점으로 정한 이유는, 효율적인 청소 방식을 위해서였다. 가장 가까운 부족부터 해서 순차적으로 쓸어버리기 위해.
“저놈이 네 비밀 병기인가?”
초원에 내려섰을 때, 칼란타가 가장 먼저 본 건 거대한 뱀이었다. 네르하임에게 비밀 병기가 있다 들었는데, 그게 이놈인 것 같았다.
놈은 몇 시간 전에 미리 운반된 전략 물자를 지키고 있다가, 네르하임이 나타나자 충성스러운 장수처럼 대가리를 땅에 박았다.
“이름도 있습니다. 페니악이라고 하죠. 비늘에도 독이 있으니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본래 히클리온의 네르하임 임시 집무실을 지키던 페니악. 전략 물자와 함께 옮겨진 것이다.
네르하임은 페니악의 꼬리를 밟곤 놈의 대가리 쪽으로 향하더니,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탈것이라는 건가.”
칼란타가 재밌다는 듯 그렇게 말할 때.
크르르르.
오크의 지휘관들을 위한 탈것도 준비됐다. 오크들만을 위한 기마로 알려져 있는 ‘오크토프’다. 크기는 투흔마의 두 배, 온몸은 투박하게 자라난 검은 털로 뒤덮였고, 짧고 굵은 다리를 지닌 짐승.
멧돼지와 비슷하고 또 코 양쪽으로 검은빛의 뿔이 나있기도 해서, 대륙의 동부에서는 별미로도 알려져 있다.
칼란타 군영에서는 지휘관들의 이동을 위해 초창기부터 길러두었던 것이다.
끄르르. 끄르르!
오크 부관은 그중 가장 용맹한 오크토프를 끌어와 칼란타 앞에 내놓았다. 칼란타는 오크토프의 엉덩이 쪽이 아닌, 코를 밟으며 올라갔다.
우르르르르.
모든 오크가 지상에 내려오고, 부대는 빠르게 재정비에 나섰다. 미리 도착한 전략 물자에서 각각의 무기와 갑옷을 착용한 1만 오크 병사들.
삼분하여 도열하고, 각 부대장들이 그 앞에 위치한다. 페니악에 오른 네르하임과, 오크토프에 오른 칼란타가 선봉에 섰다.
“이제 그랑버드는 어디로 가는 거지?”
거대한 운반함을 매단 그랑버드 두 마리가 다시 날아올랐다. 향하는 방향은 초원 바깥이 아닌 북쪽이었다.
“운반함을 처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장벽 너머 극지에다가 운반함을 버리려 가는 겁니다.”
“철저하군. 제국군이 오크와 엮였다는 걸 끝까지 감추려는 노력이 대단해.”
멀어지는 그랑버드를 바라보던 칼란타는 오크토프를 전진시켰다. 그러자 나팔수들이 전진을 의미하는 뿔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쁘후우우우, 쁘후우우우!
오크들이 한 발 한 발, 전열을 유지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크들한테 투여한 약이 훨씬 효과적인 것 같네.’
네르하임은 생각했다. 괴수들과 오크들에겐 서로 다른 판본의 면역 약물이 쓰였고, 그 효과를 확인하는 것도 이번 ‘일몰 작전’의 목적 중 하나였다.
괴수 판본은 투흔의 해일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아무런 파장도 일으키지 않았다. 반면, 오크 판본은 투흔의 해일조차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번엔 눈을 가릴 필요가 없다니.’
네르하임 역시 오크 판본을 투여한 상태. 어두운 밤에도 투흔의 해일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앞서 제국감찰관 루한 멜라스 때문에 초원에 들어왔던 일이 떠올랐다. 눈을 가림으로써 투흔의 해일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던 그 기억.
그러다 문득.
쇄골부족의 라유비아에게로 생각이 번졌다. 정확하게는 라유비아이 늑대에게로.
“칼란타 장군, 저랑 했던 약속 잊지 않으셨죠?”
“약속이라?”
“어제 했던 약속인데 벌써 잊으신 겁니까. 쇄골부족에 있는 늑대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 거 말입니다.”
“아, 그랬지. 잊을 리가 있나. 인간 부관에게 주는 내 봉급인데. 그런데 괴수들한테서 그놈이 살아남았을지 모르겠는데.”
네르하임은 씩 웃었다.
그녀가 탐내는 늑대였다. 지금 그녀가 타고 있는 페니악과는 다른 결의 영물이라 해도 좋을 놈이었다. 그런 늑대이니, 극지의 해일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살아남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살아있을 겁니다. 저한테 정신 지배를 당하지 않는 기이한 놈이니까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녀석이 장군에게 달려들어도 죽이면 안 됩니다.”
“나한테 달려든다라… 일단 참아보려 노력하지.”
* * *
휘이이이이이.
매서운 바람이 불어 닥치는 상공.
적운의 파수이자 라유비아의 신수인 엘키오는허공에 머무르며 적운을 끌고 있었다.
엘키오와 적운 사이에는 반투명한 쇠사슬이 놓였는데, 이상하게도 쇠사슬은 엘키오와는 한참 떨어진 허공에 떠 있었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파지지지짓.
엘키오가 권능을 발휘하여 움직일 때마다, 그 주변으로 뇌격이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뇌격이 혈류처럼 자리 잡으며 거대한 공기의 응집체가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 반투명한 쇠사슬이 놓인 자리는 바로 그 형상의 크기에 맞춘 것이었다.
“엘키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엘키오는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라유비아와 하네케가 서 있었다.
“현재 괴수들은 쇄골부족의 영역을 헤집는 중이네. 놈들을 유혹할 냄새만 풍기고 표범수인들은 모두 뒤로 빠졌지. 괴수들은 점점 장벽과 멀어지고 있네.”
“오크들을 내려준 그랑버드는?”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장벽을 향해 오고 있을 걸세. 운반함을 버리기 위해서지.”
하네케가 말했다. 그랑버드의 움직임은 이미 루빈의 첩보를 통해 파악해둔 터였다.
“밤이 끝날 쯤, 그랑버드는 운반함을 내버리고 다시 극지에서 나올 걸세. 지금까지는 모든 게 계획대로 있지. 여기서 문제라 한다면-”
“복귀하는 그랑버드를 내가 사냥할 수 있냐, 그게 불안한 거겠지.”
하네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부터 우리 전략이 빛을 발하는 거니까. 그랑버드를 죽이고, 그걸 괴수들의 유인책이자 참호로 쓴다는 것 말이네. 하지만 최우선적으로 자네가 그랑버드를 사냥할 수 있어야 해.”
적운의 파수 엘키오가 그랑버드의 천적이라는 사실. 신수가 허풍을 칠 리는 없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랑버드를 사냥한다는 게 쉬이 믿어지진 않는다.
하네케만의 불안도 아니었다. 적운의 성주 라유비아도 아직 엘키오의 진면목을 확인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가.
그러나 엘키오는 태연하기만 했다.
“걱정할 거 없어, 라유비아. 내가 사냥하는 동안 아이들이나 잘 다독여줘.”
“아이들? 혹시 적운이 요동치거나 휩쓸리는 거야?”
엘키오는 적운에 펼쳐져 있는 엄청나게 많은 투흔푸를 바라봤다.
아이들은 오늘 밤부터 ‘일몰 작전’이 시작됐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래서 다들 횃불을 피워놓고 웃고 떠들거나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아냐. 적운은 안전해. 나만 움직일 테니까. 그런데 사냥이 있을 땐 어쩔 수 없이 천둥이 치고 비가 흩뿌려질 거야. 투흔의 아이들은 비에 익숙하지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