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43)
암살검가 로이넨-243화(243/258)
제243화. 불명예
응집된 공기의 육체가 단숨에 그랑버드에게 달라붙었다.
풍뢰의 늑대가 아가리를 크게 벌려 모가지를 무는 순간, 뇌격이 쏟아졌다. 그랑버드는 뒤틀릴 뿐, 별다른 대항도 할 수 없었다.
“제기랄!”
그랑버드 탑승자들은 재빨리 움직여 겨우 늑대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왔다. 지지지직. 뇌격이 그랑버드 깃털을 타고 넘실거렸지만, 그들도 수준 낮은 무인들은 아니었다.
그랑버드가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틈에, 덤프 장군은 풍뢰의 늑대 한가운데 있는 엘키오의 본체를 발견했다.
‘저놈을 죽여야 해.’
덤프의 하나뿐인 눈이 번뜩였다. 방금 공격당한 그랑버드는 복구 불가능한 손상을 입은 모양이이지만, 그건 감수해야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여기서 저 괴이한 늑대를 놔둔다면, 앞으로 저놈은 계속해서 제국의 하늘을 침범할 터.
만약 저놈이 초원 밖으로 나온다면? 상상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그림이 그려졌다.
‘아… 설마 저 늑대가?’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기억.
언젠가 네르하임이 기이한 늑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자신의 전리품은 그 늑대가 될 거라던.
늑대는 투흔인들에겐 그다지 환영받는 짐승이 아닌데 반해, 쇄골부족의 한 여자아이가 끼고 산다는 그 늑대 말이다. 지금 눈앞에서 뇌격을 일으키며 그랑버드를 사냥하는 저 괴수가 바로 그 실체였을 줄은.
위우우우웅.
덤프의 오러가 울부짖었다. 집중하여 검격을 펼친다면, 저 본체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함께, 오러가 실린 검을 쭉 내리그었다.
“……!”
그러자 풍뢰의 늑대가 움찔거렸다.
검격은 튕겨져 나오긴 했지만, 덤프 장군은 순간적으로 응집된 공기가 출렁였음을 놓치지 않았다. 공기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찰나의 순간 내부의 늑대가 노출된 것이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공격을 이어나간다면 내부의 늑대에까지 공격이 닿을 거라 확신하는 덤프였다.
“또 막아봐라. 이 늑대 새끼야!”
이번엔 아예 풍뢰의 늑대에 달라붙을 작정이었다. 그의 오러가 매섭게 울부짖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백발노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인은 늑대 뒤쪽에서 나타나 곧바로 덤프를 향해 쇄도해왔다. 흑칠의 오러를 품은 검을 쥐고서.
노인의 일격이 떨어졌다.
콰콰콰콰쾅!
압도적인 파괴력. 덤프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 겨우 막아냈지만, 뒤로 한참이나 튕겨진 덤프는, 가까스로 그랑버드에 매달렸다.
‘강하다!’
덤프는 저릿한 손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누구지? 도대체 어떤 놈들이 제국군에 대항하고 있는 거지?
노인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곧장 다음 행동에 나섰다. 이번엔 덤프가 아닌 조종사를 노린 것이다.
장교들 틈에 섞여 뇌격을 피해냈던 조종사. 그러나 그 앞에 나타난 노인의 검격은 피할 수 없었다.
서걱!
그대로 둘로 갈라지는 몸뚱아리. 노인은 분명 조종사의 군복을 알아보고 공격을 가한 게 분명했다.
보다 못한 덤프가 소리쳤다.
“너, 너희 정체가 무엇이더냐!”
“…….”
하지만 노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늑대와 눈을 마주칠 뿐.
그러자 놀랍게도 이번엔 늑대에게서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랑버드 숨을 끊어냈다. 이걸 어디에 내다버리지?”
“지금 위치라면 그대로 떨어트려도 돼.”
노인의 말에 풍뢰의 늑대가 입을 벌리자, 죽어 축 늘어진 그랑버드가 힘없이 떨어져 나왔다. 그러곤 그대로 지상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추락에 대비해라! 모두 살아남아라! 지상에 떨어지면 저 노인을 한꺼번에 공격하라!”
장교들을 향한 덤프의 소리침이 이어졌다. 단 일격이었지만, 맞은편에 서 있는 노인은 장교들과 협공을 해야만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걸 깨알았으니까.
노인은 자신의 검과 추락하는 그랑버드를 번갈아 쓱 쳐다보곤, 덤덤히 중얼거렸다.
“그것 참 기대되는구만.”
잠시 후.
그랑버드가 지상에 떨어졌다.
콰콰콰콰쾅!
늑대에게 물어뜯긴 채로 떨어졌기에, 그랑버드 밑으로 순식간에 피의 웅덩이가 고이기 시작했다.
“…….”
덤프는 깃털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고, 단숨에 도약해 피 웅덩이로부터 벗어났다.
“…장군, 장교 셋이 죽었습니다.”
그랑버드에 함께 탑승했던 장교는 모두 여섯이었다. 추락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셋이 죽었고, 살아남은 셋 중 하나는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저벅저벅.
역시나 노인은 추락에도 살아남았다. 심지어 상처 하나 없었다.
이를 본 장교들이 대항의 의지를 보였으나, 노인에겐 가소로운 상대일 뿐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검신에 흑칠의 오러를 씌우기 시작했다.
“7성의 오러?”
장교 하나가 놀라 소리쳤지만, 노인은 태연하기만 했다.
“적장과 이리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군. 자네가 ‘일몰 작전’의 책임자인가.”
제국군은 얼어붙게 하는 한마디였다.
“그, 그걸 어떻게……!”
“첩보 능력은 그 중요성을 계속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 자네의 패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적을 가정하지 않았다는 거라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저 목소리와 생김새. 덤프가 열심히 머릿속을 헤집어봤지만, 생전 하네케를 마주했던 기억은 저 아래쪽에 처박혀 있었기에 쉬이 떠올릴 수 없었다.
그가 신임 사단장이었던 십수 년 전. 군단 시찰을 나온 대장군을 멀찍이서 바라본 경험이 전부였을 뿐.
“나는 전황을 살펴야 하는 몸이라 여기에 오래 있을 순 없네. 그렇다고 6성의 무인을 그냥 놔둘 수도 없으니 서둘러 끝내도록 하지.”
하네케가 덤프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죽음을 앞두었음을 직감한 덤프는,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왜?”
“자네에게 악감정은 없네. 하지만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비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지.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걸친 옷 때문에 죽는다는 걸세. 아,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하네케.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거 아나? 자네는 그나마 나보다 나은 신세라는 걸. 전장에서의 죽음. 장군에 오른 자에게 그만한 것보다 명예로운 최후는 없는 법이거늘, 난 그걸 누리지 못했지. 그러니 부디 명예롭게 생각하게나.”
저 말이 무슨 뜻이지? 자신이 이미 죽은 몸이라는 건가? 저가 장군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덤프에겐 의문을 더 이어나갈 작은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하네케의 공격이 이어졌으니.
콰콰콰쾅!
* * *
“으아아아아악!”
거조통제실.
단말마를 연상시키는 신음이 울려 퍼졌다. 통제실 밖을 지키던 두 수문장의 귀에까지 들려올 만한 소리였다.
철커덕.
통제실의 문이 열리고, 거혈인 수문장 하긴이 안으로 들어왔다. 큼직한 보폭으로 빠르게 대나무 숲길을 걸어가던 그 앞으로, 거조통제관 카랑카가 나타났다.
“안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통제관님?”
“아, 아냐. 잠깐 랑카와 말다툼 중이었어.”
하긴은 몸을 슬쩍 빼내어 거조상황판을 보려 했다. 그러나 거조상황판은 카랑카에 의해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하긴은 다시 한번 서늘한 눈으로 카랑카를 바라봤다.
“…….”
“아무 일도 없대도!”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조치가 필요한 일이라면 황궁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긴을 내보내고.
카랑카는 숨을 헐떡였다. 숨통이 저절로 틀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는 내달리듯 움직여 서둘러 거조상황판을 다시 띄웠다.
네 개의 눈동자 앞에 나타난 ‘그레하임 심장’. 그러나 카랑의 괴성을 불러일으켰던 참사는 그대로였다.
그레하임 심장에서 뻗어 나온 혈관이 또다시 잘려나가고 말았다. 그랑버드 탐색에 나섰던 또 하나의 그랑버드조차 죽어버린 것이다.
“웬 독수리들이 있었어…….”
카랑이 되짚었다. 그랑버드의 흔적을 쫓아갔더니 괴수들의 행렬이 나왔고,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추격 비행을 해왔다.
적어도 그때까진 조종사와의 소통도 원활했는데.
그다음 어느 순간 통신석이 불능이 되더니, 결국엔 공유되고 있던 그랑버드의 시야마저 끊어져버렸다.
“먼저 죽은 그랑버드랑 똑같아! 이번에도 갑자기 시야 공유가 끊어졌어.”
“게다가 끊어지기 직전 그랑버드가 반응하는 게 느껴졌어. 공포. 그래, 그건 공포였다고!”
카랑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상황판 위에 올라가 있던 그 손에 와닿았던 그랑버드의 공포.
그랑버드가 공포에 빠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아니, 그들 기억 속으론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제 어쩌지?”
“랑카! 생각해 봐, 어쨌든 이거… 우리 잘못은 아닌 걸로 밝혀질 거잖아, 안 그래? 웬 미친것들이 제국의 그랑버드를 습격한 거니깐!”
“그래, 그렇지.”
“이제 폐하께 말씀드려도 될 것 같아. 설마 우리 목숨이 그랑버드 두 마리보다 못하겠어?”
맞는 말이었다. 황제 텔마흐를 제외한다면, 그레하임 심장을 다스릴 수 있는 이는 카랑카 뿐이다.
그렇다고 대륙의 지배자가 매일 거조통제실 앞이나 지키지는 않을 터. 틀림없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허둥지둥 통제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부에서 수문장을 호출할 수도 있지만, 더욱 긴박한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서라도 직접 움직이는 게 나았다.
“하긴! 롬! 비상사태다, 비상! 어서 황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 * *
두두두두두두.
한 마리 말이 초원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비록 투흔마는 아니었지만, 그 속도는 그를 상회했다. 티나는 환혈족의 특성으로 ‘속도’를 지닌 몸이었으니까.
루빈과 티나.
대륙 동남부에 가짜 루빈의 흔적을 남겼던 티나와는 오크 군영에서 만났다. 루빈이 약물의 대량생산 작업을 마친 직후였다.
때마침 약물을 전달받기 위한 독수리 수인들이 도착한 것도 그 시점이었다.
약물의 양이 엄청났기에, 독수리 수인들 중 상당수가 이곳으로 투입되어야 했다. 그들은 두 명당 한 자루를 들고, 곧바로 적운으로 돌아갔다.
이후, 루빈과 티나는 초원으로 들어섰고 칼란타 군단을 쫓기 시작했다.
군단의 규모가 클수록 진군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다. 오크는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므로 그 뒤를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루빈이 착장한 ‘릴리크 팔찌’가 칼란타 몸속의 1급 마적석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으니.
“…하네케 쪽에서 덤프 장군과 조우했다고 하네.”
루빈이 말했다.
“이렇게나 일찍? 원래 작전대로라면, 덤프는 오크 쪽으로 가야 했던 거잖아.”
“저들이 계획대로만 움직인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방금 전까지 내면세계를 통해 하네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루빈.
그 덕분에, 덤프 장군을 태운 그랑버드를 조우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났는지도 알게 됐다.
“제국군 군단장 덤프가 죽었어. 하네케 손에.”
“진짜야? 그러면 작전 책임자가 죽은 거잖아.”
“그렇긴 한데, 초원의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야. 투흔 입장에선 실질적인 침입자가 섬멸된 게 아니니까.”
오크와 괴수가 여전히 초원에 버티고 있다. 물론 괴수는 하네케에 의해 유인되고 있지만, 그놈들을 섬멸하는 건 나중 일이었다.
“만약 그랑버드가 둘이나 죽은 걸 알면, 황궁에서 다른 군대를 움직일까?”
티나가 물었다. 루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기엔 명분도 없고, 충분한 준비도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까진 제국군은 ‘투흔의 해일’에 대한 면역체도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접경지역엔 대장군이 있다. 그가 현 상황을 보고받는다면, 진상 조사 때문에라도 소규모 군대 정도는 운용할 것이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네케의 의하면, 분명 대장군이 직접 움직일 거라 했다.
“따라잡았군. 앞쪽에 오크 군단이 느껴져.”
암연으로 오크를 감지한 루빈이 티나를 멈춰 세웠다.
“루빈, 네 예상대로야. 오크 군단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 누가 오크 쪽을 맡았더라? 아, 블라네랑 이마카룸이었지.”
최초 섬멸 대상이었던 눈동자부족의 영역 안에서, 오크 군단은 그저 텅 빈 투흔푸만 맞이하고 말았다.
오크 군단은 두 번째 부족을 섬멸하려 이동했지만, 그곳에서도 마찬가지.
그때, 이마카룸이 이끄는 표범 수인들이 군단의 후미를 습격했다. 그 목적은 섬멸이 아니었다. 오크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었을 뿐.
하지만 생각만큼 오크들을 혼란 속에 집어넣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이마카룸뿐만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도 블라네가 표범 수인들을 이끌고 습격을 시도했지만, 칼란타의 오크들은 끌려나오지 않았다.
“칼란타가 괜히 지휘관 오크는 아니네. 일단 신중하게 사태를 파악하는 중인 것 같군.”
루빈은 티나의 등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다음 순서로 넘어가지.”
“다음 순서? 너, 나한테 그런 거 안 알려줬는데.”
“이제 곧 오크 놈들의 수색대가 돌아다닐 거야. 다행히 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군. 저 정도라면 나도 충분히 잠입할 수 있겠어.”
“설마 그 계획. 수색대를 죽이고, 그 속에 섞이자는 거야? 오크인 척하고?”
루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티나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하네케가 괴수들을 이쪽으로 끌어오고 있는 이때, 오크들이 최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도록 전열을 흐트러 놓아야 했으니.
간단하다. 적이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경계하고 있다면, 안에서부터 흩뜨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