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52)
암살검가 로이넨-252화(252/258)
제252화. 황제의 선물
황궁.
폭발의 기운을 품은 채 긴박하게 흘러가는 투흔초원과는 상반되게, 황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장중한 음악도 끊긴 지 오래. 텔마흐는 굳이 음악을 다시 틀라 지시하지 않았다.
텔마흐는 거대한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욕조에는 정육면체의 얼음들이 가득했는데, 특이한 것은 이 얼음들이 모두 검은색이라는 점이었다.
사아아아아.
검은 얼음들 사이에서, 수증기를 피워내는 텔마흐의 몸. 이 얼음들은 몸 안의 독을 빼내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는 마법적인 독 또한 포함되었다.
그가 몸 안에 독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이는 릴리크가 왕국으로 있던 시절부터 이어져온 군주만의 세신 행위. 정확하게는, 릴리크가 암살검가와 얽힌 이후부터였다.
텔마흐는 암살검가의 진면목을 알았고, 그걸 알면서도 방심할 만큼 경솔하지 않았다.
비록 군신이자 혈연으로 얽힌 자들이라 할지라도, 암살검가 일족은 황제의 몸 안에 이름 모를 독을 틈입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이상 없군.”
깊은 한숨을 내쉰 텔마흐는, 등을 붙인 채 양팔을 난간에 올렸다.
그의 등 뒤로, 푸른 가면을 쓴 시종장이 서 있고, 시종장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칙명부 수장 룰포가 고개를 조아리는 중이었다.
황궁 내에서 텔마흐가 신임하는 두 사람.
달리 말하면, 이 둘은 황제의 절대적인 힘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황제는 기꺼이 그들에게 등을 내보이는 것이다.
“룰포.”
“예, 폐하!”
텔마흐는 가면을 벗고 있었지만, 룰포의 각도에서는 등만 보일 뿐이다.
“차기 대장군이 될 만한 이들의 후보를 추려서 보고하라. 현재 황궁에서 떠도는 하마평(下馬評)에 신경 쓰지 말고, 15년 이후까지 내다보아야 한다.”
“알겠나이다. 폐하!”
룰포는 몸을 낮추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대장군은 17명의 군단장 중에서 선택되지만, 그러기까지 철저한 검증을 거친다. 황궁의 여러 기관이 검증 주체로 나서는데, 칙명부 역시 그중 하나였다. 숨겨진 검증기관이자 신뢰도가 가장 높은 곳 말이다.
‘15년 이후라…….’
룰포는 가만히 곱씹었다. 황제가 굳이 특정 시기를 언급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 차는 존재하겠지만, 15년쯤 뒤에는 이 세상에서 암살검가가 사라져야 할 테니, 그리 명한 것이다.
암살검가와의 대전.
물론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대륙의 명가들의 힘까지 합세해야 했다.
그럼에도 토벌군의 중추가 제국군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현재 군단장 중에서 7성에 근접했다는 자가 몇이나 있었지?’
룰포는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제국군부의 인재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본격적인 선택 과정에 들어서면 칙명부의 대대적인 검증이 들어갈 것이고, 황제가 제공하는 정보들도 그에게 전달될 터였다.
‘대장군이라는 직위 특성상 굳이 절대적인 무위를 갖출 필요는 없지만.’
하필이면 전대 대장군 하네케와 현 대장군 레먼리브는, 지휘관의 면모뿐만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면모를 세상에 널리 떨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위명에 퇴색되지 않으려면 무위도 갖춰야 하는 것이다.
“폐하.”
“말하라.”
“대장군 레먼리브 퇴임을 언제 쯤으로 내다보고 계시옵니까?”
“흠…….”
텔마흐가 팔을 휘저어 검은색 각얼음들을 출렁이게 했다. 그러곤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햇빛에 가만히 투영시켰다.
“2년 뒤가 적당하겠구나. 퇴임은 명예롭게 치르도록.”
칙명부 수장은 다시 한번 몸을 낮추었다.
사실, 대장군이라는 직위가 제국의 상징이기도 한 만큼 불명예스럽게 퇴임하는 일은 드물었다.
설혹 불온한 마음을 품고 있어도 칙명부와 암살검가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돈할 수 있었다.
일례로, 하네케만 하더라도 실제와는 다르게 ‘빛의 탑’에 등재될 만큼 충성스러운 인물로 남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제부터 2년을 내다보고 교통정리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최종 후보를 고르고 그 후보의 정적(政敵)을 미리 제거해두는 것.
“…….”
황궁과 대장군부 내에서는 레먼리브의 후임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떠돌았지만, 황제가 직접 언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이번 작전의 실책 때문이겠지.’
아직까지 ‘일몰 작전’의 마무리가 어찌 날지는 몰라도, 지금 정황만으로도 책임자들의 말로는 확실했다.
덤프는 당연히 암살 대상이고, 대장군 레먼리브도 제복을 벗어야 한다.
“레먼리브, 그 늙은이가 대장군에 임명되던 때가 떠오르네.”
13년 전, 하네케 사망 직후였다. 하네케를 암살하는 결정은 그보다 앞선 시점에 정해졌으니, 차대 대장군이 레먼리브라는 건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텔마흐의 머릿속에서, 다소 감격한 듯한 레먼리브의 얼굴이 다시금 그려졌다. 노령의 나이였지만, 하네케의 흔적을 지우기엔 그만한 인물도 없었지.
“은벽의 기계수. 참 괜찮은 별명이었지. 하네케와는 다르게 내가 원하는 것도 잘 파악할 줄 알았고. 죽은 하네케를 따라잡는 것에만 집착하는 모습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말하는 내내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황제. 이미 그 마음에선 레먼리브가 배제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황제로서 새로운 대장군에게 작은 선물을 내주었다. 기계수를 개조해주면서, 그 안에 마적석 하나를 넣었지.”
“…….”
“폭발 마법이 내장된 마적석이었다. 그 기계수에서만 작동되게끔.”
룰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 정도의 경지를 지닌 이가 ‘폭발’이라 표현할 정도면, 그건 범인들 기준에서는 한 도시의 종말과도 같았다.
그런 마적석을 ‘선물’이라 말하는 게 기괴했지만, 이 또한 텔마흐다운 모습이었다.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발현되는 마적석이었다. 하나는 레먼리브의 심장이 멈출 때. 다른 하나는 기계수 출력이 100퍼센트에 이를 때.”
“그렇다면, 지금 레먼리브 대장군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과연 그게 작동하는 일이 있을까 싶다만, 어쨌든 초원을 적당히 청소해주는 데엔 모자람이 없는 셈이지.”
역시 대장군 혼자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늙은이, 예전 같지가 않아. 만약 무사히 복귀하면 기계수를 반납하도록 해야겠구나. 괜히 제도에서 폭발해버리면 골치만 아파지니까.”
그때였다.
룰포 앞으로 뭔가가 둥둥 떠오른 채로 다가왔다. 고개를 살짝 들어 바라보니, 황제의 문양이 새겨진 보검이 있었다.
황제가 염동으로 전하는 뜻.
‘누굴 죽이라는 거지?’
마치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황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레먼리브는 레먼리브고…. 이번 작전에서 실망스러운 이가 또 있다.”
“폐하, 그 배은한 이가 누구인지 말씀하시옵소서.”
“거조통제관.”
그 순간, 바닥 쪽으로 붙인 룰포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카랑카의 무례함이 늘 거슬렸던 룰포에게,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역시 폐하께서 카랑카의 실책을 그냥 넘기실 리 없지’
두 기의 그랑버드가 이유도 모른 채 죽어 추락해버렸다. 더구나 스스로 수습하려다 사태만 더 키워버린 카랑카였다.
“다만-”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둘 중 하나만 죽이도록. 놈들에게 검을 내어주고 재주껏 상대방을 죽이도록 명하라. 살아남은 놈은 2년간 죽음을 유예하되, 그사이 너는 거조통제관 자리에 적합한 자를 물색하라.”
룰포에게 또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
거조통제관은 완전한 보호와 은폐 속에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대체하는 게 불가능한 직책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그레하임의 심장’에 반응하는 이가 카랑카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 중요도만 따지면 ‘그레하임의 심장’이 중요한 거지, 그걸 다룰 수 있는 통제관은 그다음이었다.
대륙을 뒤지면 틀림없이 거조통제관을 수행할 이를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발탁되자마자 그가 살던 기존의 삶은 송두리째 사라지겠지만.
“물러가라.”
룰포가 예를 갖추며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녹지 않는 검은색 얼음의 냉기를 계속해서 즐겼다. 가볍게 손짓하자, 마적석에 녹음된 고대의 장중한 음악이 다시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률에 맞추어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황제.
그는 노회한 대장군 레먼리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룰포를 흠칫하게 했던 부분에 대해서.
사실, 폭발만이 선물은 아니었다. 레먼리브가 죽거나, 기계수의 출력이 100퍼센트에 이르면 마적석은 작동한다. 그로부터 폭발은 정확히 15분 후에 일어난다.
다만 그 15분 동안 레먼리브에게 벌어지는 일. 레먼리브는 이제까지는 디뎌보지 못했던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7성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15분 동안만 최상의 힘을 누리는 것이다.
“이 정도면 선물이라 해도 적당하지 않겠나? 인외의 영역이라는 8성 경지를 만끽하는 것인데.”
텔마흐의 말소리에 흠칫 반응했던 시종장은, 그게 혼잣말이라는 사실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물론 그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어쨌든 하네케에 대한 그대의 열등감, 그에 대한 황제의 넓은 아량인 것을.”
텔마흐는 노장을 갸륵하게 여기는 스스로에 흡족한 듯,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흥얼거림을 이어 나갔다.
* * *
주르륵.
하네케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냈다. 피를 닦아내는 팔뚝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그의 모습만 더 처참해지고 말았지만.
그는 맞은편에 서 있는 레먼리브를 바라봤다. 기계수에서 퍼져 나오는 빛무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고, 그 덕에 거구의 레먼리브가 유난히 커다랗게 보였다.
‘모든 걸 개방한 힘이라는 게… 이 정도인가.’
패배감. 오래도록 느껴보지 못한 패배감이 하네케에게 밀려들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레먼리브를 상대로 패배감을 느껴본 적 있었나? 처음 동료가 된 이래, 친교를 유지해온 전우였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해본 적 없는 상대였다.
패배감과 무력감은 그보다는 레먼리브에게 친숙한 감정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그런데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군. 나한테 절망감을 안겼다는 사실조차.”
레먼리브의 부릅뜬 두 눈과 크게 벌린 입에서는 여전히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자신을 이겨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든 걸 포기한 것이다.
“8성이란 이런 것이란 말이지.”
쿨럭. 하네케는 쏟아지는 피를 내려다봤다.
죽은 뒤로 성장하여 그 역시 8성을 내다보는 줄 알았는데, 진정한 8성의 경지 앞에서는 이토록 무력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육화된 상태에서 심장이 멎으면 어찌될까. 필시 영멸(靈滅)이리라. 루빈의 내면세계로도 돌아가지 못할 테고.
“흐으읍.”
어금니를 앙다물며 일어섰다. 어떡해든 막아야 했다. 여기서 레먼리브를 막지 못하면 모든 계획도, 숙원도 끝이었다.
레먼리브는 하네케가 다시 덤벼오기를 기다렸다. 비록 의식은 없지만, 제거하는 게 목적이 아닌 것 같았다. 절망을 느끼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건가?
“블라네! 이마카룸!”
하네케가 소리쳤다. 그제야 멀찍이 떨어져서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두 사람이 반응하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레먼리브가 의식을 놓았듯, 이제는 하네케로서도 자존심만 붙들 순 없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블라네와 이마카룸이 필요했다.
“딱 한 번 기회가 만들어질 거다. 누가 됐든, 놈의 심장을 끊어내!”
하네케가 소리치며 일곱 겹의 오러를 다시 응집시켰다.
그와 동시에, 이마카룸과 블라네가 양쪽으로 흩어져서 레먼리브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푸슉! 푸슉!
셋은 각자의 자리에서 레먼리브를 압박해갔다. 레먼리브는 과감한 건지 의식이 없어서 그런 건지, 블라네와 이마카룸의 공격에는 별다른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오직 그 목표는 하네케였다. 하네케의 공격에만 반응했고, 그의 오러만을 무력화시켰다.
“지금이다!”
정말로 그들에게도 기회는 왔다.
단 한 번의 기회.
이마카룸이 세 번째 땅에 처박힌 다음 다시 응전했을 때, 블라네가 저 멀리 튕겨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그때.
푸슉!
하네케의 검이 레먼리브의 심장에 박혀들었다. 정확히 심장이었다. 검의 손잡이가 가슴팍에 걸릴 정도로 깊숙이.
“이제… 이제 다 끝났다, 레먼리브.”
심장을 꿰뚫었으니까.
“하아, 하아.”
이마카룸도 블라네도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골랐다. 하네케도 검을 빼내려 했다.
“……!”
심장이 뚫리는 순간 멈칫했던 레먼리브.
그럼에도 기계수를 감싼 오러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심지어 더욱 강한 빛을 발한다.
“…죽지 않았어요!”
그의 죽음은 심장의 멎음과는 무관했다. 지금, 레먼리브는 기계수에 의해 움직이는 괴물과 다름없었으니까.
콰악.
레먼리브의 반대쪽 팔이 하네케의 목을 움켜쥐었다. 압도적인 힘에 의해, 하네케는 쥐고 있던 검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널, 이긴 것이다.”
기계적인 한마디.
아마 의식을 뚫고 올라온 본심이리라.
이내 레먼리브의 기계수가 어깨 위로 올라갔다. 하네케가 자신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듯, 기계수로 하네케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것이다.
그때.
슈우우우우웅.
“……?”
하네케는 레먼리브의 등 뒤, 허공에 떠 있는 한 마리의 로이네크로우를 보았다.
민트색 눈동자. 티나다. 티나가 이쪽을 향해 쾌속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등 위에는…….
“…루빈.”
하지만 제아무리 루빈이라고 해도 이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레먼리브의 기계수가 하네케를 향해 뻗어왔다.
철컥.
레먼리브와 하네케 사이에서,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내는 루빈.
충격으로 인해 두 팔이 크게 진동했다. 루빈이 지닌 두 개의 암연을 모두 활용해 공격을 막아냈다. 그런데도 이 정도였다.
“루, 루빈…. 차라리 도망을…….”
하네케가 힘겹게 말했다.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신수 엘키오와, 아직은 그 경지가 미약한 라유비아까지 덤빈다 해도 이 8성의 괴물은 이길 수 없다.
“지금의 레먼리브, 이길 수 없다는 거 압니다. 단지 멈추려는 겁니다.”
그다음 루빈이 보인 행동은 하네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기계수의 공격을 막아낸 루빈은 반격도, 회피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비검을 날아들게 해서 일부러 자신의 팔을 베었다.
그리고 피가 흘러 붉게 물든 손으로 레먼리브의 기계수를 움켜쥐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프스스슷슷…….
그걸 본 모든 이들은, 기계수에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는 걸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