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53)
암살검가 로이넨-253화(253/258)
제253화. 세 개의 군번줄
저벅저벅.
루빈은 암흑 뿐인 공간 속을 걸어 나갔다. 기계수의 폭발을 막기 위해 자신의 피를 가져다댄 순간, 그의 의식이 넘어온 곳.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공간이었다.
중얼중얼.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루빈은 그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공간 저쪽에 레먼리브가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바닥에 몸을 조아린 상태였다. 군주를 마주한 신하의 자세.
“텔마흐가 준비해둔 건가?”
마적석이 작동했을 때를 대비해서, 대장군이 황제를 마지막으로 알현하게 해주는 가상공간. 즉, 레먼리브에게 남기는 황제의 메시지인 것이다.
더욱 다가가니, ‘귀공’과 ‘감사’ 따위의 중량감이 느껴지는 단어들이 들려왔다.
“텔마흐.”
루빈이 말소리를 냈다. 그러자 레먼리브가 뒤를 돌아봤고, 마찬가지로 그 앞에 서 있던 텔마흐도 이쪽을 쳐다봤다.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표정엔 의문이 가득할 것만 같았다.
“누구냐?”
레먼리브가 소리쳤다. 뒤이어 황제의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 여긴 황족과 레먼리브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인데.”
텔마흐도, 레먼리브도 루빈을 알아보지 못했다. 레먼리브야 루빈의 얼굴을 본 적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텔마흐가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마적석에 메시지를 남겨놓은 시점이 한참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텔마흐는 아니지만…….”
루빈은 검을 빼 들었다.
“이 마적석을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알겠군. 방법이 마음에 들어. 이렇게라도 너의 심장에 검을 박을 수 있게 됐으니까.”
눈앞에 있는 텔마흐를 죽이는 것. 그게 폭발을 멈추는 방법이었다.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텔마흐였지만, 지금 이놈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힘을 지니지 않았고 어떤 이능(異能)도 발휘할 수 없었다.
“멈춰라!”
그건 레먼리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루빈 앞을 막아섰고, 기어이 기계수를 휘두르기까지 했지만-
“……!”
안개를 휘젓는 것처럼, 루빈의 몸을 휙 지나칠 뿐.
“당신은 이미 죽었어요, 레먼리브.”
몇 번을 공격해도 마찬가지였다.
루빈은 그대로 걸어가 텔마흐 앞에 섰다. 가면 너머, 샛노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다.
이놈은 거대한 폭발을 위해서만 설계된 놈이었다. 폭발을 멈추기 위해 루빈이 나타난 걸 알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덜덜덜.
루빈은 떨고 있는 텔마흐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두려움에 떠는 텔마흐라. 수천 번 그려봤던 장면이었지만, 역시나 가짜인지라 그리 통쾌하진 않았다.
그저 폭발이 실패함으로써, 저 멀리 황궁에 있는 그놈을 조금이라도 분노케 하기를.
“그… 그만둬라!”
텔마흐가 두 팔을 어깨 위로 크게 벌렸다. 그게 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위기감을 느낀 짐승처럼 몸집이나 키워대는 것.
그리고 딱 그 상태로 몸짓이 멈추었다.
루빈의 검이 가슴에 박혀 들어갔으니까.
프시시싯.
멈춰버린 텔마흐에게서 울리는 소리. 루빈은 다시 레먼리브 쪽으로 돌아섰다. 그 등 뒤로, 텔마흐의 피부 거죽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흉측하네요. 안 그렇습니까, 레먼리브?”
“…….”
질퍽한 진흙처럼 온몸이 녹아내린 텔마흐.
그 한가운데, 루빈의 검이 박혀 있는 모래시계가 놓여 있다. 폭발이 일어나는 15분 후에 맞춰졌던 것이고, 내려앉은 모래의 양으로 보자면 3분 정도 남은 시점인 듯하다.
루빈이 해체함으로써 더 이상 모래는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모래시계가 풍화되기 시작했다. 풍화가 끝나면 루빈도 이 공간 밖으로, ‘현실’로 돌아갈 터였다.
사아아아아아.
“자네가 바로… 하네케가 말한, 믿을 만한 아군인 것 같군. 자네가 결계를 무너뜨린 거겠지?”
레먼리브의 목소리는 초연했다.
황제를 앞에 두고 몸을 낮추며 예우를 다한 그였지만, 이 공간을 둘러싼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죽음.
설계된 텔마흐의 허상.
그러면서도 진심인 것처럼 텔마흐의 말을 새겨들었던 건, 본인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예우였을 뿐이다.
그마저도 난데없는 침입자가 나타나 중단되었지만.
“믿을 만한 아군이라. 더 정확하게는, 하네케의 제자죠.”
“허… 브리온 오러를 발현시킬 수 있단 말인가?”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레먼리브가 또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아는 하네케라면… 혈육이 아닌 이에게 검술을 가르칠 리 없는데?”
자신은 하네케의 혈육은 아니라는 뜻으로, 루빈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고 싶어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사이, 모래시계가 절반 이상 바람에 흩날렸다. 루빈과 마찬가지로 그쪽에 시선을 던졌던 레먼리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가 칼란타까지 처치한 건가? 그런 다음 하네케를 도우러 온 게야?”
“아뇨, 칼란타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놈을 따돌리고 오느라 애를 먹었죠. 이제 곧 괴수와 오크가 격돌할 겁니다.”
“…결국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군.”
레먼리브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네케를 이겨보려 평생을 살아왔건만.”
“마지막 싸움에선 당신이 이겼습니다. 기계수의 최대치에 다다른 덕분에.”
“아니.”
레먼리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 앞으로 기계수를 가져와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다스릴 수 없는 힘 덕분이었지, 그건 내 본연의 능력이 아니었네. 자네가 이겼다고 말해주었지만, 결국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승리감을 누릴 수도 없어.”
“…….”
“이 암흑의 공간에서 깨어나고, 눈앞에 있는 폐하를 보았을 때… 나는 후회했네.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말걸, 하고 말이야.”
레먼리브는 씁쓸하게 웃었다.
“폭주하지 않고, 그저 내 힘으로 맞서다가 하네케 앞에서 좌절하는 게 차라리 더 달콤했을 테니까. 이해하겠나?”
“…….”
루빈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오히려 루빈은, 기계수의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면서까지 하네케를 죽이려 했던 기존의 선택에 더 공감했다.
만약 루빈이 레먼리브의 처지였고, 그 상대가 텔마흐였다면… 그랬다면 루빈은 망설임 없이 폭주의 힘을 빌렸을 테니까.
그런데 왜 좌절이 더 달콤했으리라는 거지? 단지 죽지 않았을 테니까?
“저는 당신처럼 했을 겁니다.”
“누구한테 말인가?”
“텔마흐, 릴리크의 황제, 제 복수의 대상 말입니다.”
이 젊은이의 복수의 대상이 다름 아닌 황제 폐하라는 사실에 레먼리브 얼굴 위로 놀라움이 지나쳤지만, 그걸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세상의 지배자인 황제를 향한 복수의 씨앗. 그게 어디 한둘일까.
“그래, 그건 복수니까. 승부의 대상과 복수의 대상은 달라.”
“…….”
“하네케가 내 복수의 대상이었다면 나도 그리 생각했겠지만… 나에게 하네케는 승부의 대상이었을 뿐이네.”
13년 전, 하네케가 죽었다는 걸 확인한 뒤로, 더는 수련에 열중하지 않았던 레먼리브였다. 뛰어넘고자 하는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네케가 다시 돌아오면서, 그의 심장은 오래전의 열등감으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건 복수를 위한 박동이 아니었는데, 레먼리브는 그렇게 착각했던 것이다.
“…그동안 하네케에게 느껴왔던 좌절과 열등감이, 오히려 나를 움직이게 했던 원천이라는 걸 잊은 거지.”
“그리 말씀하시니, 이해가 되는군요.”
“그럼… 자네도, 하네케도 황제 폐하께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승부의 대상이 아닌, 복수의 대상인 게지?”
“기꺼이 폭주의 힘을 빌릴 만큼.”
끌끌끌. 레먼리브는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의 기계수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몇 가지 조작으로 오른쪽 어깨에서 기계수를 탈착했다.
푸슈슈슈슉. 탈착한 기계수를 자신의 앞에 내려놓는 레먼리브
“이렇게 나는 은퇴하네만, 제국의 앞날엔 먹구름이 가득하군.”
“…….”
“자네 같은 젊은 괴물과 하네케 같은 노회한 괴물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폐하께 복수를 하겠다니. 제국에 인재가 많아도 어찌 될지…….”
그들 눈앞에서, 모래시계의 마지막 조각이 공중에 떠오르며 흩날린다. 짤막한 대화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자네는 자네의 전장으로 돌아가야겠군. 하네케를 만나거든, 내 시신은 약식으로 처리해 달라 해주게. 그대들의 전장이 긴박할 테니.”
“알겠습니다.”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흑색 공간 안에 새하얀 빛이 가득 차올랐다. 마적석의 폭발 마법이 성공적으로 해체됐다는 뜻이었다.
빛은 모든 윤곽을 지워나갔다. 바로 옆에 있는 레먼리브의 모습조차, 빛에 완전히 잠겨 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루빈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 자세는 자신의 피를 레먼리브의 기계수에 묻혔던 그대로였다. 현실의 시간은 고작 1초가 지나갔을 뿐이다.
다만, 그 1초 사이에 레먼리브의 온몸은 검게 그을려진 뒤였다.
프스스슷.
“…….”
“루빈, 괜찮나? 자네가 기계수를 만지는 순간 레먼리브의 움직임이 멈췄어. 그리고 온몸이 검게 타버렸고.”
하네케가 말했다. 그는 레먼리브의 심장에 박아넣었던 자신의 검을 쓱 빼냈다. 레먼리브의 거구가 앞으로 기울어지자, 하네케가 받아주었다.
오랜 전우를 바닥에 고이 눕히는 모습에, 루빈이 말을 이어 나갔다.
“기계수가 최대치에 이를 때, 이 일대를 날려버릴 폭발 마법이 작동됐습니다. 저만 멈출 수 있었고요.”
부릅떠져 있는 레먼리브의 두 눈을 감겨주는 하네케. 그가 침음을 흘렸다.
“1급 마적석이라는 거군.”
루빈은 릴리크 팔찌를 확인했다. 1급 마적석을 감지하던 팔찌는 이제 더 이상 빛을 발하지 않았다. 기계수 안에 매장되어 있던 마적석은 폭발을 해체함과 동시에 그 쓰임을 끝낸 것이다.
“마적석을 재활용하려 했더니, 안 되겠네요. 폭발 하나만으로 가득했나 본데, 얼마나 큰 폭발이었을지.”
그러고는, 레먼리브의 유언을 전해주었다. 시신을 약식으로 처리해달라는 것.
“이놈, 남의 전쟁을 걱정하는 건가.”
하네케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 유언을 따랐다. 기계수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한쪽에 충격을 가했다. 그러자 기계수가 턱 열렸다.
안에서는 레먼리브의 빛바랜 군번줄이 나왔다. 일개 병사들은 군번줄을 목에 차지만, 장교들은 무기에 내장하는 게 제국군의 관습이었다.
군번줄을 살펴보던 하네케는 멈칫했다.
“…….”
거기엔 레먼리브 그 자신의 군번줄만 보관되어 있던 게 아니었다. 하네케의 군번줄, 심지어 그의 손자인 펠키온의 군번줄 또한 보관되어 있었다.
13년 전, 브리온가의 두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챙긴 것 같았다.
“…반역자 혈통이라더니.”
하네케는 세 개의 군번줄을 다시 돌돌 말아서, 이번엔 자신의 검 손잡이 안에 넣었다. 그는 그저 검 손잡이를 쥔 채 가만히 눈을 감고는, 낮은 목소리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었다.
“…….”
조촐한 장례식엔 눈물이나 절규 따윈 없었다. 오랜 전우와의 신의를 지키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후.
“이쯤에서 질문 하나 해도 되려나?”
이마카룸이었다.
“음?”
“이 골렘 팔 말이야. 이건 어쩔 거야?”
블라네가 인상을 찌푸렸고, 하네케는 피식 웃었다.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모를 리 없었다. 기계수를 욕심내는 건데, 사실 여러모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긴 했다.
시체는 썩겠지만, 기계수는 그러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대장군이 여기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은폐될수록 그들에게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내장된 1급 마적석은 재활용이 불가능했지만 이 기계수는 또 몰랐다. 오러의 형태를 변칙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고, 그 내구도는 7성의 검격도 막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거 쓰려면 팔 하나가 없어야 해. 그리고 대장군이나 되니까 결합이 가능했던 거고.”
블라네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때 루빈이 하네케를 바라봤다.
“하네케가 허락하신다면, 제가 일단 보관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욕심이 났거든요.”
“레먼리브 성격이라면 개의치 않을 걸세. 어차피 자네가 멈추지 않았으면 폭발했을 거였지. 안 그런가, 이마카룸?”
사실이 그랬기에, 이마카룸은 입만 들썩이며 그르렁댈 뿐이었다.
“크르르르. 이제 어쩔 거지? 저쪽은 일단 전투가 시작된 것 같은데.”
기계수를 탈착하여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는 루빈. 이윽고 다른 이들의 시선을 따라 전장을 바라봤다.
결계가 붕괴된 직후부터 내달리기 시작한 5천의 괴수. 어느덧 오크 군단과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크르르르카아!
루빈을 붙잡으려던 칼란타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괴수들 방어에 전념하고 있었다.
칼란타의 외침에 오크 군단이 호응하고, 맞은편에서는 침을 흩날리며 내달리는 괴수들이 울부짖는다.
“나는 적운으로 돌아가서 부대를 통솔하겠네. 무효화 약물의 살포도 준비해야 하고.”
“그럼 우린 지상 부대에 합류하겠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윽고, 괴수의 해일이 오크에게 쏟아졌다.
중갑의 오크들이 도끼를 휘두르고, 장창을 내찔렀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오크토프의 말발굽이 괴수들을 짓밟았다.
어느덧 태양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라 있었다. 이제, 일몰도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