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57)
암살검가 로이넨-257화(257/258)
제257화. 증명
‘여길 다시 와보게 되다니.’
블라네는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호흡할 때마다 독이 배어든 안개가 느껴졌다. 오직 로이넨가를 보호하기 위해 저택을 성벽처럼 감싼 안개. 투흔초원의 ‘투흔의 해일’과도 같다.
이전의 그녀였다면 독을 이겨내는 데 전력을 다해도 무리였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다. 오히려 안개 속을 걸을수록 그녀의 암연뢰가 더 견고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도 본가가 처음은 아니었다. ‘1차 선택’을 치렀던 아홉 살, 이곳에 와서 창고 물품을 선택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와는 엄연히 다른 입장이었다. 지금 그녀는 본가 자제 루빈 로이넨의 안내를 받은 정식 초대된 몸.
사실, 방계의 가주들이라 해서 자신의 의지대로 본가에 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정식 방문 요청이 있고, 허락이 떨어져야만 안개 성벽 안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가주들이 그러한데 방계 자제는 어떠할까.
-아가씨,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녀의 로이넨서 부르소의 전음. 그러고 보니 부르소는 블라네보다 편안해 보였다.
‘맞아, 부르소는 로이넨가의 가신 출신이었지.’
거기에다가, 불과 얼마 전에 루빈의 명령에 따라 본가에 들르기도 했던 부르소였다. 블라네에게 알맞은 원거리 무기를 구해오는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모두 암연뢰를 뛰어넘지 못해 거점창고로 분출됐지만.
-여기는 아가씨의 시험 무대가 아닙니다. 누구도 아가씨를 경계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
-그럼요, 무엇보다 루빈 도련님께서 초대하신 거잖아요.
-하지만 도련님도 여기선 똑같이 후계 경쟁을 해야 할 거잖아.
-그게 일반적이죠. 그런데 얼마 전에 본가에 와서 보니 균형추는 이미 기울어져 있더군요. 그것도 완전히.
-완전히?
일전에 본가에 들렀을 때, 부르소는 루빈을 향한 본가 사람들의 완전한 신뢰를 감지했다. 그건 자제를 향한 예우의 수준을 뛰어넘는 신뢰였다. 본가 출신인 부르소였기에 섬세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마치 충성심과 같았습니다. 가주에게만 품을 수 있는 그런 충성심이요.
-그렇다는 건, 루빈 도련님이 벌써 차기 가주가 되었단 말이야?
부르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렌이 선포하진 않았지만, 가문 내에서는 이미 기정사실처럼 되어 있었다. 특히나 직속가신 데이몬과 전설을 키워낸 로이넨서 킬리언에게조차 그리 인정받고 있었으니까.
-물론 아직 방계가문들에서는 그 정도까지 눈치채진 못했을 겁니다. 훗날 공식적인 선언이 있다면, 엄청난 파란이 일겠지요.
-출가한 지 2년 만에 차기 가주로 인정받다니…….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곁에서 루빈을 본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6성에 도달한 루빈의 경지는 그녀 가문, 크리거가의 가주보다도 한수 위. 그녀의 아버지보다도 강하다는 의미였다. 씁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버지뿐만이 아니야. 지금의 도련님이라면, 흑영들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베닉 베나르보다 강할지도 모르지.’
그런 루빈은 어째서 자신을 본가로 초대한 걸까? 도착하면 알게 될 거라 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이윽고, 안개를 모두 거쳐 나간 그들 앞으로 로이넨 저택의 정문이 나타났다.
스르륵.
문밖에서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정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직속가신 데이몬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몬은 루빈을 향해 예를 표했다.
“데이몬.”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루빈 도련님.”
데이몬은 뒤이어 블라네에게도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로이넨가의 직속가신 데이몬입니다. 크리거가의 영애를 마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련님과 함께 황명을 수행해주신 점 감사드리며, 머무르시는 동안 편안히 지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블라네가 가벼운 목례로 답하자, 데이몬이 앞장섰다.
“두 분을 위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스름홀로 가시지요. 가주님께서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 *
각종 요리가 한가득 올라와 있는 기다란 탁자. 그 끝엔 세이렌이 앉아 있었다.
루빈은 자신 옆에 있는 블라네가 긴장한 나머지 숨을 크게 들이키는 걸 알아차렸다. 불과 2주 전에 전쟁을 치르고 온 블라네조차 암살검가의 가주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돌아왔습니다, 가주님.”
“블라네 크리거, 본가 로이넨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세이렌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으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루빈과 블라네가 자리에 앉고, 쿠제와 부르소가 그 뒤에 섰다. 세이렌은 두 로이넨서에게도 손짓했다.
“너희도 앉아 함께 식사를 하도록.”
그러고 보니 준비된 자리는 모두 다섯이었다.
쿠제와 부르소는 본능적으로 직속가신을 쳐다봤다. 그러나 데이몬은 이건 시험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쿠제와 부르소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의자에 앉을 때, 루빈은 자기 가슴팍 주머니를 톡톡 건드렸다.
주머니 안에는 티나가 있었다. 조그만 생쥐 모습으로 민트색 눈동자를 끔뻑거리는 티나.
준비된 자리는 다섯. 아직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루빈은 저 한 자리가 누굴 위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티나도 함께 식사하지.”
“예, 가주님.”
세이렌 입에 자기 이름이 오르는 순간, 티나는 이미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였다. 루빈의 손을 타고 밖으로 나왔고, 후다닥 제자리를 뛰었다.
“쥐 모습으로 식탁 위를 가로지르라고 허락하진 않았다만.”
찍찍. 찍찍?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들부들 떠는 티나의 모습이 꽤 귀여웠는지, 세이렌은 피식 웃었다. 장난이었다는 의미로 손짓하자, 그제야 티나가 안심하고 인간 모습으로 변신했다.
피이이이잉.
어디선가 봤을 법한 민트색 머리칼의 아리따운 여성. 세이렌을 향해 헤헤, 웃으며 포크와 나이프부터 잡았다.
“혹시 이 안에 독이 들어있진 않겠지?”
“어렸을 때 킬리언이 식탁에 독이 든 요리를 꼭 하나씩 올려놓곤 했지.”
“세이렌, 그거 농담이지…? 그치?”
“농담은 아니지만, 마음 놓고 식사해라. 너희모두 그런 훈련을 할 단계는 지난 것 같으니.”
그제야 티나가 안심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서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건 단 두 사람, 루빈과 티나 뿐이었다.
“루빈.”
“예, 가주님.”
식사가 중반을 넘어갔을 때였다.
“폐하의 첫 번째 과업은 어떠했더냐.”
브리온 오러를 추적하는 임무를 묻는 것이었다. 루빈은 막힘없이 답했다.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국감찰관이라는 신분 덕에 더 간단했습니다.”
“네가 찾아낸 투흔인, 호송되던 중에 괴수의 습격을 받았다는구나. 칙명부 간부까지 모두 사망했다는군.”
세이렌의 의미심장한 말. 성조 하나 없는 건조한 투였지만, 그 끝은 날카로웠다.
세이렌이 품고 있는 암살검가의 정보력이 대륙 곳곳으로 퍼져 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세이렌은 그게 루빈이 벌인 짓이라고 확증하진 못했겠지만.
“임무에 관해 말해 보거라, 루빈. 무엇을 겪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세이렌의 명이 떨어졌고, 블라네는 긴장된 눈으로 루빈을 쳐다봤다.
도련님은 얼마큼의 진실을 말할까?
이계의 대장장이에 대해서도 말할까? 선택받은 존재들에 대해서는? 또, 투흔들의 수인화와 제국의 ‘일몰 작전’에 대해서는?
이윽고, 루빈의 입이 떨어졌다.
“저는 아베른에서 블라네를 만난 뒤…….”
한동안 어스름홀에는 루빈의 목소리만 울렸다. 세이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간히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이야기 내내 건조한 분위기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루빈은 절반 정도의 진실만 말했다.
하네케의 숨겨진 증손녀를 만난 것, 이마카룸과 싸웠지만 그를 생포하지는 않은 것, 쿤달리트를 가짜 브리온 오러 발현자로 건넸고, 도중에 그를 위한 구출을 벌인 것까지.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비밀로 남겨두었다.
6성에 도달하고 ‘암연’과 대화를 나눈 것. 대장장이의 세계에 갔으며 라유비아가 ‘적운의 성주’가 된 것. 투흔들을 위해 제국의 ‘일몰 작전’을 실패로 이끈 것까지.
언젠가 이것들 또한 밝힐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 판단한 것이다.
지금의 세이렌은 황제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할지언정 황제를 죽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언젠가 제가 회귀했다는 사실조차 말씀드릴 날이 올 겁니다, 어머니. 하지만 지금은 아니죠.’
이야기를 들은 세이렌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침묵이었다.
마침내 침묵이 깨지는 순간.
“역시 그 투흔인은 살아있었군. 다행히 칙명부는 널 의심하진 않는 것 같더구나.”
“제 결정이 잘못된 거라면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이어지는 덤덤한 목소리.
“네가 벌인 일이 옳고 그른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완전하고 무결한지, 혹은 그렇지 못한지. 그것만이 중요하지.”
루빈이 벌인 일이 칙명부와 황궁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땐 세이렌이 루빈의 행동을 심판했을 터.
그게 암살검가를 지켜내는 것이 최우선 목표인 세이렌의 냉혹함이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엔 살벌하기 그지없는 결정이겠지만, 적어도 블라네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가주님은 도련님을 정말 신뢰하시는구나.’
자유의지를 내주겠지만, 완벽하지 못하다면 기꺼이 도려내겠노라 말하는 세이렌. 이것은 도리어 냉혹함이라기보다는 세이렌의 과감한 결단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왜 벌써부터 루빈이 차기 가주로 내정될 수 있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가주님.”
“……?”
“데이몬에게 듣기론, 킬리언이 암살 명령을 받고 떠났다 하는데, 그에 관해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칙명부 수장에게서 긴급히 전해진 명령이었다. 대장군부 본부의 일부 요직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마 ‘일몰 작전’에 대한 정보를 취한 자들을 죽이는 일이리라.
루빈의 짐작처럼, 황제는 초원 개척을 훗날로 미루려는 것 같았다. 암살검가에 그 뒤처리를 맡겼다는 건, 달리 말하면 ‘일몰 작전’에 루빈이 관여되어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장군부 요직엔 5성이 여럿, 6성도 둘이나 있지만, 킬리언이라면 문제없을 거다.”
루빈은 확신했다. 그래서 세이렌도 이를 최대한 빨리 끝마치기 위해 킬리언을 부른 것일 테고.
“루빈. 다음 황명은 이번처럼 쉽지 않을 거다. 그래…. 다음 임무에는 누굴 조력자로 선택할지 결정했느냐?”
“임무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각해둔 방계 자제들이 있습니다. 쿤 크로키슨 혹은 하밀 쿠니틀리입니다.”
세이렌은 그 둘을 떠올려보았다. 루빈과 함께 ‘1․2차 선택’을 치렀고, 모두 상위권에 속한 아이들이었다.
크로키슨가의 쿤은 현재 항구도시 크룰티에서 제국 해군 병사로 있으면서 해적을 소탕하고 있었다.
세이렌은 본가 가주로서 자제들의 교육 상황을 정기적으로 접하고 있는데, 전해지는 정보에 따르면 쿤의 성장세는 엄청났다.
대대로 흑영에 오르는 크로키슨가에서도 자랑스러워할 정도의 인재. 그 성장세로만 보면, 세이렌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물론 아무리 날고 기어도 루빈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쿤이라고?’
이를 들은 블라네는 속으로 경악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 쿤이라면, 도련님한테 경쟁심을 넘어 증오심까지 품고 있는 애잖아.’
쿤의 포악한 성질을 빤히 알고 있는 블라네로선 의외일 수밖에. 자신이 루빈이라면 언제 등 뒤에서 칼을 빼 들지 모르는 쿤을 곁에 두기 힘들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역시 하밀도 생각해두셨구나.’
반면, 하밀 쿠니틀리라면 충분히 짐작해둔 터였다. 루빈을 존경하고, 무엇보다 향상심이 가득한 아이니까.
그녀가 기억하기로 하밀은 ‘2차 선택’에서 용병들의 성지인 ‘레우레타’를 선택했다.
극지와 더불어 대륙의 유명한 괴수 범람지인 그 도시를 선택한 것만 봐도, 하밀이 얼마나 향상심이 가득한지 알 수 있었다.
‘하밀도 나처럼 성장하겠지. 원래부터 강한 아이였으니까 도련님이 도와준다면 얼마큼 성장할지…….’
블라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루빈과의 여정은 이제 곧 끝나겠지만, 그렇다고 하밀과 쿤의 성장만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아베른으로 돌아가면 아직 확인하지 못한 암연뢰의 탄환들을 서둘러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그때.
“가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세이렌을 향한 루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부탁이라?”
“마렉 헬리드를 로이넨 저택으로 불러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순간, 세이렌의 눈빛이 흔들렸다. 다만 그녀를 제외하고는 루빈의 부탁이 뭘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마렉 헬리드가 흑영 8인 중 하나라는 사실만 떠올렸을 뿐이다.
“너와 비무대에서 겨뤘던 헬리드 가주 말이더냐?”
“예, 그자와 만나 다시 비무를 펼치고 싶습니다.”
“이전에 나와 했던 약속, 그걸 증명해보이겠다는 것이냐?”
몇 개월 전 마렉과 호각을 보였던 루빈.
그 비무가 있고 나서 세이렌은 루빈과 약속 하나를 했었다. 2년 뒤에 비무를 마련해줄 테니, 그때 마렉을 완전히 뛰어넘었다는 걸 증명하라는 약속.
“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세이렌은 피식 웃었다. 마렉을 로이넨가로 불러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루빈이 그를 이기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한 일.
하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초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더냐, 루빈.’
분명 2년을 기한으로 두고 한 약속이었다. 그로부터 채 6개월도 안 지났는데.
이상하게도 루빈은 자신감이 넘쳤다. 분명 초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거기서 성장의 빛을 본 것 같았다.
‘설마.’
벌써 6성에 도달했다는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