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 Assassin of the Ronan RAW novel - Chapter (258)
암살검가 로이넨-258화(258/258)
제258화. 재앙의 전조 (1부 完)
다음 날.
세이렌은 마렉을 불러오기 위해 직속가신 데이몬을 보냈다. 직속가신 정도는 움직여줘야 흑영이 이 의뭉스러운 초대에 응할 터였다.
마렉이 있는 곳까지 이동하는 데 일주일. 그곳에서 마렉의 일정을 매듭짓기까지 또 이틀을 더 기다렸다. 그를 데리고 돌아오는 여정은 더욱 속도를 내서 나흘에 그쳤다.
비무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함구했기 때문에, 마렉은 이동하는 내내 갖가지 생각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흑영’. 본가 로이넨을 견제하는 암살검가의 또 다른 축. 마렉은 상대적으로 약한 하위 흑영 중 한 명, 사실상 가장 약한 자라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자긍심이 낮은 건 아니었다.
데이몬이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게 거슬리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가 따지거나 윽박지르지 않은 건, 다 세이렌 때문이었다. 지금의 로이넨 가주는 어떤 흑영보다도 강했으니까.
‘…이건 뭐지?’
본가에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마렉. 다음 날 아침에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됐다.
뼈의 정원.
본가의 수련장인 그곳으로 안내를 받았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세이렌만이 아니었다.
화상 자국이 선명한 이름 모를 여자아이.
그리고 그 옆으로 서 있는 루빈 로이넨.
‘여기에 루빈이 있다는 건, 황명을 무사히 수행했다는 뜻이겠지. 근데 왜 날 찾은 거지, 다른 곳도 아닌 여기에서?’
마렉은 주변을 돌아봤다. 수련장을 관리하는 가신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벌어질 모든 일은 비밀로 남길 거라는, 세이렌의 의지가 엿보였다.
“당황스럽습니다, 가주님. 무엇을 위해 저를 여기로 부르신 것인지…….”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이해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마렉. 일전에 루빈과 끝내지 못한 비무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게 제가 헬리드 가주를 귀찮게 한 이유입니다.”
“비무……?”
물론 그 역시 일전의 비무를 잊지 않았다.
아니, 그건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지난번 회동은 ‘매피스의 죽음’이나 ‘황명’으로 각인되지 않았다. 루빈과의 일전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맹공을 모두 막아낸 루빈. 고작 열세 살의 자제가 암살검가 최강 가주 8인 중 하나인 자신과 호각을 이루었던 일.
당사자로서 엄청난 충격은 당연했고, 자존심은 더 구겨질 수 없을 만큼 구겨졌던 터였다.
“루빈이 승리를 자신하더군요.”
“…….”
“폐하의 과업을 수행하면서 한껏 오만해진 탓이겠지요”
“그때 미루었던 비무의 끝을 보라, 그 말씀이십니까?”
“예, 저 아이에게 현실을 깨우쳐주기를 부탁드립니다.”
세이렌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듣기에는 루빈은 절대로 이기지 못할 거라는 말 같지만, 오히려 그녀 진심은 그 반대인 것 같았다.
“물론 발걸음이 헛수고가 되어서는 안 될 테죠.”
“보상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승패와 상관없이 헬리드 가주님을 위한 쓸 만한 방어구를 준비해두었습니다. 거기에 루빈의 미래까지.”
“미래라뇨?”
“패배한다면, 훗날 로이넨 가주가 되는 것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하는군요. 제 형에게 깔끔히 양보하겠다고.”
로이넨 가주가 될 수 있는 미래를 포기하겠다고?
더 놀라운 건 세이렌이 그에 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확실했다.
‘제기랄, 기분 더럽네. 로이넨 가주가 내 패배를 이 정도로 확신하다니.’
그만한 확신이 없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무도 준비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마렉에게 솔깃한 제안이기도 했다.
다른 흑영들과는 달리 루빈의 경지를 직접 체험해보았던 그였다. 그가 감지했던 루빈의 경지는 5성. 열세 살에 그 정도라면 같은 나이대 세이렌을 뛰어넘는 성장세였다.
흑영 입장에서는 그런 괴물이 로이넨 가주가 되는 걸 막을 기회인데, 어찌 달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때 나와 호각세였다고 자신 있는가 본데…. 네 결정을 후회하게 해주마.’
마렉은 차갑게 웃었다. 그에게도 대비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좋습니다. 가주 후보가 하나밖에 남지 않을 텐데도 로이넨 가주님께서 용단을 내리셨으니, 저 역시 그 마음에 따라야겠지요.”
“잘됐군요.”
“다만, 비무는 내일 펼치도록 하죠. 진지하게 임해야 하는 만큼,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시죠.”
마렉은 세이렌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뼈의 정원을 나서려 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잊었다는 듯 방향을 틀어, 루빈에게 걸어갔다.
“루빈 도련님, 황명을 무사히 수행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덕분에 암살검가의 많은 자제들이 한숨을 돌렸을 겁니다.”
“황제 폐하의 과업은 앞으로도 이어질 겁니다. 그보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가 되실 기회를 거셨는데, 그 진심을 어찌 무시하겠습니까.”
마렉의 눈길이 루빈 옆에 있는 블라네에게로 향했다. 블라네가 몸을 낮춰 예를 표했다.
“루빈 도련님과 함께 황명을 수행한 블라네 크리거라고 합니다.”
“아, 그랬군. 크리거 가주와는 몇 번 본 적이 있긴 하지. 두 아들 이야기만 들었지, 딸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
당연했다. 블라네는 두 오빠에 비해 아비의 인정을 못 받는 데다가, ‘저격암살’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뒤로는 지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으니까.
“블라네도 비무를 지켜볼 겁니다.”
그러자 블라네의 화상자국을 살피던 마렉의 얼굴이 못마땅하다는 듯 구겨졌다.
“이 아이도요? 아, 함께 황명을 수행했다 하셨지요. 루빈 도련님이 곁에 두려는 사람인가 봅니다.”
“본가를 지탱해주는 방계의 가주가 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될 테니까요. 그것도 흑영의 한 사람으로서.”
마렉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루빈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암살검가에서는 가주가 될 기회를 내려놓을 때, 로이넨이라는 성 또한 함께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굳이 ‘본가’라 언급한 건, 내일 있을 비무에서 자신이 패배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말속에는, 블라네가 두 오빠를 제치고 크리거가의 가주가 될 거라는 예견 또한 담겨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흑영에 오를 거라는 것도.
‘내 앞에서 미래의 흑영을 들먹거리다니.’
흑영 8인은 도전과 탈환으로 이루어지는 치열한 자리. 블라네가 흑영이 될 거라 예견하는 건, 마렉의 위신을 꺾으려는 것이었다.
“재밌군요. 방금 그 말씀 중 몇 가지나 실현될지 궁금합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마렉이 그대로 뼈의 정원을 나섰다.
블라네는 팽팽했던 공기가 흩어지는 느낌에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공격이 오간 것은 아니었지만, 흡사 격전이 치러진 것 같았다.
“헬리드가의 마렉. 제가 듣기론 음흉하고 교묘한 가주라던데, 도련님 앞에선 좀처럼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네요.”
“지난번 대결 때문이겠지.”
“도련님께서 제대로 도발하기도 했고요.”
“방금 그 말은 도발이 아니었어, 블라네.”
“그럼, 정말 저보고 흑영이 되라는……?”
루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내가 왜 널 여기로 데려왔을 것 같아?”
흑영이 돼라.
내가 흑영을 꺾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라.
두 오빠를 뛰어넘어 크리거 가주에 오르고, 흑영에 도전하라. 흑영이 되어 암살검가 로이넨을 위해 싸워라.
“모든 흑영이 본가를 견제하는 건 아니야. 어떤 흑영은 그 누구보다도 절실한 마음으로 본가를 위해 싸우지. 내일 난 마렉을 꺾을 거다. 그다음엔 네가 꺾어야 할 거야. 크리거 가주로서, 마렉을 이기는 거지.”
어째서 도련님은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걸까. 저격암살의 능력으로 빛을 볼 거라는 것도, 자신이 크리거 가주를 넘어 언젠가 흑영이 될 거라는 것도.
그러면서도 블라네는 루빈의 확신에 기대고 싶었다. 왠지 루빈의 말은 믿어도 될 것만 같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럼. 틀리지 않는 진리라고 해야겠지. 내가 내일 마렉을 뛰어넘는 것처럼.”
“알겠습니다. 하루빨리 크리거 가주가 되어 흑영에 올라서겠습니다.”
다음 날, 뼈의 정원.
마렉과 루빈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지켜보는 이는 세이렌과 블라네뿐. 가주의 명에 따라 뼈의 정원 근처로 어떤 가신도 발을 디디지 못했다.
‘역시 어머니 말씀대로네. 하루 미룬 이유가 있었어.’
루빈은 마렉의 주변으로 음험한 기운이 흐르는 걸 느꼈다. 암연과는 결이 달랐다. 아마도 비약을 제조하여 복용한 것 같았다.
물론, 오크의 ‘광기’나 거혈족의 ‘거대화’처럼 경지를 증폭시키는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래도 마렉으로 하여금 승리에 대한 확신을 들게 할 정도는 되는 것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마렉한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마렉의 6성 특성은 ‘약점을 보는 눈’. 하지만 내 약점이 네 강점보다 강하다면, 아무 쓸모 없는 특성이지.’
두 사람은 제 무기를 펼쳤다.
앞선 대결에서는 또 다른 흑영, 디븐 칼둔의 무기를 빌려 싸웠던 루빈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루빈은 핏빛서리와 비검을 모두 꺼내 들었다. 마렉은 침형 무기이자 창으로 조립이 가능한 제 무기로 맞섰다.
‘오 분을 넘기지 않는다.’
아득한 격차를 느끼게 하는 것. 그게 루빈의 목표였다.
힘을 숨길 생각도, 아낄 생각도 없었다. 원래 세이렌과 했던 약속도, 단지 이기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마렉을 완전히 뛰어넘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할까요, 루빈 도련님?”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루빈의 몸 주위로 서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찰나가 지날 때, 이번엔 루빈의 핏빛서리에 ‘혹한의 오러’가 새겨졌다.
정작 마렉은 그 강대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크게 놀란 건 세이렌이었다. 흑칠의 오러의 테두리를 채우는 은백의 오러.
‘…이럴 수가.’
세이렌의 몸이 그녀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경지를 보고 이토록 전율하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지난 몇 개월 사이, 초원에서 무슨 변화를 겪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그녀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작열하는 오러가 아닌, 혹한을 품은 오러라니. 이것만으로도 루빈의 암연이 6성에 이르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암연이 검을 이끈다.’
그런데 루빈은, ‘핏빛서리’와 합일하여 ‘혹한의 오러’라는 독특한 경지로 나타난 것이다.
“내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구나.”
세이렌의 그 한마디 이후. 루빈은 마렉이 기억하게 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오늘을 잊고 싶으실 겁니다, 마렉.”
그로부터 삼 분 후.
마렉은 의식을 잃어야 했다.
쿵! 마렉이 쓰러졌고, 그 주변으로 안개가 너풀거렸다. 비록 최약체라고는 하지만, 흑영 8인 중 한 사람이 루빈에게 무릎 꿇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로이넨 저택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대륙의 북쪽.
“으쌰! 으쌰!”
“그래도 절반 이상은 줄인 것 같네.”
투흔초원 한복판에 투흔인들의 우렁찬 목소리들이 오갔다.
그 풍경은 한 달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인화를 한 상태로 열심히 일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쟁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것.
“그래, 그걸 저쪽으로 넘겨! 그건 이쪽에 쌓아두고. 거기, 독수리들! 이리로 와서 저걸 장벽 너머로 내던져 줘!”
쿤달리트가 열심히 소리치며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적표의 모습으로, 독수리 수인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
그런 그의 시야에, 한 무리의 독수리 수인들이 들어왔다. 거기엔 투흔족의 지휘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타고 있었다.
대족장 이냐키투.
‘투흔의 바람’ 이마카룸.
그리고 하네케 브리온.
쿤달리트가 전쟁 뒤처리를 지휘하는 동안, 그들은 며칠에 걸쳐 장벽 너머 극지를 탐색했던 터. 이제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와, 이제야 살겠네.”
이마카룸은 쿤달리트를 보자, 감격스러운 듯 호들갑을 떨었다.
“수고했어, 이마카룸.”
“빨리 새로운 대족장을 뽑아야지, 원. 이게 무슨 고생이냐.”
뒤이어 이냐키투와 하네케도 다가왔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드디어 이냐키투도 포기했다는 거야. 더는 탐색하지 않기로 약속했어.”
“이냐키투, 진짜야?”
쿤달리트의 물음에 이냐키투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난 며칠간의 극지 탐색은 이냐키투가 밀어붙인 것이었다.
아무리 독수리 수인들과 함께 이동하고, 하네케의 경호까지 받는다 해도, 장벽을 넘어 극지로 나아가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극점’ 근처까지 탐색했다고 했다.
장벽에 가까이 분포할수록 괴수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 반대가 바로 ‘극점’의 괴수들이었다. 극지에서도 가장 포악하고 강력한 놈들. 그런데 그곳까지 탐색했다니. 모두가 혀를 차댈 만했다.
“아무것도 못 찾은 거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이냐키투. 극점 안으로까지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그건 수색대를 위험에 빠트리게 하는 일이었다.
“마령이 왔다는 거, 정말 확실해?”
“확실해. 분명 극지 안에 마령이 있어.”
그가 그토록 찾아내려 하는 건 마령의 흔적이었다. 전쟁의 마지막이 도래했던 한 달 전 그날, 이냐키투는 마령의 목소리를 들었다.
평소에도 마령세계의 음험한 목소리들을 훔쳐 듣곤 하던 그였지만, 그때는 좀 달랐다.
그가 기억하는 건, 흥분으로 가득 찬 놈의 목소리였다.
‘넘어간다. 드디어 다시 넘어간다!’
그 말대로라면, 오크와 괴수가 살육하는 그 순간에 마령세계에서 마령 하나가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마령이란 게 뭔데?”
이마카룸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하네네와 쿤달리트와 달리, 이마카룸은 마령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극지에서 탐색 작업을 했던 것이다.
“마령세계. 현실과는 다른 층위다. 그 풍경을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징그럽게 생긴 괴수들로 가득한 곳일 거야. 극지처럼.”
“거기서 이쪽으로 쳐들어온다는 거야?”
“쳐들어온다기보다는, 이쪽 세계로 틈입하는 거지. 마령세계는 지루하지만, 대륙은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엿듣게 될 때마다 놈들은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거든.”
“놈들이 어떻게 틈입하는데?”
“인간의 몸에 깃들어. 어쩔 땐 사물에 깃들기도 하지. 어쨌든 그 목표는 인간의 정신이야. 정신을 함락하여 조종하거나, 가끔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기도 해. 물론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단, 아무 인간의 몸에 깃드는 건 아니었다. 공포가 극한에 달했을 때, 그때 마령이 틈입할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극한의 두려움이 마령의 유일한 통로인 셈.
“공포가 극에 달할 때, 인간은 마령과 계약을 하고 제 몸을 내어주지. 그러면 그 사람은 마령술사가 되고, 간악한 짓을 벌이게 될 거다.”
“간악한 짓? 착한 마령은 없는 거야?”
“내가 알기론.”
초원 안에 마령이 있는 걸 원치 않은 이냐키투는 열심히 그 흔적을 쫓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남긴 사체 무더기를 헤집었고, 이제는 극지까지 나아가 탐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흔적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냐키투, 마령이 있다 해도 지금의 투흔이라면 안심해도 될 거요. 아이들은 적운에 있어 안전하고, 지상에서는 대족장의 눈을 피해갈 수 없을 테니.”
표정이 어두운 이냐키투에게, 하네케가 입을 열었다. 물론 맞는 말이었다. 지금의 투흔은 예전과는 다르니까.
더군다나 이냐키투가 모든 투흔을 살펴보았지만 투흔인 중에는 마령이 깃든 이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마령이 누군가의 몸을 지배한다 해도 ‘투흔의 해일’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마령은 초원을 우회하여 대륙 중앙으로 나아갔겠지.’
결국 이냐키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령에 관해서는 생각을 접기로 했다. 전쟁이 남긴 상처만 돌보기에도 벅찼으니.
* * *
“휴, 죽을 뻔했네.”
극지의 가장 깊숙한 곳, 극점. 극지 최상의 포식자들이 군림하는 이곳에서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극점은 일 년 내내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다. 연기는 지상에 돌출되어 있는 분출구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지금, 분출구 한쪽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틀이 있었다. 얼핏 봐서는 짐승을 잡기 위한 덫 같다. 뼈로 얼기설기 뒤엉켜 만들어진 조그마한 케이지.
물론 괴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조그마할 뿐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옴짝달싹할 수 없이 가두었었다.
케이지를 빠져나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흘려야 했던 누군가의 피로, 바닥은 흥건했다.
“…연기 덕분에 살았네.”
허공을 가득 메운 연기 속에서, 다시 사람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 짙은 연기가 아니었다면, 하네케 일행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극점에 내려왔겠지. 한눈에 보기에도 극점은 괴이한 풍경을 품고 있었으니까.
크르르르.
크르르르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극점에서 군림했던 모든 괴수들. 포악하고 강대한 괴수들이 마치 왕을 지키는 근위대처럼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모든 괴수들을 복종시킨 한 인간이 그곳에 서 있었다. 피를 묻힌 선명한 발자국. 치렁치렁한 머리칼. 섬뜩한 눈동자.
네르하임.
그녀는 분명 네르하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네르하임이 아니었다.
오크와 괴수의 격돌. 그리고 ‘투흔의 해일’이 쏟아졌을 때. 두려움이 극한에 달했던 그녀는 마령에게 의탁하고 말았다. 틈입의 통로를 허락해버린 것이다.
마령은 빠르게 그녀 몸을 점령했다. 그럼으로써 그녀가 지닌 수혈인의 능력은 이전에는 닿지 못했을 수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대륙 역사에서 어떤 수혈인도 못 누렸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우우우우우.
낮게 퍼져나가는 울음소리. 그녀 등 뒤에서 울리는 그것은 그랑버드의 것이었다.
“…이 몸은 참 좋구나. 내가 점했던 어떤 몸보다 좋아. 흐히히히히. 그랑버드도 다룰 수 있다니.”
엘키오가 죽인 그랑버드는 두 기뿐이었다.
대장군을 내려주었던 나머지 하나는 부대로 복귀하던 중에 죽은 것으로 보고됐지만, 그것은 죽지 않았다. 바로 여기, 네르하임 곁에 있었으니.
그랑버드는 케이지에 갇혀 있던 네르하임을 태워 극지로 피신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터였다.
그러던 그때. 네르하임의 웃음이 멈추는 일이 일어났다.
사사사사삿.
극지의 가장 나약한 종이기도 한 극지바퀴 네 마리가 뭔가를 들고 왔다. 극지바퀴들은 네르하임 앞에 오크의 시신 하나를 내려놓았다.
저벅저벅.
네르하임은 맨발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죽어 있는 칼란타를 내려다봤다.
“…….”
오크의 시취가 독했지만, 네르하임에겐 상큼하기 그지없었다.
마령은 네르하임의 기억을 모두 품고 있었다. 그래서 네르하임과 칼란타 사이에 일어난 질긴 악연을 기억했다.
“그러게… 일찍 죽였어야지, 응?”
당연하게도, 죽은 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르하임은 혀를 길게 내밀어 칼란타를 쓱 핥았다. 그 맛은 별로여서 이윽고 인상을 찌푸리며 침을 뱉어버렸지만.
“그나저나 무시무시한 놈들이 많아서 초원으로는 못 나가겠는데. 여기서 몇 년을 버티다가 대륙으로 나갈 길을 찾아봐야겠네. 대륙에서 그랑버드들이나 훔쳐볼까? 흐히히히히.”
몇 년이 걸리든 상관없었다. 마령에겐 지루하기 그지없는 마령세계만 아니면 되니까.